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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발레리안, 디오클레티안, 갤러리우스
데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탄압한 이후 251년 6월 다뉴브강 이남의 아브리투스 늪지대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한 이후, 갤러스(Trebonias Gallus)가 황제로 집권하였지만, 이후 2년 3개월 동안 그를 포함하여 7명의 황제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그리고 253년 9월 발레리안(Valerian)이 황제로 즉위하였는데 그는 집권 4년만인 257년부터 잔인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탄압하였습니다. 카톨릭과 노선을 달리했던 그리스도인으로서 로마 교회의 장로였던 노바티안도 258년에 순교하였습니다. 이 무렵에는 로마 감독 식스투스 2세등의 카톨릭 신자들도 살해되고 순교하였으며, 키프리안이 258년에 참수되었습니다. 황제 발레리안은 이러한 탄압을 페르시아의 사산조 왕 사푸르 1세와 접전하기 위해 시리아로 원정 나가 있는 동안에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어 원로원 의원들 중에 기독교인들은 쥬피터 신에게 제사지내도록 할 것, 말을 안듣는 기독교인들은 노예로 강등시킬 것, 기독교인들에게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지내도록 강제한 후에 거부하면 전재산을 몰수하고 노예로 팔도록 할 것등을 편지하였습니다.
시리아 안티오크 부근지역에 주둔하였는데, 그 군대에 질병재앙이 몰려와서 큰 병력손실을 입고 사푸르 1세왕과 접전하던 중, 수세에 몰리자, 결사항전 할 수도 있었지만, 사푸르1세가 항복하면 돌려보내줄 줄 알고 260년 6월 항복했습니다. 기독교 탄압후 3년이 못된 시점이었습니다. 그러자 사푸르는 발레리안 황제를 발디딤 인간으로 삼아서 그가 말을 탈때마다 엎드리게 했고, 사푸르는 그의 등을 밟고 말을 타고 나갔습니다. 그는 동물원 원숭이처럼 새장 같은 곳에 갇혀 지냈는데, 자기를 풀어주기만 하면 엄청난 금은 보화를 사푸르에게 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달래었지만, 사푸르는 금덩어리를 발레리안의 입에 밀어넣기도 하고 여러모로 조롱했습니다. 로마에서는 발레리안이 생포된 직후인 260년에 그의 아들 갈레니우스가 황제로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즉각 중단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도 8년후 살해되었습니다.
한편 에데사에서 잡힌 발레리안은 사푸르 왕에게 매일 엎드려 말타는 디딤돌 역할을 하다가 6년만에 살해되었는데, 산채로 살을 벗겨죽였다는 설과 죽은 후에 살을 벗겨서 그 살들을 소금에 절여서 트로피를 만들어 페르시아 신전에 놓여졌다는 설등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는 기독교를 잔인하게 탄압했고 그도 잔인하게 고통당하며 죽었습니다.
이후에 50년 동안에 약 20명의 황제들이 서로 암살 쿠테타 등으로 집권하거나 살해되는 일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디오클레티안 황제는 20년 6개월가량 집권하였고 장기간 기독교를 탄압하였습니다. 이때 카톨릭 역시 탄압을 받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양위하였으나, 나중에 본인이 자살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에게서 황제위를 물려받은 갈레리우스는 마지막 기독교와 카톨릭 탄압을 6년 동안 많이 했는데 죽을 때에 살이 썩어가는 괴사병에 걸려서 311년 사타구니와 배가 썩으면서 창자가 튀어나와 죽었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 이후 311년 부터 기독교 탄압이 줄어들고 더 이상 탄압하면 안된다는 설이 퍼졌는데, 그러자 탄압받을 때에 황제숭배, 로마 신 숭배에 굴복했던 배교자들인 LAPSI 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도나투스는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침례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들은 다시 침례받을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고 카톨릭교회들과 도나투스를 따르는 무리들인 도나티스트들은 사이가 벌어졌고, 311년부터 카톨릭과 도나티스트들은 확연히 구분되었습니다. 여기에 노바티안 무리들도 합류하였으나 일부는 독자적으로 어느 정도 기간동안 별도로 신앙생활을 하였으며 그들이 노바티안 교파를 형성한 흔적이 있습니다.
