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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때를 맞이하는 지혜
마가복음 13:14~20
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5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16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7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18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0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비료 포대를 보니 퍼센티지를 표시하는 % 기호가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분명 ‘응’인데 왜 삐딱하게 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비료의 주성분은 질산, 인산, 수산화칼륨, 황산, 수산화 칼슘, 수산화마그네슘 등의 백분율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을 때는 ‘응’으로 읽었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말하는 성서 기호학(Semiotics)이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이야기로써 또 은유로써 이해하고 그 이야기를 원래의 목적대로 전달하기 위한 작업을 말합니다. 종말론을 왜곡하지 않으려면 먼저 그 언어 사용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본래의 뜻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종말의 예언들은 은유적이며 상징적인 언어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 인생의 종말이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문제는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평생을 겪었던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드러나는 자리가 바로 심판입니다.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담긴 것과 말한 것 그리고 행위의 모든 것에 대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심판’이란 원어로 ‘크리시스, κρίσις’라고 합니다. 이것은 ‘분리, 분할, 선택’이란 의미입니다. 이를 잘 나타내는 말씀은 마 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버리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란 그물에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끌려 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좋은 것과 못된 것이 구별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좋은 것’은 ‘칼로스, καλός’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창 1: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할 때 ‘좋았더라’에 해당하는 ‘토브,טוֹב’를 말합니다. 즉 기준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선한 뜻에 따라 예수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이 자라 성숙한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못된 것’이 있습니다. ‘못된 것’은 ‘사프로스, σαπρός’입니다. 이것은 ‘썩은, 부패한, 쓸모없는’이란 뜻입니다. 못된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아 자기의 옳은 대로 육신의 욕심대로 살아온 사람을 말합니다. 고전 15: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받지 않으면 절대로 새롭게 될 수 없고 세상의 흐름에 점차 썩어질 뿐입니다.
성경에서는 개인의 종말뿐 아니라 인류 역사의 종말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세상이 영구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는 이 땅을 ‘장망성(將亡城, City of Destruction)’이라 부릅니다. 장차 망할 성읍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땅도 바라보는 하늘도 사라질 날이 옵니다. 그러나 없어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종말이란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벅찬 감동으로 진입하는 것을 말하여 불신자에게는 두렵고 떨리는 진노의 심판으로 나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종말의 때는 오직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의 때의 징조를 통하여 바르게 준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는 종말의 때가 임하게 되는 징조를 말씀하고, 이 종말의 때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의 때에 임할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종말의 때가 임할 때 나타나는 징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13: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있을 큰 환난의 시작을 알리는 하나의 사건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설 때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마 24: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하였습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단9:27과 단11:31, 단12:11에서 거룩한 곳, 곧 성전에 서게 될 ‘가증한 것’은 우상을 뜻합니다. 성전은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때에는 거룩한 곳인 성전에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기시는 우상이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서지 못할 곳”이 “거룩한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맨 앞에 나오는 단어 ‘멸망’은 성전에 우상을 세우는 자가 뜻하는 목적을 가리킵니다. 그는 성전을 멸하고, 예루살렘을 멸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성전에 우상을 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4절 말씀에서 괄호 안에 기록된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이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저자인 마가가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강조하기 위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면 “듣는 자는 깨달을진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때의 두드러진 점은 종교 배반에 있습니다.
로마의 카톨릭이 교세가 커지고 교황권이 강화되면 하나님이 경배받아야 할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개신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건물과 조직을 강화하여 사람의 숫자가 증가하여 목회자가 우쭐하여 교만하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러한 징조가 여실하게 나타나는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교인 등록 교인 수가 6만 명에 이르는 대형 교회의 원로목사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저와는 동년배로 5년 전에 조기 은퇴하였음에도 쉼 없이 많은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분은 참 자랑할 것이 많아 보였습니다. 3시간 내내 자신의 업적에 대하여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늘어놓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목회자는 어떠해야 할지를 생각을 하였습니다.
특히 예배를 인도하고 성도의 삶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목사가 의지할 것이 많으면 그것도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Lord’이고 헬라어에서는 ‘큐리오스, κύριος’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라고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나를 버린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나와 함께 영원토록 함께 하시는 분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신뢰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릴 때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형 교회의 목회자는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 것으로 빼앗으려고 하는 악한 영에 사로잡힐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귀는 목회자에게 자신을 자랑하도록 부추깁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혜와 총명을 내세우면 예배의 영, 하나님의 영은 떠납니다. 악한 영에 의하여 자기를 사랑하고 자랑하는 나르시시스트로 변질할 수 있습니다.
