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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슈바이쳐 큰 별 지다
6·25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전주, 북한군의 죽창에 어깨를 찔린 농부가 피를 흘리며 고통을 호소한다. 팔을 절단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에 질린 농부는 한 외국인 청년의사에게 자신의 팔을 맡긴다. 6시간의 대수술 끝에 농부에게 ‘소중한 팔’을 다시 안겨준 청년의사, 그가 바로 설대위 예수병원 전 병원장이다.
한국전쟁 직후 호남 최대규모의 병원인 예수병원을 설립하고, 지난 36년간 수많은 업적을 남긴 ‘한국의 슈바이처’이자 ‘전북의 정신적 스승’인 설대위 전 병원장이 80세의 일기로 세상과의 이별을 고했다.
▲이역만리 전주 땅 밟다
1925년 4월 미국 플로리다 브래덴톤에서 출생한 설대위 전 원장은 북장로교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남미의 칠레와 콜롬비아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15세 때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48년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튜레인 의과대학 졸업하고 이듬해 설매리 여사와 결혼하고 의료선교사 활동을 결심했다. 53년 선교사로 임명된 설대위 부부는 첫아들 존 실(John Seel)과 함께 제2의 고향이 될 이역만리 전주 땅을 밟게 됐다.
전쟁의 폐허 속에 묻혀버린 전주에 온 그는 다가동 언덕 위에 조그만 진료소를 설치하고 환자진료에 나섰다. 그는 전쟁 후 폭발물 환자, 굶주림에 고통받는 아이, 수많은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느라 밤낮없는 생활을 보내야만 했다.
환자는 많아졌지만 병실은 턱없이 부족했다. 수많은 환자가 여관이나 병원입구 계단에서 입원실이 빌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진찰실은 역시 언제나 만원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평온한 미소로 환자들을 진료하고 보살폈다. 매일 아침 일과는 온 병동을 울리는 기쁨의 찬양으로 시작되었다. 너무 무리했던 탓일까. 그를 돕던 부인 설매리(Mary Batchelor Seel)는 58년 과로로 심각한 요통을 얻기도 했다.
▲호남최대규모 예수병원 이끌다
그는 그리스도의 따뜻한 손길로 환자를 감싸고 안아주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닌 인술을 펼친 의사였다.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피폐한 전주에 예수병원을 짓고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는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한국의 슈바이쳐’라고 불렀다.
50-60년대 무당과 민간요법으로 몸을 망친 수많은 암환자들이 뒤늦게 예수병원을 찾아오는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며, 몸소 피고름을 짜내면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수많은 환자의 목숨을 구했다.
특히 지난 64년 우리나라 최초로 암환자 등록사업을 시작한 후 대한 두경부학회를 설립, 우리나라 암환자 치료와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등 우리나라 암치료 의료사에 커다란 획을 그었다.
69년 예수병원장으로 임명된 그는 미국과 독일측에 신청한 지원금을 받게 됐다는 전보를 받고 뛸 듯이 기뻐하며 소리치기도 했다. 당시 호남 최대 규모였던 현재의 예수병원은 그가 심혈을 기울인 첫 번째 작품이었다. 올해로 106년을 맞이한 예수병원의 굳건한 토대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사랑의 의료봉사활동 죽는 그날까지
70년대 설 전 원장은 의료혜택에서 소외됐던 농촌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완주군 소양, 동산, 용진, 고산에 의료 보건사업을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지역사회 보건의사, 보건전문 간호사, 마을 건강요원 등 새로운 의료인력을 훈련시키는 등 농촌보건 사업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등 의료시설이 열악한 농민의 아픔을 함께 하며 그들의 건강을 돌보는데 앞장섰다.
79년에는 예수병원 기독의학연구원을 설립, 신앙과 과학을 접목한 의학교육을 실현해는 성과를 이뤄냈다.
그의 기본신조는 “모든 환자를 예수님 대하듯 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지난 36년간 우리나라에서 배출한 수백의 후배 의사들에게 당부한 십계명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뜨거운 정열과 그의 새파란 젊음의 전부와 전 생애 모두를 송두리째 이곳에 헌신한 청년의사 설대위는 90년, 노신사가 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노환으로 투병 중이면서도 그는 예수병원 암 센터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노환이 더욱 깊어진 올해 8월에는 남은 힘을 모두 모아 마지막 커다란 선물을 예수병원에 보냈다. 암치료 고가장비인 고에너지 선형가속기가 그것이다.
우리나라와 지역사회에서는 의료와 선교를 통한 커다란 업적을 남긴 그에게 국무총리 표창(76년), 국민훈장 목련장(78년)을 수여하였으며 전라북도는 97년 전북도민의 날 행사에서 명예 도민증을 증정하였고 그해 한미우호상, 외국인 최초 상허대상(98년)을 수상한 데 이어, 2001년 “전북을 빛낸 20세기 인물” 50인에 인촌 김성수, 미당 서정주 시인 등과 함께 외국인으로 유일하게 선정되기도 했다.
고인이 세운 반석 위에서 오늘도 환자들을 보살피는 예수병원 식구들은 “대한민국을 그토록 사랑하고 전라북도의 영원한 스승인 예수병원의 큰 별! 예수병원에서 한없이 푸르던 무한사랑의 꿈을 고이 접으시고 이제 주님의 품안에서 더 큰 평안을 누리소서 ”라는 말로 설 전 원장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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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력>
1925 미국플로리다 브래덴톤에서 출생
1948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안스 튜레인 의과대학 졸업
1948-53 뉴올리안스 체리티 병원 외과 레지던트 수료
1958-60 뉴욕 메모리얼 병원 종양외과 레지던트 수련
1954-90 미 남장로교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지원, 36년간 예수병원에서 인술을 펼침
1961 예수병원에 종양진찰실 개설
1963 한국 최초로 암환자 등록사업 시작
1969-87 예수병원장 역임
1971 완주군 소양, 용진, 동산, 고산에 농촌보건 사업 실시
1976 국무총리 표창
1978 국민훈장 목련장 수상(대한민국 대통령)
1981 소아마비 퇴치사업 전개(50만명에게 예방접종)
1984 대한두경부학회 창립 및 초대회장 역임
1986 기독의학연구원 설립
1990 예수병원 명예원장 겸 재미업무 담당
1997 전라북도 명예도민증 증정
1997 한미우호상 수상
1998 건국대학교 상허대상 수상(외국인으로는 최초)
2001 전북일보 “전북을 빛낸 20세기 인물” 50인 선정 (외국인으로 유일)
<유 족>
부인 : 설매리(Mary Batchelor Seel)
장남 : 존 실 2세(John Seel, 51세) 작가, 대학교 교수
장녀 : 제니퍼(Jennifer, 49세) 교사
차녀 : 크리스틴(Christine) 의과대학 교수
<저 서>
1975 아버지는 내 아픔을 아시는가?
1997 상처받은 세상, 상처받은 치유자들 (옮긴이 : 김민철(현 예수병원 병원장))
1998 꺼지지 않는 사랑의 불씨(옮긴이 : 김민철(현 예수병원 병원장, 오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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