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587
11월22일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연중 제34주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w2ZONaKBc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60438890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배척은 곧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배척입니다!>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훈화 말씀은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마무리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척이나 강경하고 단호합니다. 마지막 날에 전혀 다른 두 부류의 동물인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모든 사람들을 갈라 놓으시겠답니다.
예수님 말씀이 꽤나 섬뜩하게 들리지만, 결코 협박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 양떼를 향한 사랑과 연민이 가득 담긴 격려의 말씀입니다. 달릴 곳을 열심히 달린 사람들을 향해서는 위로와 칭찬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마태오 복음 25장 31절) 이 땅에 강생하신 메시아께서 최초로 보여주신 모습은 아주 작은 아기의 모습이었습니다. 지상생활 동안 보여주신 모습은 사랑으로 가득한 목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그분께서는 위엄과 영광으로 가득한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당신 왕좌에 좌정하십니다.
목자로서 살아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길잃은 양들을 불러 모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그분의 외침 앞에 어떤 사람들은 기쁘게 호응하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권능과 심판을 행사하시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 왕이십니다. 이제 그분은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들을 다시리실 것입니다(요한 묵시록 12장 5절)
커다란 쇠뭉치가 달린 긴 지팡이로 목자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두 편으로 갈라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갈라놓은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아주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복음 25장 40절)
세상속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헐벗고 떠도는 이들, 병들고 갇힌 이들을 기꺼이 형제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한 구체적인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른 쪽에 앉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왼 쪽에 앉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백번 천번 기억해야 할 진리 하나가 있습니다. 종말에 가서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가 실천한 이웃 사랑이 맏형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이 명백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져 보니 오늘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작은 사랑의 실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작은 친절과 봉사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거룩하고 깊은 믿음이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울리는 종과 같이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 지닌 신앙이 아무리 고고하고 수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허리를 깊이 숙이고 겸손하게 작은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배척은 곧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배척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중요한 건 ‘자기 정체성’지 바보야!>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M14JC4oo35k
--------------------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그리고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왜 교회에서 마지막 주일에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지낼까요? 마지막에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면 우리는 무엇일까요? 그분의 백성이나 신하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니 우리는 그분의 나라가 됩니다. 이렇게 생기는 정체성이 나를 만들고, 그 나를 만든 정체성에 당연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심판을 이기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심판관으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십니다. 그때 양과 염소로 나뉘어 있습니다. 양과 염소는 본성의 차이를 말합니다. 태어날 때 본성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자기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됩니다. 내가 늑대라 믿으면 늑대의 정체성에 당연하게 살 것이고,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으로서 당연한 삶을 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워낙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심판 기준대로 ‘가장 작은 이들을 그리스도처럼 대하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작은 이들을 그리스도처럼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나의 정체성에 있다는 것을 내용이 막장인 한 영화를 통해 보고자 합니다. ‘경축! 우리사랑’(2007)입니다.
이야기는 노래방을 함께 운영하는 한 하숙집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봉순씨는 쉰이 된 가정을 책임지는 여자입니다. 남편은 노는 것만 좋아하고 심지어 외도까지 합니다. 딸도 집에서 놀기만 하며 하숙하고 있는 남자와 사귑니다. 무작정 결혼만 하겠다던 딸은 취직이 되어 결혼자금을 벌어오겠다면 집을 나가버립니다. 다 자기 멋대로입니다.
졸지에 헤어지게 된 하숙집 남자 구상은 술에 찌들어갑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봉순씨는 술 취해 쓰러져있는 구상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의 아기를 임신하게 됩니다. 남편도 외도 중이라 뭐라 하지 못하고 빨리 딸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봉순씨의 사랑은 진심입니다. 구상도 봉순씨의 딸보다는 봉순씨를 더 좋아하게 됩니다. 봉순씨는 결국 딸의 애인이었던 구상의 아기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가족 중 아무도 자신을 아내나 엄마 취급해 주지 않았기에, 지금 엄마, 아내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도 봉순씨를 뭐라 하지 못합니다. 물론 구상에게 계속 마음이 있는 딸이 엄마에게 울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습니다.
“엄마가 뭐 이래? 엄마가 뭐 이래!”
이때 봉순은 잠깐 흔들립니다. 그러나 아내이고 엄마이기를 다시 포기하고 구상의 애인이기를 선택합니다.
말도 안 되는 스토리지만 지금까지 남편이 남편답지 않게, 자식이 자식답지 않게 살던 그 가정에서 봉순씨도 아내이고 엄마이기를 포기하고 새롭게 사랑을 시작하는 모습이 전혀 공감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가 나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강론에서 씨돌, 요한, 용현으로 산 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의 삶은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산 이유를 ‘인간으로서 당연한 일’이라 적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인간이란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 살아온 것입니다. 그것뿐인데 가장 작은 이들을 위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구원받기 위해 나의 정체성이 아닌 행동만을 바꾸려 하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됩니다. 행위만 바꾸려 하면 본성은 안 그러면서 그런 척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구원자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와 한 몸이 되심으로 당신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이 정체성이 우리 본성을 염소에서 양으로 바꾸고 결국 양으로써 당연한 삶을 살게 해줍니다.
