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사람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평하는 시절이 있었을까? 싶지만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의 관심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항상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평가하게 됩니다.
나는 이렇고 너는 이렇고 가 아니라 나는 옳은데 너는 그르다, 나는 아는데 너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이렇게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생기면서 사람 사이에 불화가 싹트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조선 후기의 문장가인 이덕무는 그의 저서 <청장관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의 허물은 항상 스스로가 옳다고 하는데서 더해지고 사람의 화禍는 항상 남을 업신여기는데서 생긴다. 스스로가 옳다고 하면 남을 업신여기게 되고 남을 업신여기면 스스로가 옳다고 하게 된다. 이것이 서로 마지막(終)도 되고 처음(始)도 되어 도무지 치우친 데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므로 군자는 살피고 삼가고 중도中道를 얻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안다는 것이 과연 알면서 안다고 하는 것일까요?
모르면서도 아는 체 하는 것일까요.
눈이 내리지 않으면 안 내린다고 안달을 하고 조금만 더 내리면 더 내렸다고 난리를 치고, 그래서 세상의 그 무엇에도 만족할 줄을 모르며 사는 것이 바로 사람이지요,
그뿐입니까, 세상의 이 일, 저 일을 두고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그렇다.’ 라고 계속 트집을 잡으면서 옹졸하고, 한심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내가 이 말을 했더니
지인은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재미있는 게 사람이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을까요?
“나에게 인간은 지상에서 그와 비견될 만한 것이 없다. 유쾌하고 용기 있고, 창의적인 동물이다. 이 동물은 어떤 미궁에 있어도 여전히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아낸다.”
그렇다면 타인은 타인이고 나는 나일 것인데, 타인이 바라보는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브라질 리우에서 마야의 피라미드를 본떠서 만들었다는 원뿔형 모양의 메트로 폴리따나 대성당을 보며 대단한 것이 사람의 창의성이고, 그 창의성이 세상을 움직여나가는 원동력이 아닐까 하고 느낀 소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