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왜기공도권은 순천왜성전투,노량해전,남해도 소탕작전 등으로 구성된 두루마리 그림이다. 명나라 황실의 종군화가 그림답게 묘사가 세밀하고 역동적이며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받고 있으나 ,소장자가 사진만 뿌려놓고 잠수해서 많은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11장의 사진 자료는 콜럼비아 대학의 게리레드야드 교수를 통해서 최초로 공개되었다. 이 쓰레드에 붙은 사진들은 인젭에 투고된 그동안 한일 유저들의 사진들을 쭉 모은것이다.
그동안 임진왜란을 그린 전투도 중에는 「평양성전투도」가 전해지고 있었지만 , 전쟁이 끝난 200년후의 작품으로 화가가 전투를 목격하고 그린 것은 아니고, 당시의 기록을 참고해 상상력을 덧붙여 그린 작품이다. 일본측에서 남긴 그림들도 대부분 그러했다. 그러나 최근 입수한 6.5미터의 「정왜기공도권」은 「평양성전투도」와는 전혀 다르고, 병사의 동작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종군 화가가 전지에서 상황을 보면서 그린 일종의 종군화이므로 그 내용이 세밀하다. 「정왜기공도권」을 정확하게 복원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이 두루마리는 400년전의 사건을 어떤 역사서적보다 자세하게 전하고 있다.
전라남도 순천왜성 전투도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図券 / 壬辰征倭図 )』에 나타난 전투장면을 보면 왜성의 모습을 보다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왜성을 공격하는 장면을 보면 석축위에는 곡륜(曲輪) 가장자리를 따라 이 둘러쳐지고 에 뚫린 총안(銃眼)으로 공성군(攻城軍)을 사격하는 모습이 있고, 넘어에는 목책이 이중으로 세워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와즙(瓦葺)건물로 보이는 시창(矢倉)이 보이고, 그외에 숙사(宿舍)가 그려져 있으며, 안쪽에는 군데 군데 방패구실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판벽(板璧)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해전(海戰)을 그린 것에서는 바닷가에 목책이 세워져 있고 곳곳에 판벽으로 가설하여 이곳에 몸을 은폐하고 공격하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목책과 판벽을 세운 곳이 구(構)의 일부로 추정한다.
순천왜성의 전투 장면 확대 : 상당히 얄밉게 싸우고 있는 유키나가의 철포병들.
명나라와 조선군이 왜성에 진입하는 장면. 몇몇 사무라이들이 뛰쳐나왔다가 후퇴하고 있다.
순천왜성 천수각의 모습
왜장 유키나가의 탈출 장면. 부장과 함께 배를 타고 성을 빠져나가고 있다.
* 고니시 유키나가 : 유키나가는 명나라의 장군들을 매수해, 무혈 철퇴의 약속을 얻어 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요구를 거부했다. 11월17일에 노량의 해안에서 왜군의 군선500척 중450척을 가라앉혔고 , 이순신이 도망치는 왜군을 쫓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간신히 도망간 유키나가는 귀국후,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측에 붙었기 때문에,1600년에 처형되었다.
사람을 죽인 죄로 귀양 간 코끼리 ▲태종 11년(1411) 2월 22일 일본 국왕 원의지(源義持)가 사신을 보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동물이다. 사복시(궁중의 소와 말과 목장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청)에서 길렀는데 날마다 콩 4~5말씩을 소비했다.
▲태종 12년(1412) 12월 10일 전 공조전서 이우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코끼리를 바치자 삼군부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는 소문을 듣고 구경 갔다가 그 꼴이 추하여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인 것이다.
▲태종 13년(1413) 11월 5일 코끼리를 전라도의 섬에 두도록 명령했다. 병조판서 유정현이 아뢰었다. 일본에서 바친 길들인 코끼리는 임금이 애완하는 물건도 아니요,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지금 두 사람이 코끼리 때문에 죽고 다쳤는데 법으로 논한다면 사람을 죽인 죄로 이 짐승을 죽여야 마땅합니다. 또 일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 석에 이르니 주공(周公)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고사를 본받아 전라도의 섬에 두소서 하자 임금이 웃으며 그대로 따랐다.
