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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말씀 38,4-6.8-10>
그 무렵
4 대신들이 임금에게 말하였다.
“예레미야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이따위 말을 하여, 도성에 남은 군인들과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자는 이 백성의 안녕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구하고 있습니다.”
5 이에 치드키야 임금은 “자, 그의 목숨이 그대들의 손에 달려 있소. 이 임금은 그대들의 말에 어찌할 수가 없구려.” 하고 말하였다.
6 그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경비대 울안에 있는 말키야 왕자의 저수 동굴에 집어넣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밧줄로 묶어 저수 동굴에 내려보냈는데, 그곳에는 물은 없고 진흙만 있어서 그는 진흙 속에 빠졌다.
8 에벳 멜렉은 왕궁에서 나와 임금에게 가서 말하였다.
9 “저의 주군이신 임금님,
저 사람들이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한 일은 모두 악한 짓입니다.
그들이 그를 저수 동굴에 던져 넣었으니, 그는 거기에서 굶어 죽을 것입니다.
이제 도성에는 더 이상 빵이 없습니다.”
10 그러자 임금이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 멜렉에게 명령하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기 전에 그를 저수 동굴에서 꺼내어라.”
▥ 제2독서
<히브리서의 말씀 12,1-4>
형제 여러분,
1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3 죄인들의 그러한 적대 행위를 견디어 내신 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낙심하여 지쳐 버리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우리의 영혼을 태우는 뜨거운 불입니다.
제1독서는 예언자 예레미야가 대신들의 요청으로 죽음의 저수동굴에 던져져 박해받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언자의 길은 참으로 고달픕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기존의 질서와 평화를 깨뜨리고 백성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는 자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썩은 세상일수록 진리와 정의를 더 강하게 외면하고 박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바로 오늘 복음과 연결됩니다.
제2독서는 “우리가 달려야 할 길”(히브 12,2)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버리는”(히브 12,1) 일이요, 또 한편으로는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히브 12,2)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불'을 지르십니다.
여기서의 불은 하늘나라의 선포를 말합니다.
한편 '불'은 구약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예레 20,9; 23,29)과 엘리야 예언자의 말(집회 48,1)을, 신약에서는 세상에 대한 종말 심판(마태 3,11; 7,19; 마르 9,48; 루카 3,16)을 말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루카 12,49) 하시며, 열절한 마음으로 저희에게 '불'을 지피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 가슴을 뜨겁게 한 이 '불'은 성령에 의해서 타오르는 '말씀의 불혀'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이 '불'을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미 가진 기득권으로 불빛을 짓누르고 공격합니다.
불의와 거짓은 물러가기보다 오히려 '불'을 꺼버리려 온갖 술수를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언자는 더더욱 박해받게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루카 12,50)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물세례’로 전도활동을 시작하시어 십자가에서 ‘피 세례’로 전도활동을 완성하셨습니다.
이 세례를 통하여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새 생명(구원)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러나 받아야 할 이 ‘피의 세례’와 우리 안에 타올라야 할 이 ‘성령의 불’은 하나의 큰 도전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들이나 딸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지 않고는 갈 수 없는,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코 갈 수 없는,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자신의 목숨마저 내 걸어야 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모순과 부조리, 불의와 거짓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세상과 맞서야만 하는 일이요, '불'로 어둠과 거짓을 사르고 자신을 파괴하고 분쇄시켜야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분열 속에서 빛과 어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2차바티칸공의회의 문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4항)에서는 말합니다.
“교회는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 시대의 표지를 탐구하고 복음의 빛으로 그것을 해명해 줄 의무를 지니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이사 9,5)일진데, 어찌하여 분열을 일으키실까?
그것은 파괴를 위한 분열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분열인 까닭입니다.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과 세상의 불의와 부정과의 분열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기심과 세상의 불의와 일치를 이룰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
(히브 4,12)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의 불’은 우리를 갈라놓고 분열시킵니다.
오늘도 세례는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분열시킵니다.
