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만리지국
[자료의 근거]
이욱정 지음. http://cafe.daum.net/essence100/D4LQ/69
국조보감 제10권 세조조(世祖朝)의 기록을 보면,
"양성지가 상소하여 여러 조항의 정책을 진달하였다. 그 내용은, 1.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는 일, 2. 한성을 상경(上京)으로, 개성(開城)을 중경(中京)으로, 경주(慶州)를 동경(東京)으로, 전주(全州)를 남경(南京)으로, 평양(平壤)을 서경(西京)으로, 함흥(咸興)을 북경(北京)으로 정하는 일..,"
다산시문집에서 황제의 도읍은 동경,서경,남경,북경이 있다고 했습니다.
으로 알고 있는 조선이 동경,서경,남경,북경 둔 사실을 볼때,
과연 조선이 제후국에 불과한 나라였다고 말할수 있을까요?
자신의 조상을 숭상하고 공경하는 사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인지, 조선왕조실록이나 학자들의 문집을 보면 종묘사직에 관한 글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들을 보면 임금의 종묘사직에 관한 글들이 많이 나오는데,
황제의 종묘사직은 칠묘(七廟)라 하며 황제의 제후국의 종묘사직은 오묘(五廟)라는 글과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조선은 과연 칠묘의 나라인가? 오묘의 나라인가?
지금껏 배워온 역사지식으로는 조선은 제후국이므로 오묘의 나라가 당연히 맞을 겁니다.
그러나 이치적으로 그러하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배워온 지식에 큰 회의감을 안겨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선조실록 51권 27년(1594년)의 기록을 보면,
대사헌 김우옹(金宇顒), 장령 심원하(沈源河)·기자헌(奇自獻), 지평 황시(黃是)·박승종(朴承宗) 등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왜구가 침입해 오자, 열읍(列邑)의 성곽이 여지없이 궤멸되어 7묘(七廟)가 진경(震驚)하고 난여(鸞輿)가 파천하였으니, 이렇게 분탕 패복된 참상은 전대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바입니다.
임진왜란을 겪는 실체는 명(明)나라가 아닌 조선입니다. 1594년경의 기록에 "왜국의 침입으로 칠묘가 진경하고,난여가
파천하였으니..," 라는 기록이 놀라울 뿐 입니다.
지금껏 배워 온 역사지식으로 본다면 조선은 오묘의 나라 입니다.
그런데 칠묘를 언급한 사실을 보면 조선은 제후국의 나라로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이 기록과 일맥상통한 기록이 있습니다.
난중잡록(亂中雜錄) 계사년 하 의 기록을 보면,
"..........손으로 칼을 휘두르며 몸에는 갑옷을 걸치고 위엄을 기르며 날랜 기운을 쌓아서 범의 굴을 바로 더듬어 백성의 분을 조금이나마 풀어 주고 칠묘(七廟)의 수치를 쾌히 씻으려 하오니,........."
이 기록은 난중잡록에 나오는 기록으로 김덕령 장군의 말씀을 기록한 내용 입니다.
어디까지나 임진왜란을 겪는 실체이자 그 주체는 조선입니다. 명(明)나라가 임란을 겪는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데도
칠묘의 수치를 말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 칠묘의 수치를 겪는 당사자가 조선이라는 것이 그 당대에 너무도
당연하므로 이런 기록이 남는 것이지,오묘의 국가 즉 제후의 나라이면서 칠묘를 말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경이자,
불미스런 일입니다.
이 기록과 맥을 같이 하는 기록이 또 있는데,
기축록(己丑錄) 하 의 기록을 보면,
".........신들이 이 두 가지의 말로써 오늘날에 간절한 것은 오직 우리 나라에 하늘이 큰 재앙을 내리고 왜적이 틈을 타서 침략하니, 삼도(三都 경주ㆍ서울ㆍ개성)가 연이어 함락되고 칠묘(七廟)가 몽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위의 기록으로 보면 "선조실록"에서는 "칠묘가 진경하고 난여가 파천하고..," "난중잡록"에서는 "칠묘의 수치.."
"기축록"의 기록에서는 "칠묘가 몽진하게 되다." 이 기축록의 기록은 확정적으로 조선이 황제국임을 밝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봅니다. 왜냐하면 제후국은 칠묘의 나라가 될수 없기 때문 입니다. 그 외에 기축록에서는
"국조보감"에서 동경,서경,남경,북경을 정하는 일에 대해 언급을 했는데, 기축록에서도 삼도(三都)를 언급한 사실에서
조선은 황제의 수도를 거느린 황제국임이 분명해 집니다.
