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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현스님 걸망 속으로 원문보기 글쓴이: injidang
비망지록(備忘之錄)- 초짜의 가피(加被)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 다라야야 ~ ~ ~ 새바라야 사바하 신묘장구대다라니 나모라 다나 다라야야 ~ ~ ~,
지난 2008년 1월 18일 저는 여느 때처럼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하며 퇴근 중이었습니다.
낮에 딸내미가 진주교대에 합격하여 평소보다 일찍 회사를 나섰으나 3번 경충국도가 금요일 퇴근시간과 겹쳐 어찌어찌 갈마터널을 들어서는데 얼핏 계수기를 보니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이 막 7만송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하필 휴대전화가 울려 발신자를 보니 부동산중개를 하는 김사장인지라 7만송을 끝내고 받을 요량으로 독송을 계속하여 마치 작위(作爲)한 것처럼 계수기가 0000을 만들며 터널을 벗어났습니다.
다행히 전화가 끊기지 않아 통화를 하니 그간 속을 졸이던 아파트 매도가 성사되어 “매수자가 계약을 하자고 하니 빨리 부동산으로 오라”는 전화였습니다. 김사장에게 재차 확인한 뒤 집에 있는 가족에게 알리고 “부동산사무실로 같이 나오라”하고는 길을 서두는 차에서 그동안 겪은 일들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물론 다라니는 7만송을 너머 계속하면서 말입니다.
저는 1955년 을미생의 경주김가 장손으로 할머니와 어머니가 생존하시고 아내와 남매를 두었으며 음반(카세트테이프)제작을 주업종, 판촉물 판매를 부업종으로 하는 소기업을 경기 광주시에서 꾸리고 있습니다.
광현스님(경기 광주시 도척읍에 소재한 조계종 해인사분원 ‘우리절’의 주지스님, 다음카페 ‘광현스님 걸망 속으로’ 주인)법문에 “중생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엉덩이에 불총을 맞아야 부처와 예수를 찾는다(飢寒發道心)” 하셨듯이 저 또한 별업(別業)으로 불경 . 법문과 교회설교, 학습테이프를 제작하고 있었으나 불교에 초짜인 제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되자 지중(至重)한 인연으로 스님을 만나 다라니 주력(呪力)을 하게 되었으며 이제 부처님의 가피(加被)와 저간의 내력을 반추와 비망(備忘)의 심정으로 간추려 보겠습니다.
먼저 약 10년여에 걸친 우환 중 큰 것 두 가지만 들면, 죽마고우의 배신과 경제적 피해 그리고 아버지의 암투병과 사망이 가장 컸습니다.
제가 중전기(重電機) 제조업체에서 무역업무를 하다 죽마고우의 간청으로 그가 대표로 있는 음반회사로 옮긴 것은 1992년 11월이었습니다.
채 1년이 안 된 1993년 9월말 법인은 부도를 내고 친구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그때부터 자금과 관련된 이를테면, 금융기관 대출 및 각종 계약과 입보(立保), 가계당좌 거래, 신용카드 사용 등이 모두 제 명의로 집행되기를 10년여에 걸쳤습니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과 제조 및 물류계약으로 월 매출액이 물경 2억여원이 될 때만해도 형편이 무난하였으나 이후 국가의 IMF사태와 대기업의 문화사업 포기, 지적재산권 강화로 인한 사계(斯界)의 타격, 인터넷상의 불법 다운로드와 MP3의 확산으로 음반시장이 사양화(斜陽化)하자 그 때부터 문제가 야기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 2003년 11월초 그가 신용카드를 결제해주지 않아 한 달여 만에 모든 카드의 연체액이 8천여만원으로 불어나자 연체금액과 카드사의 성화는 차치하고 아파트와 공장담보대출금 상환과 가계수표 부도 등 모든 금융거래에 미칠 연쇄적 파장이 우려되어 간(肝)이 다 오그라 붙는 듯 했으나 정작 그는 무대책으로 외면하여 황망히 아파트 담보대출을 추가로 받아 급한 불을 끄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더는 그와 같이 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제 명의와 관련된 것을 개산(槪算)하니 무려 8억에 달해 있어 그에게 그것을 “조속히 처리해 달라” 요구했으나 예상대로 이미 그는 수습능력이나 청산의 의지가 전혀 없었으며, 심지어 그 와중에 제 아파트를 담보로 5천만원 사채를 쓰자며 구비서류 목록을 내미는 데에는 죽마고우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차일피일 시간만 흐르며 해결의 기미는 보이잖고 쌓이는 스트레스로 침식(寢食)도 제대로 못하며 가슴만 태우던 차, 2004년 1월 그의 제의로 난마같이 얽힌 계산을 한 끝에 7억원에 공장(대지 1,116㎡ 연면적 1,038㎡의 철골조스라브지붕 3층공장)을 넘기고, 일부는 스포츠기기(러닝 . 다이어트 머신)제작의 신설법인에 투자지분을 갖고 나머지는 추후 변제하는데 합의하여 새 법인이 제 건물에 임차계약하고 저는 음반사와 새 법인을 두루 관리하는 어정쩡한 관계가 설정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건물에 있지만 상호 데면데면할 뿐더러 제 입지가 애매하여 어차피 1억여원의 금액을 받기는 불가능하니 자구책으로 음반사를 대가 산정 후 인수하여 2004년 12월부터 제 개인사업자로 운영케 되었습니다.