그것은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기 위하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흔히 분열을 회피하려 하지만, 분열은 회피하고 덮어버려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그 무엇입니다.
바로 그 분열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분열이 없는 듯 보여도, 사실은 거짓된 평화 속에 어둠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분열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열 안에서 빛과 어둠을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분열은 어둠으로부터 오기도 하지만 빛으로부터 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카오스 위에 머무르는 영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를 감돌고 있었다.”
(창세 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카오스 속에서 빛과 어둠을 보아야 합니다.
분열이 없는 것이 평화인 것이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진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화의 왕이신 당신께서는 오늘도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십니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선물더미가 아니라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주님!
이 칼의 불꽃이 우리 안에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루카 12,49)
주님!
당신은 제게 사랑의 불을 지르십니다.
제 속의 어둠을 태워 새로운 살이 돋게 하시고, 이기심을 태우고 자비가 돋게 하소서
무관심을 태우고 사랑이 돋게 하시고, 이제는 제게서 사랑의 분열을 일으키소서.
제가 중병에 걸린 까닭입니다.
제 살을 가르고 어둠을 몰아내시고,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고 정의와 불의를 가려내소서.
제 안에서도 이 세상에서도 당신 영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설마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을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크고 넓고 깊은 사랑입니다.
그 주님의 사랑을 살 수 있는 은혜를 입으시길 기도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분 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땅에 있는 것이든 하늘에 있는 것이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콜로 1,20) 라고 주님의 참 평화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12,51)
정말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신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신학교에 가겠다고 어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어머님께서 반대하셨습니다.
‘학비도 안 줄 것이고 너와 나는 이제 끝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저와 어머니와의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친구 어머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신부가 되는 것도 좋지만, 부모님께 효도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저와 어머님의 갈등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졌구나 하는 생각에 저의 결심을 굳히고 더 확고하게 ‘신학교에 간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 허락하시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부모님과 소원하게 지내야 했습니다.
이때의 갈등과 분열은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한 진통이었습니다.
‘성장통’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머님께서는 제가 미국 교포사목을 하는 동안 한 통의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신학교에 가는 것을 반대했던 미안함을 표현하셨고, 매일 저를 위해 기도하시며 마지막 운명을 앞두고도 “우리 철부지 신부 뭘 알겠습니까? 말문 열어주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고 봉사 잘할 수 있도록 건장 주시길”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멀리 있는 사람과의 관계는 원만합니다.
등을 지거나 원수되는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원수가 됩니다.
그런데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이유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집착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각자의 탈랜트에 따른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것을 더 강하게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왜 너는 나의 말을 따르지 않느냐? 왜 내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느냐? 나의 뜻을 존중해 주지 않느냐?” " 다 너를 위해서 하는 소리다" 하고 말하며 자기의 기대를 채워주지 않는 것에 실망합니다.
그리하여 자기 나름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평가하며 실망과 상처를 지니고 결국에는 “네 마음대로 해봐라. 어디 잘 되나 두고 보자.” 하는 마음을 품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은 사자와 황소의 결혼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사자와 황소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데 하루는 황소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자는 큰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먹으려 하니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황소가 여물로, 풀로 준비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자는 화가 났습니다.
잔뜩 기대를 하였는데 그 기대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황소도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준비한 것인데,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왜 안 먹느냐? 정성을 기울이고 사랑을 쏟은 만큼 화가 났습니다.
다음날은 사자가 준비하였습니다.
고기를 마련하였습니다.
그것도 쇠고기로 준비하였습니다.
결국 황소와 사자는 서로를 위하여 정성과 사랑을 다하였지만 남은 것은 기쁨과 보람이 아니라 ‘화’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눈먼 최선은 최악을 낳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에 최선을 다하되 깨어서 해야 합니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지 않으면 결국은 분열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서로 맞서게 되는 이유는 잘못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주면 더 행복합니다.
사랑하면 풍요로워집니다.
부유해집니다.