▲태종 14년(1414) 5월 3일 길들인 코끼리를 육지로 보내라고 명했다.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 장도(獐島)에 방목하고 있는데, 풀을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하니 임금이 불쌍히 여겨 육지에 내보내 처음과 같이 기르게 했다.
▲세종 2년(1420) 12월 28일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코끼리란 유익하게 쓸 곳이 없는 짐승입니다. 지금 도내 네 곳의 지방관에게 돌려가면서 기르라고 했으나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게 되니 청컨대 충청, 경상도까지 돌아가면서 기르도록 하소서라고 청했다. 상왕(태종)이 그대로 따랐다.
▲세종 3년(1421) 3월 14일 충청도 관찰사가 보고했다. 공주에서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에 채여서 죽었습니다. 이 짐승이 나라에 유익한 것은 없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의 열 갑절이나 되어 하루에 쌀 2말, 콩 1말씩 먹어댑니다.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 콩이 24섬입니다. 화가 나면 사람을 해치니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내놓으소서 했다. 임금은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고 했다
천자조선 의 이미지를 전국토에서 말끔히 씻어 내고 싶은 신해혁명 은 지나 모든 곳의 지명을 바꿉니다 한반도로 이사온 메이지 일본은 처음으로 토지 등기를 만듭니다 그 들에게 한글지명은 전주인의 흔적 입니다 때문에 그 들이 지나에서 쓰던 지명을 가지고 등기에 올립니다 손문이 버린 버린 지명 을 한반도로 이사온 메이지 일본이 등기에 재활용한 겁니다 둘의 호흡이 잘 맞지 않습니까?
전 좀 다르게 봅니다...메이지 유신은...명조(무굴)의 통치를 떨쳐내겠다는 의미로 보이며...이는 양이들에 엎혀 무굴(명조)의 전복을 돕고...그 땅은 양이들에 내 주는 대신...현 일본열도를 완전히 자신들 것으로 할량받겠단 의도로 보이며...그 옵션으로..전부터 자신들의 전초기지가 있었던 한반도 남단 현 경상남도 전라남도 언저리를 전초기지로 청일전쟁 승리훈 한반도까지 자신들의 지배권으로 형성했다가...청조(청구조선?)대타로 북경중심 중원동부에 앉혀놨던 대한제국 세력이...러시아와 배가 맞아 돌아가자...아예 폐위시키고 ... 친일세력을 중점으로 아예 한반도로 격리시키는 과정이 구한말의 지명이동사가 아닐지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반발하거나 말귀를 못 알아듣고 남경등 중원 동부에 눌러앉아 있는...반일 성향의 대한제국세력과 원주 청구조선족들을 쓸어버리는과정의 대표적 예가... 난징학살이라 보입니다...모택동의 중궈(짱께)남방족이 벌인 문화혁명기간의 학살극도....크게보면 동남아 토왜들이 벌인..같은 연장선상의 만행으로 보입니다.
지적공부(地籍公簿)와 등기부(登記簿)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지적공부는 사실관계를 나타내고, 등기부는 법률관계를 표시하는 게 주된 목적입니다. 토지(土地)와 건물(建物)은 법률상 유형(有形)의 물건(物件)입니다. 따라서 사실관계 없이는 그 법률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먼저 사실관계의 확립을 위하여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이 실시되었는데, 한국(한반도라고 추정됨) 전역에서 시행된 일제 식민통치의 기초작업이었습니다. 일본이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처음 계획한 것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고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었을 때부터입니다.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국권피탈과 함께 한국토지조사국의 사무를 조선총독부로 이관, 총독부 안의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전담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개월간의 준비조사를 거쳐, 1911년 11월 지적장부 조제에 착수하여 1912년 3월 조선부동산등기령과 조선민사령, 동 8월 토지조사령, 1914년 3월 지세령, 동 4월 토지대장규칙, 1918년 5월 조선임야조사령 등을 공포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되었습니다.