그 뒤 새 법인에는 그의 처(妻)가 경리로 들어오더니 차츰 임차료가 밀리면서 공장대출 이자가 연체되고 그의 승용차(제가 보증인으로 할부계약한) 할부금이 체납되어 할부금융에서 저에게 압류신청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등 새 법인의 매출이 증가하여 자금융통이 괜찮은데도 제게 치를 금액은 점점 늘어나서 할 수 없이 타 생명보험사로 바꿔 아파트대출을 증액받았으나 이자 및 회사지출을 감내하기는 역부족이어서 부득이 내용증명을 보내고 명도소송을 준비하는 중 2005년 10월초 연휴에 제품 . 재공품, 원부재료, 집기비품, 심지어 제 명의로 매입하여 외상대금이 2천여만원이나 미제(未濟)된 CD(콤팩 디스크)재고 등을 빼내 도주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새 법인의 다른 투자자들과 법률자문을 받아 ‘업무상 횡령 및 배임 등의 혐의’로 형사고소하였으나 상당한 입증자료에도 불구하고 법인의 실질적 대표로서 집행된 행위이며, 그가 “아니다”, “모른다”, “자료가 없다”로 일관하여 ‘증거 불충분 무혐의’로 종결처리되었으며, 정황상 민사재판을 진행해야하나 1993년 9월말로 당좌거래 정지되어 부부가 신불자(信不者)가 된 후 부부명의 통장거래 및 재산형성이 전혀 없으니 방법이 없어 포기하였습니다.
물론 전. 현 법인의 원부재 외상대, 국세 및 지방세, 각종 공과금, 종업원 급여 등의 체불로 내용증명과 벌금 . 과태료 통지가 날아 들고 노동부 고발 사태 등이 벌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 후 저는 약 8억여원의 부채에 대한 월 이자가 8백여만원(공장은 상호저축의 연리 10.0%, 아파트는 생명보험의 연리 7.12%, 가계수표는 월리 2.5%의 융통할인, 신용카드 현금서비스와 카드론 이자 등)에 이르니 도저히 회사매출로는 턱도 없어 진즉 부동산에 매물신청한 공장매도에 힘을 쏟게 되었습니다.하지만 당시 불황으로 빈 공장이 넘치고 경매물건도 쏟아져 전혀 매매가 이뤄지지 않아 7억에서 5억까지 낮췄으나 당최 작자가 없는데다 우연히 부동산중개를 의뢰한 김사장(서울 가락동에서 중개사무소를 하는 30여년 지기로 아파트를 팔아 준)이 “공장의 대지매입에서 준공 . 보수까지 투입된 제비용의 증빙도 잘 챙기라”는 얘기에 그만 공장매매를 중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유인 즉 그 친구가 2005년 10월초 용달을 대어 짐을 빼갈 때 기사와 직원들이 제 소유의 물품까지 일부 쓸어가며 건축관련 서류도 같이 가져갔다가 정리하면서 몽땅 없앴다는 것을 확인하고 부랴부랴 이천세무서에 상담결과 증빙이 없으면 양도세율이 38%나 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공장매매를 중단한 후 가족에게 특히 아내에게 “분당 집을 팔고 곤지암으로 이사 가야 한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지만 2006년 12월초 마침내 가족에게 그간의 사정을 알리고 분당구 정자동의 아파트를 내놓게 되었는데, 알다시피 참여정부가 아파트 집값 잡는데 정권의 명운을 걸어 대출억제와 세금정책 강화로 부동산 시장이 2006년 10월을 정점으로 완전히 얼어붙어 해가 지나도 녹을 기색이 보이지 않아 월 8백여만원의 금융이자를 감당하느라 그새 부채는 9억을 훌쩍 넘겼고 그렇게 만 3년여를 버티자니 실로 피가 마를 정도였는데 그 집이 드디어 매매계약을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각설하고, 글머리를 돌려 이제부터 제 선고(先考)의 발병과 사망, 내우(內憂)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외국속담에 ‘비가 오면 소낙비가 온다’는 말처럼 회사와 가정에서 시차와 순서만 달리 하고 같은 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제 아버지는 음력 1938년 4월 8일생으로 만 30여년을 충북 단양과 경기 성남에서 공무원을 하다 1997.6월 정년퇴임을 하셨고 그 후 소일거리를 잡고 수원에서 지내신지 얼마 안 돼 소변에 혈뇨(血尿)가 비쳐 2000.8월 성남 은행동의 성남중앙병원(구 양친회병원, 그때 부모님은 은행동 현대아파트에 사셨음)에서 요로결석임을 확인하여 원만히 치료받고 다시 수원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듬 해 수술이 잘 되었다는데 계속 혈뇨가 나와 재진을 하니 “아마 방광암인 것 같으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하여 2001.5월 분당 차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았는데 오진을 기원했던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이미 아버지는 방광암 4기에 그것도 가장 고약한 부위와 징후라는 결과를 들어야 했습니다.