그런데 눈높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사랑이라는 빌미로 상대방을 옥죕니다.
사실 세상은 더 많은 소유와 지배,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에 우리를 유혹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에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선을 선택해야 하는 당연함 속에서도 불이익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처지와 상황, 여건 안에서도 흔들림 없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집회서 15장 15절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네가 원하기만 하면 계명을 지킬 수 있으니 충실하게 사는 것은 네 뜻에 달려 있다.
그분께서 네 앞에 물과 불을 놓으셨으니 손을 뻗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라.
사람 앞에는 생명과 죽음이 있으니 어느 것이나 바라는 대로 받으리라.”
우리는 분명 생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눈앞에 보이는 축복이 다인 것 같지만, 주님의 눈으로 보면 그 축복이 저주요, 오히려 지금의 저주가 축복이요, 영원한 선물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하느님을 선택하기를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아기를 낳게 되면 탯줄을 잘라야 합니다.
그래야 아기가 삽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품에 있고 싶다고 해서 탯줄을 그냥 둘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면 혈육으로 된 핏줄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육적인 관계보다 영적인 새 생명의 관계를 단호히 선택해야만 합니다.
혹 인륜의 도리에 소홀한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주님을 먼저 택하면 그다음은 주님의 풍요로 채워지게 됩니다.
부모 형제,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혈육을 먼저 택하게 되면 하느님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갈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 안에서도 천상과 연결된 결정을 내려야 하고 좁은 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요구와 대결을 하며 분열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 모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택하면 나머지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넉넉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5장 13절에서 “희망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믿음에서 얻는 기쁨과 평화로 채워 주시어 여러분의 희망이 성령의 힘으로 넘치기를 바랍니다.”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옛말에 “너,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나 자신과의 싸움, 불의와의 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이 과정에서 오는 분열은 참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과정입니다.
진정한 평화를 위해서는 이 분열의 과정을 거쳐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 분명한 것은 하느님을 선택하면 모든 것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 정화의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그때에 환전상들의 가판대를 둘러 엎으시고 누가 기도하는 아버지의 집을 도둑의 소굴로 만들었느냐며 화를 내셨습니다.
사랑을 강조하신 분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행동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불의와 죄악으로 얼룩진 거짓 평화와 맞섬으로써 분열을 가져왔지만, 그 분열은 멸망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참 평화를 전제로 한 분열이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분이 있다면, 특별히 자녀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면, 신앙생활을 하도록 권해야 합니다.
역작용이 날까 두려워하며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급급해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위한 값진 보물을 발견하였으면서도 그것을 자기 혼자만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더 큰 것을 주기 위한 갈등, 분열은 감수해야 합니다.
오래 전입니다.
한 형제님의 팔순을 맞이하여 본인의 뜻에 따라 가장 귀한 선물을 주문하였는데 가족 모두가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8명의 가족이 미사참례를 하였습니다.
그중에는 쉬고 있는 자녀도 있었습니다.
미사봉헌을 마친 후 한 자녀가 말했습니다.
“신부님, 오늘 강론은 제에게 하시는 말씀 같았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자녀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기를 소망한 형제님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도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십시오.
하늘을 차지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비온 뒤에 땅바닥이 단단해지는 것처럼 어떤 풍파가 있은 후에 일이 더 단단하게 여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사안일, 허위나 부정,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선택하는 데 주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참 평화를 위한 분열을 감당할 믿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울타리가 느슨하고 모호한 공동체는 매력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매년 5만 명에 이릅니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500만 명이 흡연으로 사망합니다.
흡연하고 장소를 옮기더라도 흡연자의 옷이나 머리카락 등에 여러 가지 유해 성분이 묻어와 주변 사람에게 건강 문제를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금연을 시작한 지 20분 후에는 혈압과 맥박이 정상화되며, 12시간 후에는 혈액 속 산소량이 정상화됩니다.
2주가 지나면 혈액 순환이 좋아지고 폐 기능이 회복됩니다.