(바) 콘스탄틴의 기독교 공인=카톨릭 공인
이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령했는데 실상은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 아니라 카톨릭을 공인한 것이었으며, 이 당시에도 카톨릭과 구분되는 기독교인 도나티스트와 노바티안, 등의 비 카톨릭 기독교인들이 존재하였습니다. 316년 콘스탄틴 군대는 북아프리카 튜니지아 지역을 원정하여 수천명의 도나티스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교회들을 불태우기도 하고, 그들의 교회들을 몰수하여 카톨릭 교회에 넘겨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도나티스트들은 계속 번성하여 북아프리카에서 카톨릭보다 교세가 강하였습니다. 그러나 640년 이슬람의 사라센 군대가 이집트를 점령하고 692년까지 모로코까지 점령하자 도나티스트 기독교인들은 뿔뿔이 흩어지거나 남하하거나 알프스 등으로 숨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북부 알프스 등으로 이동한 도나티스트등의 비카톨릭 그리스도인들은 보도아 (Vaudois)라는 무리를 형성하였으며, 이들은 훗날 왈덴지안들을 형성하는 축이 되었습니다.
321년 3월7일 콘스탄틴은 <존귀하신 무적의 태양의 날에는 모든 공무원들이 쉬어야 한다> 는 칙령을 발령했습니다. 이것은 일요일 예배를 용이하게 하는 한편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쉬지 않는 날이 되므로, 안식일 예배는 어렵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이후 363-64년에 열린 라오디게아 공의회에서 안식일을 준수하는 자들에게, 안식일 예배자들에게 아나떼마, 즉 저주를 축원한다는 결의안이 발표된 이후로 안식일 예배하는 교회는 자취를 거의 감추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로마, 비잔티움, 알렉산드리아를 제외하고는 안식일 예배자들이 주축이었지만 364년을 기점으로 안식일 예배 교회는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사) 니케아 공의회
325년에 니케아에서 열린 니케아 공의회는 두가지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 유월절 행사를 부활절로 바꾸었는데, 이스터로 이름하여 바빌론 여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변경으로 부활절이 유월절보다 앞서는 경우나, 유월절로부터 8-9일 늦게 행사되는 것으로 나와서,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담무스의 부활을 기념하는 행사와 같아졌습니다. 게다가 카톨릭은 그 이전에 40일간 사순절을 행사하여, 에스겔 8장 14절의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하는 관습과 동일한 관습을 행하게 되었으며 여신 이스터를 기념하는 행사가 시행되어 왔습니다.
2) 비숍이라는 주교 또는 감독의 권한이 강력해져서 장로나 사제나 집사들보다 높아졌으며, 성직자 제도가 강화되었는데, 그것은 < 너희 선생은 단 한분 그리스도 뿐이요, 너희 모두는 형제들이니라>( 마 23:8)과는 상반되는 것이며, 신약교회에는 오직 두가지 직책이 있으며, 하나는 장로이고, 다른 하나는 집사였는데, 장로는 감독(에피스코프)으로도 불리웠다는 모임진리를 뒤엎는 것이었습니다.
3)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참석하여, 교회 행사에 관여함으로서 황제의 간섭이나 통제를 피할수 없게 되었고, 로마 황제 곁에 있는 로마 감독의 권한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382년 그라티안 황제가 쥬피터신에게 제사지내던 최고 제사장 직분인 Pontifex Maximus 폰티펙스 막시무스 칭호를 로마 감독 다마수스 1세에게 넘겨주면서 로마 감독은 잡신교 최고 제사장직을 겸직하게 되었으며, 그의 칭호는 막강해졌습니다. 로마 감독은 다른 어느 도시 감독보다 권한이 막강해진 것입니다. 이전에는 로마 감독 빅터 1세가 유월절을 부활절로 바꾸려 하여 로마 제국 도처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지만, 이제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 막강의 권력을 갖고 있어서 아무도 함부로 비난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아) 노바티안과 참 그리스도인 무리들의 이후 발전
251년 노바티안과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비록 소수였으나, 성경말씀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충실하였습니다. 그들은 배도자들, 배교자들이 돌아올 때 합당한 절차를 거쳐서 그들이 참으로 회개하고 다시 침례를 받은 다음에 재입교하는 절차를 받게하였습니다. 노바티안은 그로부터 7년후 발레리안 황제때에 순교하였는데, 그 무렵 키프리안도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저술로는 삼위일체에 관하여라는 책이 지금도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의 묘지가 1932년에 로마 근교 산 로렌조( San Lorenzo) 묘지에서 발견되었는데, 순교자 노바티아노( Novatiano Martyri), 라고 쓰여있다고 합니다. 그와 함께했던 그리스도인들은 후에 다시 있게되는 발레리안의 핍박과 이후 막시미안(자살), 디오클레티안(자살) 막센티우스(콘스탄틴 군에 살해) 갈레리우스( 온몸 괴사, 창자돌출병으로 사망)의 혹독한 핍박을 겪었지만, 살아남아 도나티스트파라는 분파를 형성하여 특히 북아프리카 자역에서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도나티스트: 이들은 311년 도나투스가 카톨릭과 다르게, 교회로 다시 돌아오고자 하는 배교자들에게 다시 침례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카톨릭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도나티스트들은 카톨릭과 결별한 이후,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크게 번성하여 이집트부터 모로코까지에서 카톨릭보다 우세했습니다만 640년 이슬람의 사라센이 카이로를 점령하고 692년까지 북아프리카 전역을 장악하자, 도나티스트 세력은 크게 약화되고 유럽속으로 숨어들어갔습니다.