당신이 서울 공릉동 원자력병원에서 치료받으시길 원하여 2001.6월 수술까지 받았으나 외려 수술로 인해 암이 사방으로 전이되어 뼈가 불거지는 등 항암치료로 입 . 통원의 길고 힘든 투병이 시작되어 나중에는 혈구치(血球値)가 부족하여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혈액과 혈소판을 보충하느라 아침에 입실수속, 저녁에 퇴원하기를 한 주(週)에 4번, 5번까지 다닌 적도 많습니다.
게다가 제 할아버지를 당시 분당 수내동의 성남시립공원묘원(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뒤, 지금은 전부 분묘이장되었음)에 모셨었는데 주변에 주택과 학교(분당 수내고등학교)가 건립되면서 이장공고가 나서 이참에 아버지는 충북 단양의 할머니도 이장합장할 계획으로 경기 인근에 약 300~500평 규모의 가족묘지를 조성하려 짬짬이 물색하던 중 당신이 그런 나쁜 병에 걸려 거동이 불편하게 되었으니 자연 묘지물색과 이장문제는 장손인 제차지가 되었고 아버지는 당신 병세가 심상찮자 종종 독촉까지 보태셨습니다.
하여 2002년 2월부터 회사는 회사대로 삐걱거리는데 아버지 원자력병원 모시고 다니랴, 묏자리 물색하랴, 애들 진학문제 신경 쓰랴 지금 생각하면 어찌 견뎠나 모르겠습니다.
부모형제가 성남 . 분당에 살고 증조 묘지가 충북 단양에, 제 회사가 광주 곤지암에 있음을 감안하여 성남, 광주, 이천, 여주, 양평, 제천, 원주, 음성 일원을 부동산과 생활정보지, 경매지 등을 통해 마땅한 곳(약 300~500평에 2~4천만원 정도의 전, 잡종지, 임야)이 있으면 한 주(週)에 예닐곱 군데를 지목하여 지도를 들고 현지를 혼자 일차 답사한 뒤 서너 곳으로 압축하여 주일에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와 수발하는 어머니를 태우고 다니기를 6개월여(제 승용차가 1998.7월식인데 2008.4월 현재 운행거리가 40만㎞임)만에 여주 강천면에 밭 1,000㎡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농지취득증명과 이장에 따른 석물 맞추는 일 또한 제 몫이었지만 2002년 10월 한 날에 조부모님을 무사히 이장합장을 마쳤고 이듬해 단양의 증조 석물과 사초(莎草)도 끝냈습니다.
이장을 끝내자 아버지는 긴장이 풀리셨는지 급작해 악화되어 암이 뇌로 전이되어 주치의로부터 시한부 판정을 받고 용인 풍덕천(거처를 옮겨 보면 좋아질까 해서 부모님을 이사시켰음) 집으로 모신 이튿날 그동안 병원과 이장에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으셨던 숙부(아버지는 형제분만 계심)가 전화하여 “큰 조카 좀 만나자”고 하시는 겁니다.