이후에는 여러 질병의 위험이 감소하며, 5~15년부터는 질병 위험이 정상인과 비슷해집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금연을 불가능한 과제로 여깁니다.
혼자 힘으로는 끊지 못해 금연보조제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약으로도 1년 금연 성공률이 20% 전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희소식이 있습니다.
담배를 정말 끊고 싶다면 이곳으로 가면 됩니다.
어떤 국가인데 앞으로 담배 없는 나라가 될 것 같습니다.
담배를 마약과 같은 것으로 규정해 2009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은 앞으로 담배를 죽을 때까지 구입할 수 없게 되며, 담배를 파는 가게도 찾기 어려워질 전망입니다.
이런 법을 만들려는 나라가 뉴질랜드입니다.
수십 년 후 뉴질랜드 자체가 금연할 수밖에 없는 국가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된다면 금연하고 싶은 사람들, 혹은 담배 연기가 싫은 사람들에게 천국은 어디가 될까요?
바로 뉴질랜드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천국을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세속-육신-마귀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 공동체에 들어오기만 하면 그것들을 끊고 사랑의 법만으로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니 사탄과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이들은 그냥 교회 안에만 머물면 됩니다.
예수님의 공동체는 처음에 가진 재산을 다 팔아 봉헌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법이 얼마나 엄했는지, 재산의 반만 바친 하나니아스와 사피라는 벌을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 사람을 많이 늘려주신 이유는 돈 걱정하며 살 필요가 없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매력을 풍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가톨릭교회는 그런 매력을 풍기고 있는지 의구심이 듭니다.
우리가 신자가 얼마냐고 물으면 한국에 한 500만 정도가 된다고 말합니다.
세례만 받으면 공동체 일원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예수님께서 처음에 계획하셨던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배울 수 없습니다.
한 나라가 담배를 팔지 않아야 ‘금연하려면 무조건 뉴질랜드로!’라는 말이 성립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금연하고 싶은 사람에게 매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범위를 좁힌 것이 3년에 한 번 고해성사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무금을 많이 내고 단체에 속해 봉사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바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신앙생활 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공동체는 매력을 잃고 또 그 안에서 성장도 할 수 없습니다.
강형욱의 ‘개는 훌륭하다’에서는 주인의 법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 개들이 많이 나옵니다.
개들이 곧 법입니다.
그리고 주인은 개들에게 자비롭고 개들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주인을 물고 개들끼리 서로 물고 싸우는 것을 허락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지옥이 되어갑니다.
강형 훈련사는 그건 개들을 방치하는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개를 키우거나 더 데려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저는 교회에서 에덴동산의 법은 지켜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느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선악과가 바쳐졌습니다.
교회의 일원이면 당연히 교무금을 내야 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고백하는 의미도 있고, 본당과 교구가 유지되게 하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그다음은 아담과 하와의 친교였습니다.
그 친교 안에서 자녀를 많이 낳으라는 법이 실현됩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세례만 받으면, 혹은 3년에 한 번 고해성사만 드리면 신자로 인정하겠다는 태도 자체가 어쩌면 자비롭게 보일 수는 있지만 교회 전체 이미지에는 좋은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놓으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신 세례를 통해 세상에 뿌려지는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성령의 불이 붙여진 사람과 붙여지지 않은 사람, 두 부류밖에는 없습니다.
선이 명확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령의 불을 붙여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어디로 와야 하는지 명확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주님께서 세우신 성령의 법이 실현되는 더 선이 명확한 공동체가 되도록 쇄신되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게으름, 나태함, 무기력한 삶을 떨치고 불꽃처럼 활활 타오릅시다!>
세상과 인류 구원을 위해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백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분히 복합적이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하는 사람들은 대견스럽게 바라보셨습니다.
오랜 세월 폭군들의 압제에 시달리던 식민지 백성들의 고통 앞에서는 저절로 연민과 측은지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도 하느님께 돌아서지 못하고 과거의 악습에 푹 빠져 도무지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 가장 중요한 자신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오늘 하루 희희낙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무런 준비도, 변화를 위한 노력도 없이,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영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시선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고, 강력한 경고 말씀이 뒤따랐습니다.
