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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3일(부활 후 세 번째 주일)
고린도후서 5:1~10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이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힐링 캠프>라는 TV 프로그램에 배우 차인표 씨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인터뷰 중에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습니다. 차인표 씨가 주식 투자를 하면서 돈 버는 일에 관심을 가질 때는 주위에 온통 주식투자자들이 몰려들더랍니다.
그런데 차인표 씨가 세계 방방곡곡에 있는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일에 관심을 두자, 이번에는 그런 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자신을 찾아오더랍니다.
오로지 먹고 사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만 모여들고, 세상 적인 명예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또 그런 사람들만 주위에 몰려들게 됩니다.
이런 세상의 이치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지금 내 주위에 누가 있는지를 살펴보면, 지금 나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가장 극명한 지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출처: 이국진, 「사람이 여물어 교회가 꽃 피다」(서울: 홍성사, 2015); 「생명의 삶」 (서울: 두란노, 2018년 3월호), p. 71에서 재인용
오늘은 부활 후 세 번째 주일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부활했다는 진리가 오늘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초대교회 메시지의 강조점이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부활에 더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1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바울은 여기서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한시적이고 연약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무너지게 됩니다. 마치 아름다운 벚꽃이 비바람에 흩날리듯이, 아름다운 우리 육체는 언젠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바울이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자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바울이 참 사도도 아니고,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서 사도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바울로 하여금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을 느끼게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복음 전도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고난을 겪습니다. 아마도 바울이 이런 고난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은 무엇입니까? 1절은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집이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집이 무엇일까요?
마가복음 14장 58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으리라 하더라 하되”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을 다 성전에서 내쫓으셨습니다. 그리고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라고 예수께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건물로서의 성전을 의미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하늘에 있는 집’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집’ 입니다. 이 집은 건물로서의 집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얻게 되는 ‘부활의 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부활의 몸을 얻기 위해서는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반드시 무너져야만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입고 있는 육신이 죽음을 경험해야 그다음으로 부활의 몸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육신이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다음 하나님께서 손수 손으로 지으신 부활의 몸을 경험할 수 없게 됩니다.
지금 바울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죽음을 예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한 이후에 얻게 될 몸의 부활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죽음 이후에 경험하게 될 몸의 부활을 사모하고 계십니까?
2016년에 우리나라 코미디계의 유명한 원로이셨던 구봉서 장로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구봉서 장로님이 90세의 생을 마감하면서 아내 되시는 권사님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여보, 내가 죽더라도 고아원 후원은 끊지 마세요.”
구 장로님이 살아계실 때 무려 37년간이나 후원해오던 고아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고아원은 경상북도 문경에 있는 신망 애육원이었습니다.
이 신망 애육원은 1954년에 고(故) 황용석 장로님이 열두 명의 고아들을 데리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8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이 고아원에서 양육되었는데, 이 아이들이 지금은 모두 성장해서 목회자, 교수, 박사 등 사회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신망 애육원에 대대로 내려오는 교훈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이다.” 한 번 같이 해 볼까요?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입니다.” 이 교훈은 신망 애육원의 설립자인 고 황용석 장로님의 평소 인생철학이라고 합니다.