김신조 씨도 삶과 죽음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김일성과 북한을 위해 죽는 것을 선택하지 않고 사는 것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나는 나!’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라던가,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던가, 나는 하느님의 본성을 입었으니 나도 사랑이라던가의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본성이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서 당연하게 살게 만들고 마지막 날 심판 때 양으로 분류됩니다.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서 차 위에서 발이 끼어 있는 사람을 구급차에 신고만 하고 저는 저 갈 길을 간 적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 가족이었다면 그렇게 바로 떠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혹은 ‘나는 사제다!’라는 생각만 했어도 행동이 달랐을 것입니다. 나의 행동은 나의 정체성에 지배당합니다. 결국, 나와 나의 자녀를 어떻게 성장시키고 싶으냐는 어떤 자기 정체성을 넣어주고 싶으냐는 것에서 결정됩니다. 물론 그 정체성은 진리와 은총, 즉 나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새겨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 나에게 왕이 되어 나를 지배하게 됩니다. 나의 정체성이 그리스도가 되게 한다면 그것으로 그리스도는 나의 왕이 되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왕으로 여기는 정체성으로 산 사람만이 마지막 심판 때에 양으로 인정받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왕 대축일’로써 전례력을 마치는 날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이란 통치권과 지배권만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긍정이며, 그분의 영광에 ‘우리를 결합하는’ 그분의 의지이다. 즉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는 ‘참여적’ 왕권이시다. 제1독서에서 ‘목자’라는 개념은 ‘왕의’ 품위로 나타난다.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목자이신 왕으로 드러내신다. 그러나 다른 왕들과는 다른 왕이시다. 즉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섬기는 왕’이시다. 사랑의 왕권이지 지배의 의미나 착취의 의미가 아니다. 그분은 길 잃은 양 떼를 찾으러 가시고 다친 양들을 돌보시고 보호해 주신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암시이다.
복음: 마태 25,31-46: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의 행위-최후의 심판의 기준
오늘 복음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을 ‘왕’으로서 동시에 ‘심판관’으로서 드러내신다. 여기서 심판관이 주시는 ‘나라’는 당신을 충실히 섬긴 보상이며, 당신이 다스리시는 ‘왕권’이 있음을 의미한다.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는 그리스도께서는 다스리실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다스리시기를’ 원하신다. 함께 다스린다는 것은 역사 내에서 그렇게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분의 왕권은 갑자기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행위를 통해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분의 왕권이 드러나고 또 인간이 그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분의 최후의 ‘심판’의 기준에서 나타나듯이, 형제들의 괴로운 몸과 마음 안에 계신 그분의 ‘위격’에 행하는 사랑의 크기에 좌우될 것이다(35-36.40절). “이 가장 작은 이들”(40절)이란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하는 문제와는 상관없다. 그들은 그저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 버림받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그들의 불행한 처지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상황이다.
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은 구약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목록들이다(이사 58,7; 토비 4,16 참조). 이제 예수께서는 여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시고, 그것을 거절하는 행위를 준엄하게 다루신다고 하신다. 바로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지상 생활에서 예수께서도 가난하셨고 당시 사회로부터 압박과 핍박을 당하셨으며 거부와 배척을 당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러”(요한 1,29) 오시는 분으로 어디서든지 악을 고발하고 단죄하셨다. 그래서 불의를 당하는 사람들 편에 항상 가까이 계셨던 분이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 대한 재평가이며 모든 인간의 손상된 몸과 마음속에 원래 새겨져 있는 품위에 대한 재인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항상 그리스도를 위한 자리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분을 받아들일 때만이 인간의 품위를 진정으로 증진 시킬 수 있고 인간의 모든 어려움과 원의를 해결해갈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현존하실 수 있도록 그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 이웃을 통해서이다. 특히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통해서이다. 바로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사랑을 거절하는 것은 바로 그분을 거절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당신의 삶을 통하여 ‘섬김’과 ‘십자가에 내어주심’에서 얻으신 것이다. 이 삶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그 ‘왕권’을 인간들에게도 참여하게끔 해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삶을 우리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그분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서 그분의 왕권에 참여하고 생명을 차지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쳐서이기셨기 때문에 ‘왕’이시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 승리에 참여케 하시며 ‘새 아담’ 즉 새 인류의 영적인 머리(1코린 15,21-22 참조)라고 하였다. 맨 처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당신 왕권의 승리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죽은 이들의 맏물”(1코린 15,20)이라는 상징적 표현은 지상의 첫 결실들이 나중에 얻게 될 수확의 ‘보증’이듯이 우리 부활의 보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왕권은 완성되지 않았다. 죽음이 아직 극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의 왕권은 종말론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죽음을 이기신 후 모든 만물은 하느님의 직접적 절대 통치권 아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이 마지막 결정적 통치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행사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 자신과 더불어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실 것이다. 우리가 없다면 그분은 하느님께 바칠 ‘왕국’을 갖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분께 속해있는 것뿐 아니라, 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웃 안에서 그분을 뵙고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무부처장) 신부님]
우리는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인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최후 심판에 관한 복음을 듣습니다. 마지막 날에 “사람의 아들”께서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리하여 의인들은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이미 창조와 함께 시작된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되는 모습입니다.
