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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봉준 장군
그는 봉건전제에 짓밟히고 있는 민권을 부르짖었고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민족을 구하려 민중을 이끌고 무명의 동학접주(東學接主)로 갑오동학혁명을 영도한 민족의 선각자요 불요불굴의 의지력과 탁월한 영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조선 말엽 민란이 곳곳에서 헤아릴 수 없이 일어났지만 아무리 심한 경우라도 조정에서 안핵사를 보내면 평정되는 것이 상례였으나 고부의 민란은 그렇지 않았다.
전봉준은 정월 봉기후 이용태 안핵사가 역졸을 거느리고 내려와 동학교도들을 역도로 몰아, 서슬이 멀큼했지만 이때 전봉준은 좌절하지 않고 무장의 대접주 손화중을 움직여 동학교의 세력을 동원 마침내 삼월봉기로 전라도를 장악하고 집강소 정치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해 6월 21일 (양 7월 23일) 일본군이 궁성에 침입하여 고종 임금을 연금하는 사태에 이르자 전봉준은 삼례에서 구월봉기를 일으켜 서울로 진격하다가 10월 23일 공주에서 15일 동안 혈전 끝에 패하고 후퇴하여 11월 27일 태인싸움을 최후로 농민군을 해산했다.
갑오혁명에는 삼남지방 각지에서 많은 동학접주들이 봉기하였으나 전봉준처럼 호남의 5천대군을 거느리고 일사불란의 전열로 일본군에 최후까지 혈전을 벌인 영도인물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충청 관찰사 박제순은 9월봉기후 전봉준이 논산으로 진격하여 공주감영이 위급해지자 교주 최시형이 거느리는 북접의 10만 대군을 막는 일보다도 호남의 전봉준을 방어하는 일이 더 화급하다고 천안에 머물고 있는 선봉장 이규태에게 급전을 보냈으니 당시 전봉준의 위력을 짐작할 수 있다.
태인싸움을 최후로 농민군을 해산한 전봉준은 수행 몇 명과 동 29일 입암산성으로 들어 갔다.
때마침 일본군 三尾(모리오) 부대와 이규태의 관군이 천원에서 추격해 온다는 정보가 있어 30일 다시 백양사로 이동했다.
백양사에서 1박하고 다음날 해질 무렵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왕년의 친우 김경천을 찾았다.
그는 공초(심문 조사)에서 서울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정부에서는 동학괴수를 잡아 들이는 사람에게 많은 상금과 고을 수령을 제수한다고 현상 공고를 했다.
김경천은 전봉준을 맞이해 놓고 전주감영 퇴교(지금의 현역장교)로 이웃에 살고 있는 한신현에 밀고 했다.
김영철, 정창욱 등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전봉준을 포위했다. 전봉준은 불의의 위기에 다달아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 다리를 얻어맞고 붙잡히고 말았으니 1894년 12월 2일(양 12월 28일)이었다.
전봉준은 순창을 거쳐 담양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 전주를 경유 12월 18일에 서울에 도착되었는데 동학군들을 경계하여 일본영사관 감방에 수감되었다.
전봉준은 다음해 2월 9일, 동 11일, 동 19일, 3월 7일, 동 10일, 5차에 걸쳐 일본 영사의 심문을 받고 1895년 3월 30일 손화중, 최경선 등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나이 41세였다.
그 후 얼마동안 음성리의 본가로 돌아와 있다가 본거지를 무장으로 옮겨 읍내의 김모의 집에 잠시 포교소를 두었다가 다시 이웃 덕림리 양곡으로 옮겼다.
손화중은 전라도내에서 가장 많은 교도를 거느리는 대접주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상속에서 검단대사 비결록을 끌어냈다는데서 더욱 신비의 인물로 여겼다.
그는 비폭력 무저항의 교단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의 혁명론에 공명하여 마침내 삼월봉기 주역으로 전봉준과 갑오동학혁명을 영도했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고부봉기를 누구와 협의했느냐는 물음에 손화중과 상의했다고 하였다. 3월봉기에 손화중포가 무장 구수내에 집결하여 전봉준 영솔 아래 고부로 와서 백산봉기의 주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전주 해산후 무장, 장성 등지에 머물고 있었던 것 같다.
