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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8일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제1독서 : 1열왕 17,1-6
복 음 : 마태 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참행복
-행복은 발견의 은총이자 선택이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찾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2,2-3)
늘 들어도 감미로운 오늘 아침 성무일도 중 시편 말씀입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웃을 때 얼굴은 그대로 꽃 같습니다.
하여 보속 처방전 말씀에 많이 찍어 드리는 스탬프, “웃어요!”라는 말마디입니다.
그대로 이웃에게 전염되는 행복의 바이러스, 웃음의 바이러스입니다.
하여 행복한 분들을 보면 저절로 사진을 찍게 되고
어제도 어느 행복해 보이는 부부도 사진 찍어 다음 말마디와 더불어 전송해드렸습니다.
“너무 아름다운 부부예요. 늘 멋지고 행복하게 사세요!”
평범한 연중시기가 좋습니다.
6월 초록빛 생명의 계절에 걸 맞는 초록빛 제의 색깔도 편안합니다.
늘 초록빛 영성으로 참행복을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대헌장이라는 산상설교의 서두인 참행복 선언입니다.
영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산상설교중의 참행복 선언으로 영향을 받은 이들은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톨스토이는 물론 종파를 초월해 간디, 불교의 성철스님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모세의 십계명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의 참행복 선언입니다.
모세의 기본적 십계명만으로 참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누구나에게 열려있는 참행복입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언젠가 살아야할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하는 행복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마지막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질문도 ‘행복하게 살았느냐?’는 하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소망이자 기쁨입니다.
하여 예수님도 산상설교의 서두에 참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과연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행복은 발견의 은총이요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발견되는 행복이요, 또 선택해야 하는 행복이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무지에, 탐욕에 눈멀어 행복을, 감사를, 기쁨을 앞에 놔두고도
보지 못해 불행을 사는 어리석은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깨달아 눈만 열리면 널려 있는 행복들입니다.
얼마 전 불암산을 보며 써놨던 시가 생각납니다.
하루에도 눈으로는 수없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등산하는 불암산입니다.
-“수십년/평생을 함께 살아왔어도
덥든 춥든/흐리든 맑든/비오든 눈오든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적 한 번도 본 적 없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늘 한결같다
불암산/나도 그렇다”-
늘 거기 그 자리에서 한 결 같이 말없는 위로와 힘이 되는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바로 불암산이 상징하는바 우리가 늘 찾고 사랑하는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행복의 샘, 위로의 샘이 되시는 하느님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하느님이 주시는 사랑의 행복만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바로 참행복은 하느님께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기도가
바로 하느님이 참행복의 원천임을 깨닫게 합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 깊이에서는 참행복의 하느님을 찾습니다.
자주 고백성사 보속 처방 말씀으로 주는 시편 구절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이런 보속 말씀을 받으면 어떤 분들은 보속補贖이 아니라 보석寶石 말씀이라 기뻐합니다.
오늘 복음도 참행복의 뿌리에는 하느님이 자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오늘 주님께서 행복하다고 선언한자가 누굽니까? 한결같이 결핍된 자들입니다.
1.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2. 슬퍼하는 사람들,
3. 온유한 사람들,
4.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5. 자비로운 사람들,
6.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7.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8.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여덟 가지 행복한 사람들이라 선언 받는 사람들 한 결 같이 결핍된 자들입니다.
각자 참행복 점수를 계산해 봐도 좋겠습니다.
20점은 기본점수로 하고 8개 참행복 항목별 10점 만점에 도합 80점,
합하여 100점 만점에 몇 점쯤 되는 지 미사 후 조용한 시간에 한번 계산해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처럼 결핍된 이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채워주시는
희망의 하느님이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궁극의 희망을 하느님께 둘 때
참행복이요, 언젠가의 행복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이미 하느님을 만날 때 이뤄지는 행복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바로 하느님이 참행복의 원천임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며칠 전 읽은 교황님의 교회의 부유함에 대해 나눈 말씀이 생각납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가난한 데 교회는 왜 그렇게 부유합니까?”
“교회란 말마디는 너무 포괄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사람이 부에, 돈에 속하는 한,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의 마음이 거기에 집착한 탓이다. 그가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그는 더욱 가난해지게 된다.