오늘 엄청 강력하고 섬뜩한 경고 말씀은 이런 분위기를 배경 삼아 나온 것이었습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루카 복음 12장 49절, 51절)
‘세상에 불’ ‘평화가 아니라 분열’ 등의 강력한 표현은 묵시 문학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이라, 조금 난해하기에 잘 새겨들어야만 합니다.
묵시 문학에서는 종말이 다가오면 가정에서부터 우주 전체에 이르기까지 붕괴 현상이 초래될 것을 예언합니다.
따라서 가정의 분열은 종말이 임박했음을 의미하는 전조라는 것입니다.
한 가족 안에서, 다섯 식구 중 3:2로 갈라져 맞설 것이라는 말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이 맞설 것이라는 말씀, 참으로 듣기에 거북하고 난감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종말이 다가오면 하느님을 최우선적으로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즈카리야서에는 더 끔찍한 말씀이 적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온 땅에서 삼 분의 이가 잘려 죽고 삼 분의 일만 살아남으리라.
나는 그 삼 분의 일을 불 속에 집어넣어 은을 정제하듯 그들을 정제하고 금을 제련하듯 그들을 제련하리라.”
(즈카르야서 13장 8~9절)
우리 역시 더 이상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결단을 내려야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지르신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밤은 낮처럼 밝아졌고 그분께서 드신 횃불이 온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무관심과 타성은 쫒겨나야 하고, 예수님의 불은 세상 방방곡곡으로 번져나가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가장 경계하시는 백성들의 삶은 열정없는 삶입니다.
살아있어도 이미 죽어버린 삶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뜨뜨미지근한 삶입니다.
열정이 없는 신앙, 불꽃이 없는 설교, 영혼이 없는 얼굴, 뜨거운 사랑 없는 삶!
이제는 떨쳐버려야 할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짧은 지상 생활은 그야말로 불꽃 같은 삶이었습니다.
매일 활활 타올랐습니다.
하루를 천년처럼 그렇게 알차게, 역동적으로 살아가셨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인생인데, 금쪽같은 순간들이었는데, 아무런 영양가 없이 빈둥빈둥 허송세월한 지난 삶이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럽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우리네 일상이 비록 구차스럽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불꽃처럼 타오르는 삶을 추구해야겠습니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 대상, 존재라 할지라도 지극정성으로 대하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게으름, 나태함, 무기력한 삶을 떨치고 일 분 일 초라도 의미 있게 보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물 창고’ 수도공동체 - 참 좋은 도반들>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시편 84,10-11ㄱ)
주님의 뜨락 수도원입니다.
어제는 참 행복했던 날이었습니다.
색다른 깨달음 때문입니다.
수도공동체가 순간 '살아 있는 보물 창고'라는, 또 수도형제들이 '참 좋은 도반들'이란 깨달음에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오늘 주일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또 여러 수녀님들이 내일 성모승천대축일을 앞두고 고백성사로 영혼을 깨끗이 한 사실이, 오랜만에 정성가득 담긴 성전의 꽃꽂이가, 또 저녁성가연습 시 성모승천 대축일 전례 노래들이 흥겹고 행복하게 했습니다.
제 주특기는 자랑입니다.
자랑은 팔불출이라 하는데, 제 하느님 자랑, 교회 자랑, 전례 자랑, 성인 자랑, 형제 자랑은 순수한 사랑의 표현이기에 팔불출엔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선 '살아 있는 보물 창고' 수도공동체에 속한 '참 좋은 도반들'에 대한 자랑입니다.
하나하나 '신의 한 수' 같은 도반들입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컴퓨터 사용이 익숙치 않아 도움을 청했을 때 한 '컴퓨터 도사'인 형제가 말끔히 해결해 주었고, 문제가 있을 시 걱정을 했더니 언뜻 스치던 윗 대답이 참 마음 흐뭇하고 든든하게 했습니다.