토지조사사업에 앞서 일본은 토지조사에 따르는 분쟁의 해결과 원활한 조사사업의 진행을 위해서 토지관습조사(土地慣習調査)를 선행하였습니다. 이때 조사된 내용은 ① 행정구역의 명칭, ② 토지의 명칭과 사용목적, ③ 과세지와 비과세지, ④ 경지의 경계, ⑤ 산림의 경계, ⑥ 토지표시 부호, ⑦ 토지의 지위 ·등급 ·면적과 결수(結數)의 사정 관행, ⑧ 결의 등급별 구분, ⑨ 토지소유권, ⑩ 질권 및 저당권, ⑪ 소작인과 지주와의 관계, ⑫ 토지에 관한 장부서류, ⑬ 인물조사 등이었습니다.
조사사업의 내용은 토지 소유권의 조사, 토지가격의 조사, 지형지모(地形地貌)의 조사로 이루어졌으며, 이의 수행을 위해 행정업무와 측량업무로 나뉘어 진행되었습니다. 이 사업의 결과 이제까지 실제로 토지를 소유해왔던 수백만의 농민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영세소작인(零細小作人) 또는 화전민 ·자유노동자로 전락하였고, 반면 조선총독부는 전국토의 40 %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는 대지주가 되었습니다.
총독부는 이들 토지를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비롯한 후지흥업[不二興業] ·가다쿠라[片倉] ·히가시야마[東山] ·후지이[藤井] 등의 일본 토지회사와 일본의 이민(移民)들에게 무상 또는 싼값으로 불하하여 일본인 대지주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이 토지수탈에 맞추어 이뤄졌고 토지조사시에 소유자가 기재되지 않은 토지는 전부 국유지(일본)로 등록되었습니다. (구)토지대장의 소유자는 취득연월일의 기재없이 이 토지조사부에 의해 기재되었습니다.
위 자료들은 <네이버 백과사전, 지식iN>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토지조사는 관련 법령(法令) 없이는 실시할 수 없습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에 앞서 "토지관습조사"(土地慣習調査)를 선행하였다고 나옵니다. 그것을 통하여 (기존의) "행정구역의 명칭", "토지의 명칭"과 사용목적을 사전에 조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일제가 그 당시에 '지나대륙'의 지명을 이용하여 기존의 '한반도' 지명을 모두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기존의 한반도 지명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다면, 최남석 선생님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다.
왜 임진왜란 전쟁중에 제주도가 빠졌나? 동래(육지로 진군) 접수만 했지, 제주도 접수하면 경상도 수군 통제사와 전라도 수군 통제사는 양면의 적군을 막을 수가 없다. 500여척이나 함선을 부산에 꽁꽁 묶어들고 제주도에도 함선 기지를 만들어서면 전라도로 올라가는 길은 그냥 고속도로..
김홍필님의 장황한 댓글의 논지는 뭔가요? 결국 네이버 사전에서 그렇게 베껴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핵심은 이거네요. -기존의 한반도 지명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다면, 최남석 선생님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다.- 학자들이 잘하는 비아냥거림의 대표적인 수작입니다. 결국 증명자료가 없기 때문에 당신의 주장은 허공에 붕 뜬 의미없는 작업이다는 거 아닙니까? 지식인 특유의 비아냥거림이라든지 공격적인 태도를 봐서는 님께서 이 사이트에서 뭘 얻으시려 하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비아냥'이라니요? 저는 가장 확실한 증명 방법을 설명하였습니다. 저의 주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요? 정응준 선생님은 제가 언급한 내용을 직접 확인하여 보셨습니까? 제가 지금 생업이 없고 연구만 한다면, 일본으로 들어가서 모든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조차 해보시지 않고, 무조건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시면.....
사람은 대개 자기가 아는 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저의 행위가 "더러운 짓거리" 같다는 것인데... 저는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고, "정치적인 행동" 또한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저를 오해하고 계십니다. 저는 순수한 아마추어 역사 연구자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더 이상 제 이야기를 하지 마시고, 역사 관련 쟁점을 잡아서 논의하시길 바랍니다. 역사 이야기만 합시다. "정치"라는 단어는 매우 싫습니다. 정치적 센스가 남다른 분들은 전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궁금합니다.