저는 혹 아버지 병세에 관한 무슨 얘긴가 했는데 난데없이 “네 할아버지가 내게 주기로 했던 땅(충북 단양의 증조모와 종조부를 모신 밭 1,613㎡, 할아버지가 숙부에게 따로 대토를 해줬다는)과 과거 성남 태평동의 집(숙부가 군복무할 때 숙모와 사촌들을 세 살게 할 수 없어 할머니께서 숙모에게 ‘숙부가 제대해도 이 집에서 살아라’ 하셨는데 그건 이 집을 나 준다는 말과 같으니)을 내놔라. 단양 밭은 네 아버지가 가로챘다가 조카 앞으로 이전되었으니 나한테 명의이전 해주던가 아니면 시세로 쳐주고 태평동의 20평 주택도 똑같은 집을 사주던가 집값을 계산해서 달라. 할머니와 어머닌 그런 사실을 다 아실테니 큰 조카가 개입하여 내놓으라’”시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뿐인 친형이 암으로 몇 달 후면 죽게 되어 지금은 정신없이 하루 종일 헛소리를 하는 그 시점에 대체 말이나 되며 그 말대로 시끄러운 게 싫어 따른다 치면 내 아버지와 할머니는 동생과 아들 재산을 빼돌린 파렴치가 되고 어머니는 방조자가 될 터여서 “그건 말도 안 되고 절대로 해줄 수 없습니다” 하였더니 끝내 숙부와 숙모는 의절을 하고 제사참여는 고사하고 사촌들(2녀1남)까지 따라서 출입을 금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모르시고 아버지는 허성(虛聲)을 하고 곡기를 끊더니 끝내 2003년 4월 눈을 감으셨는데 숙부는 아버지 빈소 한 편에서도 시골 종조모와 친지들에게 “내 땅을 형이 가로챈 것이 맞지 않느냐”고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외 아버지 49재가 발단으로 동생들(저희는 3남 2녀임)이 저와 아내에게, 판교청약 건으로 동생이 제게 한 일 등 분란이 있었으나 맏이의 입장으로 보면 모두 제 흉일뿐 아니라 어느 집안이나 있을 수 있는 일로 치부되어 줄이며, 제 회사에서도 그가 떠난 후 건물 옥상의 물탱크가 터지고 멀쩡하던 자동포장기가 안 되고, 정화조와 지하수 모터가 고장나고, 마스터룸(원본 마스터와 녹음기계가 있는)은 화재가 나더니 얼마 후엔 벽면 물파이프가 터지고, 적벽돌 대문기둥을 한 밤중 지나던 차가 두 동강을 내고, 저는 회사 지근(至近)에서 아찔한 교통사고가 나고, 공장 뒤편에 산사태가 나고, 일제 디지털 마스터(주요 녹음기계)가 갑자기 작동이 안 돼 메이커에서도 수리가 불가능하다 했는데 며칠 만에 자연 복구되고, 이유도 없이 장기 거래처가 거래해약을 하는 등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연(然)이나, 우환은 이쯤하고 다음에는 제가 위와 같은 처경을 벗어나려고 제 나름 행한 노력(努力) 아니 안간힘을 적어 볼까 합니다.
우선 부처님과 조상님께 매달린 일을 적기 전에 한 마디 하면, 저는 하도 힘이 들고 우환이 오래 뻗쳤지만 언제부터 갖게 됐는지는 분명찮으나 ‘아무리 재미있는 드라마도 종영을 하고 긴 터널도 반드시 끝이 있듯이 나중에 얼마나 큰 기쁨을 주시려고 이렇게 시련을 주시는가? 정녕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일진대 지금까지 겪은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내 지지 않겠다. 희망이 근처에 와 있는 것 같은데 아마 깜짝 놀래주 려고 숨어 있을 거다. 아무튼 기쁨을 만날 때까지 내 아무 것도 않는 것보다는 돈이 안 들면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 볼 거다’ 하면서 힘든 시간을 이겼습니다.
그러니까 2007년 6월초 제가 자금경색 때 도움을 주고 불경과 법문음반을 기획제작하여 발주(發注)주는 유사장(불교방송국 제작PD를 하다 기획제작사를 설립한)이 그간의 사정을 잘 알기 때문에 제게 “사무실에 부처님(금 . 옥불상을 모셔 줌)을 모시고 신묘장구대다라니나 관음정근을 독송해 보라”고 권하여 기초교리 서적을 몇 권 사서 읽으며 6.6일부터 ‘신묘장구대다라니’를 독송하는데, 기왕에 할 거면 한 번 제대로 해보려고 6.8일 근처 ‘우리절’의 관음전을 찾았고 이내 지중한 인연으로 광현(光賢)스님을 친견케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대뜸 “제가 이러저러한 일로 현재 힘이 부칩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가피를 받고 좋아질 수 있는지 부디 좋은 방법과 말씀 좀 주십시오”하였더니 스님께서 많은 격려와 함께 “관음정근도 좋지만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일념으로 독송하시오. 오롯이 기도만 하면 절로 좋아질 것입니다”하시며 기도요령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그 날부터 스님께 교육받은대로 신묘장구대다니를 독송하여 2007.7.26일 1만송(300송을 가외로 더 했음), 9.30일 3만송(200송을 가외로), 11.29일 5만송(1,500송을 가외로), 2008.1.18일 7만송, 3.20일 1십만송(1,038송을 가외로), 4.24일 현재 11만6천송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7만송 이후 부처님의 가피(加被)로 벅찬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2007.8.20~9.9일까지 3 . 7(21)일간은 매일 오후 7시에 108송(쉬는 날도 분당에서 일부러 나와 연일)을 한 적이 있고, 최고로 많이 한 날은 2008.3.3일 1,140송을 하였으며, 화장실에서도 계수기 문고리에 걸고 심지어 목욕할 때도 계수기를 손에 쥐고(스님법문에 ‘염불은 믿음, 발원, 수행을 갖고 하되 용변이나 목욕 같은 민망한 경우에는 묵송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도, 출퇴근과 납품 운행할 때도, 그야말로 눈 뜨고 잠들기 전까지 틈 나는대로 독송하였습니다.