“눈만 뜨면 일입니다.
보이는게 일이요, 끝없는 일입니다.”
어제는 멀리 온종일 외출하여 감곡에까지 가서 복숭아를 가져온 형제가 토요일 오후에도 일하고 돌아왔기에 “일하고 왔느냐?”에 대한 화두같은 위 대답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앞서 형제가 '컴퓨터 도사'라면 이 형제는 '일의 도사'입니다.
수도원 내 다방면에 걸쳐 행하는 무수한 일들을 보면 절로 그 일눈에 경탄하게 됩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나름대로 어느 방면에 도사의 경지에 이른 수도형제들이요, 그리하여 '주님을 섬기는 공동체'인 수도원이 '참 좋은 도반들'로 가득한 '살아 있는 보물 창고'임을 감사로이 깨닫고 행복했습니다.
또 엊저녁 오랜만에 길게 참석한 공동 휴게 시간 역시 사랑의 소통 시간에 '살아 있는 보물 창고'임을 깨닫고, 또 성가연습 시 늘 부르던 내용들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아 행복했습니다.
새삼 행복도 은총의 발견임을 깨닫습니다.
성가연습 시 새롭게 와닿은 내용은 전례 자랑이 되겠습니다.
모두가 노래로 흥겹게 부른 찬미 감사기도입니다.
“어느덧 새벽해도 꺼져가오니, 빛이요 영원한 빛 성삼이시여,
복되신 삼위일체 하느님이여. 그 빛을 우리 맘에 부어주소서.”
얼마나 아름다운 내용의 찬미가인지요!
이어지는 셋의 후렴에 이은 응송, 계응, 마리아의 노래 후렴 모두가 영혼에 큰 기쁨을 줬습니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를 빌어주라.”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 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
“주 예수는 당신 자신을 낮추셨기에,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원토록 높이 올리셨도다.”
“해뜨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주님께 올리는 나의 기도 분향같게 하옵시고, 쳐든 손 저녁 제사같게 하옵소서.”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으니, 이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하는도다.”
이런 은혜 충만한 내용의 전례가 삶을 만듭니다.
삶의 전례화를 통한 존재론적 변화의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이니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전례 은총의 힘이, 공동체의 힘이, 공동체를 통한 주님의 도움이, 어려움을 타개해 가는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공동체를 통한 주님의 세 가지 가르침입니다.
첫째, “목표를 지녀라!”입니다.
아무리 구름 짙거나 비오는 캄캄한 날에도 그 배후에 빛나는 태양처럼, 우리의 영원한 희망의 태양, 사랑의 태양인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를 정확히 가르쳐 줍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면서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참된 목표입니다.
세상에 사랑의 불을, 말씀의 불을 지르러 오신 예수님이요,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예수님 사랑의 불이 되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예수님의 평생 내적 고뇌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런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 또한 받아야 할 온갖 시련과 마침내 죽음의 세례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예수님의 오심 자체가 분열의 심판을 초래합니다.
파괴적 분열이기보다는 참된 평화에 이르는 과정중의 창조적 분열입니다.
참평화이신 예수님 앞에 거짓 평화는 그 정체가 폭로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 자체로 인해 빛과 어둠, 참과 거짓, 생명과 죽음이 둘로 나뉘니 저절로 분열이요, 이는 참평화에 이르는 과정의 잠정적 분열, 창조적 분열이니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님과 함께 끝없이 인내와 기다림의 믿음중에 묵묵히 잘 견뎌내면 됩니다.
참으로 늘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 목표를 바라볼 때 온갖 분열, 불화, 갈등 중에도 꿋꿋히 반듯하게 주님의 진리로, 주님의 평화로, 주님 사랑의 불로, 주님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절망하지 마라!”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입니다.
살아계신 그리스도입니다.
영어로 “Christ is alive!”