첫댓글 아침에 작성한 글이 이제야 수정이 완료되어...아침에 본 대슬에 이제 답장 드립니다...조선생님...네.전남 순천성은 그림의 예교성과 영 딴판의 지형입니다...바닷가란 것 밖엔여...
천자조선 의 이미지를 전국토에서 말끔히 씻어 내고 싶은 신해혁명 은 지나 모든 곳의 지명을 바꿉니다 한반도로 이사온 메이지 일본은 처음으로 토지 등기를 만듭니다 그 들에게 한글지명은 전주인의 흔적 입니다 때문에 그 들이 지나에서 쓰던 지명을 가지고 등기에 올립니다 손문이 버린 버린 지명 을 한반도로 이사온 메이지 일본이 등기에 재활용한 겁니다 둘의 호흡이 잘 맞지 않습니까?
전 좀 다르게 봅니다...메이지 유신은...명조(무굴)의 통치를 떨쳐내겠다는 의미로 보이며...이는 양이들에 엎혀 무굴(명조)의 전복을 돕고...그 땅은 양이들에 내 주는 대신...현 일본열도를 완전히 자신들 것으로 할량받겠단 의도로 보이며...그 옵션으로..전부터 자신들의 전초기지가 있었던 한반도 남단 현 경상남도 전라남도 언저리를 전초기지로 청일전쟁 승리훈 한반도까지 자신들의 지배권으로 형성했다가...청조(청구조선?)대타로 북경중심 중원동부에 앉혀놨던 대한제국 세력이...러시아와 배가 맞아 돌아가자...아예 폐위시키고 ... 친일세력을 중점으로 아예 한반도로 격리시키는 과정이 구한말의 지명이동사가 아닐지 싶습니다
그 과정에서...반발하거나 말귀를 못 알아듣고 남경등 중원 동부에 눌러앉아 있는...반일 성향의 대한제국세력과 원주 청구조선족들을 쓸어버리는과정의 대표적 예가... 난징학살이라 보입니다...모택동의 중궈(짱께)남방족이 벌인 문화혁명기간의 학살극도....크게보면 동남아 토왜들이 벌인..같은 연장선상의 만행으로 보입니다.
너무 복잡하게 얽힌 근세사 입니다 그 성격을 단순 명쾌하게 하나로 결론 지을 수는 없겠지요 이런 때는 결과적으로 누가 이득을 얻었냐? 도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겠습니다
너무 복잡한 경우에는, 결과적으로 누가 이득을 얻었는지 검토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다만, 의도적 이익이 아니라 반사적 이익도 누릴 수 있으므로, 그것 또한 잘 구별하여야 합니다.
지적공부(地籍公簿)와 등기부(登記簿)의 차이점을 아십니까? 지적공부는 사실관계를 나타내고, 등기부는 법률관계를 표시하는 게 주된 목적입니다. 토지(土地)와 건물(建物)은 법률상 유형(有形)의 물건(物件)입니다. 따라서 사실관계 없이는 그 법률관계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먼저 사실관계의 확립을 위하여 토지조사사업(土地調査事業)이 실시되었는데, 한국(한반도라고 추정됨) 전역에서 시행된 일제 식민통치의 기초작업이었습니다. 일본이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처음 계획한 것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맺어지고 통감부(統監府)가 설치되었을 때부터입니다.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국권피탈과 함께 한국토지조사국의 사무를 조선총독부로 이관, 총독부 안의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전담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개월간의 준비조사를 거쳐, 1911년 11월 지적장부 조제에 착수하여 1912년 3월 조선부동산등기령과 조선민사령, 동 8월 토지조사령, 1914년 3월 지세령, 동 4월 토지대장규칙, 1918년 5월 조선임야조사령 등을 공포함으로써 전국적으로 토지조사사업이 본격화되었습니다.