-https://blog.naver.com/tumen1004/220806849171에서 인용
심지어 황 장로님이 소천한 날, 장례식장에서도 이 문구가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솔직히 장례식장에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이다.”라는 문구가 어울릴 리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 문구가 장례식장에 걸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고 황용석 장로님이 살아 계실 때, 하늘로부터 오는 영원한 집, 즉 몸의 부활을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도 몸의 부활에 대한 간절한 사모함이 있습니까? 우리가 몸의 부활을 믿고 그 사실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살다 간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별히 35절 이하에 보면, 부활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그 소망으로 인한 현실적 박해를 어떻게 이겼는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초대교회 믿음의 여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부활을 더 좋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실적인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순교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한 부활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고린도전서 15장 17절 이하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에게 부활이 없고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주를 위해 살고, 남을 위해 희생하겠습니까? 그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더 많이 즐기다가 죽으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의 병기(兵器)가 아닌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이 땅에 사는 사람 중에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어쩔 수 없어요. 내세관이 다르면 인생관도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죽음 이후에 얻게 되는 몸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혹시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던질지도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죽어야 다시 산다면 이 세상의 삶과 부활 후 얻게 되는 저 세상의 삶은 동떨어진 것 아닌가요?”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현실과 동떨어진 게 아닙니다. 우리 몸의 죽음과 부활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만일 우리 몸이 죽고 다시 새로운 몸으로 부활한다면, 예전의 우리 몸은 영원히 소멸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2절과 4절에 보면, 바울은 ‘덧입다.’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 음성으로 2절을 찾아 읽겠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여기에서 바울은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또 4절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도리어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서도 바울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도리어 덧입고자 함이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절과 4절에서, 공통 적으로 사용된 말은 ‘덧입다.’(헬, 에펜듀오마이)라는 단어입니다. 왜 바울은 몸의 부활을 설명할 때, 단순히 ‘입다’라고 사용하지 않고 ‘덧입다’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우리가 ‘옷을 입다.’라고 하면 옛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을 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옷을 덧입다.’라고 하면 옛 옷을 벗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옛 옷 위에 새로운 옷을 끼어 입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죽음 이후에 겪게 되는 몸의 부활은 마치 겉옷 위에 다른 옷을 껴입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그의 마음과 몸이 병들고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때에 주님을 위한 그의 몸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옷을 껴입게 될 것입니다(조석민, 「이해와 설교를 위한 고린도후서 주석」, 이레서원, 조석민, 123).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고난을 겪고 있다면, 부활의 아침에는 그 고난의 흔적이 영롱한 영광의 열매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한 삶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의 몸을 재료로 사용하여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새롭게 갱신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 몸을 재료로 사용하셔서, 부활의 날에 우리 몸을 밝고 빛나는 새로운 몸으로 갱신하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장차 우리가 얻게 될 부활의 몸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여기서 바울은 현재의 우리 몸과 장차 얻게 될 부활의 몸을 ‘심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씨앗은 땅에 심어집니다. 씨앗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반드시 죽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씨앗이 죽을 때, 그 씨앗에서 새로운 형체가 살아납니다. 죽음은 이 세상과의 단절이지만, 부활은 새로운 옷으로 덧입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몸은 이 세상의 몸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썩을 것을 심지만 썩지 아니할 것을 거두게 되고, 약한 것을 심지만 강한 것을 거두게 됩니다. 바울은 “거둔다”라는 말을 “다시 살아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신망 애육원의 설립자인 고 황용석 장로님의 인생철학처럼,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입니다. 주 안에서 사는 것도 복된 것이고, 주 안에서 죽는 것도 복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죽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사느냐, 죽느냐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날,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각각 이 땅에서 선악 간에 몸으로 행한 모든 것을 따라 우리를 재판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28절 이하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지를 생각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아끼는 후배 목사님 가운데 해외선교사로 사역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최근에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2018년 고난주간 3월 27일 화요일 새벽 2시 21분에
내 사랑, 내 동생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위암 말기로 힘들어하더니 결국 갔습니다.
어렸을 땐 “형아, 형아!”라며 쫓아다니고
좀 크니 “형! 형!” 그러며 날 그리 좋아하고
어른 되니 술 먹고 전화해 주정 부리며
편하게 까불던 놈
아프다고 해서 찾아갔더니 반쪽이 된 모습에
내 맘을 조이게 하더니
지난주 찾아갔을 땐 힘들게 잠들었대서
곁에 편지 한 장 써놓고 왔는데
그거 읽으며 기운도 없는 놈이 그렇게 울었답니다.
어젯밤 찾아갔을 땐, 눈도 못 뜨고 말도 못하는 놈이
형 왔다고 “어! 어!”라며 알 수 없는 신음으로 맞아주었는데
이젠 그 신음도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아. 어제 형이 말해준 예수님과 지금 함께하고 있지?
좋냐? 부럽다 임마. 부러우면 지는 거니까 형이 진거다!
그동안 이 세상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네 위가 그렇게 아팠겠니.
너무 미안하다.
그래도 이젠 그런 아픔은 없겠구나.
조금만 기다려, 형도 간다.
니가 먼저 갔으니까 천국 길 좀 잘 익혀 놔라.
형 천국 갔을 때 니가 관광 시켜줘.
금방 보자.”
우리가 부활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 단순한 자세를 갖게 됩니다.
“조금만 기다려. 형도 간다. 금방 보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손에 들고 있는 것 다 내려놓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마치 오후 내내 친구와 땅따먹기하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때 엄마가 큰소리로 “아무개야, 밥 먹으러 들어와라!” 한마디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옛 다, 이 땅 너나 다 가져라!”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집으로 뛰어가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이 땅 사는 동안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도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