한눈에 감격스럽게 와닿던 말마디가 “그리스도는 살아 계시다!” 우리말로 번역되니 참신하게 안 와닿는 것입니다.
“You are ‘the now’ of God”, 한눈에 감동으로 와닿던 말마디가 “너희들은 하느님의 ‘지금’이다” 우리말로 번역되니 역시 참신하게 안 와닿으니 참 신기하네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기에,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지금’이기에 결코 절망할 수도 없고 절망하지도 않고 절망해서도 안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목표로 둔 이들은 결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절망은 불신에서 기인하는 죄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가 그 좋은 증거입니다.
참으로 사면초가, 고립무원의 절망적 사지에서 주님의 은총으로 구출되는 예레미야입니다.
저수 동굴에 빠져 여지없이 죽게된 예레미야를 주님은 에벳 멜렉을 통해 치드키야 임금을 움직여 살려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레미야 예언자가 죽기 전에 그를 저수 동굴에서 꺼내어라.”
주님을 목표로 하여 주님과 함께 사는 이에게 절망은 없다는 깨우침을 주는 실화입니다.
그러니 예레미야처럼 늘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과 함께 사는 이에게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은 좋은 이웃을 통해 도와 주실 것입니다.
제가 여기 불암산 기슭에 34년 동안 정주하면서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三望했던 기억은 없습니다.
셋째, “꾸준하라!”입니다.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 경주입니다.
우보천리牛步千里, 호시우행虎視牛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오늘 지금부터가 중요합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 살았어도 도중하차하여 무너져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골인 지점을 눈앞에 두고 무너져 내리면 얼마나 허망하고 억울하겠는지요!
하느님은 회개한 자들의 과거는 불문에 붙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지금입니다.
지금부터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것이요, 끝까지 골인지점을 통과할 때 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과거가 아니라 내일의 희망의 주님을 내다 보며 오늘 지금 여기를 살아야 합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입니다.
역시 히브리서 저자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구름처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짐과 그토록 쉽게 달라붙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 갑시다.”
얼마나 좋은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이요 믿음의 증인들인지요!
교회가 바로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물 창고’입니다.
특히 저희로 말하면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물 창고' 수도공동체 안에 있는 살아 계신 주님이, '참 좋은 도반들'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참으로 언제 어디서나 주님 목표를 향하여 바라보며 살게 하고, 절망하지 않게 하고, 한결같이 꾸준하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시편 130,7)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강의를 들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인 1972년에는 ‘국민소득 1,000불, 수출 100억불’이라는 구호가 학교 벽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1980년이 되면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이 중진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제품보다는 일본, 독일, 미국의 제품을 선호하였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선진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지 못하였습니다.
2022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35,000불이 넘었습니다.
수출은 6,400억불이 넘었습니다.
경제적인 수치에서 대한민국은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문화와 예술에서도 대한민국은 ‘한류’를 전하고 있습니다.
‘기생충, 미나리’와 같은 영화가 국제적인 상을 받았습니다.
‘오징어 게임, 킹덤, 이상한 변호사 우병우’와 같은 드라마는 세계인들이 즐겨보았습니다.
‘BTS'는 춤과 노래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대한민국은 ’방역‘에서도 성공을 보였습니다.
‘추적, 검사, 테스트’라는 방식으로 확진자를 줄였고, 의료진의 헌신과 시민들의 협조로 방역에서도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정말 눈떠보니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눈물 젖은 빵을 먹었던,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막아냈던 분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앞서서 선진국의 문턱을 넘었던 나라들이 있습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가 있었고, 아시아의 필리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들은 선진국이란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제는 낙후되었고, 시민들의 삶은 어렵습니다.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트린 탓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제대국인 일본은 선진국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 30년 동안 거품이 꺼지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선진국은 문턱을 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선진국의 자리를 오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이 필요합니다.