이러한 기록과 더불어 조선이 한반도 상황과 다른 영토적 상황에 대한 기록이 존재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 상 을 보면,
"명 나라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살펴보건대, 저 동국(東國)은 조가(朝家)의 바깥 울타리로, 서쪽은 압록강(鴨綠江)이 한계가 되고, 동쪽은 상돈(桑暾)에 닿았으며, 천지(天池)는 거의 그 남쪽 문이 되고, 말갈(靺鞨)은 그 북쪽 문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 나라는 동남쪽이 모두 바다에 닿아있고, 서북쪽은 건주(建州)이고, 정북쪽은 모련(毛憐) 해서(海西)이다."
명나라 사람 동월의 "조선부"에서 동남쪽이 바다에 닿아있고, 서쪽은 건주지역이고,압록강이 한계라고 합니다.
또 정북쪽이 황해도 지방을 지칭하는 해서(海西)지방 이랍니다. 또한 아마도 지금의 백두산을 말하는 듯한 천지(天池)가
남쪽이라고 합니다.
현 한반도 상황에서 보면 이 기록은 말도 되지 않는 기록이 됩니다. 한반도 관점에서 보면 동,서,남쪽이 바다에
접해 있습니다. 또 조선의 서쪽은 바다(海)이지,건주도 아니며, 그 서쪽에 압록강도 없습니다. 오늘날의 한반도의 압록강은
북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황해도는 조선의 서쪽이지 정북쪽에 위치해 있지 않습니다. 천지 또한 북쪽이지 남쪽이 아닙니다. 이렇듯 조선이라는 나라는 방위 개념도 희박한 나라였을까요?
방위개념이 없는 나라가 고도의 천문관측을 한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그리고 조선이 정말로 한반도에 있었다면,
이런 어이없는 기록을 동국여지승람 이라는 국가가 발행하는 서책에 기록이 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위의 기록은 조선초기의 기록이지만 이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기록은 "규원사화" 만설(漫說)에도 나옵니다.
다시말해서 조선조 숙종때의 기록인 규원사화를 기록할 당시만 해도 한반도의 방위 개념과 아주 다른 기록이 나옵니다.
"..,조선 땅은 북쪽으로 대황에 접해 찬 하늘과 언 땅이 우리의 퇴로를 끓고 서쪽은 몽고에 닿아 만리벌판이 우리의 왼쪽으로 펴는 팔을 끓으며, 그 서남쪽은 한토(漢土;지나)에 가까와 높은 산과 험준한 고개와 큰 강이 끝이 없으므로..,"
위의 기록은 규원사화 만설편에 나오는 기록 입니다.
이 기록이 쓰여진 시기인 숙종때만 해도 현재의 한반도의 상황과 아주 다른 기록이 나옵니다.
조선의 서쪽은 분명 바다인데 규원사화에서는 몽고에 닿아있다는 기록하고 있고, 또 조선의 서남쪽 역시 바다인데도,
규원사화에서는 지나의 땅에 가깝다고 기록하고 있고,지나땅에 가까운 조선의 서남쪽에 높은 산과 큰 강이 끝이 없다는
한반도 상황과 전혀 다른 기록을 하고 있다는 기록을 볼 적에 조선이 과연 한반도 있었나? 하는 큰 의심을 아니
가질수 없습니다. 다시말해서 제 생각으로는 조선은 숙종 임금 때만 해도 한반도에 위치한 국가가 아니었다고 봅니다.
숙종 임금 때만 해도 조선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중에 규원사화 "만설"편의 기록때문
이기도 하지만, 조선이 한반도에 없었다는 심증이 굳어지게 하는 기록은 숙종실록 38권 29년의 기록
입니다.
그 기록을 보면,"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강하였는데, 고구려(高句麗) 안시성(安市城)의 일에 이르렀을 때 임금이 한탄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도 성(城)을 잘 지키는 것으로 이름이 나서, 수(隋)·당(唐)의 백만 군대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지방이 고구려에 비하여 배(倍)나 크고 산천이 험준한 것은 고금(古今)이 같은데도........."
