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위 내용을 삭제하지 마세요!!
(아래 선 아래에 글을 올리세요!!)
----------------------------------------
왜 애민, 애국의 담론인가?
차례
1. 애민, 애국의 기치는 승리의 담보다
2. 애민, 애국의 기치는 민의 주체적 요구에 화답한 과학적 체계에 근거하고 있다
3. 민은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 집단을 구성하여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간다
4. 애민, 애국의 기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도
5. 현시기 애민, 애국의 기치로 한국 사회의 대전환을 이룩하기 위한 4대 핵심 과제
1. 애민, 애국의 기치는 승리의 담보다
한국 사회에서 민이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기 위해서는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야 합니다. 한마디로 개혁 세력이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개혁 세력이 승리하자면 한국 사회의 실태가 어떻게 되어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 아울러 그 해결을 위해 어떻게 광범위한 사람을 모아가야 하는지가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승리의 관건은 한국 사회의 실태를 명확히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면서 거기에 광범위한 사람을 단합시켜 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 사회의 실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국 사회가 돌아가는 기본적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근거의 기본 틀의 핵심을 살펴보면 반북, 반공, 친미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부분이 있겠지만 나머지는 사실상 미사여구에 불과하거나 반북, 반공, 친미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미군정의 지배를 받으면서 남북 간의 대결을 통한 과정에서 성립되었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 민생, 통일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반북, 반공, 친미를 견지해야 하기에 내용 없는 빈 껍데기의 말 잔치로 끝나는 데서도 명확히 확인됩니다. 한마디로 반북, 반공, 친미라는 명목으로 그 모든 주장이 제약받고 사문화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반북, 반공, 친미의 주장을 깨부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남북 관계는 6.25 전쟁의 아픔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아주 오랜 기간 서로 적대하고 살아왔습니다. 물론 화해하고 단합하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애타는 노력도 아주 오랜 기간의 대결과 적대 관계의 상존으로 인해 도돌이표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사람에게 북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것과 북의 침략에 대항해 맞서 싸워야 한다는 주장이 펼쳐질 때 어디가 이기겠습니까? 상식적인 이치로 본다면 서로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면서 화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자는 주장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자면 서로 간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만, 적대적 관계는 단 한 번만으로도 대립 대결의 분위가 형성되면 바로 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게 아니라 나치즘이나 일본 군국주의 세력이 유대인, 조선인을 적대적인 상대로 몰아붙여 탄압하고 학살했다는 데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인류애와 세계 평화의 옹호 측면에서 보면 독일인과 일본인이 유대인, 조선인과 서로 친하게 지내고 협력하는 게 맞을 것인데, 한번 대결적 분위기가 형성되니 그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역사에서 보여준 사례인데, 거기에다가 남북은 직접 전쟁도 겪었고, 또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군사적으로 대치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든지 대결적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한국에서 살고 있는 이상 남북 간의 대결적 분위기가 형성되면 화해하고 협력하자는 주장보다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단 이기고 봐야 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것입니다.
이런 판단으로 북으로부터 한국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무조건 미국과는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과의 동맹을 반대하면 한국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탄받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이로부터 미국과 불평등한 조약과 협정을 맺고 사실상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데도 정당화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반북, 반공, 친미로 인해서 한국 사회가 외세와 매국노가 주인 행세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외세와 매국노가 주인 행세하는 사회를 극복하고 개혁하기 위해서는 이 반북, 반공, 친미의 논리를 넘어서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개혁이 이루어지기는커녕 본질적으로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어떤 주장을 펼쳐도 반북, 반공, 친미를 위해서 허구화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한국 사회는 지금껏 대통령도 바뀌고 정권교체도 이뤄졌으며, 심지어 대통령을 탄핵하고 파면까지 했는데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한국 사회를 개혁하자면 반북, 반공, 친미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승리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극복하는 대안으로서 반북, 반공, 친미에 반대되는 주장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친북, 친공, 반미입니다. 허나 이것은 반북, 반공, 친미 주장처럼 하나의 입장에 불과하기에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비등비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압도적 우위를 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지금껏 남북 관계는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서로 대립, 대결을 벌여왔기에 이를 극복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거의 이길 수 없는 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반북, 반공, 친미의 논리를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원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애민, 애국의 기치입니다. 그러니까 반북, 반공, 친미이든 아니면 친북, 친공, 반미 등은 영원불변한 것이 아니라 애민, 애국의 기치에 의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는 식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애민과 애국의 기치에 의해 반하는데도 그런 주장을 계속 고집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라와 민족의 이익이 아니라 외세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매국노에 다름 아닌 입장임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의 대립 관계를 애국과 매국의 구도로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국과 매국의 대립 관계로 되면 필승의 구도가 될 것입니다. 