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 유튜브 카페 등에 조총에 대한 글이 많이 올라와서, 걍 생각해 봅니다.
조선시대의 조총이 일본군의 무라타, 30식, 38식, 99식 소총이나, 아라사 소총에 비해서 교전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렇게 형편 없었는가?
=>의외로 잘 훈련된 포수는 농성전, 유격전을 할 경우, 조총을 가지고도 교전을 벌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홍범도 장군, 전봉준 장군 등등 !
그러나 한국의 조총(화승총)은 대게, 일본에서 건너온 것을 개량한 것인지라?
화약과 불심지(화승)가 물에 취약하고
폭발이 불가능해지는데.....
서양이나 일본과 달리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면, 섬유 등으로 불심지(화승)를 꼬아서 점화용 불씨를 장시간 보존하는 것이 아니고
조선의 전국에 흔하디 흔한 칠기(칡)의 줄기를 말렸다, 잿물에 담궜다 말렸다를 반복해서 섬유로 만든 로프 같은 구조가 되면,
훈소가 진행되게 되고...수십미터씩 되는 칡 불심지를 만들어 가지고 다녀서 어떤 강풍에도 꺼지지는 않으나, 비만 오면 쉽게 젖어버리니..
우산이 없는 경우에는 어김 없이 발사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문제는 일본군이 의병들의 조총이 가진 이 약점을 너무나 잘 아는지라...
구한말 의병항전기 한창 잘 싸우다가도 비만 오면 일본군이 이를 틈타 반격하니,
전국 각지에서 소나기 오는날이 의병, 독립군 제삿날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고 합니다.
출처 : 독립운동사 제1권 : 의병전쟁사 (1970. 11. 발행) 274쪽 등등
(.... 전략......)의병진에서는 24일 밤으로 각처 주둔 장병들이 모두 제천읍으로 들어와 모이게 되었는데, 밤은 깊고 궂은 비는 내려서 성중의 형편이 처량하고 소란하기 이를데 없었다. 25일에는 중군 안승우(安承禹)가 비장한 결심으로 새로 쌓은 남산성(南山城)에서 싸움을 독려하며 손수 화약을 재어 군사들에게 주면서 격려하고, 청국인 군사 여국안(呂國安) 등이 앞에서 총을 쏘아 32명을 사살하니 고장림(古場林)으로 들어오던 경군이 숲 밖으로 물러가기 3번이나 하였는데, 나중에는 장기렴이 칼을 빼어들고 군사 4,5명을 베어 죽이며 독려하니 군사들이 다시 나오고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의병진 장병들의 좌우협공(左右挾攻)으로 다시 달아나니 성중에서는 환호성이 오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야말로 하늘이 돕지 않아서이랄까, 큰 바람이 서남쪽에서 불어오며 천지가 자욱해지고 살대같이 굵은 빗발이 내려 부니 군사들이 손발을 움직일 겨를이 없었다. 더구나 화승총에 불이 붙지 않으니 무기가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여기서 성 서쪽에서부터 군사들이 흩어지기 시작하는데, 적의 총환은 그대로 쏟아지니 그만 온 진중이 무너지게 되고 말았다.20)
이 때 중군장 안승우(安承禹)는 분을 참지 못하여 돌을 던지며 대항하다가 성 위로 올라가 큰소리로,
“창의 중군(倡義中軍) 안승우는 여기 있다.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면 빨리 오너라.”
고 외치는데, 탄환이 오른쪽 다리에 맞아 거꾸러지게 되었다.....(후략)
19)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하권 병신년 4월 11, 12일조 및 수사본 ≪의암유선생서행대략≫ 병신년 4월 13일조 참조.
20) ≪하사안공을미창의사실≫ 하권 및 ≪유선생서행대략≫의 병신년 4월 13일조 참조.
첫댓글
남들은 저런 신식소총 만들때
좃썬은 임진년에 쓰던
조총가지고 싸웠으니 ~~~
ㅎㅎ
칼들고, 혹은 맨손으로 가신 분도 계신 모양요.
잘 읽었습니다.
아... 빗물과 함께 눈물이 주륵주륵...
너무 슬픈 이야기입니당😳🤯💦
우산을 쓰면 조준사격 당했겠군요..
현대식 소총에 조총으로 대응했다니 비오는 날씨에 일본군의 반격에는 당해낼수가 없었군요
38식, 99식도.. 오늘날의 소총에 비교하면, 조총 수준이지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