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먼 길을 와서 죽음보다 깊은 잠에 푹 빠졌다가 일어난 시간, 한 달이라는 시간이 길었다는 걸 실감합니다. 그사이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쌤앤 파커스에서 <신 택리지> 아홉 번째 책인 <명당과 길지>라는 책이 나왔고, 또 하나의 책이 발간을 기다리고 있고, 풍수지리학자인 최창조 선생이 먼 곳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지구의 끝자락에서 들었습니다. 신 택리지를 쓸 때 심적으로 가장 많이 도움을 받았던 최창조 선생님과 19902년 무렵, 동학사 부근으로 풍수기행을 갔던 때가 떠올라 망연히 먼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한국의 자생풍수를 세상에 널리 알리신 최창조선생님 덕에 내가 태어난 진안군 백운면의 덕태산 자락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최창조 선생은 <한국의 풍수지리>라는 저서에서 내 고향 덕태산 자락을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덕태산 방면에 어린용이 보이다 “벌써 20년 이상 풍수를 공부해 오면서도 필자는 아직까지 어떠한 종류의 풍수적 이상향도 제시하지를 못했다. 그것은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그야말로 이상의 세계에서나 있을 수 있는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는 끊임없이 그 이상향을 꿈꾼다. 필자는 풍수적 삶터의 이상적인 모형으로 인간 관계에서는 대동적 공동체를 조화로운 어울림을 표방하여 왔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터전을 현실 속에서는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이번 여름에 그에 상당히 근접하는 좋은 마을들을 한꺼번에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그곳은 바로 전북 진안군 일대였다. 지리산 서쪽에 가서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남원을 거쳐 임실에서 진안으로 들어가는 30번국도에 접어들었을 때는 굵은 장마비가 하염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원래 맑은 날보다는 비 오는 날들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이렇게 물난리가 날 지경에 이르러서는 좀 지긋지긋한 생각이 들었다. 임실 성수면을 지나 진안 성수면(같은 성수면이 임실에도 있고 진안에도 있음)을 약간 스쳐 백운면에 접어들었을 무렵 참으로 운이 좋게도 잠시 파란 하늘이 고개를 내미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다. 더욱 행운인 것은 이때 바로 교룡의 대표적인 형세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눈룡이란 용세십이격 중 노령에 대칭되는 개념으로 글자 뜻 그대로 어린 용이라는 뜻이다. 백운면 초입 남계마을에서 북서쪽으로 덕태산 방면에 나타난 눈룡은 산이 바로 사람임을 웅변으로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산은 즉 사람이다. 눈룡이란 어린아이다. 한 열 살쯤 되는 어린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처럼 혈기방장한 것도 아니고 아기처럼 철이 너무 없는 것도 아니며 노인처럼 기력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매우 신선하게 아름다우면서도 교만하지 않고 순박하다. 아름다움을 갖추고도 교만하지 않다는 것은 어린아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기운은 이제 싹이 돋아나려는 듯이 밑에 깔려 위로 치솟고 있는 상태다. 산이 사람으로 비친다는 것은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로써 산과의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백운면의 눈룡은 한마디로 감동이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고향을 사랑하지 않았던 내 고향을 새삼스럽게 사랑하게 만든 최창조 선생은 <새로운 풍수 이론>에서 “명당은 찾아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습니다. 매월당 김시습은 그의 부모가 죽었을 때 무덤자리를 가려 편안히 장사를 지내고자 하였지만 풍수에 구애받지 않았습니다.
김시습이 보았던 편안한 곳 다섯 가지는 첫째, 흙의 두께를 가렸고, 둘째로 물의 깊이를 가렸고 셋째로는 소나무나 가래나무가 살만한가, 넷째로 세상이 바뀌어도 갈아서 밭으로 만들 수 없으며 다섯째로 집에서 가까워서 성묘省墓나 시제時祭를 지내기에 편리한가, 이 다섯 가지 조건이 갖추어 진 뒤에 장사를 지내는 것이 군자가 행할 바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비록 시체라도 구천九泉에 편안하게 거처하게 함은, 역시 인자하고 사랑하는 깊은 뜻을 잊어버리지 못해서다”라고 하면서 부모를 좋은 곳에 장사지내고자 함은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풍수지리학의 원조인 일행선사(一行禪師) 역시 그와 비슷한 의견을 개진하고 있습니다. “효자는 부모에게 좋은 산천의 땅을 구해드려야 하는데, 그 이유는 장사(掌事)라는 것이 부모를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드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부모의 유해가 편안해지면 효자의 마음도 편안해지는 것이다. 부모의 유해가 편안함으로써 복이 후손에게 흘러 그 음덕이 살아 있는 자손들에게 모이는 이치라고 한다면, 효자 아닌 자가 어찌 만에 하나라도 감히 그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대대로 내려오는 효자는 부모님의 유해가 좋은 땅에 모셔짐으로써 진실로 복이 자신에게 접응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떠올리지 않는다. 그저 어리석고 천한 무리들이 음덕을 받는 것이 바로 땅의 이치라고 믿어버리고는, 살아가는 못된 꾀로서 좋은 터를 구함에만 급급해 있다. 오로지 부모의 유해가 편안함을 얻게 함이 풍수의 이치이니, 그 보람은 음덕을 입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모님을 편안히 모실 수 있느냐를 근심함에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의 묏자리를 잘 쓰고 좋은 집터를 잡아 자기와 가족들이 음덕을 보려는 데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풍수가들 역시 길지라고 잡아주고 보상을 받는 데만 골몰하는 등 이기적인 목적의 풍수가 판을 치고 있지만 최창조선생은 “땅을 사람 대하듯 하면 된다.” 라는 말과 “명당은 당신 마음속에 있다.” 그 말을 절실하게 깨닫고 깨달았기 때문에 나 역시 이 땅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나 이외는 모두가 다 나의 스승이다.” 부처의 말과 “내가 아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만을 알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명심하며, 최창조선생의 뒤를 따라 걸으며 세상의 모든 사람, 사물들에게 배우리라 생각합니다. 최창조 선생의 영전에 깊은 애도를 전합니다. 2024년 2월 4일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