당연한 게 매국 행위라는 것이 밝혀지게 된다면 매국노들은 한국 사회에서 설 땅이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상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면 주권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애국 행위일 것이고, 민족이 분단되어 있다면 조국통일을 이룩하려고 하는 게 애국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미국과의 동맹을 위해 주권의 행사는커녕 식민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애국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마찬가지 이치로 남북은 통일되어야 하는데, 남보다도 못하고 서로 대립하여 싸우는 것만이 애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애민, 애국의 기치는 외세와 매국노가 주인 행세하는 사회의 부당성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낼 뿐만이 아니라 외세와 매국노가 자신들의 지배 행위를 정당화하는 반북, 반공, 친미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정당한 대안으로 됩니다. 한마디로 민이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가고 있는 조건에서 애민과 애국의 기치를 내걸어야 반북, 반공, 친미의 논리를 넘어서서 왜 외세의 부당한 지배에서 벗어나야 하는지가 명확해질 뿐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에 반하는 매국적인 행위가 왜 단죄되어야 하는지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애민, 애국의 기치는 또한 한국 사회를 질적으로 바꿔낼 수 있는 계선을 명확히 드러냅니다. 지금껏 한국 사회에서는 6월항쟁과 촛불 항쟁에서 보듯 광범위한 세력을 모아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때의 단결 계선이 질적인 변화를 담보하는 기준선을 명확히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는 외세와 매국노가 주인 행세하는 사회입니다. 그 때문에 한국 사회를 질적으로 바꾸어 개혁하자면 외세와 매국노를 응징하는 기준선을 명확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서 애민, 애국의 기치는 외세와 매국노를 응징하는 그 기준선을 명확히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의 실태에 대한 파악과 함께 그것을 고쳐갈 수 있는 질적 계선이 제시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광범위한 사람들을 하나로 모아내야 합니다. 어차피 세상을 바꾸는 실질적인 행위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 그 무엇이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을 바꿔 가는 준비를 실질적으로 갖춰가느냐는 결국 얼마나 광범위한 사람들을 단합시켜 내느냐에 달려 있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애민과 애국의 기치는 광범위한 세력이 단합할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단합의 기초를 세우는 문제가 중요한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단합을 공고히 하느냐, 그렇지 못하고 또다시 분열의 길로 나가느냐를 가름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단결은 서로가 합의한 사항을 지키기만 하면 이뤄질 것이라고 손쉽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합의 사항을 지키지 않기에 단결이 되지 않는다고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낭만적인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을 보면 합의한 사항을 안 지켰기에 협력관계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합의되지 않은 사항에 대한 입장 차이가 크기 때문에 서로 갈라진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서로 간의 협력관계가 깨지지 않게 하자면 절충의 형태 차원으로 전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물론 절충하지 말라는 것은 자기의 사상과 이념, 주장을 견지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입장을 견지한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길 때 하나의 통일된 입장을 내올 수 있는 부분만큼은 명확하게 단합의 기초로 확립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를 질적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일치된 지점을 명확히 드러내 주면서도 동시에 광범위한 세력들의 다양한 입장과 요구를 실현해 줄 수 있는, 즉 그 실현 전망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기치를 확고한 단합의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민, 애국의 기치는 민이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가고 있는 조건에서 우선 주권을 찾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매국 행위는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된 지점을 보여줍니다. 그뿐 아니라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자면 현실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그 권리를 확대 강화해 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양한 입장을 가진 광범위한 세력들에게 자신들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다는 전망성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애민과 애국의 기치를 내건다면 외세와 매국노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포괄할 수 있고, 또다시 분열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애민, 애국의 기치를 더욱 풍부화하면서 공고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결국 애민, 애국의 기치는 한국 사회의 실태를 분명하게 파악하게 하면서 어떻게 고쳐갈 수 있는가를 명확히 보여줌과 동시에 이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주체, 즉 광범위한 세력들을 하나로 모아낼 수 있는 기초가 되기에 이를 중심으로 단합해 간다면 개혁과 변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민, 애국의 기치는 승리의 담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 애민, 애국의 기치는 민의 주체적 요구에 화답한 과학적 체계에 근거하고 있다
애민, 애국의 기치가 얼마나 정당한 위력을 발휘하느냐는 그 기반이 얼마나 과학적 체계에 근거하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여기서 애민, 애국의 기치는 철두철미 민의 주체적 요구에 화답한 과학적 체계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의 개혁이나 변혁운동은 자연발생적이나 우연에 의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치밀한 과학적 타산하에 진행해야만 승리를 이뤄낼 수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에 기반한 사상과 이론, 방법이 얼마나 과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느냐는 그 우월성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으로 됩니다. 이 대목에서 애민, 애국의 기치는 민의 주체적 요구에 화답한 과학적 체계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애민과 애국의 기치는 민을 주체로 상정하는데, 그것도 주체적 요구에 기초해서 민의 개념을 도출해 냅니다.
