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489) "관 속에 누워"
입력2024-04-12 00:00 수정2024-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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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놀이로 떼부자된 천 생원
성난 민심을 마주하는데…
개성 위의 평산(平山)은 해주 버금가는 큰 고을이다. 평산 제일 부자 천 생원은 돈놀이 장사꾼이다. 천 생원이 돈 버는 방법은 이렇다. 어느 필부의 마누라가 배가 아파 배를 움켜잡고 돌돌 구르면 남편은 황 의원한테 달려간다. 황 의원은 천 생원과 짜고 현찰이 없으면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남편이 천 생원에게 달려가 급전을 빌려 돈 자루를 안기면 황 의원은 아편을 넣은 탕약을 지어 먹인다. 마누라는 언제 아팠냐는 듯 거짓말처럼 일어나지만 빚을 잔뜩 짊어진다. 몇번 하다보면 마누라는 아편에 중독돼 시시때때로 배가 아파 뒹굴지만 아편 탕약 한재에 벌떡 일어난다. 그들은 아편에 중독된 줄도 모르고 황 의원을 명의라 우러러본다.
악질 천 생원과 황 의원은 공생하며 돈을 긁어모아 고을 최고의 갑부가 되었다. 천 생원은 돈놀이만 하는 게 아니다. 급전 대출보다 더 악질 짓이 장리쌀 놓기다. 소농들 논밭 몇 뙈기로 뼈가 부서져라 농사지어 가을에 타작해 쌀을 독에 넣어두고 아껴 아껴 먹어도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식구들은 황달이 오고 헛것을 본다. 밥 들어가는 입을 줄이고자 어린 딸아이를 민며느리로 보내면 가장은 눈이 뒤집혀 가을에 죽을 값이라도 장리쌀을 덥석 문다. 보릿고개에 쌀 한말을 빌리면 가을에 쌀 두말로 갚아야 하는데 무슨 수로 두말을 갚을꼬. 담보로 맡겼던 몇뙈기 논밭 문서는 속절없이 천 생원 손에 넘어간다. 천 생원과 황 의원, 이 때려죽여 마땅할 두 놈이 아부는 잘해 고을 사또를 구워삶아 놓아 민원이 들어가도 항상 유야무야다.
민심이 흉흉해지더니 세상이 바뀌었다. 병자년에 무지막지한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내려오며 발길 닿는 곳마다 분탕질을 치는 것이다. 맨 먼저 평산 사또가 야반도주했다. 평산은 무법천지가 되었다. 이방 집이 불타오르고 관아도 화염에 휩싸였다. 천 생원도 다락에서 궤짝을 꺼내 전대 3개를 만들어 어깨에 둘러메고 허리에 차고 가장 중요한 치부책을 품 안에 넣고 방문을 열려는데 웬 젊은이가 들어왔다.
“누누누, 누구요?”
자신을 해치러 온 사람이 아닐까 하고 천 생원의 온몸은 무당 손의 사시나무처럼 와들와들 떨렸다. 허름하게 차려입은 젊은이가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방바닥에 놓으며 말했다.
“생원님께서 급전을 마련해 주셔서 아버님을 살렸습니다. 그때 빌린 돈 백냥과 이자 백이십냥, 합쳐서 이백이십냥입니다.”
천 생원은 젊은이의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후다닥 안마당을 뛰쳐나가 하인을 불렀지만 하인은 벌써 도망가고 없었다. 하녀들도 은수저 놋그릇을 챙겨 모두가 줄행랑을 쳤다. 그저께 마누라와 딸아이를 멀리 곡산 친정으로 보낸 게 다행이다.
천 생원은 허겁지겁 집을 나서 허름한 누비옷에 벙거지를 눌러쓰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저잣거리로 나섰다. 막상 청나라 침략군은 관아를 불태우고 사라졌지만 억눌려 살던 사람, 원한에 사무친 사람들이 무법천지에 날뛰기 시작했다. 아직도 불타는 관아 앞 광장에는 황 의원이 기둥에 묶여 몽둥이찜질에 축 늘어졌다.
“천 생원 놈도 잡아 와!”
한 떼의 사람들이 천 생원 집으로 몰려갔다. 와들와들 떨며 저잣거리를 벗어나 개울을 따라 넘어지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밤길을 걸어 천괘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천 생원은 걷고 또 걸었다. 누군가 뒷덜미를 잡을 것만 같아서 보폭을 더 넓혀 빨리 걷다가 쓰러졌다. 천 생원은 산자락 외딴 상엿집에 들어갔다. 부싯돌을 켜서 빈 관을 찾아 그 속에 들어가 누웠다.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불타는 관아, 혀를 빼고 늘어진 황 의원, 낫을 들고 설치는 광기들…. 이런 것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생각나는 건 그 난리 통에 원금과 이자 이백이십냥을 싸 들고 왔던 그 젊은이뿐이었다. 정직한 젊은이와 가난한 사람들의 고혈을 빨아먹던 자신이 비교되며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몰려왔다.
십년의 세월이 흘렀다. 천 생원의 고래 대궐 같은 기와집은 불타버려 흔적도 없고 그 터엔 아담한 초가집이 들어섰다. 농사꾼이 땀 흘리고 집에 들어와 개다리소반에 저녁상을 받았다. 아들딸을 안고 상 앞에 앉은 마누라는 천 생원의 딸이다. 이백이십냥을 들고 왔던 그 젊은이가 시방, 저녁 밥상을 차고앉은 농사꾼이다. 천 생원은 그 많은 재산을 모두 원한을 샀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돌려주고 탁발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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