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 대첩의 명장 강감찬에 얽힌 일화
고려시대의 양주는 바로 지금의 서울입니다. 그 때는 양주 땅에 호랑이가 무척 많았다는군요! 서북의 인왕산 북의 북한산 남의 남산 등의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 있으니 호랑이의 이동이 자유로울 수밖에 없지요. 지금은 대도시로 변모되어 곳곳에 넓은 도로가 뚫려있으니 쉽게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산위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 약간은 이해가 갈 것입니다. 서울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거기서 내려온 하천들이 중랑천들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들어갑니다.
한때 강감찬 장군이 양주고을을 다스렸다는군요. 언제나 호환은 있어왔지만 그 때는 상당히 더 심하여 백성의 원성이 하늘까지 찌를 정도였답니다. 반드시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만 양주 백성을 위무하고 잘 다스리기 위하여 학식과 도술에 뛰어났다고 하는 강감찬을 보내었습니다.
아무튼 양주에 도착하니 토착벼슬아치들이 맞이하며 호환이 심하니 막아주소서라는 백성들의 청원서를 올렸습니다. 그 후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강감찬이 부하에게 서필을 주며 저기 보이는 산 중턱 큰 바위 위에 노승이 앉아 있을 것이니 이 서한을 주고 데려오너라. 영문을 모르는 부하는 투덜거리며 간신히 산 중턱에 올라갔습니다. 반신반의하던 부하가 주위를 살피다가 노승이 큰 바위에 걸터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워하며 서신을 전하였습니다. 서신을 다 읽고 난 노승이 부하를 따라 관청에 외서 강감찬에게 공손하게 절을 하고 분부를 기다렸습니다.
강감찬이 말하기를 “산의 호걸인 네가 형편을 알 것이니 속히 일가를 데리고 북쪽으로 떠나거라. 아니면 포수를 보내어 일족을 멸하겠다!” 굽신거리며 막 노승이 떠나라고 하는 차 아까부터 궁금증을 참지 못한 부하가 조심스럽게 말하였습니다. “ 아니 이 노승이 누구이기에 떠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 말을 들은 강감찬이 노승에게 일갈하기를 “변하라!” 그러자 갑자기 노승이 사라지고 큰 호랑이가 나타나 포호하는 것입니다. 이 괴변에 부하가 깜짝 놀라 벌벌 떨었습니다. 다시 노승으로 돌아온 호랑이는 산으로 떠났습니다.
다음 날 오후에 한 무리의 호랑이들이 늙은 호랑이의 뒤를 따라 강을 건너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이 우화는 양주에 출몰하여 백성들을 위협하였던 호랑이의 서식지를 없애고 나무를 잘라 길을 만든 후 요소요소에 군사들을 배치하여 호랑이를 몰아낸 강감찬의 위업과 도술에 능하다는 전해지는 강감찬의 카리스마가 결합된 것이 아닐까요? 아무튼 백성이 편히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바른 정치라는 것에는 동서고금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일화라고 하겠습니다. 나라가 어지럽거나 호환, 홍수, 가뭄 등이 발생하거나 외적이 공격하면 결국 많은 피해를 입는 것은 백성들입니다. 일예를 들면 신흥 세력이 후금이 쇠약해진 명나라를 세차게 공격할 때 명나라 편에 서는 것은 의리와 성리학의 가르침에 의하여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해가 되지는 않지만) 그렇게까지 심하게 후금을 자극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결국 지나친 후금에 대한 말로만의 공격으로 두 차례에 거쳐 후금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인조도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였지만 일반 백성들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인과응보인지는 모르지만 양반들의 귀부인들은 후금 군에 잡혀 성적인 수모를 당하였다는군요. 귀부인들의 고난은 심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에도 계속되었으니 본인들의 잘못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부인들을 집안에 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갈 곳이 없어진 돌아온 여자들이라는 뜻의 환향녀에서 오늘날의 화냥년이라는 말이 나왔다는군요.
그런데 지금도 이와 유사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이익만 그것도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며 책임 의식이 없는 일부 무리들에 의하여 상당한 국민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