덧붙여 스님 말씀대로 저는 독송을 하면서 의심하지 않았고 거래하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곧 다라니 독송을 일념으로 계속해야지 하는 마음뿐 몇 번까지 해서 기색(起色)이 없으면 그만 둬야지 하는 생각은 갖지 않았습니다.
이 마음은 지금까지 지켜왔고 앞으로도 그리 할 것입니다.
다음은 시차가 앞서지만 2006.7.10~10.17일까지 백일기도를 드렸습니다. 제 사업장에서 매일 저녁 9시에 조상님과 터주(토지 및 건물신)께 기도하기를 백일간(공휴일은 물론 중간에 추석날도 분당 정자동에서 곤지암 회사에 나와) 하였습니다.
증조 3위(位), 조부모 2위(位), 아버지 그리고 터주(토지 및 건물신)께 신주 써 붙이고 청수 올리고 기도 후 재배(조상님은) 혹은 삼배(터주는)를 각각 올렸으며 30일, 60일, 90일, 100일째 날에는 과포(果脯)와 탁주를 장만하여 조상님 합동과 터주님께 각각 기도 후 108배를 올렸습니다.
2007.4.24일에는 조상 천도재(遷度齋)를 올렸습니다.
종로 견지동 조계사 대웅전에서 능허(能虛)스님 집전 아래 선망조상님과 장인 . 장모의 천도재를 어머니, 아내와 함께 올렸습니다.
2007.8.7일엔 여주 조부모와 선고(先考) 산소를 찾아 광명진언을 독송하였습니다. 금모래(단양 사인암에서 가져 온)와 108염주를 양 손에 들고 그 옛날 원효대사의 유훈대로 광명진언을 각각 108송을 한 뒤 봉분에 모래를 뿌려 드렸습니다.
2007.12.3일부터 12.12일에 걸쳐 ‘자비도량참법’을 일정독(一精讀)하였습니다. 사무실에서 예불 후 소탁(小卓) 놓고 무릎 꿇고서 하루에 1~2편씩 표지에서 도움말까지 한 차례 정독하였습니다.
2007.12.15일, 12.22일, 12.29일 각각 1천배씩 도합 3천배를 하였습니다.
연말을 맞아 간절한 마음으로 주말마다 1천배씩 사무실 불전에서 고 후 배례(拜禮)하였습니다. 청견스님의 ‘절을 기차게 잘하는 법’ 동영상을 몇 번 보다가 아예 서울 군자동 법당에서 절 교육을 받은 바 있으며, 4대 관음성지 예불과 108배는 제법 많이 하였습니다
기왕에 무속(巫俗)행위와 수맥(水脈)에 대한 것도 모두 적겠습니다.
그동안 조상을 위하는 정성이 소원(疎遠)하고 여주의 조부모 산소이장이 탈났다 하여 2006.1.25일 원주 신림 굿당에서 법사(法師)가 다섯이나 동원하여 조상 해원(解寃)의 종일굿을, 2.9일은 그 법사 중 두 사람이 여주 조부모 산소에서 산소탈을 푸는 행위를 하였고,
조상 산소에 물이 찼다 해서 경북 달성군청(수맥전문가가 공무원 신분이어서)까지 찾아가 상담 후 2006.4.29일 단양과 여주 산소에 수맥차단 물건을 묻었고, 천주교 명동성당을 찾아가 떼를 써서 현존 수맥의 대가인 팔순(八旬)의 임신부(林神父)를 모시고 2006.7.5일 여주 산소 수맥감정을 받았었고, 충북 음성의 수맥감정과 이장(移葬)전문인 천주교 신자 남모(南某)씨를 2번이나 방문하여 수맥진단을 받고 “조상님 산소를 조속히 이장해 드려야 우환이 해소된다”는 답변을 듣는 등의 몸부림을 친 바 있었습니다.
또한 앞에서 잠깐 언급하였지만 어느 시점부터 ‘내 절대 절망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오기도 발동하였고 ‘어떻든 끝까지 견뎌 꼭 좋은 날을 보고 만다‘는 마음속 내기도 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다행입니다.