파울파(폴리시안) 이들은 소아시아, 아르메니아, 코카서스, 앗시리아 지역등에서 번성하였습니다만, 북서쪽의 그리스 정교회와 남쪽의 이슬람 세력의 침략을 받고 약화되었습니다. 이들은 초대교회시대인 바울시대부터 650년경 이슬람에게 억압받고 쇠퇴하였습니다.
네스토리안: 431년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받은 네스토리우스를 따르던 무리들은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에서 어느 정도 번성하였고,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중국에 들어왔으며, 당나라때, 도교 다음의 2대 종교로 경교 (景敎) 로 알려졌습니다. 중앙아시아에는 공동묘지에 이들의 묘비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만주 요나라에서도 번성하였고, 아마도 한국,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전파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당나라에는 635년 알루펜에 의해서 전파되었으며, 마르코 폴로때에 그가 원나라 세조 시대에 카톨릭을 전하려 했으나, 경교 세력에 밀려서 전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보고밀: 하나님의 친구들로 불리우던 이들은 불가리아에서 보스니아에 이르는 지역에서 활동하던 그리스도인들로서 카톨릭에 강력히 저항하였고 헝가리 지역에 이르는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크로아티아 등으로부터 몰려오는 카톨릭 세력과 남쪽의 코소보 지역의 이슬람 세력에 저항하다가, 카톨릭에 항복하느니, 차라리 이슬람의 터키에 항복하겠다고 하여 오토만 터키에 복속되었고, 약 20만명이 포로 잡혀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슬람을 택함으로서, 성경에의 접근이 가능한 카톨릭보다 믿음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길을 걷게되었는데, 그들이 포로잡혀갈 때에 성경들을 땅속에 묻어두고 떠났다고 합니다.
알비진: 알비파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카톨릭에 의해서 가장 참혹한 학살을 당했는데, 이들이 당한 학살은 십자군 원정때, 특별히 알비파를 살육 멸종시키기 위해 알비 십자군을 결성하여, 살인 강간, 절도 강도 행위를 한 자라도 알비파를 죽이는 일을 수행하면 죄가 용서되어진다고 바티칸에서 포고하기도 하였습니다.
카톨릭은 이들이 2개의 신, 즉 선한 신과 악신을 믿는 2신론자들이라고 규정하고 이단이므로 학살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카톨릭은 그런 식으로 참 기독교인들로서 자기들의 우상숭배, 마리아숭배, 교황제도, 유아세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성경대로 주장하는 것은 주장했다고 말하지 않으면서 피살자들이 듣도 보도 못하고 주장한 적이 없는 교리를 주장했다고 누명을 씌워 왔습니다. 존 밀튼의 실락원은 카톨릭에 의한 알비파 살육을 다룬 것으로, 노인들도 태워죽이고, 젊은 남녀들은 고문후 살육하는 방식을 썼으며, 그들의 어린 아기들은 바위에 머리를 내쳐서 죽였습니다. 그 참혹한 현장에서 불태워진 집들의 연기나는 모습을 그린 책이 실락원이라 믿어집니다. 카톨릭은 그들이 워낙 이단이었으므로 그렇게 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데, 실상은 기본교리에는 카톨릭 처럼 3위1체를 믿었고, 다만 유아세례, 교황제도, 우상숭배, 마리아 숭배, 죽은 성인들에의 기도 등의 실행과 교의에 반대했던 사실이, 그들의 남은 무리가 보고밀로 가서 합류한 사실로만 보아도 증명된다고 합니다. 이들의 참혹한 카톨릭의 잔학상에 관한 증언들이 보고밀이 나중에 카톨릭에 굴복하기 보다는 이슬람에 굴복하자 하는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4세기경부터 14세기까지 프랑스 지역에서 번영하였습니다.