주체에 대해 노동자, 시민, 국민, 민중, 민족 등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노동자야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사회 경제적, 계급적 처지를 반영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시민은 어떤 지역이나 국가에 사는 사람을 지칭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보면 신분제 사회의 붕괴기에 새롭게 등장한 부르주아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주되게 부르주아적 시민의식을 함유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국민은 일제의 식민 잔재에 의해 사용되는 황국신민이라는 의미를 사상한다면 주되게 국가 단위의 소속원을 범칭 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중은 계급적 처지를 반영해서 연대와 동맹관계를 형성하는 기층 세력을 지칭하는 것으로 통용되고, 민족은 핏줄과 언어, 지역과 문화의 공통성에 입각해 다른 민족과 구분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시민의식이라는 개념은 일정하게 사람의 주체적 측면을 일부 반영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지금 시기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과제로 되는 조건에서 현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국민이나 민중, 민족은 분명 그 의미는 다르지만 주되게 객관적 측면을 놓고 살펴보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의 개혁과 변혁운동은 주체적 요구에 의해 발전하고 실현되는 것인데, 이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의식을 갖거나 단지 객관적 측면의 반영에 머물러 가지고 어떻게 주체의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이것의 맹점은 거의 똑같은 환경과 교육을 받고 자랐다고 해도 왜 서로 다른 계급의식과 사회적 의식을 갖는지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실상 노동자라면 노동자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라든가, 같은 민족인데 도리어 외세의 앞잡이 역할을 하는 매국노 행위를 한다는 점은 객관적 측면의 반영이라는 각도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급과 민족적 처지를 나타내는 객관적인 토대가 실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사회적 의식과 계급의식으로 저절로 반영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제 주체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객관적 토대를 고려해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주체의 지향과 요구를 더 중시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민은 객관적 측면을 고려하기는 하지만 주체적 요구를 더 중심에 놓고 설정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민은 사회 계급적 처지를 고려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주체적 지향과 요구를 더 중시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사회 계급적 처지보다는 사회와 역사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려는 모든 세력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체적 요구를 중시하게 되니 철학적 범주에서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그저 사람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 즉 민을 의미하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한마디로 민이 있기에 철학적인 개념인 사람이라는 범주가 설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민이 철학적 범주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사람 일반을 범칭 해서 민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사람, 즉 민이 사람이고,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면 진짜 사람이 아니라 짐승 같은 사람이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입장에 있기에 매국노는 민족 문제를 풀어가는 주체가 될 수 없고 응징해야 하는 존재라고 봅니다. 한마디로 주체적 요구는 철두철미 민의 요구로 보고, 이런 민을 상정해서 사회 역사의 주체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민의 주체적 요구를 중심으로 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근거와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은 민이 자기 운명을 주인답게 실질적으로 개척하는 단계로 진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학사에 있어서도 이런 민의 주체적 요구에 화답하기 위한 합법칙적인 발전 과정이 수반되었습니다.
주체적 요구 문제를 철학적 과제로 삼게 되자면 세계가 어떻게 합법칙적으로 변화, 발전하는지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객관세계가 어떻게 발전하는지도 모르는 조건에서 주체적 요구를 실현한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계가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한 근본문제는 물질(존재)과 의식 간의 관계 문제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계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놓고 존재론과 인식론의 영역에서 따져보게 될 때 존재와 의식 간의 관계가 가장 기초적인 범주로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물의 형상이 천차만별이더라도 존재(물질)라는 개념보다 더 기초적인 범주는 성립할 수 없고, 또 수많은 생각과 관념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의식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문제 해결의 관건은 결국 물질(존재)과 의식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선차적이고, 또 인간은 과연 이 세계를 옳게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냐에 대해 그 해답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의식과 물질과의 관계에서 선후차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결국 무엇을 선차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것에 의해 세상의 변화 발전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물질, 즉 존재가 선차적이라면 물질에 의해서 세상이 움직일 것이며, 의식이 선차적이라면 의식에 의해서 세계가 변화 발전하는 것으로 되기 때문입니다. 또 인식의 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이 세상을 인간의 요구에 맞게 개조 변혁할 수 있는가의 문제와 관련되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의 변화 발전 과정을 옳게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조건이라면 어떻게 세상을 개조하고 변혁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세계는 물질로 통일되어 있고 합법칙적으로 변화 발전하며, 인간은 능히 여러 실천 과정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철학사의 과정에 큰 진전을 가져왔습니다. 객관적 토대와 근거가 명확히 세워짐으로써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별할 수 있는 잣대를 세워주었기 때문입니다.
허나 물질과 의식의 관계로만 보면 분명 물질의 반영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는 논리는 성립하지만, 의식 자체의 문제로 들어가면 상황은 복잡해집니다. 인간의 의식은 그저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차원에서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지와 조건이 노동자라고 해서 저절로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형성하지는 않습니다. 주체가 어떤 지향과 요구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래서 한편에서 의식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심지어는 의식의 중요성을 너무 강조한 결과 의식 자체에 의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처럼 여기는 주장마저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의식이 갖는 역할을 명백히 밝힐 필요성이 제기됩니다.
그런데 인간 의식의 역할을 파악하자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살펴보고, 사람의 주체적 특성을 파악하자면 세계와의 관계에서 따져보아야 합니다.
동물도 감정을 갖기에 사람만 의식을 갖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인간의 의식을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의식 문제를 풀려면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주체적 특성을 파악하자면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 문제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사람의 주체적 특성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일방으로 하면서 가장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범주는 세계이기에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질과 의식이라는 가장 기초적이고 일반적인 개념이 있는데, 왜 사람과 세계라는 관계 범주를 또 설정하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물질(존재)과 의식의 관계로서는 이 세상이 물질로 통일되어 있고, 합법칙적으로 변화 발전하며, 이를 인식할 수 있기에 이 세상을 개조 변혁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지만, 인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합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그에 맞게 세상을 개척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와 같은 주체적 요구의 질문은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밝혀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대하고 살아가고 있는가가 밝혀져야 인간의 주체적 특성이 전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세계를 어떻게 대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파악하자면 먼저 세계가 무엇으로 통일되어 있고 변화 발전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알지 못해서는 세계를 대하는 입장 자체, 즉 주체적 요구를 세울 수 없습니다.