무장의 손화중 도소와 장성은 가까운 거리에 있다.
전봉준은 공초에서 이해 8월 전라관찰사의 부탁으로 나주에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장성에서 손화중과 만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전봉준이 손화중에게 전주로 동행하자고 권유했으나 그는 신병을 요양한 후 전주에 들르겠노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손화중포의 농민군은 이해 7월 자주성 싸움에 최경선이 거느리는 농민군의 주력을 이루었다는 사실이다. 이때 최경선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이 무장의 손화중 도소에서 집결하여 나주로 향했다는 사실이 촌로들의 증언에서 밝혀진 것이다.
9월봉기에는 일본군이 나주 해안으로 상륙한다는 설이 있어 전봉준의 북상에 참가하지 않고 최경선과 같이 나주에 머물고 있었다.
11월 전봉준의 공주패전 후 나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했으나 태인전투를 최후로 대세가 재기불능에 이르자 11월 27일 광주로 진격했다가 12월 1일(양 12월 27일) 농민군을 해산했다.
그 후 그는 몸을 피하여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高敞郡富安面鞍峴里) 이모씨(李某氏)의 제실(祭室)에 있다가 12월 11일(양 1월 6일, 1895) 제실직(祭室直)인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관군에 잡혀 전주감영(全州監營)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비장한 비화 한 토막이 있다.
죽음을 같이 맹세했던 전봉준, 김개남이 이미 관군에 잡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손화중은 실의한 나머지 이봉우에게 네가 나를 고발하여 후상을 받아라. 그동안 너에게 진 은혜를 갚겠다.
이봉우는 후상을 받고 증산(甑山·평안남도)군수로 제수 되었다.
손화중은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30일 새벽녘 전봉준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나이 35세였다.
그는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내 백성을 위해서 힘을 다 하였는데 사형에 처하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하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손화중은 여러 혈족들이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희생자가 많았다. 손익중(孫益仲), 손여옥(孫如玉)이 12월 25일 정읍에서 관군에 처형당하였고 손순경(孫順京, 족질), 손무경(孫武京, 족질), 류용수(柳容洙, 1895년 1월 6일 흥덕에서 처형)가 또한 희생되었다.
이 밖에 1895년 1월 16일 체포령이 내린 사람 가운데 손덕로(孫德老, 족형), 손춘익(孫春益, 족제), 손치경(孫致京), 손치수(孫致秀)가 있었다.
부인 류씨(柳氏, 1855∼1912)는 관군에 의하여 집을 소각당하고 네 살짜리 셋째아들(응수(應洙), 1890∼1961) 한 살짜리 갓난애기 딸을 데리고 화를 피하여 옥구(沃溝, 전북)에 가서 김씨(金氏)로 변성하고 3년 동안 지내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기포장(起包將) 최서중(崔西仲)과 마부(馬夫)인 고창(高敞) 우복록은 광주(光州)에서 곤장수(棍杖手) 정정칠(丁正七)은 12월 4일 손덕수(孫德秀)와 함께 장성 북하면 용두동(北下面龍頭洞)에서 김낙주(金洛柱), 서상옥(徐相玉)등 민병들에 붙잡혀 일본군에 의하여 장성(長城) 장터에서 효수(梟首, 목을 베어 달아 매는 것)되었다.