이와 반대로 악한 이들은 영원한 불 속에서 벌을 받습니다. 그러나 의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자신들이 “언제” 예수님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였는지 또는 하지 않았는지 묻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의 답은 명확합니다. 기준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 전에 마지막으로 최후 심판의 내용을 전합니다. 이 말씀은 마태오 복음의 전체적인 구도와도 잘 어울립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초기에 하신 산상 설교를 통하여 가르침을 요약합니다(5-7장 참조). 그리고 산상 설교의 마지막 가르침에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며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을 강조합니다(7,24 참조). 최후 심판에서 강조되는 것 또한 말씀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가장 작은 이들에게 말씀을 실행하였는지가 심판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구분되어 있지 않습니다. 심판은 마지막 날에 있겠지만 지금 여기에서 말씀을 실행하며 사는지 아닌지가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따라서 최후 심판에 관한 말씀은 지금 여기서의 삶을 생각하게 합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최후의 심판>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마태 25,31-33)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최후의 심판’ 장면을 보면, 재판은 이미 끝났고 선고만 남은 상황입니다. (피고인의 ‘죄의 유무’를 검사와 변호사가 다투는 상황은 이미 끝났고, 재판장의 선고 절차만 남은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유무’를 따지는 재판은 언제 이루어졌을까? 최후의 심판이 시작되면서 한순간에 끝나버렸을 수도 있고, 심판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결정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 자체가 매 순간, 순간이 재판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심판대의 왼쪽에 서는 것이고, 진심으로 회개하면 다시 오른쪽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자기가 짓는 것이니, “어느 쪽에 서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의 유무’를 따지는 심리 과정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생각할 때, ‘심판’이라는 말 때문에 ‘처벌을 위한 재판’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제로는 ‘처벌을 위한 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재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1테살 5,9-10)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은, 우리에게는 무척 중요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사람도 어떻게든 구원하려고 애를 쓰시는 분이다.”라는 뜻입니다. 노력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고, 구원받기를 원하고,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후의 심판 때 내리는 ‘멸망 선고’는, 구원받기를 원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노력했더라도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도 멸망 선고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받을 사람의 수와 구원받지 못할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아시겠지만, 우리는 모릅니다. 어느 쪽이 더 많을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미리 정해 놓으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심판의 결과는 ‘나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그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다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4-36)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이라는 말에서 ‘너희’는 특정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충실한 신앙생활과 사랑 실천으로 구원받을 자격을 얻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임금이 ‘구원 선고’의 이유로 말하는 ‘사랑 실천’들은 마태오복음 7장 21절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이한 것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구원을 선고받는 의인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실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랑 실천’은 ‘하느님 뜻 실행’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인들은 자기들이 주님께 사랑 실천을 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마태 25,37-39) 임금은 그들에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고 설명해 줍니다.(마태 25,40) (주님은 온 세상의 임금이시면서도 ‘나보다 더 작은 이’의 모습으로 나에게 오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나를 시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구원받을 자격을 얻을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의인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께 사랑을 드렸고,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구원받을 자격을 얻었습니다. ‘왼쪽에 있는 자들’, 즉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 자들은
자기들이 왜 ‘멸망 선고’를 받아야 하는지를 납득하지 못합니다.(마태 25,44) 그들의 질문은, “주님께서 언제 그런 처지에 놓이셨습니까? 그 작은 이가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저희는 곧바로 주님께 모든 것을 다 드렸을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임금은 그들에게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라고 설명합니다.(마태 25,45) 그들의 죄는 “‘작은 이들’이 곧 주님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죄”가 아니라,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죄”입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그들에게 “작은 이들이 곧 주님이다.”라고 미리 가르쳐 주었더라도, 그들은 “그럴 리가 없다.” 라고 부정했을 사람들입니다.)
지금 이 이야기는 ‘최후의 심판’(공심판)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개인의 사심판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공심판과 사심판이 다를 이유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지상에서의 생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서게 되면, 자기의 ‘믿음 실천’과 ‘사랑 실천’에 대해서 상세하게 진술서를 작성해서 제출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자신이 어떤 선고를 받게 될지를 즉시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변명도, 핑계도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노자의 도덕경 41장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아주 큰 사각형은 각이 없고, 아주 큰 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아주 큰 형체는 보이지 않고, 아주 큰 그릇은 채우지 못한다.(大方無隅, 大音希聲, 大衆無形, 大器晚成)” 지구는 둥굴지만 사람들은 지구가 둥근지 몰랐었습니다. 사람이 볼 수 없을 만큼 컸기 때문에 몰랐습니다.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이 있습니다. 아주 큰 소리나 아주 작은 소리는 듣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주의 크기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는 우주에서는 아주 작은 점과 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물이 바다로 흘러가지만 바다는 넘치는 적이 없습니다. 바다가 넓고 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기만성은 성공의 기준이 아닙니다. 대기만성은 겸손과 아량의 표징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율법학자들은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태어날 수 없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헤로데는 구세주의 탄생을 경쟁자가 태어난 것으로 알았습니다.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오른쪽과 왼쪽에 앉을 수 있는 자리를 청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면 안 된다고 말했다가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뜻을 찾지 않고 사람의 뜻을 찾는다.’라고 야단맞았습니다. 로마의 총독이었던 빌라도도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도록 했습니다.