이를 보면 물질과 의식의 관계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놓고 살펴보았던 것은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즉 주체적 요구가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을 풀기 위해 필히 겪으면서 먼저 해결해야 할 선행적 과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일정하게 해결된 조건에서는 계속 거기에 매달려 멈춰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인간은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존재인지에 대해 대답해야 합니다. 인간의 주체적 요구에 대해 화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문제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내려주는 것이 철학의 근본문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민이 사회 역사의 주체로 등장하고, 여기서 주체적 요구가 제기되자 이 문제에 화답하기 위한 노력이 이뤄짐으로써 또 한 번 철학사의 획기적인 진전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 문제의 해결이 철학의 근본문제로 다가오는 이상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입니다.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에서 제기되는 근본문제를 해결하자면 인간의 주체적 지향과 요구를 반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세계와 관계를 맺으면서 나타나는 주체적 특성의 최상 경지는 세계의 모든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주인답게 풀어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과 세계와의 관계 문제의 해결은 결국 인간의 주체적 특성과 관련되니만큼 주체의 요구를 최상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측면을 완벽하게 해명해 내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인간의 주체적 지향과 요구는 수많이 제기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이 세계의 모든 억압과 구속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주인답게 개척하며 살아가는 것에 귀결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높거나 완벽한 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의 지위와 역할을 설정하는 데에서 주인이라는 것보다 더 높은 경지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기 삶을 주인답게 살아가려고 한다는 주체적 요구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거나 주인의 지위와 위치를 차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실상 어떻게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고, 주인의 지위와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물질세계는 물질 자체의 합법칙성에 의해 변화 발전할 뿐입니다. 물질세계에서는 중심이나 주인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단 인간은 세계 속에서 자기 삶을 주인답게 풀어가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주체적인 지향과 요구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주체적인 지향과 요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기에 주관적 측면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상 주체적인 지향과 요구라는 것 자체가 벌써 가치관을 내포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의 주관성은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주관성입니다. 인간 개개인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도 된다는 식의 주관적 이해가 아닙니다. 이렇듯 주체적 요구라고 할 때의 주체는 민이고, 일정하게 가치관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관적이기는 하나, 이 또한 인간으로서의 운명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에서 주관적이라고 말하지 않고 주체적 요구라고 표현합니다. 그 때문에 주체적 요구는 그 자체로 객관성을 담보하게 되어 객관성과 주체성이 하나로 통일된 입장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삶을 주인답게 개척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주체적 요구의 최상 경지라고 한다면 인간 존재의 주체적 특성 또한 이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약 다른 데서 찾게 된다면 인간이 세계 속에서 자신의 삶을 주인답게 개척할 수 없다는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측면에서 살펴볼 때 인간은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을 갖는 사회적 존재임이 명백해집니다. 자주성은 인간이 주인답게 살아가려고 하는 지향과 요구를 가진다는 것이고, 창조성은 인간이 세상을 개조하고 변혁하는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며, 의식성은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이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이라는 주체적 특성을 갖춘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주인답게 개척할 수 있으려면 그런 지향과 요구를 지녀야 할 것임과 동시에 그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고, 동시에 이를 담보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체적 특성을 갖추었기에 인간은 주체적 요구를 실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의식의 문제를 옳게 해결하자면 인간의 주체적 특성 속에서 인간의 의식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주체적 특성이 자주성과 창조성, 의식성이라고 하였으니 인간의 의식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는 결국 의식성이 자주성과 창조성에 대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관계 문제에 대해 해답을 찾게 되면 인간에게 있어서 의식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명확하게 파악될 수 있습니다.
의식성은 자주성과 창조성을 담보하고 지지해 주는 관계에 있습니다. 자주성과 창조성이 세계 속에서 인간이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해 가는 데에 있어서 현재 수준 상태의 위치와 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의식성은 이를 고무 추동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모든 의식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 데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의식의 종류에 따라 수준과 역할에 차이가 납니다. 의식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감각으로 감지하면서 감정 등을 느끼는 감각적 지각이고, 또 하나는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과학적 지식이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의 이해관계 및 지향과 요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여 표현하는 사상의식입니다. 여기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사상의식입니다.
감정이나 과학적 지식도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사람의 이해관계 및 지향과 요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사상의식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사람의 행동이 달라지는 것에서 확인됩니다. 정치라는 것이 원래 사람을 조절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데, 이것이 사람의 이해관계를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주성과 창조성을 고무 추동하는 데에 있어서 사상의식이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람의 품격과 능력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은 자주성과 창조성인데, 이를 고무 추동해 주는 원동력이 사상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자주적인 사상의식이 주체적 특성을 견지하도록 하는 결정적인 담보입니다. 물론 모든 사상의식 자체가 자주성과 창조성을 고무 추동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지배 통치하려는 사상을 품었다면 어떻게 주인답게 살아가려는 지향과 요구를 품겠습니까? 그래서 정말로 자주성과 창조성을 고무 추동하는 사상의식은 자주적인 사상의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람의 품격과 수준을 고무 추동하는 원동력은 사상의식인데, 참다운 자주성과 창조성을 담보해 주는 것은 자주적인 사상의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사람으로 하여금 참다운 주체적 특성을 견지하도록 하는 결정적인 담보는 자주적인 사상의식에 달려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세계와 인간 의식의 관계로 놓고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사상의식의 역할을 해명한 데에 따른 것입니다. 자주적인 사상의식이 이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세상을 개조 변혁하여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하려면 자주적인 사상의식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상을 앞세워서 일을 풀어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듯 애민, 애국의 기치는 철두철미 민의 주체적 요구에 대한 해명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민이 사회 역사에 전면에 등장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세계와의 관계 문제를 철학의 근본문제로 놓고 주체적 특성을 해명한 과학적 체계에 근거하고 있음으로써 그 정당성이 확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3. 민은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 집단을 구성하여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간다
