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방문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운(運)도 불리하고 여건도 좋지 않으면 종종 등장하는 것이 기도를 하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하면 과연 효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반문을 받는 것도 당연한 코스라고 해야 하겠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에 대한 낭월의 경험담을 들려 드림으로써 나름대로의 소견을 밝히도록 할 참이다. 물론 실화이며 단 한 글자도 조작은 되지 않았다는 점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나이 20세,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는 해였다고만 말씀을 드린다. (1977년) 어느 봄날 아침에 자고 났는데, 천지가 온통 붉은 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물은 가까이는 보이고 멀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3~4일이 지나면서 점차로 그 붉은 기운은 짙어지더니 마침내는 아무 것도 식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부는 고사하고 자신의 밥그릇을 찾아 먹기도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대구에 있는 동산병원이라고 하는 종합병원을 찾았다. 하루 종일 검사를 한 다음에 내린 결론은 '실명'이었다. 시력을 쓸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그리고는 끝이다.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으니 공부는 끝났고 자신의 생계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하였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자신이 건강할 적에는 부모형제가 필요 없다고 큰소리 뻥뻥 치면서 잘도 돌아다니지만, 막상 병이 들면 아무 곳에서도 오라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계시는 집으로 가서 민간약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병명은 '초자체혼탁'이라고 했다. 그리고 현대의 의술로는 치료를 할 방법이 없다고 하는 답이 명확하게 나왔다. 막판에 몰리면 지푸라기를 잡아야 한다. 그대로 머물러 있기보다는 기도라도 해야 뭔가 숨통이 트일 것으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듬거리면서 찾아간 곳은 동해의 양양 낙산사였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기도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막판에서나마 마지막 기도를 한번 해보고 세상을 하직하고 몸을 바꿔서 다시 공부를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많이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비록 경치는 보이지 않았지만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낙산사에 도착을 했다. 시간은 저녁 11시경이었다. 원주 스님을 찾았더니 밤중에 중이 돌아다닌다고 푸념을 하셨다. 이해는 되지만 상황은 그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죄송하기만 했다. 새벽에 꿈을 꿨다. 꿈에도 낙산사로 기도를 하러 왔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절 안에서 늙은 비구니 스님이 동자를 데리고 바삐 어디론가 출장을 가시느라고 나오고 있었다. 합장을 했다. 그래도 꿈에는 사물이 바로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 비구니 스님이 흘낏 보시더니 걸음을 멈추고 하시는 말씀.. "기도하러 왔구만, 하고 있어, 난 좀 급히 다녀올 데가 있네." "예, 다녀오십시오." 그 뿐이다. 비구니 스님이 사라진 곳을 멀거니 바라다보다가 꿈을 깼다. 그리고 그 감은 매우 좋았다. 몇 달 동안의 암흑에서 빛을 발견할 가망성을 얻었다고 해야 하겠다. 아마도 그 비구니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었을 것이라고 저 좋을 대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는 주지스님을 찾아서 기도를 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게 될 줄은 이미 꿈을 깨고 나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100일간의 기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할 일은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 절실히 느끼고 또 깨달았다. 잠자는 시간 6시간과 공양시간 3시간을 빼고는 모두 기도에 매달렸다. 그야말로 자나깨나 '관세음보살'이었다. 그렇게 집중이 잘 될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하겠다. 잡념이 없어진다는 것은 큰 일을 당하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잡념이 많다는 말은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망상은 한가로움의 푸념인 것이다. 참으로 절박한 막다른 길에서는 오로지 일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고 해야 아마 실감이 드실 것이다. 그 해는 낙산사의 해수관음보살을 점안한 해인 것으로도 기억이 된다. 스님들의 조언, "무리하지 말아라." 당시에 함께 살았던 대중 스님들이 6명인가 되었는데 하나같이 기도를 염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도를 시작한지가 며칠이나 되었을까 싶은 날에 책임자 되시는 분이 조용히 불러서 말씀하셨다. "스님. 고생이 많소. 근데 지금 스님의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대중 스님들이 불안해하고 있구랴. 왜냐면 기도하다가 쓰러지겠다는 염려로 인해서요. 그러니 매일 8시간만 법당에서 하고 나머지는 스스로 조용하게 한다면 대중도 편안하고 본인은 자신의 기도가 법당에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닌 줄은 알 것이므로 그 방법을 택해 보도록 하시오." 그 말을 듣고 보니 또한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불안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따르기로 했다. 그렇거나 말거나 목탁을 두드리면서 하는 기도 시간만 줄었다는 것이지 여전히 목숨을 달고 관세음보살에 매달렸다. 물론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그래도 새벽에 눈을 뜨면 어떤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로 불빛을 바라다 봤고, 여전히 같은 상태에서 실망감을 갖게 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약 두 달 정도가 지났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 기도는 순일하게 진행이 되었다. 기도를 마치고는 생을 마감하겠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담담하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다음 생의 준비를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해 나가던 상황이었다. 그 어느 날 밤에 꿈을 한 자리 얻었다. 지금도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동해안 유람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 지역의 사령관 댁을 발견하고는 방문을 하였다. 들렸으니 인사를 하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인해서이다. 그 집은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한참 올라가서 있었다. 계곡이 가팔랐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초가집이 있었고, 문안을 드리고 절을 세 번했다. 물론 속인에게 절을 세 번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지만, 당시는 그렇게 했다. 그러자 그 분이 하는 말씀, "자, 저쪽 밝은 데로 가시지" 해서, 창가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해맑고 따스한 햇살이 쏘여들었다.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말했다. "그래 혹 나에게 부탁을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지." "예 실은 전입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 어디 보세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민 것은 예전에 동산병원에서 받은 진단서였다. 그는 진단서는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질문만 했다. "거기에 이러이러한 항목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그럼 저러저러한 항목은 있나?" "그러한 항목도 없는데요." "그럼 염려할 것 없네. 내가 해결해 줌세." "예, 고맙습니다." 이것이 꿈의 전부였다. 그리고 잠에서 깨여나니 새벽 1시 반이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아무리 둔하다고 해도 이게 무슨 메시지인지는 감이 잡히실 것으로 짐작을 한다. 이제 눈을 고쳐주겠다는 암시가 아니고 뭐겠느냔 말이다. 그대로 가사장삼을 걸치고 법당으로 가서는 목이 터져라 하고 관세음보살을 불러댔다. 그리고 아침 공양을 하는데 대중들이 눈치를 보면서 분위기가 술렁술렁함을 느꼈다. 어느 스님이 말했다. "기도를 하시다가 오늘 새벽에는 다른 것을 하시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이 말은 혹시 기도하다가 돌아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서 의사를 타진해 보는 것으로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말씀 드렸다. "아, 대중 스님들께 미안합니다. 기도가 잘 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중은 함께 기뻐해 줬다. 그렇게도 세상을 붉은 천지로 만들었던 짙은 색이 그 후로 조금씩 조금씩 옅어져갔다. 그렇게 보름 정도가 지나자 저 멀리 안개 속으로 느꼈던 사물들이 어느 정도 식별을 할 수가 있는 정도가 되었다. 비로소 옆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새벽에 눈을 뜨면 매일 쳐다보던 전등의 유리 윤곽선이 시야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그 무렵의 마음은 그야말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100일 기도의 회향을 21일 남겨놓고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묵언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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