동시에 복음에 따라 순수한 마음으로 부를 잘 관리하는 부자들도 있다.
그러나 교황이, 주교가, 사제나 수도자가 부유하다면, 그것은 교회에 스캔들(걸림돌)이다.
누구든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려면 모든 부로부터 멀어져야 하고,
‘가난한 마음a poor heart’을 지녀야 한다.
부를 관리하도록 불림을 받았다면 개인적 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들을 돕는데 써야 한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는 말했다.
가난은 ‘생명의 어머니mother of life’이니 타인을 위한 ‘자아의 선물the gift of self’인
‘너그러움generosity’을 낳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난한 자가 너그러울 수 있고 부자가 더 인색할 수 있습니다.
바로 부유함이 주는 참행복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참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도 분명 하느님과 맘몬(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셨습니다.
참 행복을 위해서는 주님이 ‘삶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 잡아야 함을 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엘리야가 참행복한 사람입니다.
외적으로는 가난의 극치이지만 하느님의 배려 중에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며
특별 피정 시간을 갖는 내적으로는 참 행복한 부자 엘리야입니다.
다음 아름다운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까마귀들이 그에게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
바로 하느님을 찾는 가난한 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축복을 주시는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해주는 예화입니다.
하느님의 사람, 엘리야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진리를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을 찾는 우리 모두
참행복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영화를 잘 보지 않아서 극장을 간 지도 꽤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고등학생 시절 때만 해도 극장을 수시로 찾았습니다.
학생이라 돈이 없는 관계로 개봉관이 아닌, 영화 한 편 보는 가격에
두세 편을 볼 수 있는 극장에 가서 온종일 영화를 본 적도 많았지요.
또 지금처럼 좌석제가 아니었기에 똑같은 영화를 2~3번 본 적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영화를 좋아했던 저였습니다.
당시 왜 그렇게 영화에 빠졌을까 생각해보면 재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극장에 붙은 영화 대형 그림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호기심이 왕성했던 시절, 이 그림판은 ‘꼭 보고 싶다’라는 마음을 갖게끔 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어디를 가도 이 대형 그림판을 볼 수 없습니다.
또 당시처럼 인기 있어 화제가 된 영화를 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설 필요 없이
예약만 하면 편하게 그 시간에 맞춰서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당시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요? 분명히 지금보다 불편했던 환경이었는데 말입니다.
불편했던 기억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리움의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는 고통과 시련 역시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진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이런 기억 역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어렵고 힘든 상황이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습니다.
또 내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역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세상의 관점을 뛰어넘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산 위에서 사람들에게 ‘행복선언’을 발표하십니다.
이 행복선언의 첫 마디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부를 경멸하고 하느님 안에서 부유하게 된 이가
하늘 나라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행복선언은 우리 세상에서의 관점을 완전히 뒤바꿔 놓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최고라고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대신 하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를 믿는 사람은 영광스러운 보상을 생각하면서
세상의 어떤 고통이라도 견뎌낼 준비가 늘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을 누리기 바라는 이는 땅에서 받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 불행하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질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늘 나라의 영광에 부합한 지를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순간의 행복이 아닌 영원한 행복,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이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 영원한 만족을 이룰 수 있도록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행복한가요? 아니면, 행복하지 못한가요? 그런데 대체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참 행복”에 대한 선언입니다.
“행복하여라”(μακαριοι)는 용어는 <성경>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행복을 말한다기보다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 강조를 둡니다.
특히, 이 용어는 주님의 길을 걸으며 그분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선언됩니다
(시 1,1;2,12;119,1-2;128,1-2;루카 1,42-45;11,27-28;마태 16,17).
그리고 ‘행복한 사람, 복된 사람'은 어떤 특정 상황이나 특정 태도가 지니는
윤리적, 종교적 가치 기준을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인 “참 행복” 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영적 가난, 슬픔, 온유, 자비, 깨끗한 마음, 의로움 등
인간적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태도를 강조합니다.
사실, ‘참 행복’은 복음적 인간, 복된 인간이 되는 방식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런데 “진복선언”은 두 가지 영성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참 행복’을 지탱해주고 있는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됨’(being)과 ‘함’(doing)이라는 존재론적이고 실천적 영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자는 우리의 ‘꼴 짓는 영성’이고, 후자는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영성’입니다.