민의 주체적 요구를 실현하자면 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민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모르는 조건에서 주체적 요구를 실현하겠다고 하는 것은 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민이 어떤 존재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한국 사회에서 6월항쟁 이후 군사독재 세력이 더 이상 맥을 못 추면서 개인과 집단, 나라와 민족 단위의 모든 방면에서 요구가 분출되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나 농민, 민족 문제 등은 물론이고 환경 문제나 성폭력 문제 등 인간의 삶과 관련된 제반 문제에 대한 요구가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분출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다 보니 결국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존재방식과 활동방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존재방식과 활동방식의 문제가 명확히 정리되면 결국 인간의 제반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게 되는 경우를 보면 이론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제기된 당면 문제를 풀려고 하는 실천 과정에서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빈익빈 부익부의 비참한 현실을 보고 어떻게 하면 여기에서 벗어나게 될까를 살펴보려고 하니까 물질세계의 합법칙적 발전 과정을 설명하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나오고, 민이 사회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니 세계와 사람 관계를 놓고 사람의 주체적 특성을 설명하는 주체사상이 나오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적 요구와 다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인간의 제반 문제를 어떻게 하면 전반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해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 사회 역사의 주체인 민이 살아가는 존재방식과 활동방식을 보게 되고 그로부터 민은 누구나 다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 집단을 구성하여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부분에서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사는 것이 참다운 애민, 애국의 기치로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 개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나 계급 계층으로 존재하고 나라와 민족 단위로 특징지어진다는 주장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동시에 총체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견지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동시적 연관성을 확고하게 견지하지 못하게 되니 각 부분의 파악도 온전하지 못하고 일정한 한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개인으로 파악할 때는 개성을 가진다는 것과 다양성의 관계가 어떠한지, 계급으로 파악할 때는 계급의식과 자주의식 및 집단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나라와 민족으로 파악할 때는 민족과 민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명확히 해명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제한적인 이해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철저히 민을 중심으로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주체의 요구는 사회와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민을 떠나서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체적 요구는 다름 아닌 민의 주체적 요구라는 것을 항상 명확히 해야 합니다.
민의 주체적 요구를 중심으로 파악할 때 개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은 그 자체로 유일한 존재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가장 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개성의 유일성은 남으로부터 자기 권리를 침해받지 않고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려는 주체적 요구로부터 기인합니다. 실상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하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은 독특한 개성을 가진 그 당사자이지 그 누가 아닙니다. 만약 대신해서 주인답게 살아줄 수 있다면 그토록 개성을 강조하고, 심지어 개성의 유일성까지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개성의 유일성은 철저히 민의 주체적 요구, 즉 남으로부터 권리를 침해받지 않고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려는 주체적 요구를 전제한 조건에서만 가능합니다. 이 전제를 망각하게 되면 어떤 것이 참다운 개성의 실현인지가 애매모호하게 됩니다. 민적 풍모와 품성을 저버리면서도 개성의 실현이고, 다양성의 보장이라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필연코 인간을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에 참다운 개성의 실현을 가로막고 말 것입니다. 그 때문에 개성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를 다양성의 보장이라고 설명하기보다는 개성의 유일성을 공인받는 측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주체적 요구를 전제로 하면서 개성의 유일성을 공인받는 측면으로 철저히 바라보지 못하면 다양성이라는 명분으로 개인주의를 조장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또한 개성의 유일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공통의 이해관계가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협력하여 사회의 당면 과제를 해결하여 나간다면 그만큼 개성을 꽃피워가는 데에도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개성의 유일성을 보장한다는 것은 사람마다 수준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차피 개성을 꽃피우려고 하는 것은 주체적 요구입니다. 그래서 주체적 요구를 실현하려고 각자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수준의 차이가 없다면 뭐 때문에 민적 품성과 풍모를 갖추고 참답게 개성을 꽃피우려고 노력하겠습니까? 주체적 노력 여하에 따라 영웅이 탄생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참답게 개성을 꽃피워 영웅이 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누구나 영웅이 되어 참답게 개성을 꽃피워간다면 인간은 누구나 다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인간은 개성을 가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집단을 구성하고 살아갑니다. 인간이 집단을 구성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회를 구성하여 살아가는 데서 비롯됩니다. 사회는 집단적인 힘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고립된 한 개인의 힘으로는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회를 말할 때 집단을 떠나서 논할 수 없습니다.
물론 집단을 구성해서 살아간다고 해서 누구나 다 똑같은 지위를 차지하고 똑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개성의 유일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얼마나 참답게 꽃피우느냐는 주체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는 이치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개성의 평가는 한 개인의 주체적 측면이 주되는 부분을 차지하지만, 집단에서는 집단 자체가 평가 수준이 됩니다. 어떤 집단 자체가 사회에서 위력한 힘을 행사하면 그 집단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이 높아집니다. 그 때문에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하자면 어떤 집단을 형성하고 강화할 것인가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인간이 집단을 구성해서 살아가는 측면에서 계급과 계층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집단을 계급, 계층으로만 대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계급적 지배와 억압이 폐지되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계급이 존재한 이상 계급적 지배와 억압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그 지배와 억압이 폐지되었다면 계급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집단을 구성하고 살아가는 것이 없어지는 것일까요? 계급이 철폐되어 없어지더라도 주체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집단을 조직해서 발전시켜야 합니다. 사회와 역사의 발전은 집단적인 지혜와 힘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해 나가는 미래 사회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데에서도 집단을 놓고 바라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계급적 지배와 억압이 이뤄지는 조건에서는 계급의식의 관점을 확고히 견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계급의식 또한 주체적 요구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볼 때 자주의식은 계급의식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계급적 지배와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이유는 다름 아닌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려는 자주의식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계급의식에 의해 설명되지 못하는 부분도 자주의식에 의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을 이용해 자연을 어떻게 개조할 것인가는 계급의식과 일정한 관련을 맺고 있지만,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것 자체는 계급의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연의 구속에서 벗어나 주인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을 적극 발전시켜야 합니다. 자기 삶을 주인답게 개척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주의식과 계급의식은 서로 배치되는 관계가 아닙니다. 당연한 게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려고 하는데, 계급적 지배와 억압을 허용한다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래서 자주의식은 계급의식을 자체로 포함하면서도 모든 구속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하며 살아가려는 주체적 지향과 요구를 포괄하게 됩니다. 이런 자주의식을 근간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바로 인간은 집단을 구성하여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주체적 요구를 집단의 힘으로 풀어가야 한다는 입장은 주체적 수준에 맞게 수많은 조직 결성을 추동함과 동시에 주체적 수준과 능력을 더욱 끌어올리게 만듦으로써 주체 역량의 확대 강화에 확고한 밑천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사람은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 집단을 구성하여 살아가면서도 동시에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갑니다.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간다는 것은 이것을 삶의 단위로 해서 운명공동체 집단이 공고하게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운명공동체 집단이 형성됨으로 하여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사회가 운영되고 관리됩니다.
