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9일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아벨의 피부터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예언자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47-54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47 “너희는 불행하여라! 바로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너희가 만들기 때문이다.
48 이렇게 너희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너희는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으니,
조상들이 저지른 소행을 너희가 증언하고 또 동조하는 것이다.
49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도, ‘내가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낼 터인데,
그들은 이들 가운데에서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박해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50 그러니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51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52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 교사들아!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치워 버리고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53 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54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예언자로 살기
예언자는 ‘예언자(預言者)인가 예언자(豫言者)인가’ 말이 많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미리 예(豫)’자를 쓰지 않고, ‘미리 예(預)’자를 써야 맞는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말이 같은 뜻을 가지고 있지만 예(豫)자는 ‘미리, 즐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예(預)자는 ‘미리, 참여하다, 간여하다, 즐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아주 작은 문제지만 문제를 삼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두 가지 뜻으로 쓰일 때 어떤 것이 맞는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예언자(豫言者)라는 말이 ‘자기 사상이나 예측에 의하지 않고 영감(靈感)에 따라 계시(啓示)된 신탁(神託 : 神意)을 전달하고 또 해석하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라고 백과사전에서는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預言者)라는 뜻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매개자이며, 하느님의 뜻을 담아 간직하였다가 사람들에게 전하는 예언직분(預言職分)을 강조하는 말로서 일반적인 예언자의 뜻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에 인간이 참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앞날을 위해서 보관하고 있다가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하느님의 말씀의 핵심에 대한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가 실타래를 풀듯 사람들이 말씀을 알아듣도록 하는 그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예언자(預言者, 豫言者)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글자가 맞는다고 할 수는 없고 모두 맞는 글자라고 생각되어집니다.
모름지기 예언자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살지 않고, 자신의 사상이나 예측에 의하지 않고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해석하고, 하느님과 인간과의 매개자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어서 주님의 진노를 사고, 사람들이 주님께로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교사들의 교만과 위선을 질책하시고, 지금 그들과 같이 살고 있는 우리를 또한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꾸중을 듣는 입장에서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하는 데도 내 자신의 교만함과 오만함으로 하느님을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예언자들의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깨닫지 못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배운 지식이 내게는 편견과 선입견을 형성하고, 내가 배운 지식이 그릇된 것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진리의 품이신 하느님께 다가가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느님께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막아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말을 듣는 사람도 나의 폐쇄적 사고방식에 하느님과 장벽을 쌓고 그 장벽이 점점 두꺼워지도록 행동하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3,21-30ㄱ
형제 여러분, 21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26 이 죄들은 하느님께서 관용을 베푸실 때에 저질러졌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어, 당신께서 의로우신 분이며
또 예수님을 믿는 이를 의롭게 하시는 분임을 드러내십니다.
27 그러니 자랑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무슨 법으로 그리되었습니까? 행위의 법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입니다.
28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29 하느님은 유다인들만의 하느님이십니까?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은 아니십니까? 아닙니다.
다른 민족들의 하느님이시기도 합니다.
30 정녕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축일10월 19일 성 바오로(십자가의) (Paul of the Cross)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 연도 : 1694-1775년
같은 이름 : 바울로, 바울루스, 빠울로, 빠울루스, 파울로, 파울루스, 폴
이탈리아의 오바다(Ovada) 태생인 성 바오로 프란치스코 다네이(Paolo Francesco Danei)는 몰락한 어느 귀족의 맏이로 태어났고, 부모의 신앙 유산을 물려받은 탓인지 15세 때에 이미 카스텔라초의 자기 집에서 엄격한 고행과 보속을 행하였다. 1714년 그는 터키인들과 싸우는 베네치아(Venezia) 공국의 군대에 입대하였으나, 기도와 보속생활에 이끌려 명예 제대를 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결혼도 마다하면서 몇 해를 은거하던 중 1720년에 예수의 성명과 흰 십자가가 그려진 고난의 문장을 검은 옷에 단 성모님의 환시를 보았는데, 이때 그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교하는 수도회 설립을 명하셨다고 한다. 그의 환시가 올바른 사실임을 인정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부터 수도회 설립에 관한 허가를 받게 된 바오로(Paulus)는 40일간의 피정을 통하여 회칙 초안을 마련하였다. 그는 자기 동생인 요한 밥티스타와 함께 로마(Roma)로 가서 교황청의 허가를 신청하였다. 처음에는 거절당하였으나 1725년의 방문에서는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로부터 수련자를 받아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1727년에는 자신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들은 몬테 아르젠타리오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규칙이 너무 엄격했던 탓으로 많은 수련자를 잃었다고 한다. 1737년에는 첫 수도원의 문을 열었고, 1741년에는 교황 베네딕투스 14세로부터 개정 회칙을 승인받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십자가와 고난의 맨발 성직 수도회'(예수 고난회)가 전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바오로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초대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탈리아 전역을 누비며 선교 여행을 하였고, 그의 설교는 놀라운 힘을 발휘하여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그는 초자연적인 은혜로써 축복을 내렸고, 치유의 기적과 원거리에서 동시에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적 등이 나타났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설교가였다. 그는 예수 고난회의 최종 승인을 1769년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로부터 받았다. 또한 그의 노력에 의하여 여자 수도회 수녀들이 코르네토에 첫 수도원을 갖게 되었다. 그는 3년 동안의 병고로 고생하다가 1775년 10월 18일 로마에서 운명하였고, 1867년 비오 9세(Pius IX)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바오로(십자가의) (Paul of the Cross)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