곧 존재로서의 영성은 우리의 존재의 틀을 만들고 내용을 채우며
나의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영성이고, 실천적 영성은 존재론적 영성에 살이 입혀진 영성입니다.
이렇게 ‘참 행복’이 지닌 특성은 내면의 성숙이나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행위와 실천으로 살을 입고 구체화 됩니다.
곧 현실에서 육화됩니다.
곧 ‘됨’의 영성은 가난, 슬픔, 온유,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고난)이고,
‘함’의 영성은 하느님께 예속(의탁), 치유, 섬김, 해방, 용서, 회개, 비폭력, 인내이며,
그 복은 하늘나라, 위로, 땅, 배고픔, 자비, 하느님을 봄, 하느님의 자녀, 하늘나라가 됩니다.
그러니 ‘참 행복’은 단지 여덟 가지 덕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존재의 여덟 가지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참 행복’을 통해 존재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일입니다.
<둘째>, ‘참 행복’이 지닌 또 하나의 영성적 특징은 ‘아래로부터의 영성’입니다.
안셀름 그린은 영성의 지향에 따라 영성을 ‘위로 향한 영성’과 ‘아래로부터 영성’으로 구분합니다.
‘위로 향한 영성’은 우리에게 이상적 요소들을 제시하고,
그것은 언젠가는 마침내 채워야 하는 것을 지향하는 영성운동의 방향을 의미합니다.
곧 하느님의 거룩함을 바라보며 그와 하나 되려는 갈망,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영성을 닮아가려는 일련의 모든 영성적 지향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신앙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위를 바라보는 영성운동입니다.
반면에, ‘아래로부터의 영성’은 인간의 현실적인 삶과 고통과 고난으로 말미암은
영성의 새로운 차원을 의미합니다.
곧 고통과 상처, 절망과 아픔 등의 인간적인 상황 속에서
처절하게 하느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체험함으로 말미암는 영성입니다.
이 영성은 ‘인간의 얼굴을 가진 영성’으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세계에서 펼쳐지는
‘살갗’이 드러나는 실재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등한시 하고 있는 인간의 온갖 부정적인 현실조차도
영성의 자양분임을 인정하고, 모든 부정적인 현실이 지닌 영성적 측면을 회복시킵니다.
곧 육체, 아픔, 상처, 고독과 외로움, 절망, 슬픔, 욕망, 세속 등에서 영성의 의미를 회복시킵니다.
진복팔단의 영성은 바로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팔복은 가난, 슬픔, 핍박, 정의를 위한 갈망, 고난 등
우리가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어 하는 주제들이 지닌 풍부한 영성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행복하여라,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12)
주님!
제가 가난을 살게 하소서.
비록 ‘쓸모없는 종’이지만, 당신 앞에서는 부유하게 하소서.
슬퍼할 줄을 알게 하소서.
측은히 여기는 당신의 마음이 제 가슴에 부어지게 하소서.
온유하게 하소서.
겸손하고 양순하신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르게 하소서.
당신 외에는 결코 아무 것에도 목마르지 않게 하소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게 하소서. 아멘.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 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슬픔을
이겨낼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슬픔 속에서도
행복은 피어납니다.
슬픔에
함께 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새로운 행복은
이와 같이
주님과 함께 하는
하나 되는 행복입니다.
주님과
함께하기에
삶의 모든 것이
행복이 됩니다.
슬픔 또한
나누시며 이끌어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함께 나누어야 할
슬픔이며 아픔입니다.
슬픔을 나누는 것이
위로임을 배웁니다.