운명공동체 집단으로서의 권리가 보장되자면 대외적 관계에서 주권이 철저히 보장되어야 합니다. 대외적 관계에서 주권을 행사하느냐, 못 하느냐는 그 삶의 단위에서 사는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받느냐, 인정받지 못하느냐와 관련됩니다. 그래서 그 삶의 단위에서 사람의 권리를 인정받으려면 대외적 관계에서 필연코 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침략전쟁은 물론이고 지배와 억압적인 정책이 추진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나라와 민족을 이해함에 있어서 민과 떨어뜨려 파악해서는 안 됩니다. 국제적인 대외관계에서 국가의 이익이라는 명분으로 침략과 약탈 행위가 수시로 벌어지게 되는 근원적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데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그것을 명백히 이해하지 못하고 국가적 이익이라는 명분이 왜 사회 속에서 통용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라와 민족을 민과 떨어뜨려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나라와 민족이 그 자체로 존재할 것처럼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국가적 이익이라는 명분이 통용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은 민을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민이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에선 한 민족이 하나의 나라를 갖지 못해 꼭 일치하는 형태는 아니지만, 나라와 민족이라는 삶의 단위에서 민의 특성이 대체로 민족성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민의 특성이 민족성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민을 떠나서 나라와 민족성 자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와 민족성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되고, 그것이 곧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적 이익이라는 명분을 내거는 토대로 작용하여 대외침략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성을 철두철미하게 민과 결부시켜 이해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성을 민과 결부시켜 파악하면 나라와 민족에 대한 이해에서도 주체적 요구가 중요합니다. 나라와 민족은 민이 주체적 요구를 실현하면서 형성된 하나의 공고한 운명공동체 집단입니다. 나라와 민족성을 민과 결부시켜야 하는 것은 민이라는 개념 자체가 객관적 토대에 근거를 두면서도 주되게 주체적 요구의 반영이라는 점에서 당연한 이치입니다.
흔히 민족을 핏줄과 언어, 지역과 문화의 공통성에 기초해서 성립된 사회 역사의 공고한 집단체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민족 형성의 객관적 측면을 밝힌 것으로서 민족을 이해하는 데에 큰 진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습니다. 객관적 토대가 주체의 형성에 일정한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체적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민족이라는 이해도 주체적 측면을 위주로 놓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로 볼 때 매국노는 핏줄과 언어, 지역과 문화의 공통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민족 구성원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매국노에 대한 응징은 민족의 분열이 아니라 도리어 민족적 특성을 참답게 세워가는 길입니다. 민족성이라는 것 자체가 저절로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민이 주체적 요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공고하게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주체가 민적 품성과 풍모로 빛내어 나가려고 노력해야만 참답게 민족성이 발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 단위에서 운명공동체 집단으로서의 민족성을 전면적으로 빛내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애민, 애국의 정권을 세워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 단위에서의 주권의 행사는 사실상 정권이 담당합니다. 그래서 정권을 올바르게 세워내지 못하면 주권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심지어 외세의 침략과 약탈을 수반하게까지 합니다. 이것은 민이 주체적 요구를 실현하는 데서 심대한 타격으로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정권은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가는 구성원을 적극적으로 동원하고 통솔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래서 어떤 정권이 등장하느냐는 민의 주체적 요구를 실현하는 데에서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여기서 민의 지향과 요구를 실현해야 하니만큼 애민정권을 세워내야 합니다. 애민정권을 세워내면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쥐게 되어 주체적 요구 실현에 획기적인 전변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민의 존재방식과 활동방식이 개인과 집단,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간다는 것이 밝혀진 조건에서 이 모든 부분에서 주체적 요구가 실현되면 민은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서 애민, 애국의 입장에 의해 민이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 집단을 구성하여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가고 있다고 밝힌 것의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4. 애민, 애국의 기치를 실현하기 위한 방도
애민, 애국의 입장에 의해 민이 개인과 집단,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가고 있는 조건에서 이 모든 부분에서 주인의 권리를 실현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민이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자면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존재 방식의 모든 영역에서 그 내용이 관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영역에서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자면 그리할 수 있는 기본 원칙이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주, 민주, 통일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 모든 영역에서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자면 그리해야 한다는 주장이 당연시되어야 할 것이고, 그다음에는 그 주장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와 질서 체계를 세우는 과제가 제기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저 빈말로 그치지 않게 실현하자면 그런 정치적 역량을 담보하는 과제가 제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치로 해서 자주는 민족 자주에 한정되지 않고 개인과 집단까지 포함하여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마찬가지 이치로 민주 또한 반독재 민주화에 그치지 않고 개인과 집단, 나라와 민족 단위의 모든 부분에서 주인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와 질서 체계를 세우는 것으로 풍부화됩니다. 