다라니 독송을 하기 전 일상에서 실천한 몇 가지 실례를 들면, 위에 적은 기도를 할 때 중요한 날은 매번 샤워 후 내의를 갈아입고 임했으며, 기도 발원은 항상 가족은 할머니 . 어머니와 형제를 먼저 하고 처자를 뒤에 회사는 직원과 세입자 본인과 그들 가족까지 기도하였고, 텔레비전을 볼 때도 우는 장면이나 잘못 되는 장면은 보지 않았고 코미디 프로나 웃고 잘 사는 스토리로 돌렸으며, 차량 내비게이션과 휴대전화에 집은 ‘화목가(和睦家) 우리집’으로 회사는 ‘발전사(發展社) OOO’라고 입력하고 다녔으며, MBC ‘라디오시대’에서 매주 특정요일에 불치병이나 형편이 어려운 분의 아픈 사연을 소개하는데 제가 들은 사연은 한 번도 안 빼고 송금(부끄럽습니다. 이나마라도 하면 아버지 병이 차도가 나고 좋은 묏자리를 얻지 않을까 하는 동기로 처음은 4만원에서 나중엔 2만원밖에)하기를 아버지 발병하고 나서 지금까지 해 왔습니다.
아들에게 부탁하여 희망과 용기에 관한 노래를 뽑아 달래서 CD로 구워 ‘발분가(發奮歌)’라고 타이틀을 붙이고 수시로 듣고 다녔습니다.
참고로 곡목은 1.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안치환 2. 해뜰 날/ 송대관 3. 매직 카펫 라이드/ 자우림 4. 일탈/ 자우림 5. 쿵따리 샤바라/ 클론 6. 일어나/ 김광석 7.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강산에 8. 선구자/ 가곡 9. 넌 할 수 있어/ 강산에 10. 하하하쏭/ 자우림 11. 희망의 나라로/ 가곡 12. 나는 문제없어/ 황규영 13. 마지막 승부/ 김민교 14. 페스티벌/ 엄정화 15. 위 아 더 챔피언/ 퀸 입니다.
그리고 다라니 독송을 하고부터는 위에 추가하여 도로 상의 축생(畜生)의 주검을 보면 교통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 차를 세우고 그 시체(개나 고양이의)를 더러는 묻어 주고 아니면 노변으로 치우며 위로하는 기도를 해 줬고, 무례하게 끼어드는 차량도 넉넉히 끼워주고 제 차는 남 뒤로 들고 다른 이는 내 앞으로 넣어 주는 여유도 갖게 되었으며, 운행 중 다라니 독송에 발음이 꼬이면 CD(#1. 신묘장구대다라니, 관음정근, 광명진언 #2. 육자대명주, 금강경 #3. 한문 성독- 논어 . 주역 . 고문진보의 일부, 격몽요결 . 소학의 서문, 소학제사, 사물잠 #4. 위에 적은 발분가)를 듣거나 논어 위정편(爲政篇) 아홉구절 . 격몽요결(擊蒙要訣) 서문을 성독(聲讀)하며 아예 잡념이 못 들도록 봉쇄하였으며, 휴대전화 바탕화면 문구도 ‘나모라다나...사바하’로 입력해 놓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2008.1.18일 7만송을 기점으로 부처님으로부터 받고 있는 무한한 가피(加被)에 대해 적어 볼까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피를 적기 전에 분명히 천명할 것은, 다라니 주력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고 잘못을 참회(매사가 내 잘못임을 뉘우치며)하고 용서하는 마음(이런 가피는 모두 죽마고우 때문에 생겼으니)이 생기고 매사에 감사와 환희심이 인 것만으로도 한량없는 가피를 받은 것인데 저도 속물이라 금전과 자식문제가 풀린 일로 가피를 들게 됨을 밝힙니다.
서두에 적은대로 2008.1.18일 다라니 7만송에 분당 아파트가 팔리는 바람에 약 4억원의 부채가 줄고 따라서 금융이자도 5백만원이나 감소됐습니다.
1.17일 낮 부동산에서 집을 보자 했을 때 아내가 “지금 외출 중인데 저녁 늦게 들어갈 것 같다. 그리고 집이 엉망이라 오늘은 좀 곤란하다”고 했다는데 기어이 저녁에 부인이 와서 보고 다음 날은 남편도 한 번 보겠다면서 다녀가더니 “전망이 좋다(정자역 건너 탄천을 앞에 둠)”며 두 말 않고 계약하였는데 그게 같은 단지 내(저는 302동이고 매수자는 310동에 살면서)에서 자기들 집은 팔리지 않은데다 가격도 국민은행 시세에 한 푼 안 깎고 산 것입니다.