행복은
슬픔속에서도
주님을 믿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슬픔을 위로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행복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미래의 나에게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
얼마 전에 어떤 청년과 대화하던 중 제가 조금 당황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행복하려면 이래 저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청년은 자신은 행복이 인생의 첫 번째 가치나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다섯 번째라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의 최고 가치가 행복이었고 그것이 바뀐 적이 없었기에
그런 반응은 저를 당황하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행복이 인생의 첫 번째 가치가 아니라면 우리는 자아의 욕구에 속아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자녀의 성공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면
나는 그 가치를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면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말씀도 그런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행복일 것입니다. 우리도 그런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니 나에게 행복을 허락해도 되고 어쩌면 나의 행복이
나를 만들어주신 분께 가장 효도하는 길일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행복해지고 싶어도 그 방법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해답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가난”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저를 잃어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저를 찾으며 몇 시간을 돌아다니셨습니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저를 발견하셨는데
제가 트럭들이 다니는 길거리에서 흙장난하며 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엄마를 찾겠다고, 그러면 행복할 것이라고 찾아다녔다면
그 하루 동안의 행복은 날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저를 찾지 못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멀리 안 가고 주위에서 놀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저를 데려가지 않고 어머니가 저를 찾으실 수 있으셨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찾아오셨다면 주님은 항상 제 곁에 계시고 저희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의 가난입니다.
어렸을 때는 그랬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런 가난한 행복은 잊고
대학에 들어가야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생겼습니다.
저의 책상 앞에는 “나는 공부하는 기계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기계로 지내고 나중에 대학 들어가면 행복하여지자는 말입니다.
그렇게 지옥 같은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대학에 갔더니 행복할 수 있었을까요? 취업 걱정해야 했습니다.
취업하면 행복할까요? 그 나름대로 또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결혼도 해야 하고 직장에서 인정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식으로 행복해지려면 끝이 없습니다.
이런 삶의 형태가 마음이 부자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부자는 많이 가졌지만, 더 가지려 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마치 어린이처럼 부모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주님만 있으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 마구간은 겉보기에는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지만 마구간 자체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더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안에 머무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행복이십니다. 예수님이 머무는 마음이 행복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의 여관들은 마음이 부자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그들은 겉보기에는 이미 가진 것이 풍족하지만 실제로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가난해 보이는 부부는 맞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이 많을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의 행복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영영 참 행복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을 찾는 헤로데에게 자녀들이 다 참혹하게 죽는 비극을 맞습니다.
마음이 부자인 사람들의 운명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네 잎 클로버에 얽힌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네 잎 클로버를 따려고 허리를 굽힌 순간 포탄이 지나가서 목숨을 건지게 되어
‘행운’이라는 꽃말을 지니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흔한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입니다.
우리는 행운이라는 네 잎 클로버를 찾기 위하여
행복이라는 세 잎 클로버를 짓밟고 다닐 수 있습니다.
누군가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은 짓밟으며 ‘미래’의 행운을 발견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부자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발밑에 이미 행복할 조건이 깔려있음을 알고 행운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런 사람의 것입니다.
결국, 네 잎 클로버도 행복해지자고 찾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이 발밑에 있는데 뭐하러 네 잎 클로버를 찾으려고 할까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내 발밑에 그분이 항상 깔려있음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행복을 허락합시다.
내가 행복하면 그분은 행복하게 머무는 나를 찾아오실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처음 갔던 것은 1995년 10월입니다. 벌써 25년이 지났습니다.
교구에서는 보좌신부들에게 성지순례를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당시 대한항공은 이스라엘에 처음으로 취항하면서 교회에 홍보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교인들에게는 ‘성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성지순례를 많이 가는 편이지만 그때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뒤로 복음화학교 담당신부를 하면서 공동체 회원들과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함께 했습니다.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고, 하느님의 은총이고, 제게는 기쁨의 시간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전에 카타리나 성당이 있습니다. 들어가는 문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만일 당신이 여행객으로 이곳에 오셨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순례자로 이곳에 오셨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모든 순례자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였던 아인카렘, 예수님께서 탄생하셨던 베들레헴,
예수님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던 나자렛, 첫 번째 표징을 보여주셨던 가나,
거룩하게 변모하셨던 타볼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저녁을 함께 드셨던 다락방,
밤 새워 기도하셨던 겟세마니 동산, 베드로가 회개했던 닭 울음 성당,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던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제게 가장 큰 감동을 주는 곳은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셨고,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는 예수님께서 표징을 보여주신 곳이 많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 곳,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어 보신 곳,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곳, 그리고 참된 행복을 선포하신 곳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를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두려워마라! 왜 믿음이 약하느냐? 내가 있지 않느냐? 너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2005년 이스라엘 성지순례의 기억입니다.
참된 행복 선언 성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순례오신 분들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어떤 행복을 선포하시겠습니까?’