왈덴지안: 이들은 알프스 남부의 산골짜기에 거하던 보도아 기독교인들( 아마도 노바티안의 무리들의 후예들)이 북상하며, 독일의 산악지대에 거주하던 그리스도인들이 합류하여 카톨릭과 다른 교리와 실행을 지켜왔습니다. 그들을 심문한 종교재판관( 호노리우스)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한 여자 신도를 심문한 결과 자기들의 교회는 콘스탄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장로에 해당되는 베베라는 형제가 모임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카톨릭에서는 이 왈덴지안을 피터 왈도라는 사람이 1180년경에 시작했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왈덴지안은 콘스탄틴 이전까지 거슬러올라 간다는 말이 맞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카톨릭의 비리와 모순 95개 조항을 내걸었을 때에도 스타우핏츠라는 사람에게서 조언을 얻기도 했지만, 왈덴지안 신도들의 전도를 받고 1515년 거듭났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롤라드: 영국의 비카톨릭, 기독교인 집단으로 위클리프가 대표적 인물이며, 왈덴지안과 같은 신앙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얀 후스에게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위클리프는 성경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후사이트: 1414년 프라하 대학 교수 이안 후스가 오늘날의 복음 침례교회, 형제모임 등의 교리와 비슷한 교리를 가르치며 카톨릭의 모순을 비난하자,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23세가 후스의 신변안전을 보장해줄 터이니, 콘스탄스에서 열리는 공의회에서 당신의 신앙을 소명하라는 요구를 받고 가지 않으려 했으나 자꾸 신변 안전 보장을 약속하면서 자기 신앙을 소명하지 않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며 협박하기도 하자, 거기에 갔지만 얼마되지 않아서 후스는 갇혔고, 나중에 콘스탄스 호수가에서 1415년 화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된 수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들고 일어나서 후스파를 형성하며 개혁운동을 벌였던 것입니다.
이외에도 농민운동, 재침례파운동 등이 루터의 개혁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믿어집니다.
이후에는 스타우피츠, 왈덴지안 등에서 복음을 들은 마르틴 루터가 카톨릭 개혁의 포고문을 걸어놓아서 종교개혁이 1517년부터 시작되었고, 메노나이트, 모라비아 형제단, 웨슬레의 감리교 운동, 플리머드 형제단으로 이어졌습니다.
(자) 신사참배와의 유사성
일제하의 조선 기독교가 대부분이 일제 압력에 굴복하여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그들이 신사참배는 종교행사가 아니라 국민의례다 하여 다수가 참여하였고, 장로교가 1938년 9월 10일 신사참배를 결의할 때, 평양 노회장 박응률, 박임현, 길인섭, 신임 총회장 홍택기가 찬성하였고, 김길창의 인솔하에 평양 신사로 가서 참배하였습니다. 이에 선교사 방위량(윌리엄 블레어), 선교사 원세열, 선교사 한부선이 반대하였고, 30여 선교사는 퇴장하였습니다. 이 총회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치열한 사전 공작으로 친일파들을 앞세운 전략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감리교 양주삼, 김종우, 성결교의 이명직 등이 신사에 참배하였으나, 성결교는
그들의 4대 교리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의 하나인 재림이 문제되어 자진 해산하였고, 침례교, 안식교 교단들이 자진 해산하였습니다. 기독교에서 뚜렷이 끝까지 저항한 교단은 침례교가 유일하다고 하며 많은 사람들이 투옥되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전국에서 약 50명이 순교하였으며, 2000명 이상이 투옥되었고, 수만명의 기독교인들이 조용히 또는 비밀리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었다고 믿어집니다.