또한 매수자가 공동명의인데 부인이 초등학교 선생으로 발령지가 시흥이라 전세 놓을 예정이라는데 딸이 진주교대 합격한 날(원래는 1.21일 발표였는데) 계약된 것은 그냥 우연일까요?
또한 딸내미는 2008.1.26일 경인교대에도 합격하여 거기 입학하였고, 3.2일엔 기숙사에 입사하여 잘 다니고 있습니다.
제 딸은 2003년 경희대 불어과에 들어갔다 2학년을 마치고는 적성에도 안 맞고 장래가 불안하다면서 다시 수능을 쳐서 심리학이나 철학을 전공하겠다며 휴학을 감행하더니 2005년은 도서관에서 공부한다며 지가 벌어 학원등록하겠다며 까먹고, 2006년은 서울 송파의 종합학원을 다녔으나 수능성적이 시원찮다며 응시조차 않겠다는 것을 모두 센 곳에 넣었다 떨어졌고, 2007년은 분당의 학원을 다녔는데 수능을 그런대로 보아 고려대 및 연세대 낮은 과나 이화여대 괜찮은 곳을 희망한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교대로 선회하더니 가군(群)은 진주교대, 나군은 경인교대를 지원(다군은 아예 안 썼음)해서 모두 합격하게 되었고 4.24일 오늘 장학생 선발통보도 받았답니다.
그리고 2008.1.21일에는 공장 1, 2층 임대차계약을 맺었습니다.
2005.10월 그 친구가 떠나고 1, 3층을 임대 줬는데 1년 만에 각각 나간 뒤 제가 2층에서 3층으로 옮기고 1층 100평, 2층 100평을 임대 놓았었습니다.
1층은 전기매트를 만드는 사람에게 보증금 2백만원에 월세 1백만원으로 계약했는데 월세가 5개월이나 밀렸는데도 아무 대책이 없어 내용증명을 보낸 후 알아보니 전에 성남 신흥동에서 가방공장을 하다 망해서 도망하여 그것도 하하청(下下請)을 하는 사람이란 것과 성남 은행동의 연립도 경매로 날리고 현재 무일푼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설프게 대해선 안 될 것 같아 대문에 말뚝을 박아 체인을 치고, 출입문에 봉인을 하고, 승용차로 대문을 막은 후 파라솔과 의자를 대문 앞에 놓고서 “밀린 월세 가져오기 전에는 한 발짝도 못 들어 온다”고 한 뒤 몰아내고 2007.9.18~10.1일(그 안에 추석이 있었지만 지방을 써서 보내고 차례 . 성묘도 빠지며 꼬박)까지 공장 사무실에서 먹고 자는 한 편 ‘부동산 점유이전금지 가처분신청’과 ‘명도소송’을 냈더니 밀린 세와 경비를 전부 내고 10.31일 나간 후 3개월째 비어 있었습니다.
2층은 의료기기를 만드는 업체에 1층과 같은 조건으로 계약했는데 역시 나중에 알았지만 세 사람이 동업형식으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떨어져 나가고 둘이 남아 직원도 없이 개발이니 수출이니 하다 월세가 6개월이나 밀렸습니다.
나중에는 무릎을 꿇고 빌어도 보았으나 꿈쩍도 하지 않아 레코더를 들이대고 납부약속을 녹취하여 사기죄로 고소까지 하겠다고 하여 겨우 7.20일 나간 뒤 6개월여 공실(空室)로 있어서 드나들며 볼 때마다 속도 상하고 어려운 살림에 월세도 못 받아 죽을 지경이었는데 1, 2층을 다 쓰겠다며 보증금 2천2백만원에 월세 2백2십만원으로 계약하여 1.31일 입주하였습니다.
2008.1.29일에는 초월읍 산이리 벽산아파트를 시세보다 기천만원 싸게 매입계약하였습니다.
전 주인이 경남 창원에 거주하는데 그 집에 약간의 대출도 있고 자기들은 입주계획이 없는데다 급히 돈 쓸 데가 있다며 시세보다 낮춰 매도하였고, 세입자가 워낙 깨끗이 써서 인테리어 비용도 별로 안 들고 3.31일 이사 들었습니다.
아들은 2008.2.20일 ROTC 입단을 하였고 3.1일에는 ‘경기장학관’에 입사(入舍)하였습니다.
현재 아들은 고려대 임상병리학과 3학년에 재학 중으로 제48기 학군단에 지원하여 입단을 하게 되었지만 3, 4학년 그러니까 임관할 때까지 매주 화, 목요일에 전투체력 행사로 아침 7시에 등교해야 하나 곤지암으로 이사 오면 그게 큰 걱정이었는데 후배(그는 집이 수원이라는데 떨어지고)의 소개로 경기장학관(서울 쌍문동에 있으며 경기도 거주 10년 이상이 기본요건에 성적이 절대적인)에 무사히 입사하였고 학군단 단대장(單大長)도 한다고 합니다.