통일 또한 한국의 정치적 역량을 담보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반도 차원에서 민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 역량의 단합으로까지 확대됩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자주와 민주, 통일의 과제를 풍부화하고 심화시키는 내용으로 갖추게 된 연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한국 사회에서 군사독재가 더 이상 맥을 추지 못하게 되면서 형식적인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살아야 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살자면 자유와 평등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풀리지 않고, 어떻게 하면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 것인가의 문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 수 있어야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보면 자주, 민주, 통일을 풍부화시키는 입장은 민이 개인과 집단, 나라와 민족 단위의 모든 부분에서 주인이 권리를 누리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완벽한 해답으로 됩니다. 인간해방, 계급해방, 민족해방까지 다 포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개성의 영역은 인간해방과 관련되고, 집단의 영역은 계급해방, 나라와 민족 단위는 민족해방과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런 논리적 구조에서는 낮은 차원뿐만이 아니라 아주 높은 차원까지 다 포함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어떤 합법칙적인 발전 과정을 통해 민이 개인과 집단, 나라와 민족 단위의 모든 부분에서 주인의 권리를 실현해 가는지가 총체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자주와 민주, 통일의 과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합법칙적인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민이 주인의 권리를 전면적으로 누리고 살자면 먼저 그것을 가로막는 최대의 세력부터 먼저 청산해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에 억압과 착취를 없애는 부분으로 나가야 할 것이고, 그다음으로는 전면적으로 누구나 다 주인의 권리를 실현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자주와 민주, 통일의 과제는 민이 주인의 권리를 실현해 가는 합법칙적인 발전 과정의 모든 부분을 다 포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주와 민주, 통일의 과제를 해결하자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풀릴 수 있겠습니까? 각 단계마다 해결해야 할 핵심적 기치가 요구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현시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외세와 매국노가 주인 행세하고 있는 사회이기에 그들에게 제일 먼저 화력을 집중해서 청산하기 위한 목표를 내거는 것입니다. 그 실현의 담보가 바로 애민, 애국의 기치입니다. 민이 개인과 집단, 나라와 민족 단위의 모든 부분에서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사는 세상을 실질적으로 만들자면 외세와 매국노가 주인 행세하는 세상부터 먼저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애민, 애국의 기치로 개인과 집단, 나라와 민족 단위의 모든 부분에서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기 위해서는 일치와 입체, 통일의 방법론을 구사해야 합니다.
개인과 집단,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각기 다양한 수준의 주체적 요구를 모두 반영할 수 있는 길은 일치와 입체, 통일의 방법론으로 집약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일치는 이해관계의 동일성 속에서 질적 계선을 찾는 문제이고, 입체는 일치의 지점을 전제로 하면서도 각기 자신들의 요구를 적극 풀어가도록 보장하는 문제이고, 통일은 일치와 입체로 진행하여 참다운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총체적인 전망을 내세우고 그것을 확고히 담보해 주는 문제입니다.
민의 힘을 한데 모아서 당면 과제를 해결하자면 일치의 계선이 필요할 것이고, 각기의 요구가 차이가 있고 다양한 조건에서 일치의 지점만 확고히 견지해 가겠다고 한다면 나머지 차이는 각자의 요구를 적극 실현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하니 입체가 요구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치와 입체는 궁극적으로 인간이 주인답게 자기 삶을 개척하여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그렇게 되도록 총체적인 관점에서 그 실현의 전망성을 확고히 담보해 주는 통일의 지점이 요구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치의 문제가 주되게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서의 최대 방해 세력과 관련되어 있다면 입체의 문제는 일치된 지점을 철저히 견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 조건 속에서 성립합니다. 그리고 통일의 문제는 개인과 집단, 나라와 민족 단위의 각 부분에서의 총체적 전망을 담보해 주면서도 주되게는 나라와 민족 및 정권과 관련시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민이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 집단을 구성하여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가고 있다는 근거에 기초하여 일치와 입체, 통일의 방법론이 제시된 것은 이 모든 방면에서 주체적 요구를 전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확고한 무기를 손에 쥐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무기를 확고하게 손에 틀어쥐고 일치와 입체, 통일의 방법론을 구사한다면 주체세력은 통일 단결된 역량으로 더 이상 우왕좌왕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주체적 요구를 전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길을 확고하게 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5. 현시기 애민, 애국의 기치로 한국 사회의 대전환을 이룩하기 위한 4대 핵심 과제
애민, 애국의 기치에 의해 민이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 집단을 구성하여 나라와 민족 단위로 살아가고 있고, 그 때문에 이 모든 부분에서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아가자면 자주, 민주, 통일의 목표를 기본 원칙으로 견지할 것과 일치와 입체, 통일의 방법론을 통해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 명확히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를 한국 사회에 적용해 풀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외세와 매국노가 주인 행세하는 사회입니다. 