라마니 더바슐러 박사(Dr. Ramani Duvasula)는 “거짓말은 나르시시스트들의 제2의 천성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귀에게 속으면 자신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마치 신적 권위가 있는 것처럼 각양 표적과 기적을 행하면서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자신을 통하여 구원이 완성된다고 전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목사의 두드러진 모습에 환호하면서 따르게 됩니다. 점차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잃어버리고 사람을 높이며 따르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면 종말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종말의 때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대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14절 말씀에서는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고 하였습니다. 종말의 때는 구원을 이루는 복음을 희미하게 하고 멸망에 이르게 하는 미혹의 영들이 활개를 칠 때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은 산으로 피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산이 가져다주는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받기 위하여 산으로 올랐습니다. 엘리아는 아세라와 바알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를 척결하고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하여 갈멜산에 올랐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택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도하시기 위하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를 만나 변화하신 모습을 산에서 보이셨습니다.
이런 사실을 살펴볼 때 종말의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인식하고 우상의 속살거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참 자녀로 변화되기 위하여 힘써야 할 것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때는 산처럼 견고한 믿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막 13:15, 16절에서 “지붕 위에 있는 자는 내려가지도 말고 집에 있는 무엇을 가지러 들어가지도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에 있는 집들은 지붕이 평평합니다. 지붕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집안으로 나 있기도 하지만 집 바깥으로 나 있기도 합니다. 저녁이 되어 날씨가 선선해지면, 지붕에 올라가 쉬기도 하며 또는 그곳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밭에서 일할 때는 겉옷을 벗어두기 마련입니다. 그래야 일을 하는데 거치적거리지도 않고, 땀도 덜 나기 때문입니다. 유대에 사는 성도가 밭에서 겉옷을 벗고 일을 하던 중입니다.
종말의 때는 우선순위를 바르게 설정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끊어버리고 새롭게 도래할 새 하늘과 새 땅에 합당한 영성을 지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을 굳건하게 가져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피할 곳은 나의 영원하신 주님 한 분 뿐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10:13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환난을 당하고 계십니까? 미쁘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 피할 길을 내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환난 때문에 낙심하지 말고, 날마다 믿음으로 모든 환난을 극복하며 승리하는 우리가 모두 되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종말의 때에 임할 하나님의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막13:17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본래는 여자가 아이를 배는 것과 또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서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큰 환난 때에는 사정이 다릅니다. 아이 밴 여자는 아무래도 몸이 굼뜰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남자는 집안의 물건이나 겉옷을 버리고 도망할 수 있지만, 여자는 아이를 버리고 도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젖먹이는 여자는 적그리스도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여자들에게 오히려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말의 때에는 이런 축복이 저주로 변화되는 혼란의 시대가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13:16 말씀과 같이, 그때 잔인한 적그리스도는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를 것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땅에 내동댕이쳐, 어린아이의 몸을 산산조각으로 부서뜨릴 것입니다. 이렇듯 큰 환난 때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막13:18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종말의 때가 도래할 것을 미리 대비하여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유대 지방은 겨울에 비가 옵니다. 때로는 눈이 내릴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날씨가 춥거나 비가 내리면, 집 밖으로 나가기가 싫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내린 비로 시냇물이 넘치면 산으로 도망하기가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5:16~17 말씀처럼,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비가 오지 않게도 하시고 비가 오게도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에 따라 겨울을 피하게 하실 것입니다.
막13:19 “이는 그 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는’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환난의 극심함을 예고하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마24:21에서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어느 정도로 큰 환난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극심하여 아무리 마음이 강한 사람이라도 놀라 자빠질 정도로 큰 환난의 때가 종말을 맞이하는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도들이 환난을 겪을 즈음에 피할 길을 내시며, 친히 성도들을 보살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 큰 환난 가운데서도 안전할 것입니다.
막 13:20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장차 있을 큰 환난 가운데서도 안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안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징조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이 때에 우리의 믿음을 견곤하게 하여 믿음의 주님을 의니할 때 넉넉히 이기고 나갈 수 있습니다. 종말의 때의 지혜는 오직 믿음이요 소망의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