제삼십육호(第三十六號)
판결선언서(원문)(判決宣言書(原文))
전라도 정읍 거 농업 평민(全羅道 井邑 居 農業 平民)
피고 손화(화)중 년 삼십오(被告 孫華(化)仲 年 三十五)
우기자(右記者)의 손화중(孫華(化)仲)을 대(對)하야 형사피고사건(刑事被告事件)을 심문(審問)한 즉(則) 피고(被告)난 동학당(東學黨)이라 칭(稱)하고 비도(匪徒)의 신괴(臣魁)로 개국(開國) 오백삼년(五百三年) 삼월(三月) 이후(以後) 해당(該黨)을 모아 전라도 고부군아(全羅道 古阜郡衙)로 드러와 작경(作梗)을 하여 군기(軍器)를 착탈(捉奪)하고 또 그 곳에서 저라감영군(全羅監營軍)을 항적(抗敵)하여 정읍(井邑), 흥덕(興德), 고창(高敞), 무장(茂長), 등지(等地)를 지나 전주(全州)로 드러가 초토사(招討使) 홍재의(洪在義)가 거느린 관병(官兵)을 항적(抗敵)함인데 그 사실(事實)은 피고(被告)와 및 기동모자(其同謀者) 전봉준(全琫準), 최영창(崔永昌, 최경선(崔景善)·필자주(筆者註)등(等)이 자복(自服)한 홍초(洪招)와 압수(押收)한 증거문적(證據文籍)이 분명(分明)한지라 피고(被告)의 소위(所爲)는 대전회통형전중(大典會通刑典中)의 군복기마작변관문자(軍服騎馬作變官門者) 부도시참(不徒時斬)이라 하난 율(律)을 조(조)하야 처죄(處罪)할 거시니라. 우(右)에 이유(理由)로써 피고(被告) 손화(화)중(孫華(化)仲)을 사형(死刑)에 처(處)하노라.
개국(開國) 오백사년(五百四年) 삼월(三月) 이십구일(二十九日) 법무아문(法務衙門) 대신(大臣) 서 광 절(徐光節)
협판(協辦) 이 재 정(李在正)
주사(主事) 김 기 조(金基肇)
오 용 묵(吳容默)
회심(會審)
경성주재 일본상국령사 내전정퇴(추)(京城駐在 日本帝國領事 內田定槌)
여기에다가 최경선(崔景善)이 태인 주산리(舟山里) 출생이며 김덕명(金德明)이 또한 이웃 금구 원평 출신이며 산외면 오공리(五公里) 김개남의 종형인 김삼묵(金三默·명 영하(永夏)) 김문환(金文桓) 부자가 또한 동학의 중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당시 세간에서는 도강김씨에 24접주가 있다고 했을 정도로 태인 도강김씨가 동학에 많이 가담했던 것 같다.
전봉준 손화중과 아울러 갑오동학혁명의 삼걸(三傑)로 일컫는 김개남은 그 가운데서도 적극적인 강경파였다. 그는 남원을 본거지로 우도(右道)의 금산(錦山), 무주(茂朱), 진안(鎭安), 장수(長水), 용담(龍潭)을 비롯하여 좌도를 호령하였고 순천(順天)에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대접주(大接主) 김인배(金仁培)로 하여금 영남의 서남부지방(하동, 산청, 진주)을 관장케 했다.
그는 정부의 회유에 응하지 않았다.
이해 7월 대원군(大院君)의 효유문(曉諭文)을 가지고 찾아온 정석모(鄭碩謨) 일행을 곤장을 치고 두 달 동안이나 연금했던 것이다.
김개남은 전봉준과 시국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여 행동을 서로 달리했다.
전봉준은 공초(供招)에서 "내가 왕사(王事)에 협력하자고 (일본이 침략해 와 있기 때문)권유했으나 끝내 들어주지 않아 상의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9월봉기에도 행동을 달리했다.
김개남은 한달쯤 늦게 10월에 남원에서 5천군을 이끌고 안귀복(安貴福), 이수희(李秀希)를 선봉장으로 전봉준과는 달리 전주, 금산(錦山)을 거쳐 청주(淸州)로 진격했다.
그리고 북상(北上)도중 전주(全州)에서 남원부사(南原府使) 이용헌(李龍憲), 고부군수(古阜郡守) 양필환(梁弼煥)을 체포했는데 굴복하지 않고 반항하자 일거에 이들을 참수(斬首)하였던 것이다.