율법을 많이 알았던 사람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나라의 왕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로마의 총독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으로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밤을 새워 양들을 돌보던 목동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알아보았습니다. 눈이 멀었던 소경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세관장이었던 자캐오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회개한 사람, 겸손한 사람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가 신랑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갈망이 있는 사람, 꾸준히 기도하는 사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 회개하는 사람,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은 우주보다 크신 예수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난한 노숙자가 길에서 죽었습니다. 날씨가 너무 추웠기 때문입니다. 조각가는 그 뉴스를 보고 벤치에 누워있는 노숙자의 모습을 만들었습니다. 노숙자는 담요를 덮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노숙자의 발이었습니다. 발에는 못 자국이 있었습니다. 조각가의 눈에는 길에서 죽었던 노숙자가 예수님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토론토 시에 제안했습니다. 그 노숙자가 죽은 자리에 자기가 만든 노숙자의 동상을 세우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토론토 시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노숙자를 돌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조각가는 뉴욕의 주교좌 성당에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뉴욕의 성당에서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성당의 외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각가는 교황청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신이 만든 동상을 로마의 바티칸에 보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편지는 교황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교황님은 조각가에게 어떤 답장을 하였을까요? 조각가를 바티칸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교황님께서 직접 동상을 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동상을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못 자국을 만져보며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무심했던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 헐벗은 사람, 아픈 사람을 생각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한국의 한 사제도 조각가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작품을 한국에도 보내 줄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조각가는 기쁜 마음으로 동상을 가지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못 자국이 있는 노숙자의 동상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상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마음을 열면 얼마든지 우리 곁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그리스도의 벗인가요>
마태오 25,31-46 (최후의 심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의 벗인가요>
그리스도께서는
굶주림에 쓰러져 가시는데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제 배를 채우고 있는 나는
그리스도의 벗인가요
그리스도께서는
목마름에 타들어 가시는데
물과 공기와 생명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제멋대로 허비하고 있는 나는
그리스도의 벗인가요
그리스도께서는
풍찬노숙으로 지쳐 가시는데
편히 쉴 자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제 몸 하나 누이고 있는 나는
그리스도의 벗인가요
그리스도께서는
하나 둘 빼앗기고 계시는데
존엄한 인간으로 빚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제 지위와 명예에 목매고 있는 나는
그리스도의 벗인가요
그리스도께서는
수많은 아픔으로 시들어 가시는데
몸과 마음의 건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제 살 길만을 찾고 있는 나는
그리스도의 벗인가요
그리스도께서는
묶이고 짓밟히고 버려지고 계시는데
자유와 능력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제 꿈만을 좇고 있는 나는
그리스도의 벗인가요
=====================
[수원교구 김진우 베드로 신부님]
<차별 없이 공정하신 하느님>
예수님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기에 유대교라는 뿌리에서 출발한 그리스도교가 많은 박해를 겪으면서도 발전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민족의 차이, 문화, 신분, 남녀의 차이가 만연하던 시기에, 소수의 사람만이 행복해지고 구원을 얻는 사회가 아니라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까지 모두 행복을 누릴 수 있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도 말씀하십니다.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오 복음 25장 32절, 40절 45절)
양은 아무도 해치지 않고 온유하며 누구에게 해를 입어도 저항하지 않고 견디는 인내 덕분에 의로운 사람을 나타내고, 반면 염소는 변덕, 자만심, 호전성 같은 악덕을 특징으로 갖고 있어 악인을 나타냅니다.(「교부들의 성경주해」 中) 그리고 이 말씀은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잘잘못에 따라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됩니다.
다함이 없는 본성을 지니신 분께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혔다 하시는 데, 정말 그분이 본성 안에서 그러셨을까요? 아닙니다. 당신의 종들 안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악인들이 단죄받은 이유도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의 종들 안에서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보살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과 같이 오른쪽에 자리한 의인들은 선(善)을 행하고도 자신이 그 선을 행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상 안에 사랑이 담긴 선이 자연스레 녹아있기에, 그들이 선을 행하는 것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염소와 같이 왼쪽에 자리한 사람들은 사랑이 결여된 형식을 더 지향하기에 듣고서도 못 들은 척하고, 이해하고서도 이해하지 못한 척합니다. 그저 외면할 뿐입니다.
차별 없이 공정하신 하느님께서 지금의 나를 바라보실 때 내가 서 있는 위치가 어느 쪽에 자리 하고 있는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악인들이 심판 때에,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감히 서지 못하리라.”(시편 1,5)
=====================
[춘천교구 오세민 루도비꼬 신부님]
<네가 왕이냐?>
교회는 전례력의 마지막 주일을‘그리스도왕 대축일로 기념합니다. 그리스도왕 대축일은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개인과 가정과 사회 및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교황 비오 11세께서 제정하셨습니다.(1925년)
여러분은 왕이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드시나요? 보통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를 떠올리게 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하는 놀이 중에‘왕 게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게임을 통하여 왕으로 뽑힌 사람의 명령에 신하들은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명령이 가령 길을 가는 사람에게 돈을 꾸어오라든가, 건너편에 있는 여성(혹은 남성)에게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고 오라는 등의 황당한 것이라도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하는 것이지요.
그 명령을 실행하지 못하면 더 가혹한 형벌을 가하게 됩니다. 지극히 세속적인‘왕의 모습이요 전형적인 힘의 논리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시다’라는 고백에도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 해답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 구원을 위하여 가장 비천하고 작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대한 말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오 복음 20장 25절-28절)
그리고 예수님은 일생 비천한 이들, 버림받은 이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시며 그들과 어울리시고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며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러한 총체적 삶의 결론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오 복음 25장 40절)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귀한 존재인 인간은 영혼과 육신을 지녔지요. 영혼이 있다는 사실은 죽음 다음의 삶을 생각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열망하는 하늘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신 나라이며, 정의와 평화, 사랑과 나눔, 섬김과 봉사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진정한 백성이 되기 위하여 오늘 낮은 자의 모습으로 ‘작은 사랑을 실천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
[의정부교구 허영민 세례자 요한 신부]
<‘옆집’ 성인들의 헌신을 기억하며>
지난 한 해를 생각하며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반성해 봅니다. 늘 그렇듯이 만족보다는 후회와 아쉬움이 남습니다. 더구나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해 보지못한 코로나19의 세상 그것은 다양한 분야에서 지금까지의 일상을 모두 정지시키거나 바꿔버렸습니다.
