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강론>(2024. 2. 16. 금)(마태 9,14-15)
『단식』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유대인들의 단식은 원래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자신들의 그동안의 생활에 대해서 참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단식이 ‘슬퍼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는 그랬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참회의 의미는 점점 희미해지고 일상적인 신심 행위로 변했습니다. 그들은 단식을 많이, 또 자주 하면 좋은 것으로 생각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면서 자기들은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단식을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마태 6,16ㄱㄴ).”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예수님 말씀은, 이미 메시아가 와 있기 때문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은 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세상에 와 계시는데,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과 참회하면서 슬퍼하는 단식을 하는 것은, 이미 오신 메시아를 거부하는 일이 될 뿐입니다.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라는 말씀은, “지금은 기뻐할 때이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본래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나를 구원하려고 구세주께서 오셨고, 내가 그분과 함께 살고 있고,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당연히 ‘기뻐하는 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이 말에서 ‘먹고 마시는 일’이라는 말은, 음식에 관한 율법 실천 문제를 가리키는 말인데, 우리 교회의 단식과 금육 문제도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극기 고행과 단식과 금육을 잘 지키는 나라가 아니라, 그런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성령 안에서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는 단식이 없습니다. 그 나라는 모든 것이 완성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바로 그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오신 분이고, 그 나라를 미리 체험하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메시아와 함께 사는 기쁨을 누리면서 살았기 때문인지 단식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의 신심 행위로 단식을 하고 싶어 했다고 해도, 아마도 실제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날이 먹는 날보다 더 많았을 것이고, 그래서 단식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단식은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이 먹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기 때문에, 먹을 것 자체가 없는 상황이라면 단식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만일에 그렇게 굶주리고 있는 상황을 모르거나 외면하면서 단식하라고 강요한다면, 그 강요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또 병 때문에 제대로 먹을 수 없는 병자도 마찬가지인데, 먹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단식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도 자비도 없는 일, 무자비하고 냉정하고 잔인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 말씀이고, 넓은 뜻으로는 신앙인들이 어떤 죄를 지어서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신앙인들이 신랑을 빼앗긴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몹시 슬퍼했던 신자들은 슬픔이 너무 커서 잠도 못 자고 식사도 못했을 것입니다. <‘일부러’가 아니라 저절로 단식하는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죄를 지어서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는 상황은 정확하게 말하면 ‘신랑을 빼앗기는 일’이 아니라 ‘신랑을 떠난 일’입니다. 죄를 짓고 떠나 있다가 회개하고 신랑에게로(주님에게로) 되돌아가려고 노력할 때, 단식은 회개와 보속을 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교회가 실천하고 있는 단식의 가장 첫 번째 의미는 ‘보속’입니다. <남을 위한 희생이 아니라 나를 위한 보속입니다.>
그러면 꼭 단식을 해야만 하는가? 단식만이 유일한 방법인가? 우리는 단식과 금육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간에 어떤 신심 행위에 대한 강박 관념을 버려야 합니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죄가 되지만, 할 수 없어서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단식재와 금육재를 겉으로만(형식적으로만) 지키는 경우가 있고, 그 경우는 바리사이들 같은 위선자들(율법주의자들)과 다르지 않지만, 반대로, “혹시 내가 지키는 단식과 금육도 위선이 아닐까? 나도 위선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 때문에 주눅 들고, 걱정하고, 괜히 부끄러워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생각도 신앙생활의 기쁨을 방해하는 걸림돌입니다. ‘보속’은 용서의 은총을 받은 기쁨으로 하는 일입니다. 당연히, 보속의 의미로 하는 단식도 기쁨 속에서 해야 합니다. “혹시 나도 위선자가 아닐까?” 라는 걱정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은 결코 주님의 뜻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제1독서로 읽는 이사야서의 단식에 관한 말씀은, 단식이라는 외적인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 먼저이고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출처]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