그는 11월 10일 청주성(淸州城)을 공격했으나 일본군에 패하여 진잠(鎭岑)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장금리(長錦里) 매부인 서영기(徐英基) 집에 잠거해 있다가 임병찬(林炳瓚)의 고발로 12월 1일(양 12월 27일) 강화병방(江華兵房) 황헌주(黃憲周)에 피체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김개남은 태인 너듸(四升·정읍시산외면장금리) 서영기 집에 잠거해 있었는데 이웃 종송리(種松里·정읍시산외면) 임병찬(林炳瓚)이 김종섭(金縱燮)을 시켜 송두용(宋斗鏞·종송리) 집으로 유인했다.
그것은 종송리는 회문산(回文山) 자락으로 너듸마을 보다 험하고 높은 곳에 위치하니 더욱 안전한 곳으로 와 있으라는 것이었다.
임병찬은 김개남을 종송리로 유인해 놓고 김송현(金松鉉), 임병욱(林炳昱), 송도용(宋道鏞)을 시켜 전라도관찰사 이도재(李道宰)에 고발하니 이도재는 황헌주(黃憲周)로 하여금 강화병(江華兵) 80명을 거느리고 종송리에 와서 12월 1일 새벽 김개남을 잡아갔다.
다음해(1895) 정월 정부에서는 논공 행상으로 임병찬에 임실군수(任實郡守)를 제수했으나 임병찬은 이를 사양했다. 정부는 임병찬 대신 황헌주(黃憲周)를 임실군수로 제수했다.
전라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서울로 압송하는데 위험을 느껴 12월 3일(양 12월 29일) 신시(申時·하오사시(下午四時)) 서교장(西敎場)에서 임의로 처형하여 최후를 마치니 나이 42세였다.
그 머리는 서울로 압송되어 12월 25일 서소문(西小門) 밖에 3일간 달아 매었다가 다시 전주로 내려보내 달아 매었다.
일본공사 이노우에(정상형(井上馨))는 조선정부에 서한을 보내 비도(匪徒·동학농민군)의 처형은 신중을 기해야 하므로 체포된 비도들은 일본군에 넘겨 처리토록 하라고 요구했었다.
그런데 전라관찰사가 김개남을 단독으로 처형하자 일본공사는 조선정부에 전라관찰사를 불러들여 그 까닭을 엄중히 조사하여 공사(公使·일본)에 알려주고 그에 대한 처분문제는 공동으로 상의하자고 요구해 왔다.
난처하게 된 조선정부에서는 경위를 해명하고 그에 대한 처분을 할 터이니 불러들여 조사하는 것만은 재고하여 달라고 요청하여 간신히 이를 모면했다.
그리고 전라관찰사는 월봉이등지전(越俸二等之典)에 처했다.
1994년 5월 뜻 있는 이들의 성금으로 전주 덕진공원(德津公園)에 추모비를 세웠다.
1893년(고종 31) 3월 20일 전라감사로 제수된 김문현(金文鉉)이 조정에 들어갔을 때 전라도의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이때 고종임금은
"호남에서 금구(金溝)에 동학이 가장 많이 있다고 하는데 전주(全州)로부터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먼저 그 소굴을 소탕하여 없애라"
문현(文鉉)이 아뢰기를
"30리 가량 떨어져 금구 원평(金溝院坪)에는 과연 동학당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삼가 성교(聖敎·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금구 원평의 동학은 물론 김덕명포(金德明包)의 동학을 지칭하는 것이니 그 세력이 얼마나 떨치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덕명은 원평에 도소(都所)를 크게 설치해 놓고 공전(公錢·세금) 공곡(公穀·국고미)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공주(公州)패전 후 전봉준과 원평으로 후퇴하여 재거를 계획했으나 11월 25일 원평싸움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리고 27일 태인(泰仁)싸움을 최후로 해산하고 향리로 돌아와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金山面長興里安靜寺洞)에서 잠거하고 있다가 1895년 1월 1일 (양 1월 25일) 태인 수성군(泰仁 守城軍)에 잡혔다.