코로나19로 야기된 고통과 죽음, 낙심 그리고 혼돈에 빠져버린 세상 안에서 지난 2월 신자와 함께 하는 미사가 중지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사태의 발생을 미처 대비하고 있지 못한 세상에 공포감과 함께 엄청난 혼란과 무력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리 삶의 진로를 뒤엎는 일이 일어나는 시간, 난세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다른 이의 생명을 위해 두려웠지만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다가간 이들의 헌신과 사랑이 지금의 일상이나마 지켜낸 것이라 믿습니다.
많은 이들이 내가 아니라 너와 우리를 살리는 몸짓을 선택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옆집’ 성인의 선함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나의 삶 중심에 ‘옆집’ 성인들의 선한 마음과 헌신, 생명 나눔의 부드러운 마음이 있었는가 반성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실 때 가장 비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세상의 왕들과는 다른 섬김과 나눔, 사랑과 용서의 왕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한순간도 쉬지 않고 세상에 사랑과 용서, 평화와 겸손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날 심판의 기준도 이웃 사랑의 실천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문제는 '굶주린 이, 헐벗은 이, 감옥에 갇힌 이'가 누구로 보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하느님께 벌을 받은 죄인으로 보이는가, 아니면 십자가를 지고 매달려 계시는 주님으로 보이는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겉모습만 본다면 무시하기 쉽습니다. 겉모습 너머로 그 사람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주한다면 그 굶주린 이, 헐벗은 이, 감옥에 갇힌 이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의 껍데기와 겉모습이 아니라 이웃의 내면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잘것없는 ‘나’와 ‘너’가 하나가 될 때, 사랑과 용서, 평화와 겸손이 충만한 우리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예수 그리스도 왕국입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살아가며 잘 견뎌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며 한 이름 없는 신앙인의 기도를 나눕니다.
‘주님,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낼 수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기도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부끄러운 삶이었지만
내 맘속에 진작 표현하지 못하는 기도는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저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축하할 거면 계속하고, 숨길 거면 그만둬라.”
어느 책에서 읽은 구절입니다. 가슴을 꽝 때리는 듯한 충격으로 와닿는 구절이었습니다. 우리는 축하할 일은 계속하지 않고, 또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것은 그만두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알코올 중독자 한 명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술을 완전히 끊고서 모범적으로 살고 있지만, 예전에는 술만 마셨다 하면 끝장을 보듯이 마셔대서 직장에서 쫓겨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글쎄 일주일 내내 술을 마신 적도 있다고 합니다. 병원에 실려 갈 때까지 술을 마신 것이지요.)
그는 단주 모임을 가면서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술 마시는 부끄러움을 더는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술 없이는 못 살 것 같았지만, 지금은 술 없이 잘살고 있습니다. 축하할 것과 숨길 것을, 그리고 계속해야 할 것과 그만둘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세계, 기쁨과 행복으로 나아가는 세계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 속에서 축하할 것과 계속해야 할 것을 행동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지막 시간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떳떳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만약 숨길 것을 계속하고, 축하할 것을 그만두는 삶을 산다면 주님 앞에 감히 설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전례력으로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임금)이심을 기리는 날입니다. 왕이신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오늘 복음을 통해 분명히 보여 주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아시고, 인간이 하는 일을 예견하시며 공정하게 판결할 줄 아시는 분께서는 목자가 염소와 양을 가르듯이 각 사람의 잘잘못에 따라 그들을 갈라놓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양이 의로운 사람들을 나타내는 까닭은 그들이 아무도 해치지 않고 온유하며 누구에게 해를 입어도 저항하지 않고 견디는 인내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염소라고 표현하십니다. 변덕, 자만심, 호전성 같은 악덕이 염소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양의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양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것을 축하하고, 그 모습을 계속 간직해야 합니다. 온유와 인내, 그리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삶을 통해 우리는 왕이신 주님께 기쁘게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라는 주님 말씀을 새기며, 계속해서 행해야 할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큰 축하를 받을 것입니다.
###############
<여행>
여행은 혼자의 여행이 진짜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와 함께 가면 솔직히 여행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누구와의 여행’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혼자 가면 여형 전체를 즐길 수가 있습니다. 자연을 볼 수 있고, 맑고 깨끗하며 신선한 공기도 마음껏 흡입할 수 있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는 여행도 분명히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목적을 두고 있는지가 명확해야 합니다. 만약 자연 자체를 느끼고자 한다면 무조건 혼자 여행을 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적이 있습니다. 어느 형제님이 계셨는데, 이 형제님은 주변을 밝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항상 이분 주위는 시끌벅적합니다. 쉴 새 없이 떠들기 때문이지요. 이런 시끄러움 가운데, 일행 중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연 좀 조용히 즐깁시다.”
함께하는 여행에서 조용히 자연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 자체가 잘못이 아닐까요? 이렇게 목적이 중요합니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도 이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목적이 분명합니까? 그 목적이 분명해야지 내 삶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습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은 이동 감실이다>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미리 세상의 끝 날에 있을 심판을 준비하도록 안배 하셨습니다. 이 시간 마지막 날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길 바랍니다.
시험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은 시험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됩니다. 그러나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두려움을 갖게 마련입니다.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 최후 심판을 맞이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심판의 기준을 알려 주셨기에 그 기준에 따라 준비하면 그 날이 기다려지고 기대가 됩니다. 그러나 준비하지 못하면 두려움 속에 그 날을 맞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히브리9,27).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2고린5,10). “심판의 날이 오면 모든 것이 드러나서 각자가 한 일이 명백하게 될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불을 몰고 오겠고 그 불은 각자의 업적을 시험하여 그 진가를 가려줄 것입니다”(1고린3,13).