일본이 어려움을 겪는 것은 세계 최고라는 자만심 때문에 혁신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이 스마트 폰, 스마트 TV에서 발전이 더딘 것은 아날로그에서 세계 최고라는 자만심에 취해서 디지털로의 전환을 늦게 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의 연결에서도 일본은 전화선으로 세계 최초로 인터넷 망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전화선으로 인터넷 망을 연결하는 대신에 광케이블로 인터넷 망을 구축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망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기름을 기반으로 하는 차에서는 세계 최고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차 시장으로 진입하는 데 늦었습니다.
일본의 거품 붕괴는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있는 대한민국에는 ‘타산지석’이 되고 있습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고 하듯이 대한민국도 혁신과 도전이 없으면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교회는 세계 교회를 선도하였습니다.
화려한 건축과 예술은 대부분 교회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마을의 중앙에는 늘 교회가 있었습니다.
신앙은 삶이었고, 신앙은 생활이었습니다.
유럽 교회의 제도와 교리 그리고 신학은 현대사회의 기틀이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아시아와 아메리카로 떠났고 그곳에도 교회를 세웠습니다.
유럽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는 교회에서는 ‘선진국’이었습니다.
유럽의 표본은 교회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사상과 이념의 대립을 겪으면서 두 번의 세계전쟁을 겪으면서 유럽 교회는 세계 교회를 선도할 힘을 잃었습니다.
유럽 교회의 신자들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에 심취하면서 교회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급격히 고령화 되었고, 성직자들의 수도 줄었습니다.
신자들이 떠난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유럽 교회에 영향을 받았던 북미 교회의 사정도 유럽 교회와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성직자 수는 줄고 있고, 고령화된 교회는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교회가 통폐합되고 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는 저는 그런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성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10년마다 신자는 100만 명씩 늘었습니다.
많은 교회가 새로 신축되었습니다.
7개의 신학교가 설립되었고 사제들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도 최근 들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성소자가 감소하고 있고, 젊은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으며,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도 변화와 쇄신의 바람이 불어야 합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눈에 보이는 유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유산을 물려주려고 하였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신앙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에 충실하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삶입니다.
자녀들의 결혼도 세례를 받은 신앙인들 중에서 선택하도록 하였습니다.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주시는 거룩한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배우자가 신앙이 없으면 교리를 받아 세례를 받은 후에 혼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이 학력과 능력 그리고 재산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일과 삶이 균형과 조화를 이룰 때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쉽지 않습니다.
하루 8시간 일을 마치자마자 삶 안에서 또 다른 행복을 만날 수가 있을까요?
일하는 8시간이 분명 적지 않은 시간입니다.
예전과 비교하면서 요즘 사람은 너무 놀고먹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일과 삶의 조화를 이루겠다면 일하는 시간은 분명히 줄어야 할 것입니다.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에 대한 대가가 일에 대한 보수라고 하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서 일의 강도와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될 때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과 삶의 균형과 조화는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텔레비전을 좋아해서 그 안에 푹 빠져서 살고 있다면 자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연 만족스러운 삶이 될까요?
유튜브, 게임 등은 어떨까요?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만족스러운 삶은 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줄 삶을 만들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는 것도 있고 또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밖에도 자기 취미 활동에 집중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삶의 영역에 대한 만족도를 높여야 지금 내가 하는 일과 삶의 균형과 조화도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악을 실천할 때 얻을 수 있을까요?
반대인 선을 실천할 때 얻게 될까요?
주님께서는 악이 아닌, 선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당신의 삶을 통해서 계속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커다란 충격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라고 시작하는 예수님 말씀은 평화가 아닌 불화를 일으키러 왔다고 하시면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했을 것입니다.
특히 부자간, 모녀간, 고부간의 반대를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
가족 안에서 일치가 아닌 분열을 일으킨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선 자체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분열된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옳을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도 악은 있을 수 있고, 가족을 위해 악이 합리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면서 악을 합리화하며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악보다 선을 실천하면서 삶의 만족도를 높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등이 선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선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진정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다시 한번 힘내서 진리를 향해 갑시다.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히브 12,1)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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