주기철, 최봉석(최권능), 최상림, 박관준 등이 순교하였으며, 주남선, 최덕지, 이인재 조수옥 최인규 안이숙 등이 저항하였으며,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한상동 목사는 1945년 8월 17일 평양에서 출옥하여 이듬해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를 세웠고,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들이 바로 고신파입니다.
반면에 카톨릭 교회는 1936년 5월 18일-23일 교황청은 교황 피오 11세의 지시에 따라 일본 천주교에 훈령을 내려 신사참배는 문화인의 애국행위이므로 참여하라 하였고 이에따라 모두 신사참배에 참여하였으며 당시 경성 교구장 노기남 대주교는 매달 한번씩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으나 32명의 신부등이 약간의 저항을 벌인 정도였습니다. 카톨릭에서 신사참배 거부를 이유로 순교하거나 투옥된 사람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불교도 신사참배에 적극 참여하고 협력하였습니다. 다만 만해 한용운 같은 사람은 극히 예외로 일제에 저항하였습니다.
여기서 신사참배 문제를 다룬 이유는 카톨릭이 형성된 251년 상황이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한국 기독교의 주류 교단들과 아주 흡사하다는 것이었고, 반대로 노바티안 등의 참 기독교 무리는 일제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해방 후 출옥한 출옥성도들과 흡사했다는 것입니다. 해방후 북한에서는 두 달간 참회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회개운동이 미미했으며, 한경직 목사가 여러 번 신사참배 사실을 시인하고 회개한 정도였습니다.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교회들은 큰 건물들과 많은 돈을 갖고 교세를 확장시켰지만,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한 신사참배 거부 교인들의 교회는 매우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교회들로 발전했습니다. 이것이 251년 쥬피터 우상 숭배 교인들의 집합체였던 카톨릭과 그에 반대했던 노바티안의 그리스도인들의 차이와 같았습니다. 한국에서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교단들은 정통 주류 교단으로 알려지고, 소수의 신사참배 거부 교인들, 출옥성도들, 순교자들을 따르는 무리들은 광신도 극렬집단으로 비난받던 시절을 지나왔습니다.
(차) 카톨릭의 세계 종교 통합 노력과 종말
계시록 2장
12 퍼가모에 있는 모임의 사자에게 편지를 쓰라. 날카로운 두 날가진 칼을 가진 자가 이것들을 말씀하시니라; 13 네 행위들과 네가 어디에 기거하는지를 내가 아나니, 사탄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 그러나 네가 나의 이름을 붙들고, 나의 신실한 증인 안티파가, 너희에게서, 곧 사탄이 우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했던 날들에도 나를 믿음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도다.
549-546BC에 키루스(성경상의 고레스)는 아나톨리아를 정복하는데 그중 일부였던 퍼가모가 포함되었습니다. 이후에 539년에 바빌론을 정복하였는데 이 무렵 바빌론 제사장 무리가 퍼가모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주전 133년까지 퍼가모는 바빌론 종교의 본산이었으며 그 일을 폰티펙스 막시무스였던 아탈리드 왕조의 아탈루스 왕이 담당하였습니다. 주전 133년 아탈루스는 로마제국에 왕국을 넘기면서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도 로마제국으로 넘겨졌습니다. 사실 퍼가모에는 원래 에트루스칸 족이 살았었는데 이미 주전 1200년경에 이탈리아 북부로 이동하였습니다. 그 에트루스칸 족은 유명했던 메디치 가문, 합스부르크가문을 형성하였으며, 전임 교황 프랜시스, 축구선수 마라도나, 메시, 미국의 정치인 낸시 펠로시, 뉴욕주 전지사 앤드류 쿠오모 등은 모두 에트루스칸 족에 해당됩니다.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직책을 넘겨받은 로마제국에서는 73BC에 쥴리어스 시저가 폰티펙스가 되고, 63BC에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되어 44BC 에 죽기까지 쥬피터 신을 위한 최고 제사장직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직책은 시저의 암살이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물려받았고, 이후 로마제국 황제들이 쥬피터를 위한 최고 제사장직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러한 황제가 있던 로마시의 교회 감독은 순수한 기독교 생활에서는 중요하지 않았지만, 로마제국이 쥬피터 우상 숭배를 강요하던 때에는 그 황제와 제국에 협력 여하에 따라 로마 교회 감독의 권위는 크게 달라지곤 했습니다. 251년 로마제국에 협력하여 주피터 우상숭배에 참여했던 카톨릭 신자들은 이후 로마 황제와 가까워지기 시작하였고 차츰 그 위상이 다른 지역 감독들보다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카톨릭을 공인하고, 382년 그라티안 황제가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을 로마감독 다마수스 1세에게 넘기자, 로마 감독의 권세는 엄청나게 강화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로마교황은 쥬피터 우상에게 제사지내는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을 겸직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우상숭배란 다른 종교에나 해당되지 자기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궤변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카톨릭은 탄생시부터 우상숭배를 관대하게 보는 종교로 출발했던 것입니다. 즉 바벨론 종교가 퍼가모의 에트루스칸 족에게로 이동하였고, 그들이 다시 로마로 진입하였는데, 그 종교에 굴복했던 기독교의 랍시 배교자들이 합류하였다가 그들의 최고 제사장직인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책을 로마 교회가 넘겨받아서 오늘날의 로마교회 최고 지도자들이 된 것입니다.
