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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 카톡, 카톡......
사방에서 가을이라고 조석으로 신호를 보낸다. 좋은 글과 예쁜 단풍으로 물든 조국과 세계 각국의 가을 전경, 그리고 음악과 영상을 넘치도록 관람한다. 손끝 하나로 움직이고 눈과 귀로 여행을 하며 편하게 즐긴다. 하지만 그것으로 가을을 다 공유하고 만끽한 것 같지는 않다. 왠지 남이 입에다 넣어주는 가을을 맛보는 기분이 들어 영 석연치 않다. 아무리 멋있는 가을풍경을 보고 있어도 내겐 여전히 회색빛 가을이 흐르고 있기 때문일까.
아침에 눈을 뜨고 창밖을 보면 왠지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아침 햇살은 자취를 감추고 침침하고 우중충한 회색 하늘을 더 자주 보게 된다. 너무 일찍 일어나서 본 하늘이었는지 엘에이 한인 타운의 아파트 창밖으로는 단풍잎을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아직 누런 나뭇가지에 연초록 잎들이 드문드문 살아서 바람에 간간 흔들리고 있는 정도다. 예전엔 운치가 있던 가을 맛이었는데 올해는 또 다른 가을을 맞는다. 계절도 해마다 느낌이 같을 수는 없는가보다.
언제 부터인가 난 피부 속으로 느껴지는 감각적인 사계를 느끼는데 익숙해져 있다. 살갗에 다가오는 바람의 숨결과 온도로 계절이 바뀜을 알아차린다. 뜸한 새소리나 옷을 갈아입는 나뭇잎의 색상을 통해서도 느낀다. 외적인 환경이 가을이라고 속삭여 주는 감성에 슬그머니 가슴속 까지 흔들린다. 괜히 시가 멋있게 와 닿으면 친구에게 전하고 나눈다. 시상이 떠올라 적어놓고 스스로 도취해 버리기도 한다. 가을은 봄보다 더 운치가 있어 저마다 시인이 되어가는 것 같고, 옷깃을 여미며 사색에 잠기게 된다. 그래서 더 많은 추억을 떠올리며 자기 성찰을 통해 성숙해져가는 길목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난 회색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이가 많으셨던 아버지의 양복 색 같아 노티가 나는 것이 싫었다. 그런데 올해는 내가 좋아하는 가을이 유난히도 회색빛으로 와 닿는다. 그만큼 나의 감정이 현실과 부대끼며 오는 침울함 때문인지는 모르나 반드시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문득 아직도 잊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회색 옷 한 벌이 생각난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입학식에 입을 옷을 손수 만들어 주셨다. 회색 투피스인데 목, 소매, 그리고 양쪽 주머니엔 연초록색 바이어스를 대어 참 멋이 있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옷이어서 아끼며 아주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이젠 옷장에 걸려 있지도 않지만 그런 회색이 올해 맞이하는 나의 가을 분위기이다. 어머니는 왜 하필 회색 천으로 입학식에 입는 옷을 지어주셨을까, 그리고 연초록색은 무슨 조화인가.
그 이유를 어릴 땐 잘 몰랐지만 가끔 회색 옷을 볼 때마다 빨강색과 배치를 하지 않으시고 연초록색으로 대치를 시킨 어머니의 깊은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마땅한 천이 없으셨겠지만 어머니는 내게 바라는 삶의 모형이 있으셨던 것이다. 회색은 별로 더러움도 타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은은한 색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색 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뛰어나게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삶으로 그저 무난하게 배경으로 살기를 바라셨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중요한 부분에 연초록이라는 천으로 받쳐주니 전체 분위기에 생기가 돈다. 회색도 살고 멋지고 세련된 옷으로 기억된다. 올 가을 분위기가 마치 이런 색상의 옷 같은 느낌이 든다. 매일 자고 깨면 부딪치며 일하는 곳에서 노인 환자들과의 만남에 너무 익숙해져 있는 탓일까. 어느 날 지인이 찾아와 내게 옷을 고르라고 가져왔을 때 빨강색 장미가 그려진 옷을 제쳐놓고 나도 모르게 은은한 회색을 골랐으니 말이다.
내 나이도 색으로 보면 회색을 향해 가는 중이지만 회색으로 그냥 머무르고 싶지는 않다. 항상 연초록색을 달고 있던 그 옷처럼, 내 마음은 봄에 돋아나는 새싹처럼 늘 솟아나고 순수하고 싶다. 가을 뒤에 혹독한 겨울이 오듯, 혹 시련이 찾아올지라도 연초록 소망의 빛을 잃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에게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나의 부모님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시시 때때로 생각나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힘이 되고 있듯이, 오늘도 새 힘이 솟는다. 이번 주말엔 꼭 산책을 하며 청명한 하늘로 숨을 쉬고,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읽으며 마음껏 가을을 만져봐야겠다.
본명: 김혜원
1954년 서울출생 간호사, 양호교사, 소샬워커, 사모
1981년 미국이민, 엘에이 새싹어린이교실 윤영
2010년 엘에이 올림피아 요양병원 소셜서비스일
2013년 재미시인협회, 재미수필문학가 협회 신인상 으로 각각등단
2023년 '이 아침을 어찌 넘기랴' 산문집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