로마서 2장6절에서 8절에는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을 행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고,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면서 진리를 물리치고 옳지 않은 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하고 단호한 선언이자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약속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그 심판대 앞에서의 판결기준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25,40).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했느냐가 심판의 잣대입니다. 그들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판결은 명확합니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흑이냐 백이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어중간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심판의 기준을 안 만큼 그에 맞는 삶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답을 알려주었는데도 준비하지 않고는 엉뚱하게 하느님을 원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둣방을 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자기는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간절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죽기 전에 꼭 예수님을 한 번 뵙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한 덕분인지 예수님이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한 말씀하시는 거예요. “내가 내일 너를 찾아갈 테니 그리 알아라.” 할아버지는 너무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어요. 이른 아침부터 쓸고 닦고 부산하게 예수님 맞을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눈이 빠지게 기다렸어요. 그런데 하루가 다 가도록 오신다던 예수님은 오지 않고 거지가 동량 나왔고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도 지나가고, 굶주린 어린아이도 문밖에 쪼그리고 앉아있고 몇몇 손님이 다녀갔어요.
기다리다 지친 할아버지는 그러면 그렇지 나 같은 노인에게 오실리가 있나? '개꿈이었나보네' 하며 실망했어요. 그날 밤 지쳐 잠이 들었는데 예수님이 또 나타나신 거예요. 예수님을 보자 할아버지가 대뜸 소리를 질렀어요. 오신다고 해 놓으시곤 왜 오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도 거짓말을 하십니까?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러셨어요. 무슨 소리냐? 내가 오늘 세 번이나 너를 찾았는데. 한번은 거지의 모습으로, 한번은 소경의 모습으로, 한번은 굶주린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말이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이십니다. 성체가 모셔진 성당의 감실 앞에서는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고 예의를 표하면서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인 이웃 사람에게는 얼마나 소홀한지요? 사실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이동감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를 스쳐 지나가지 말고 관심과 사랑으로 만나시길 바랍니다. 베푸는 삶, 사랑의 삶이 심판의 잣대임을 잊지 말고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오늘 만나게 되는 모든 이가 나를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는 도구가 됩니다.
부자는 꿈에 도둑을 만난답니다. 많이 가졌으니 늘 잃으면 어쩌나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꿈에 은인을 만난답니다. 도움을 줄 사람을 간절히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욕심 많은 자는 꿈에 거지를 만납니다. 그리고 마음을 비운 사람은 꿈에 신선을 만난답니다. 마음을 비우면 그 안에 주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 하느님의 나라. 낙원을 꿈꾸고 기다리지만, 그 낙원은 바로 지금 여기에, 우리 손안에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영원을 살아야 훗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랑을 사십시오. 내 앞의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보내준 사람, 아니 '이동감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모두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우선적으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 안으십시오. 그리하면 자신을 가지고 심판 날을 맞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1요한 4,16-17). 많이 많이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나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온 누리의 임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오늘은 연중 마지막 34주일이자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1925년 교황 비오 11세는 당시 세계에서 날로 확산되어 가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는 조치로 교회 회칙 ‘첫째의 것’을 통해 온 세상의 왕인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기리는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는 자의 교서 ‘파스카의 신비’를 내면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으로 새로 명명합니다. 그는 기념날짜를 대림이 시작되기전 연중 시기의 마지막 주일로 옮겨 기념하게 합니다.
이어 그리스도는 천상 교회와 지상 교회의 구분 없이 모두를 다스리는 왕으로 대림이 되기전 모든 것을 정리한다는 의미로 축일 중 최고 등급인 대축일로 지정합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5년부터 이 마지막 주간을 성서 주간으로 정해 하느님 말씀에 특별히 맛들일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축일 제정이 무려 거의 100년이 지났습니다만 어둠의 역사는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작금의 보편적 현상이 극단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회의주의, 상대주의, 허무주의, 소비주의, 포퓰리즘 등 참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모습들입니다. 더구나 하나뿐인 공동의 집인 지구도 기후변화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모두가 중심을 잃고 방황중입니다.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떠남으로 자초한 무지한 인류의 업보입니다. 유일한 처방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삶의 질서를 회복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목표와 방향, 삶의 중심과 의미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뿐이기에 마지막 성서 주간에는 특히 하느님 말씀 공부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은 어떤 분이십니까?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펴봅니다.
첫째, 착한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의 평생 활동을 통해 드러나는 측면입니다.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가르치고, 치유하고, 위로하고, 자유롭게 하시는 분으로 그대로 우리 안에 계신 눈에 보이는 하느님의 현존이십니다. 참으로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병자와 죄인들을 돌보고 섬겼던 착한 목자 예수님이시며 지금도 여전히 교회를 통해 활동하고 계시는 우리의 영원한 착한 목자 파스카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바로 오늘 화답송 시편이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참으로 착한 목자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만이 구원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는 착한 목자 하느님의 결연한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착한 목자 예수님이심을 새롭게 확인합니다.
“나 이제 내 양떼를 찾아서 보살펴 주겠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해 내겠다. 잃어버린 양은 찾아 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겠다. 나 이렇게 공정으로 양떼를 먹이겠다.”
바로 우리가 대축일로 지내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의 모습입니다. 우리를 끊임없이 돌보고 섬기며, 위로하고 격려하고 치유하며 가르치고 인도하는 착한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둘째, 승리의 왕이십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왕은 우리의 기쁨이자 희망이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 나심으로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신 분입니다. 죽음이 한 사람 아담을 통해서 왔듯이 부활도 한 사람, 예수님을 통하여 왔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살아 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종말의 때에는 궁극의 승리가 잘 드러납니다. 바오로의 고백이 큰 위로가 격려가 됩니다.