382년 이후 기독교 탄압의 중심은 바로 바티칸의 카톨릭이 되었던 것입니다.
앞으로는 카톨릭이 세계 종교들을 통합시키고, 그들의 우상숭배에 순종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크게 탄압하고 고문하고 살육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때에 카톨릭은 그들의 본부를 예루살렘 성전산으로 옮기고, 교황이 거룩한 곳에 설것이며( 마 24:17) 또 성전에 앉을 것입니다(살후 2:4)
· 그것은 오슬로 협정 1,2 에 들어있으며, 2015년 6월 26일에 체결된 바티칸-팔레스타인 양해각서에 성전산에 대한 바티칸의 권리 존중이 들어있습니다.( Maintenance of the Status Quo regime governing holy sites) . 카톨릭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가 아니라, 251년 10월 코르넬리우스가 배도자들 랍시들을 모아서 총회를 열고 세운 종교임을 기억해야 하며, 그들의 회개나 기도가 깊이가 없는 것은 성령께서 응답하시기까지 그들이 스스로 어디서 떨어져 나왔는지를 깨닫기를 거부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신학 이론으로 도그마, 교의, 교리를 발전시켜왔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처음 시작할 때에는 그들 중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도 소수 있었으며, 차츰 줄어들어 거의 없었으며, 때로는 전혀 없기도 하였으며 정확한 통계는 하나님이 아실 것입니다.
이제 카톨릭이 주장하는 바, 자기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33년에 세우셨다는 거짓말에 충분히 반박하고 이겨야 할 것입니다.
2026. 9. 13 하토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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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사참배 이야기 하니까 한경직 목사가 생각납니다. 신사참배한 한경직 목사는 장로교 통합교단을 WCC에 가입시키는 데 큰 공이 있고 에큐메니칼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실제로 한경직 목사가 로마카톨릭교황 요한 바우로 2세를 만나 웃으면서 악수를 하는 장면의 사진(아주 가증스러운 사진)이 있습니다. 신사참배 한 것을 회개 했다는 것이 진심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빌리그래함을 초청한 인물도 한경직 목사라고 합니다.그때 통역했던 한국 목사가 현 극동방송 사장 김장환 목사이구요.
중요한 사실입니다.
사실 WCC 문제를 여기서 어느 정도 언급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에의 가입은 신사참배에의 연장선상과 흡사하다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경직 목사가 WCC에 한국 교회 가입시키는데 기여했다는 점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WCC 에 가입하고도 앞으로 우상숭배교와의 활동 연대를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고 지금이라도 가능하다면
벗어나야지 그것은 앞으로의 길이 우상교행렬에 가담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한기총 한국 기생충 총연합회와 같아질 것입니다.
한목사가 회개를 안했다기 보다는 그것의 깊이가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한번 배도하면 그 회개의 깊이를 찾아간다는 것이 어려울 것입니다.