1895년 3월 29일 법무아문(法務衙門·法務部) 권설재판소(權說裁判所)에서 전봉준·손화중·최경선·성두환(成斗煥·忠淸道)고 함께 사형을 선도받고 교수형으로 최후를 마치니 나이 51세였다.
제 삼십 호(第 三十 號)
판결선언서(判決宣言書)
전라도(全羅道) 금구면(金溝面) 동거(洞居) 농업(農業) 평민(平民) 피고(被告) 김덕명(金德明) 년(年) 오십일(五十一)
우기자(右記者)난 김덕명(金德明)이가 금구지방(金溝地方)에서 취군성당(聚群成黨)하야 관고(官庫)의 군물(軍物)을 착탈(捉奪)라고 민간(民間)의 전곡(錢穀)을 겁략(劫掠)하야 혹(或) 관정(官庭)과 혹 촌려(村閭)에 작경자효(作梗滋擾)하야 파분우의(把分于義)가 망유기극(罔有紀極)한다 하기로 본아문재판소(本衙門裁判所)에 나교(拿交)하야 심문(審問)을 령행(零行)한 즉(則) 피고(被告)가 해지방(該地方)에서 우항정절(右項情節)을 사행(肆行)한 증빙(證憑)이 적확(的確)한지라 기소위(其所爲)는 대전회통추어조군복기마(大典會通推條御軍服騎馬)하고 작변관문자(作變官門者)를 부대시참(不待時斬)이란 명문(明文)을 조(照)하여 처죄(處罪)할 거시니라.
우(右)에 이유(理由)로써 이피고(以被告)에 김덕명(金德明)을 사형(死刑)에 처(處)하노라.
개국(開國) 오백사년(五百四年) 삼월 일(三月 日) 법무아문권설재판소(法務衙門權說裁判所)
법무아문(法務衙門) 대신(大臣) 서 광 절(徐光節)
협판(協辦) 이 재 정(李在正)
참의(參議) 장 박(張 博)
주사(主事) 김 기 조(金基肇)
오 용 묵(吳容默)
회심(會審)
경성주재 일본상국령사 내전정퇴(추)(京城駐在 日本帝國領事 內田定槌)
3월 백산(白山)봉기에서 영솔장(領率將)으로서 동학농민군을 통솔했다.
5월 전주해산 후 전라도 각 군·현에는 동학농민군의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었는데 남원부(南原府)와 나주목(羅州牧)이 이에 응하지 않아 전주 대도소(大都所)에서는 이를 정벌(征伐)하기 위하여 남원에는 김개남을 나주에는 최경선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하여 최경선은 동학농민군 3천을 거느리고 내려가 7월 5일 나주성(羅州城)을 공격했으나 목사 민종열(牧使·閔種烈)의 완강한 저항으로 나주성 점령에 실패했다.
9월봉기 후 일본군이 나주(羅州·영광(靈光)) 해안으로 침입한다는 설(說)이 있어 서울 진격에도 참가하지 않고 손화중과 나주에 머물고 있었다.
공주(公州)패전 후 전라도 서남부지방의 동학농민군을 나주로 집결시켜 나주성을 포위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내려오자 11월 27일 광주(光州)로 입성했으나 사태가 재기불능에 이르자 12월 1일 동학농민군을 해산했다.
최경선은 독자로 동학농민군 잔군을 이끌고 남평(南平)을 거쳐 동복(東福)으로 내려가 12월 1일 벽성리(碧城里 現 화순군 南面)에서 관군에 피체되었다.
최경선은 담양(潭陽)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서울에서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1895년 3월 30일 최후를 마치니 나이 37세였다.