“종말의 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 드리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합니다.”
하여 우리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 사도의 고백도 고무적입니다.
“마지막으로 파멸되어야 할 원수는 죽음입니다. 아드님께서는 모든 것이 당신께 굴복할 때에는, 당신께 모든 것을 굴복시켜 주신 분께 굴복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시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꿈이며 희망입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승리를 앞당겨 승리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요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현실화되기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이지만 ‘착한 목자’이자 ‘승리의 전사’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에 참으로 용기백백하여 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영적 승리의 비결은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라는 이 길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격려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
셋째, 심판의 왕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의 심판 일화는 비유라기 보다는 예언적 서술입니다. 늘 읽어도 충격입니다. 예수님이 임금이 되어 심판하십니다. 완전히 우리의 예상을 벗어납니다. 종교적 색채가 전혀 없습니다. 기도도, 전례도, 말씀공부도, 십계명의 준수도 아닌 구체적 사랑 실천이 심판의 잣대입니다. 구체적으로 곤궁중에 있는 이웃이,
1.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는가?
2.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는가?
3.나그네 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 주었는가?
4.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는가?
5.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는가?
6.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는가?
가 최후 심판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이런 곤궁중에 있는, 가장 작은 불쌍한 이들을 ‘내 형제들’이라 칭하며 이들을 당신과 동일시합니다. ‘당신을 위해(for you)’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당신께(to you)’ 하신 것이라 분명히 못박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전자의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가고, 후자의 인정머리 없던 이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갑니다. 과연 나는 어느 쪽에 속하는지요? 문득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와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전자에 해당된다면, 부자는 후자에 해당됩니다. 프랑스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피에로 신부는 이렇게 영벌의 지옥 상태를 묘사합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죽음은 바로 하느님과의 눈부신 만납입니다. 만일 영원한 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법정의 심판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영벌은 우리가 시간의 그림자로부터 빠져나가는 순간, 그동안 세상에서 무엇을 했느냐를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돌아봤는데 평생 저만 알고, 저만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가 있을 것입니다. ‘너는 너 자신으로 만족하고 살았으니 영원히 너 자신만으로 만족하며 살아라!’ 이런 목소리가 영벌의 선고일 것입니다. 그동안 자아도취에 빠져 살았으니 앞으로도 거울을 들여다 볼 때마다 그런 자기 모습을 보게 되는 것, 그것이 영원한 고통의 벌이자 지옥일 것입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전례력으로 올해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오늘 미사의 말씀은 임금이신 주님이 누구신지 고루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마태 25,32)
복음 말씀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께 심판의 권한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이 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나아온 이들을 바라보시고 그들이 살아온 대로 그들의 자리를 정해 주실 것입니다.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 해 주지 않은 것"(마태 25,40/45)
예수님은 가장 작은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시지요. 그들에게 연민과 자비로 베푼 것이 바로 당신께 해 준 것이고, 무관심과 멸시로 외면한 것은 바로 당신을 소외시킨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심판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지상에서 어느 처지의 삶을 살아가건,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과 해 주지 않은 것이 기준이 됩니다. 과부의 헌금 일화에서 보았듯이 희사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마태 25,37.44)
예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그런데 두 부류의 질문 어조는 상이하겠지요. 아낌없이 내어주면서 준 것을 바로 잊어버리고 또다시 새로운 나눔의 기회를 찾는 이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칭찬과 축복이 어리둥절해서 이렇게 여쭐 것이고,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사치를 당연한듯 누리며 주변에 누가 힘든지 외면하고 산 이들은 항변하듯 따질 것입니다. 당신이 언제 내 눈앞에 나타나셨느냐고, 당신이라고 밝혔으면 내가 정말 잘해드렸을 거라고 말이지요.
진정한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으니,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 안에 당신을 감추시는 것이야말로 신의 한수일 겁니다. 신앙과 사랑의 옥석은 여기서 갈리지요.
제1독서 대목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자애가 넘치는 착한 목자이심을 보여 줍니다.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에제 34,15)
당신께서 몸소, 친히 우리를 돌본다고 하십니다. 사실 주님은 우리 대신 살림을 살아주는 분이십니다. 먹이고 입히고 키우는 분, 생명을 더 풍요롭게 살리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런 주님의 사랑을 믿지 못해 의탁을 거두고, 아등바등 진을 다 빼가며 헛손질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화답송)
시편 저자는 착한 목자 품안에서 사랑받으며 살아가는 양의 마음을 노래합니다. 탐욕은 아쉬움밖에 모르고, 감사는 아쉬움을 모릅니다. 목자를 신뢰하고 온전히 의탁하는 양에게는 감사뿐이니 아쉬움이 없지요. 각자 느끼는 아쉬움의 정도는 영혼의 상태와 신앙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겁니다.
제2독서에서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대속자입니다.
"죽은 이들의 맏물이 되셨습니다."(1코린 15,20)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지만,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를 대신해 죽음을 받아 안으셨습니다. 그분의 속량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구원을 받았지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입니다."(1코린 15,22)
주님을 믿는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끝이라 여기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겪는 고통과 슬픔 역시 동 트기 직전의 어둠으로 여겨 쉬이 절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공로로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이 보장받았음을 믿고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은 이런 분이십니다. 사랑 빼고는 그분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걸 오늘의 말씀들이 보여주고 계시지요.