숙종 임금 때만해도 현 한반도와 다른 상황이 드러나는 기록 입니다. 우리 역사상 가장 큰 강역을
차지한 나라는 고구려라 배웠고,조선은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는 나라로 배웠는데,
고구려와 조선의 영토 크기 비교 그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상황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숙종실록에서 숙종 임금은 고구려를 작은 나라로 말하며,조선이 고구려에 배나 크다고
말했습니다. 다시말해서 규원사화 "만설"편에서 말하는 한반도와 다른 조선의 영토적 상황과
숙종실록 38권 29년의 기록을 비교해서 보면 조선은 한반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조선은 대륙에
실재 하였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영토상의 위치도 문제이지만 조선의 강역도 의문의 연속 입니다.
세조실록 7권 3년의 기록을 보면,
"판서운관사(判書雲觀事) 양성지(梁誠之)가 상언(上言)하였는데, 상언은 이러하였다.
..........우리 동방(東方)은 요제(堯帝)와 더불어 같이 일어나서 토지(土地)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되고......"
한반도를 기점으로 보면 조선의 영토의 넓이가 만리가 된다는게 이치에 맞는 기록인가?
적어도 역사를 연구한다는 분들에게 한반도를 기점으로 봐서 이런 기록이 이치에 합당한지 묻고 싶습니다.
또 이시애의 난 평정을 기리는 양성지의 "평삭방송(平朔方頌)"을 보면 조선이 제후국이라면 있을수 없는 기록이 있습니다.
예컨데 본문 중에 있는 글의 일부 중에 " 사방 만리 땅에 우리와 함께 태평하네.(幅員萬里, 同我大平)",
"황은(皇恩)이 망극(罔極)하여(皇恩罔極)"
양성지의 평삭방송은 악장가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이 글은 어디까지나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것을 기리는 글입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글은 "사방 만리 땅에..."라는 글 입니다.
이 글은 막연히 노래의 형식을 취한 과장법으로 인식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과장된 것이라면,
위의 세조실록 7권의 기록조차 과장이 되고 맙니다. 악장이라는 노래의 특성상 과장법을 취할수도 있지만,
정확한 사실을 추구하는 실록에서는 과장된 사실이 있을수 없다고 봅니다. 즉 조선은 한반도 만의 국가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 평삭방송이라는 글을 받는 주체는 조선의 임금입니다. 그런데 양성지의 글에서 "황은망극..,이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조선이 제후국이라면 쓸수도 없는 불경한 단어 입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조선의 임금에게 바치는 글이지,
명나라의 임금에게 바치는 글은 아닙니다. 또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기까지 명나라의 그 어떠한 도움없이
자체적으로 해결한 사건 입니다. 그런데 황은망극이라는 구절이 명나라를 지칭한다면 이는 문맥상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기록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평삭방송의 내용의 전반부는 조선의 임금을 칭송하는 글이 나옵니다.
이시애의 난을 성공적으로 평정한 저력은 역대의 훌륭한 임금과 현재의 국왕의 지혜와 은덕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황은망극의 주체가 명나라라면 명나라의 임금을 칭송하는 글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문맥상 이치가
맞는 겁니다. 즉 황은망극의 진정한 주체는 조선의 임금 이라는 겁니다.
세조실록1권 1년의 기록을 보면,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遼水)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萬里之國)이라 불렀습니다. 삼면(三面)이 바다로 막혀 있고, 일면은 산을 등지고 있어.."
이 기록을 한반도 상황에 대비해 보면 당연히 합당해 보일수도 있는 기록입니다.
삼면이 바다로 막혀 있는 형국을 보면 한반도 조선은 당연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동방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 동쪽에 살았고, 만리지국이라 불렀다."
이를 현재의 만주의 요수를 기점으로 본다면 이치적으로 합당하지 않는 기록이 되고 맙니다.
요수의 동쪽에 살고 있으므로 일부 만주와 한반도를 거점으로 조선이 있었다고 상정했을때 만리지국이라 불렀다면,
이 얼마나 어이없고 황당한 기록입니까? 그 당대 사람들은 수치적 지리관념이 불명확한 사람들 이었단 말입니까?
즉 요수의 동쪽, 다시말해서 조선의 요동지역은 지금의 요동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원래의 요동지역은 송나라의 "우적도"가 말하는 대륙의 중심부 지역 요(遼) 라는 지역이었고,
그곳은 오늘날 산동,하남,하북성을 포괄한 지역 입니다.
그곳을 기점으로 한반도와 지금의 만주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볼적에 만리지국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합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현재 만주의 요동지역이 요동이라 불린것은 일본의 강점에 의한 역사조작의 결과물이지,
원래부터 요동지역이 아닙니다. 중국고금지명 대사전에서 조차 현재의 만주가 옛날의 만주가 아닌것으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