판결선언서(원문)(判決宣言書(原文))
전라도 태인 주산동 거 농업 평민(全羅道 泰仁 舟山洞 居 農業 平民)
피고 최영창 자 경선 년 삼십칠(被告 崔永昌 字 卿宣 年 三十七)
우기자(右記者)는 최영창(崔永昌)을 대(對)하야 형사피고사건(刑事被告事件)을 심문(審問)하여 본 즉 피고(被告)는 동학당(東學黨)이라 칭(稱)하난 비도(匪徒) 거괴(巨魁)로 개국(開國) 오백삼년(五百三年) 삼월이후(三月以後) 전라도(全羅道) 태인(泰仁) 산외면(産外面) 동곡거(東谷居) 농민(農民) 전봉준(全琫準)이 모주(謀主)가 되어 도당(徒黨)을 모화 동도고부군아(同道古阜郡衙)고 드러가서 작경(作梗)을 하고 또 그곳에서 전라감영관병(全羅監營官兵)을 항적(抗敵)하고 정읍(井邑), 흥덕(興德), 고창(高敞), 무장(茂長), 영광(靈光), 함평(咸平), 장성(長城)을 지나 동년사월이십육·칠일(同年四月二十六·七日)게 전주(全州)를 들어가 초토사(招討使) 홍재희(洪在羲)가 거나린 관군(官軍)을 항적(抗敵)할 때에 피고(被告)는 전봉준(全琫準)의 고굉(股肱)이 되어 종시기사(終始其事)에 참여(參與)할뿐더러 동년구월이후(同年九月以後) 전봉준이 일병(日兵)을 격양(擊壤)하량으로 도당(徒黨)을 숙집(嘯集)하난 중(中) 동년십이월(同年十二月) 동복(同福) 벽성(碧城)의서 수성군(守城軍)한대 잡힌거신데 그 사실(事實)은 피고(被告)와 급기동모자(及其同謀者) 전봉준, 손화중이 자복(自服)한 공초(供招)와 압수(押收)한 증거문적(證據文籍)이 분명(分明)한지라 차(此)를 법률(法律)에 조(照)하면 피고(被告)의 소위(所爲)는 대전회통형전중(大典會通刑典中)의 군복기마작변관문자불대시참(軍服騎馬作變官文者不待時斬)이란 율(律)로 처리(處理)할 거시니라.
우(右)에 이유(理由)로써 피고(被告) 최영창(崔永昌)을 사형(死刑)에 처(處)하노라.
개국(開國) 오백사년(五百四年) 삼월이십구일(三月二十九日)
법무아문권설재판소(法務衙門權說裁判所) 선고(宣告)
법무아문(法務衙門) 대신(大臣) 서 광 절(徐光節)
협판(協辦) 이 재 정(李在正)
참의(參議) 장 박(張 博)
주사(主事) 김 기 조(金基肇)
오 용 묵(吳容默)
회심(會審)
경성주재 일본상국령사 내전정퇴(추)(京城駐在 日本帝國領事 內田定槌_
첫댓글 동 학 격 문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른 것은 그 본 뜻이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가운데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의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내쫓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에게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방백과 수령의 밑에 굴욕을 받는 소리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을 것이나.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기회를 잃어서 오날날 이렇게 후회한다고 하더군요
그당시 쪽바리들을 끌어들여 동학혁명의 불을 꺼뜨린 자들의 후손이 지금 기득권의 주류지요.
일단 추천부터 드갑니다,,
드갑니다
유모스러운 단어에 한참 웃었습니다
전라도에 일어난 동학혁명은 외세개입이없었다면
지금쯤 대단한 나라가 되었을텐데
안타깝지요...
왜넘이나 양키넘이나 떼넘이나 우리미족의
번영과 자주국가를 건설에 넘어야할 장애물이지요
좋은 나라를 이루려다 왜넘들때문에 뜻을 못이루고
순국하신 선열들에 조의를 표합니다!
이이화 선생의 기록에 빠진 전남최대두령 배상옥 장군이 있습니다. 무안사람으로 무안에 곳곳에 유적지가 남아있습니다. 청천리에 집강소가 현재 보존되어있고 해제에 가면 훈련장도 있습니다. 해남에서 체포되어 돌아가셨는데 전봉준장군과 함께 현상금이 가장 많았다합니다.
고맙습니다
배상옥 장군님의 활약상도 올려보겠습니다
좋은글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무안군 동학농민혁명 희생자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