사랑의 임금이신 예수님 안에서 사랑이 되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사랑이 필요한 이들이 도처에서 우리의 눈길과 마음길과 손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펼쳐 주신 선물일 겁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말씀하셨지요.
언젠가 사랑의 심판대 앞에 설 때 사랑이신 분과 기쁘게 해후하고 하나 될 수 있도록, 우리,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주님을 닮아 사랑이 되어가시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전례력으로 연중 마지막 주일인 오늘, 우리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보내면서 <복음>으로 마지막 때의 심판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는 왕의 권한 행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에제케엘 예언자가 예고한 임금이신 목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양 떼를 찾아와 보살펴주고, 그들을 먹이고 쉬게 하는데, “잃어버린 양은 찾아내고 흩어진 양은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줍니다.”(에제 34,16). 그러면서도 공정으로 양떼를 먹이시고,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십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죽을 때 예수님께서는 판관이요 임금으로 오시지만, 그분이 오는 목적은 벌이 아니라 상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오심을 예고하신 것은 심판으로 겁주려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기 위하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바로 이를 위해, 곧 당신의 구원이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끝나도록 하기 위해, 이토록 마음을 쓰시며 격려와 예고로 경각시키십니다. 이토록,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보살피고 가없는 사랑을 쏟으십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을 이어받은 훌륭한 왕으로서, 새 이스라엘을 건설할 분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겼고, 군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런데 대체 왕은 누구인가?”
한마디로, 전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를 잘 말해줍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맏물이 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재림 때에 모든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모든 권세와 권력과 권능을 파멸시키시고 나서, 나라를 하느님 아버지께 넘겨드릴 것’(1코린 15,24)이고, ‘하느님께서 모든 권세를 그리스도의 발아래 잡아다 놓으실 때까지는 세상을 다스리실 것’(1코린 15,25)임을 밝혀줍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지내며, 예수님께서 왕이심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대체 그분은 어떤 왕인가?”
그것은 ‘그가 대체 어떻게 왕이 되었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도 바오로의 “그리스도 찬가”(필리 2,6-11)에서 잘 보여줍니다. 곧 그는 낮추어 종이 되어 십자가의 죽기까지 순종하여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낮추어 종이 되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까닭은 우리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신 까닭이었습니다. 결국, 종으로 낮추어 왕이 되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여 왕이 되셨고, 사랑으로 왕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왕들처럼 권력을 휘두르고 위에서 힘으로 지배하고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섬김의 왕이요 사랑의 왕이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통치방식은 권세와 힘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섬김이요,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나라에 사는 우리 역시 사랑과 섬김을 삶의 원리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10,43)
오늘 <복음>은 이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이토록, 인간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을 인간들 사이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버려진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습니다. 진정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형제에게 속해있고, 동시에 하느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우리는 이제 ‘섬김과 사랑의 법’ 아래서, 섬김과 사랑의 왕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왕국의 백성인 자녀로 살아가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아멘.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잖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온 누리의 참된 왕'이시라는 것을 '선포하는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왕으로 모시겠다는 나의 믿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날'입니다. 한 해 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참된 왕으로 모시면서 살아왔는지에 대해 '성찰하는 날'입니다. 또한 다시금 그렇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닮으려고 하는 '왕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아주 특별한 왕(임금)'이십니다.
예수님은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왕이시며, 섬김을 받으러 온 왕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왕이시고, 양들을 위해 당신 자신을 십자가 죽음에 내어 맡기신 왕이십니다.
오늘부터 한 해의 마지막 주간인 이번 한 주간(11.22-11.28)은 '성서 주간'입니다.
성서(성경)은 '하느님 계시의 중요한 원천'으로써, 성령의 감도로 쓰여 진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드러내는 핵심 주제는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다.'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이시며,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참된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인 오늘 복음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마태25,31-46)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때에 '심판의 기준'이 '나의 작은 사랑실천'이라는 단순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25,45)
성경 안에서 한 해를 잘 마무리 합시다!
새해(나해)에는 성경을 더 가까이 하고, 성경이 전하는 사랑을 더 잘 실천하는, 그런 하느님의 자녀들이 됩시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마태 25, 31)
아파하고
부서지며
한 해를 살았다.
더욱 소중해지는
생명의 겸손한
시간이다.
모든 삶에는
끝이 있다.
우리와 함께하신
그분의
사랑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마지막이라
여겼던 곳에서
뜨거운 사랑과
구원을 체험한다.
우리 삶의
모든 길의
끝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사랑과 용서는
끝이 없다.
한 해를
마무리하지
않고서는
기쁜 새 해를
맞이할 수 없다.
삶의 끝은
언제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고
사랑이 있다.
모든 여정을
완성시키시는
사랑이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과 감사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 되시는
우리 삶의
그리스도왕이시다.
그리스도왕께
우리의
한 해를
떠나보낸다.
그리스도왕께
의탁하지
않고서는
이 어려움을
헤쳐나갈 수 없다.
우리모두를
살리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그 어떤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 할 수 없다.
생명을 돌보시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고
따른다.
신앙인의 삶이란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의 삶으로
그리스도왕을
섬기는 복음의
사람들입니다.
부서졌고
무너졌던
이 시간을
봉헌한다.
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왕께서
몸소 보여주셨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는
삶이 그리스도의
삶임을 기억하며
기쁘게 따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특별한
한 해의
마무리이다.
더 좋은 사랑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기도드린다.
우리 모두의
아픔과 어려움
이 모든 것을
그분께
올려드리자.
모두들
고생 많으셨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