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일(吳挺一)
[문과] 인조(仁祖) 17년(1639) 기묘(己卯)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1[探花]위(03/07)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624C815C77CB1610X0
자(字) 두남(斗南)
호(號) 귀사(龜沙)
생년 경술(庚戌) 1610년 (광해군 2)
졸년 경술(庚戌)(주1)【補】 1670년 (현종 11)
향년 61세
합격연령 30세
본인본관 동복(同福)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 후기에, 도승지,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두남(斗南), 호는 구사(龜沙).
직장 오세현(吳世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오백령(吳百齡)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오단(吳端)이며, 어머니는 병조참판 심액(沈詻)의 딸이다.
1627년(인조 5)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36년,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추진하자, 성균관유생으로서 반대하는 상소를 주도하였다가 성균관에서 축출당하였다.
1639년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43년부터 1646년 사이에 정언(正言)·헌납(獻納)·이조좌랑·사간·이조정랑 등을 거듭 역임하였다.
1645년 도당록(都堂錄)에 올랐으며, 1646년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집의(執義)·부응교(副應敎)·응교 등을 거쳐 1648년 승지에 이르렀다.
이어 황해도와 경기도의 관찰사 등을 지냈다.
1652년(효종 3) 매부인 인평대군(麟坪大君)을 집에 초대하여 잔치를 벌였을 때의 일을 빌미로 일어난 옥사에 연루되었으나 무고임이 밝혀졌다.
1655년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도승지를 거쳐 1657년 이조참판·대사헌, 1659년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1660년(현종 1) 도승지로서 『효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663년 형조판서·판윤을 거쳐, 1670년 호조판서에 올랐다.
[문과] 인조(仁祖) 24년(1646) 병술(丙戌) 중시(重試) 병과(丙科) 2위(05/08)
[진사] 인조(仁祖) 5년(162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58위(88/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07명 [甲1・乙1・丙5]
전력 진사(進士)
관직 호조판서(戶曹判書)
문과시제 표(表):당군신하명훼금은기완이보군기(唐羣臣賀命毀金銀器玩以補軍器)
타과 1627년(인조 5)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58위
본인문과 1646년(인조 24) 병술(丙戌) 중시(重試) 문과(文科) 병과(丙科) 2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오단(吳端)[文]
[조부(祖父)]
성명 : 오백령(吳百齡)[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오세현(吳世賢)
[외조부(外祖父)]
성명 : 심액(沈詻)[文]
본관 : 청송(靑松)【補】
[처부(妻父)]
성명 : 정호선(丁好善)[文]
본관 : 나주(羅州)【補】
[안항(鴈行)]
제(弟) : 오정원(吳挺垣)[文]
제(弟) : 오정위(吳挺緯)[文]
제(弟) : 오정벽(吳挺璧)【補】(주3)
제(弟) : 오정창(吳挺昌)[文]
[가족과거]
자(子) : 오시만(吳始萬)[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천계7년8월초4일정묘식년사마방목(天啓七年八月初四日丁卯式年司馬榜目)』(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B13LB-1])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안항 : 『동주집(東州集)』 卷之8, 誌銘, [관찰사 오공묘지명(觀察使吳公墓誌銘)]을 참고하여 "오정벽(吳挺璧)"을 추가. "生五男四女.男挺一.大司憲.挺垣承旨.挺緯參議.竝文科.挺壁夭.挺昌進士. "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十(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오단(吳端)
[문과] 인조(仁祖) 2년(1624) 갑자(甲子)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1[探花]위(03/04)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624B2E8FFFFB1592X0
자(字) 여확(汝擴)
호(號) 동암(東巖)
생년 임진(壬辰) 1592년 (선조 25)
졸년 경진(庚辰)(주1)【補】 1640년 (인조 18)
향년 49세
합격연령 33세
본인본관 동복(同福)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 후기에, 빈전도감도청, 전주부윤, 황해도감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여확(汝擴), 호는 동암(東巖)·백암(白巖).
직장 오극권(吳克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장 오세현(吳世賢)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오백령(吳百齡)이다. 어머니는 제주고씨(濟州高氏)로, 고경룡(高景龍)의 딸이다. 처는 청송군(靑松君) 심액(沈詻)의 딸이다.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3년(인조 1) 음보(蔭補)로 직장이 되었다. 이듬해 알성문과에 병과한 뒤 전적(典籍)이 되고, 형조와 공조의 좌랑이 되고 곧 뒤이어 병조정랑이 되었다.
1625년에 교리(校理)를 거쳐 1627년에 정언이 되었으며, 이듬해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그 뒤 1635년과 그 이듬해에 수찬(修撰)·장령(掌令) 등 청환(淸宦)을 역임하였다.