한마디로 개인과 집단, 나라와 민족 단위의 모든 부분에서 주인의 권리를 가로막는 최대의 세력이 외세와 매국노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의 개혁과 변혁, 통일운동을 성공시키자면 우선적으로 외세와 매국노를 반대하며 응징해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개혁과 변혁, 통일운동의 주체는 민이고, 그 대상도 외세와 매국노로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외세에 대한 싸움만이 아니라 매국노에 대한 투쟁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매국노들이 외세의 매개자가 되어 식민 지배를 받고 살아가도록 앞장서서 획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싸움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 매국노라는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외세와의 싸움이 힘있게 전개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한국 사회가 식민 지배를 받기는 하지만, 지난날 일제 식민 시기의 총독부와 같이 직접 지배 통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형식적인 독립을 인정하기는 하나 불평등한 조약과 협정을 통해 통치하는 신식민지 지배 방식을 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한국의 대통령은 미국이 어떤 공작을 벌이든 간에 결국 한국 사람이 투표를 통해 선출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미국과의 불평등한 조약과 협정을 파기하여 식민 지배에 벗어나자면 정권을 통해 진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매국노에 대한 응징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들을 정권에서 몰아낼 수 있겠습니까? 이들을 정권에서 몰아내지 못하면 식민 지배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국노들을 응징하는 투쟁을 기본 원칙으로 삼아야 하는데,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매국노 중에서도 배신 세력을 명확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음으로써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군사독재 세력 시절에는 이들이 매국노의 핵심 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군사독재 세력이 청산된 이후에는 배신 세력이 매국노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배신 세력의 등장은 김영삼 정권 시기에서부터 시작해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권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배신 세력이라고 함은 한때는 민과 함께했지만, 결국 민을 배신하고 그 진출을 가로막고 탄압하고 나오는 세력을 말합니다. 민이 주인의 권리를 실현하자면 도도한 대하의 물결처럼 계속 전진해야 하는데, 처음에는 같이하다가 결국 자신들의 기득권과 야망을 위해 민을 배신하고 가로막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민이 주인의 권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처음엔 형식적인 자유와 평등의 보장에는 함께했지만,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누리고 살고자 하는 데에는 결국 가로막고 탄압하는 행동으로 나왔다는 것이고, 독재정치에 반대하는 데에는 함께하지만, 나라와 민족의 주권을 확립하는 차원에는 또다시 외면하며 반대하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들 배신 세력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식민 지배에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들 배신 세력은 자신의 존립 근거를 독재 세력 내지는 그 잔당과의 대립 대결에서 찾고 있기에 독재 세력 내지는 그 잔당이 철저히 청산되지 못하게 합니다. 실상 독재 세력의 잔당이자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반동 세력이 등장하게 된 내막도 따지고 보면 이들 배신 세력의 역할이 컸습니다. 이것은 이명박과 박근혜, 윤석열 정권 같은 반동 세력이 등장하게 된 과정을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시기는 독재 세력과 그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반동 세력은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정도로 민의 힘은 성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박근혜와 윤석열에 대한 탄핵과 파면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그 때문에 지금 시기는 배신 세력을 청산하는 문제가 핵심 과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배신 세력을 청산하느냐가 외세와 매국노가 주인 행세하는 사회를 끝장내고 민이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 수 있게 하는 관건적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상 배신세력을 극복했다고 하는 것은 이제야말로 민이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처음부터 민을 짓밟은 독재자를 몰아낸 조건에서, 그다음으로 민의 권리를 가로막고 나오는 억압 세력은 한때는 같이 했지만 결국 배신의 길을 가는 세력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세력마저 청산한다면 그다음 단계는 자연스럽게 민이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살 수 있게 될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수박 문제가 제기되고 비판적 여론이 형성되고 있는 것도 배신 세력을 청산하는 과제가 본격적인 궤도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형식적인 자유와 평등이 아니라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을 누리려고 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단지 독재정치와 반동 세력에 반대하는 데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주권 문제를 제기하여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배신 세력이 사실상 매국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면서 이들을 청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애민, 애국의 기치로 외세와 매국노를 응징하고 한국 사회의 대전환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4대 핵심적 요구를 내걸어야 합니다. 그것은 첫째 주권 문제의 해결, 둘째 (남의 권리를 억압할 자유를 허용하는) 차별적 억압 질서를 폐지하고 누구나 차별받지 않도록 보편적 권리 보장, 셋째 각종 대중단체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 체계를 세워내면서 이들의 요구를 국가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제도와 질서 체계의 수립, 넷째 빈부격차의 해소입니다.(이에 대해서는 우리겨레연구소 카페, 현 정세와 개혁 세력의 임무(2025. 4. 7), 참조)
현시기 윤석열이 파면된 조건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데, 여기서 4대 핵심적 요구를 명확히 제기하면서 대선 후보가 이를 공약으로 내걸도록 하여 압도적인 다수로 당선되게 한 다음, 행정부와 국회와의 협조로 이에 맞게 헌법을 개정한 후 사회 대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가야 할 것입니다.
4대 요구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고 나서게 한다면 애민, 애국의 기치에 의해 한국 사회를 어떻게 개혁할지에 대한 전반적인 방향이 확립되어 갈 것입니다. 물론 개혁의 내용이 이것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대선 기간에서 총체적인 방향을 확립한다는 차원에서 이런 원칙적 입장을 대선후보가 핵심 공약으로 내걸고 나서도록 한다면 이 성과를 기반으로 대선 이후에 이 요구에 맞게 헌법을 새롭게 개정하여 한국 사회를 명실상부하게 대개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즉 애민, 애국의 기치에 의해 민이 개인과 집단, 나라와 민족 단위의 모든 부분에서 주인의 권리를 누리고 사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25. 4. 16
우리겨레연구소(준) 소장 정호일

첫댓글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추천하고 갑니다...
정말 명문장입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