에큐메니칼, ECT : Evangelical, Catholic, Together 복음주의 교회들과 카톨릭 교회들이 함께하자, 이것은 아주 교활한 운동이면서 사회적으로 아주 좋은 호응을 얻을 것입니다
@하토브. 히브리서 6장 4절~6절(배도한 사람이 회개가 불가능하게 된다는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노바티아누스에 대해 크게 2가지 견해가 있는데
노바티아누스는 히브리서 6장 4절~6절 말씀을 이유로 배도한 사람은 어떻게든 절대 교회에 받아 들일 수 없다고 이야기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보통 노바티아누스에 대해서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는 사람이 주장)이 있는 가 하면
노바티아누스는 배도한 사람을 받아들일려면 회개 뿐만 아니라 다시 침례를 받아야 성도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이야기 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보통 노바티아누스에 대해서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는 사람이 주장)이 있습니다.
즉 2개가 서로 모순되는 주장입니다.
@KESLL 노바티안에 대한 평가는 카톨릭들이 그를 비난하는 글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노바티안이 돌아오는 배교자들에게 회개를 요구했고, 회개후 재침례를 요구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공통된 평가로 보입니다. 문제는 노바티안이 요구한 회개가 그냥 화장실에 들어가서 조용히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으로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모독하고, 공개적으로 쥬피터 신에게 제사하면서 예수님보다 상위의 신으로 섬긴다고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예수를 비방하고 모독하며 저주했던 그 저주가 지속되는 줄로 다른 사람들이 계속 여길 것이기 때문에, 공개적인 회개, 참회를 통해서 과거에 공개 행사에서 예수님을 저주했던 것이 무효화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개적 참회 등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며, 더 나아가서 그후에 다시 침례받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랍시들은 결국 코르넬리우스가 초청하는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 편한 일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하였습니다. 그 결과 진정한 회개와 참회가 없었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그만큼 축복하지 않으셨으며, 그들이 깨닫는 깨달음에는
@하토브. 인간적인 회개와 인간적인 성경 연구, 신학연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잘못되었을 때에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되찾아가서 하나님의 사하심이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통해서 통보되어질 때까지 진정한 회개를 했어야 한다는 문제를 던져줍니다( 계 2:5, 요일 1:9). 한번 왕창 배도한 다음에 찔끔 찔끔 수없이 회개한다 해도 진정한 뿌리를 찾아가기 어려울 것입니다.
카톨릭은 251년 1월 총회에서 기독교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그때 그들 스스로가 혹은 키프리안이 축사로 불렀는지 몰라도 카톨릭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토브. 언급한 교회들 중에서 일부 네스토리우스파(아시리아 동방교회)와 왈도파 교회(왈덴시안 교회)는 오늘날 WCC에 가입한 교회들입니다.
카톨릭 교회를 언급한 교부들을 대라고 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Ignatius of Antioch, Irenaeus of Lyons, Augustine of Hippo, Basil the Great, and Gregory of Nyssa are key early Christian writers who explicitly used the term "Catholic Church" or "Catholic faith" in their surviving texts.
Ignatius of Antioch (d. ~107): In his Epistle to the Smyrnaeans, he is credited with one of the earliest known uses of the phrase "Catholic Church" to describe the universal body of believers.
Irenaeus of Lyons (d. ~202): In his major work Adversus Haereses (Against Heresies), he frequently used the term to distinguish orthodox Christia
325년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사람들은 카톨릭으로 고착된 이후이므로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이전 사람들로는 이그나티우스와 이레나에우스 뿐인데, 이그나티우스의 편지는 위작 혹은 주작임을 이미 밝힌바 있습니다. 그것은 카톨릭 개념이 확고히 정립된 이후인 몇세기 후에 쓰여진 글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레니우스의 이단에 대항하여, 라는 책자는 원래 그리스어로 쓰여졌는데, 그것은 하나의 사본도 남지 않았고, 라틴어 사본이 있는데 그것 역시 800년쯤 후의 사본으로서, 수많은 첨가 문장들이 들어있어서 어느 말이 진정한 것인지 구분이 안됩니다. 또 그 안에 카톨릭이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남은 것은 키프리안의 카톨릭 교회의 단결에 관하여 라는 책자인데 그것이 쓰인 때가 바로 251년 10월 전후인데, 그 책자의 내용중에는 여러번 교회라는 말이 나오지만, 카톨릭이라는 말은 한번도 안나옵니다.
따라서 그 책자의 표지에 붙은 카톨릭 교회의 단결이라는 말도 원래는 교회의 단결이었는데, 나중에 카톨릭을 첨가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251년 카톨릭 총회 이후 카톨릭이라는 말은 많이 보급되어 도나투스때에 이른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