1634년에 둘째 딸을 인평대군(麟坪大君)에게 출가시켰다.
이듬해 인렬왕후(仁烈王后)가 죽자, 빈전도감도청(殯殿都監都廳)이 되어 상례(喪禮)를 잘 치렀다.
1637년 전주부윤을 거쳐 충청감사와 황해도감사를 역임하였다. 왕자의 장인으로서 죽은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성품이 겸손하여 진취를 좋아하지 않았고, 광해군의 폐모 정의(廷議: 조정의 논의)에는 불참하였다.
내외요직을 지내면서 양차의 호란 때 근왕병동원과 군수조달에 진력하였다.
[생원] 광해군(光海君) 10년(161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27위(57/100)
[진사] 광해군(光海君) 10년(161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18위(23/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04명 [甲1・乙1・丙2]
전력 직장(直長)(주3)
관직 감사(監司)
관직 옥당(玉堂)
문과시제 표(表):당감찰어사위정청상핵대옥이신원왕(唐監察御史魏靖請詳覈大獄以伸寃枉)
타과 1618년(광해군 10)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27위
1618년(광해군 10)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2등(二等) 18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오백령(吳百齡)[文]
[조부(祖父)]
성명 : 오세현(吳世賢)
[증조부(曾祖父)]
성명 : 오극권(吳克權)
[외조부(外祖父)]
성명 : 고경룡(高景龍)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심액(沈詻)[文]
본관 : 청송(靑松)【補】
[안항(鴈行)]
형(兄) : 오준(吳竣)[文]
[가족과거]
자(子) : 오정일(吳挺一)[文]
자(子) : 오정원(吳挺垣)[文]
자(子) : 오정위(吳挺緯)[文]
자(子) : 오정창(吳挺昌)[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만력46년무오식년사마방목(萬曆四十六年戊午式年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1618)])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주 3]전력 : 「홍패(紅牌)」(종중문적[동복오씨 오정일가])에는 전력이 "통훈대부 행장악원직장(通訓大夫行掌樂院直長)"으로 나옴.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十(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오백령(吳百齡)
[문과] 선조(宣祖) 27년(1594) 갑오(甲午) 정시2(庭試2) 병과(丙科) 5위(09/10)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3C624BC31B839B1560X0
자(字) 덕구(德耉)
호(號) 묵옹(默翁)
생년 경신(庚申) 1560년 (명종 15)
졸년 계유(癸酉)(주1)【補】 1633년 (인조 11)
향년 74세
합격연령 35세
본인본관 동복(同福)
거주지 한성([京])【補】(주2)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 후기에, 대사간, 이조참판, 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덕구(德耉), 호는 묵재(默齋).
오원몽(吳元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직장 오극권(吳克權)이고, 아버지는 직장 오세현(吳世賢)이다.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참봉 성근(成近)의 딸이다. 형조판서 오억령(吳億齡)의 동생이다.
1588년(선조 21)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어머니를 죽이려 하자 몸으로 가로막아, 왜적이 오백령의 효심에 감동해서 살려주어 효자로 이름이 났다.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뽑혀 사관(史官)이 되었고, 이어 정언(正言), 예조와 병조의 좌랑, 재령군수·응교(應敎)·사인(舍人)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동부승지가 되어 복천군(福川君)에 봉하여졌으며,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여러 참판을 거쳐, 1618년(광해군 10)에 폐모론의 정청(庭請: 세자, 또는 삼정승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궐에 대사(大事)를 알리고 임금의 명을 기다림)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파직되고, 성밖에 은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형조참판에 기용되고, 이어 도승지·대사간·이조참판·성균관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괄(李适)의 난 때에 왕을 공주에 호종한 공으로 승급되었다.
[생원]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39위(69/100)
[진사]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14위(44/100)
[이력사항]
선발인원 10명 [甲1・乙3・丙6]
전력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
관직 이조참판(吏曹參判)
관직 한림(翰林)
문과시제 표(表):하군신하비의악식(夏群臣賀菲衣惡食)
타과 1588년(선조 21)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三等) 39위
1588년(선조 21)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三等) 14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오세현(吳世賢)
[조부(祖父)]
성명 : 오극권(吳克權)
[증조부(曾祖父)]
성명 : 오원몽(吳元蒙)
[외조부(外祖父)]
성명 : 성근(成近)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양사행(梁思行)
본관 : 미상(未詳)
[안항(鴈行)]
형(兄) : 오억령(吳億齡)[文]
[가족과거]
자(子) : 오단(吳端)[文]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주 2]거주지 : 『만력16년무자2월24일사마방목(萬曆十六年戊子二月二十四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Harvard-Yenching Library)[K 2291.7 1746(1588)]) 내의 합격 기록을 참고하여 거주지를 추가.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八(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