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달리기, 걷기
석야 신웅순
나는 직장을 두 번씩이나 그만 두었다. 30대엔 초등학교 선생을, 40대엔 중학교 선생을. 교수가 되어 학자의 길을 걷고 싶었다. 30대는 부모와 동생들을, 40대는 처와 자식들을, 거기에 석박사 공부까지 지독한 중압감에 시달렸다. 나는 병명도 모른 채 상상 이상의 공황장애를 겪었다. 지금도 평생의 후유증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달리기와 걷기였다.
사오십대엔 달렸고 육십 넘어서는 걸었다. 달리기와 걷기가 아니었으면 나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는“60살까지만이라도 살게 해주세요.”그렇게 기도했다. 그런데 그보다 십년을 훌쩍 넘겨 살고 있다. 의학의 발달로 예까지 왔으니 참 세상 많이도 좋아졌다.
나는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해 학교를 그만 두었다. 두 번째의 무모한 도전이었다.
“정신 나갔느냐?”
“처자식은 어쩌라고.”
주위에서 사람들은 나를 보고 미친 짓이라고 했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되더라. 당시 내 삶의 전부는 간절하고도 아슬아슬한 기도였다. 그 때마다 달렸고 지치면 걸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천우자조자(天佑自助者)’는 내게는 진리였다.
교수가 되니 아, 또 산 너머 산이었다. 대학은 연구하고 가르치는 곳인 줄만 알았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가 않았다. 거기에는 정치가들도 있었고 사업가들도 있었다. 살아남아야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세상 앞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나가더라. 어찌 말로 다 설할 수 있으랴. 하늘의 도움으로 무사히 정년퇴임할 수 있었다. 나는 사회의 부적응아였다. 이런 저런 사람들과 타협하며 사는 그런 쉬운 방법을 몰랐다.
많이도 외로웠다. 그 때 마다 달렸고 달리다 지치면 걸었다. 달리면 하늘과 산이 달렸고 걸으면 하늘과 산이 걸었다. 말없이 동행해주었던 고마웠던 그 때 그 눈부신 하늘과 산이었다.
옛선비들이 세상과 문을 닫고 제자를 키우며 홀로 학자의 길을 걸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멘탈이 약한 나 같은 사람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리.
내려놓아야할 고희이다. 무엇이 아쉬워 아직도 학문에 매달리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집 사람은 그도 내려놓으라 한다. 시나 쓰고 글씨, 그림이나 그리며 살자 한다. 인기나 있나, 알아주기나 하나, 돈이나 생기나, 본전이나 찾나, 집사람은 아등바등 시조연구에 매달리는 이런 내 모습이 안쓰러웠나보다.
나는 어렸을 적 꿈이 있었다. 그림 그리기였다. 어쩌다 나는 학문과 예술을 같이 해왔다.운명 같은 인연이 내겐 있었다. 서예가 부끄러운 오십년이요 시와 학문이 남사스러운 사십년이다. 솔직히 말해 그 동안 이룬 게 없고 제대로 쓴 책이 하나도 없다. 대접은커녕 외로움만 더하니 아무래도 학문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몇 달 전부터 내 버킷리스트, 한국화 그림을 시작했다. 시작하기까지 70년이 걸렸다. 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잘은 못 그리나 재미가 있다.
올해처럼 더운 날씨는 처음 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자동차를 자제하는 것, 에어콘 대신 가능하면 선풍기를 쓰는 것 정도이다. 작은 실천에도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편리에 익숙해진 몸을 되돌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나 그도 습관들이기 나름이다. 몸이란 환경에 맞게 적응하도록 되어 있다.
걷기만큼 좋은 운동은 없다고 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차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 물론 건강과 환경 때문이다. 아파트도, 전철도 웬만하면 계단을 오른다. 덕분으로 많이 건강해졌다.
내 인생 힘들어 시작한 달리기와 걷기였다. 멀찌감 생각해보니 내 건강뿐만 아닌, 창해일속이나 지구 환경에게도 조금은 일조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조금은 불편해도 환경에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 실천해보아야겠다. 후손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걸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가 않다.
“웅순아, 그래도 예까지 와줘 고맙다.”
- 2024,9.16 여여재, 석야 신웅순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