저는 마리아의 행복선언, 요셉의 행복선언, 아가다의 행복선언, 안드레아의 행복선언을 들었습니다.
순례에 오신 분들은 모두 저마다의 행복선언을 하였습니다.
각자가 처한 환경과 자리에 따라서 행복선언도 내용이 달랐습니다.
현실적인 내용들도 많았습니다.
아픈 사람이 건강을 회복하는 것, 남편이 회사에서 승진하는 것,
자녀가 혼인을 하는 것, 자녀가 취직을 하는 것, 봉사하는 단체가 잘 되는 것,
성전 신축이 잘 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본인의 행복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전쟁이 없는 것, 남과 북이 일치를 이루고 통일이 되는 것,
굶주리는 사람이 없는 것, 병든 사람이 없는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런 행복을 말하고 싶습니다.
“행복하여라! 코로나 바이러스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
발전과 성장이 모든 것이 아님을 알았을 겁니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음을 알았을 겁니다.
행복하여라! 암인 줄 알았는데 오진이었음을 알게 된 사람들,
하루하루가 참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행복하여라! 오늘 새벽에 눈을 뜬 사람들,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토록 원하던 하루였습니다.
행복하여라! 신앙을 가진 사람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월요일 아침입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이 ‘행복선언’을 하신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시겠는지요?
예수님의 행복선언과 여러분의 행복선언을 한번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점이 비슷한지, 어떤 점이 다른지도 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행복의 기준은 ‘비움, 나눔, 희생, 봉사, 평화, 가난’입니다.
이렇게 살면 세상에 채울 것은 적어지지만 하늘나라에 많은 것들을 채울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초의 불을 다른 이웃의 초에 옮겨 주어도 내 초는 잃은 것이 없지만 세상은 더 밝아지듯이
우리의 희생, 나눔, 헌신, 비움은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풍요롭게 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그만큼 더 환해지고 밝아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사라지고 말 것을 채우기 위해서 애쓰는 것도 필요하지만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는 한 주간되시기 바랍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Makarioi!
전 요세피나 수녀
오늘, 예수님의 산상수훈(참행복 선언, 진복팔단)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습니다.
물론 깊이 있게 생각하면 결코 쉽지 않은 내용들이지만,
"행복하여라(Makarioi)!"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이
귓가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다가온 제자들과 당신을 따라온 이들의 눈빛 속 깊은 갈망을 읽으셨을테지요.
그리고 해답을 보여주십니다.
"가난한 마음, 슬퍼함, 온유함,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름, 자비로움, 깨끗한 마음,
평화를 이룸,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음"이
참행복을 누리는 조건이요,
"하늘 나라, 위로를 받음, 땅을 차지함, 흡족함, 자비를 입음, 하느님을 봄,
하느님의 자녀라 불림"이
참행복의 결과라고 하십니다.
물론 하느님이 그 중심에 계실 때 힘을 지니는 조건이요, 결과이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실천해야하는 몫은 결코 쉬운 몫이 아니지만, 그 결과물은 실로 귀합니다.
하늘 나라에 입문하여 하느님을 뵐 수 있다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이천년 전의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하늘 나라에 대한 귀한 팁(tip)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유효하기에 더욱 감사한 "산상수훈"입니다.
어제 한 자매와 이런저런 삶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나온 시간 속에서 만난 사람들, 상황들 그 가운데 받은 상처가 뒤늦게 튀어나와
지금 목표를 향해 집중해야하는 시간을 과거의 상처와 싸우느라 허비하고 있어 괴롭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스트레스 속에 있지만,
하느님 안에서 질문하고 답을 찾고 있어
대화를 마치고 돌아가는 자매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흐뭇했습니다.
아니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대화를 통해 주고 받은 "경청"과 "환대"가 서로에게 "참행복"을 느끼게 해 주었더랬습니다.
지친 마음을 하느님 이야기로 보충하니,
가난한 마음에 생기가 돋고, 과거의 상처 속 슬픔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풀어내니
서로가 상처 입은 위로자가 되어 형제애를 누렸습니다.
결국 하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어야 할 목적지이니
오늘 하루,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이웃들과 상황 속에서 진복팔단을 누릴 수 있도록
"행복하여라!"하시는 예수님의 생생한 음성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행복한 오늘이기를 희망해 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