정말로 감동적인 일은 2008.3.16일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가 공무원을 하던 1997.3월 먼 친척뻘 되는 아주머니에게 1천만원 보증을 섰는데 얼마 안 가 채무자가 이자납부도 하지 않아 한동안 생으로 이자를 물다 1999.1월 대위변제해 주고 못 받아 속을 끓던 그 1천만원이 근 10년 만에 돌아 온 것입니다.
당시 아버지는 제가 탈 승용차의 할부보증도 안 해 주는 분이셨는데 그 아주머니(같은 고향에 친구 누님이기도 하며 성남 태평동에서 한 집에 살 때는 할머니가 몰래 끼닛거리도 많이 대줬음)가 성남 성호시장 부근에 미용관련 가게를 낸다며 은행대출을 5백만원 받아야 되는데 “형부(아버지를 그렇게 불렀음)는 공무원이라서 서류도 간단하고 보증도 혼자 서면 되니 꼭 좀 해 달라”고 사정하여 교보생명에 같이 갔더니 막상 자서(自書)할 때가 되어 “사실은 1천만원이 필요하다”하여 불쾌히 보증을 섰는데 그예 낭패를 당했던 겁니다.
그 뒤 한 때는 성남법원 근처에서 갈비집도 차리고 쓸 것 다 쓰고 다닌다는 말을 듣고 부모님이 수차례 전화도 걸고 집으로 찾아가 독촉도 했지만 “벌어서 꼭 갚겠다”며 안 갚아서 아예 포기하고 말았던 일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난 3.15일 제 휴대전화로 “동생(제 친구이기도 한)에게 내 번호를 알아서 전화했는데 지금 어머니 사는 곳과 연락번호를 좀 가르쳐 달라”하여 찜찜한 마음으로 알려 주었고, 이튿날 풍덕천의 어머니를 찾아와 원금 1천만원을 내 놓으며 “지금은 야탑에서 손주를 봐 주고 있으며 그동안의 잘못을 용서하고 이자는 못 드리고 원금만 드리니 받아 주시오”하고 갔다는데 이러한 일이 저를 통해 이뤄진데다 더 중요한 건 결국 그 돈이 거의 제게로 와서 빚잔치에 쓰였으니 가피도 이런 가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외에 판촉물 홈페이지를 거저 받아 운용하고, 원하는 전화번호를 이사오는 집으로 개통하는 등 전에는 거의 배반만 하던 기대가 제 뜻대로 된 일은 생략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지금껏 대놓고 하지 못한 감사인사를 이곳을 빌어 적으며 마칠까 합니다.
먼저 이 글에서 언급된 “복은 지은대로 받으며(自作自受), 거래하는 기도는 절대 안 된다(惟誓願不去來)”는 光賢스님, 불상과 염주를 주며 독려하고 음반제작의 거래관계에 있는 柳사장님, 직장생활에도 많은 도움을 주더니 이 번에 아파트까지 매도해 준 지기(知己) 金사장님 감사합니다.
문리가 트이지 않는데도 근 10년을 한결같이 지도해 주시는 수당(守堂) 훈장님과 망년의 서당 동학(同學)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제 가족(처음 모든 얘기를 듣고는 오히려 “그동안 그래도 잘 지냈고 가족들 건강하니 걱정맙시다”라며 꾹꾹 참아준 아내, 모든 게 부족한데도 비뚤어지지 않고 밝게 성장한 자랑스런 딸 . 아들)이 무엇보다 고맙고, 회사와 저를 저보다 더 아끼고 조력(助力)하는 徐차장과 姜부장, 거칠고 산만한 글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 또한 고맙습니다.
부디 모두 성불하십시오.
아! 제가 1만송 했을 때 스님께서 적은 댓글에 “그동안 열심히 진언주력기도를 하고 계시는 듯 하십니다.^^ 이제 겨우 일만송입니다. 티벳불교에서는 옴마니 반메훔을 백만번 했을 때, 겨우 유치원 졸업수준으로 본답니다.^^ 그래서 저도 수시로 가나 서나 앉으나 누우나 기도로 일념하고 있답니다.”란 글이 생각납니다.
불기 2552년 계춘(季春) 지장재일에
다라니 행자 김동섭 씀
첫댓글 먼저 지나가신 여러 어르신들의 발자국을 보며, 어리고 어리석은 녀석이 합장올리옵니다._()_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보면 중소기업 하는분들 정말 존경합니다 기도 열심히 하시고 소원 성취 하십시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