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키는 정신력] 정병경
ㅡ백구과극ㅡ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빠름을 실감한다. 십팔사략에 '인생여백구과극人生如白駒過隙'이란 말이 있다. '인생은 문틈으로 백마가 달리는 모습을 보는 것과 같다'라는 의미다. 문득 돌아보면 곁에 없는 것이 세월이다. 아끼고 지킬 방법이 없어 한숨 소리만 커진다. 엊그제는 손주였는데, 이제는 할아버지 신세다.
흰토끼해(辛卯年)에 태어나 회갑이 지나고 열두 해가 더해져 검은 토끼해(癸卯년)를 맞으니 성쇠盛衰의 감을 느낀다. 백년의 세월이 찰나다. 내가 좋아하는 조선시대 검서관 이덕무의 세정석담에서 몇구절 읽어본다.
"천지간에 가장 애석한 건 세월과 정신이다. 세월은 한정이 없지만 정신은 유한하다. 세월을 허비하면 소모된 정신을 다시 수습할 길이 없다."(하략) 정신을 차리고 다시 돌아본다.
생존해 계신 모친은 양띠해(辛未生)에 태어나 올해 93해째를 맞는다. 문명의 이기 덕에 수명은 연장되지만 지병 완치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어 일희일비一喜一悲다. 의학이 발달해 백세 시대에 접어들어도 진부陳腐한 삶을 이어가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깝다.
모친은 3년 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잦은 보이스피싱의 충격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으며 해마다 증세가 더해진다. 낮선 전화 올까봐 외출시 휴대폰 소지하는 걸 꺼리신다. 정신적인 안정이 필요함을 느낀다. 나이 들수록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억이 점점 사라져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코로나 이후부터 조상님 제사는 묘소에서, 차례상은 사찰에 모신다. 평소 기일이나 명절 때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하시던 모친이다. 어느날부터 무관심으로 변해간다. 자손의 입장으로 조상에 대한 죄스러움이 앞선다.
지난해 추석 명절에 코로나가 한 단계 해제되어 기뻤다. 모처럼 퇴촌 본가에서 형제 가족과 만났다. 유아를 비롯해 식구가 거의 코로나 확진으로 곤혹을 치루었다. 모친은 용인 소재 코로나 전문 요양병원에 일주일간 입원했다. 그 이후 식욕이 떨어지고 증세가 더 심해진다.
평소처럼 구구절절 이야기를 나누던 모친의 옛모습이 아니다. 점점 단순해지는 증세다. 평일은 요양 주간보호센터에 나가신다. 유치원생과 정신 연령이 같다며 노치원생으로 부른다.
비슷한 증세의 환자들과 하루를 보내는 시간을 행복해 하신다. 항상 하시는 말씀이다. "너무 좋아" 단 한마디 뿐이다. 액자 속 같은 한정된 공간이지만 또래와 함께 즐기는 시간이 좋다고 하신다. 유일한 낙으로 여기지만 슬픈 사연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 저녁 TV에 '분홍립스틱'의 가수 작은별가족 강애리자 모친이 같은 증세다. 새삼 전두엽과 후두엽, 측두엽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집안의 구조나 환경과 색상이나 분위기도 영향이 있다고 한다. 치매도 가족력과 관계가 있다니 정신이 번쩍든다. '포스파티딜세린'은 뇌세포나 기억력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어제는 설 명절이어서 아침에 떡국을 챙겨드리고 왔다. 손수 하는 요리는 어려운 처지다. 코로나로 인해 잃었던 식욕을 회복해 다행이다.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한시름 놓인다.
ㅡ설상가상ㅡ
일제 강점기 때 모친의 일곱 남매는 일본 큐슈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졸업 무렵 해방이 되었다. 가족 모두 외조부 고향인 대구로 오게된다.
비빌 언덕이 없고 언어도 안 통해 처녀 시절에 외출도 못하는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한다. 회갑이나 칠순 때 일본 여행을 권했는데 싫어하신다. 어린 시절에 지진을 자주 겪어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어서다. 지나간 일을 들출 일은 아니지만 추억도 나름이라는 걸 느낀다. 어린 시절 습관이 오래 간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겨울에 피부병이 전염되어 치료중이다. 요양 전문병원에 입원이 안 된다고 한다. 여동생의 자가 치료 도움으로 점차 회복되어지고 있다. 나이 들면 면역력 약화로 감염을 조심해야 한다.
현대 의학으로 치매는 완치가 없다니 슬픈 일이다. 지난달 빙모님께서 낙상으로 고관절 손상으로 보름째 입원 중이다.
소동파는 약한자를 위해 박차고 일어서라며 힘을 준다.
"늙을수록
더욱 씩씩하고
궁할수록 굳세야 한다"는 싯구절을 새긴다.
2023.01.23.
첫댓글 '늙을수록 더욱 씩씩하고
궁할수록 굳세야 한다'는 구절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문틈으로 스쳐버린 백마의
멋진 순간이 결코 아름답습니다
병마로 세월을 묻어버린 기억도
진정 함께여서 축복입니다
떡국으로 다져놓은 삶의 한 해
더 멋진 시간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