토지조사사업에 앞서 일본은 토지조사에 따르는 분쟁의 해결과 원활한 조사사업의 진행을 위해서 토지관습조사(土地慣習調査)를 선행하였습니다. 이때 조사된 내용은 ① 행정구역의 명칭, ② 토지의 명칭과 사용목적, ③ 과세지와 비과세지, ④ 경지의 경계, ⑤ 산림의 경계, ⑥ 토지표시 부호, ⑦ 토지의 지위 ·등급 ·면적과 결수(結數)의 사정 관행, ⑧ 결의 등급별 구분, ⑨ 토지소유권, ⑩ 질권 및 저당권, ⑪ 소작인과 지주와의 관계, ⑫ 토지에 관한 장부서류, ⑬ 인물조사 등이었습니다.
조사사업의 내용은 토지 소유권의 조사, 토지가격의 조사, 지형지모(地形地貌)의 조사로 이루어졌으며, 이의 수행을 위해 행정업무와 측량업무로 나뉘어 진행되었습니다. 이 사업의 결과 이제까지 실제로 토지를 소유해왔던 수백만의 농민이 토지에 대한 권리를 잃고 영세소작인(零細小作人) 또는 화전민 ·자유노동자로 전락하였고, 반면 조선총독부는 전국토의 40 %에 해당하는 전답과 임야를 차지하는 대지주가 되었습니다.
총독부는 이들 토지를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를 비롯한 후지흥업[不二興業] ·가다쿠라[片倉] ·히가시야마[東山] ·후지이[藤井] 등의 일본 토지회사와 일본의 이민(移民)들에게 무상 또는 싼값으로 불하하여 일본인 대지주가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토지조사사업의 목적이 토지수탈에 맞추어 이뤄졌고 토지조사시에 소유자가 기재되지 않은 토지는 전부 국유지(일본)로 등록되었습니다. (구)토지대장의 소유자는 취득연월일의 기재없이 이 토지조사부에 의해 기재되었습니다.
위 자료들은 <네이버 백과사전, 지식iN>에서 인용한 내용입니다. 토지조사는 관련 법령(法令) 없이는 실시할 수 없습니다.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에 앞서 "토지관습조사"(土地慣習調査)를 선행하였다고 나옵니다. 그것을 통하여 (기존의) "행정구역의 명칭", "토지의 명칭"과 사용목적을 사전에 조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일제가 그 당시에 '지나대륙'의 지명을 이용하여 기존의 '한반도' 지명을 모두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기존의 한반도 지명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다면, 최남석 선생님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다.
왜 임진왜란 전쟁중에 제주도가 빠졌나? 동래(육지로 진군) 접수만 했지, 제주도 접수하면 경상도 수군 통제사와 전라도 수군 통제사는 양면의 적군을 막을 수가 없다. 500여척이나 함선을 부산에 꽁꽁 묶어들고 제주도에도 함선 기지를 만들어서면 전라도로 올라가는 길은 그냥 고속도로..
신용일님 반말로 댓글 다는것 자중좀 하시죠
전 제주와 탐라는 원체 다른 곳인데...근세에 왜곡됐다 생각합니다...역사가 말한 제주는...전동적으로 제나라 영토였단 산동일대일듯 싶고...그 제주(산동)일대가 청구(靑)으로 자주 표기되니...그 곳이 충청지방아닐지란 예상을 합니다.
신용일 선생님이 이르신 제주가 침략당한 근거가 없다란 말씀은...현재의 한반도 남단 제주를 이르신듯 하며...더 나아가 탐라(탐모라)지역의 해전사가 별반 없단 지적이시라 봅니다.,,,전 개인적으로...현재의 제주도는 임란당시 일본국였다 보입니다.
김홍필님의 장황한 댓글의 논지는 뭔가요? 결국 네이버 사전에서 그렇게 베껴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핵심은 이거네요. -기존의 한반도 지명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다면, 최남석 선생님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다.- 학자들이 잘하는 비아냥거림의 대표적인 수작입니다. 결국 증명자료가 없기 때문에 당신의 주장은 허공에 붕 뜬 의미없는 작업이다는 거 아닙니까? 지식인 특유의 비아냥거림이라든지 공격적인 태도를 봐서는 님께서 이 사이트에서 뭘 얻으시려 하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비아냥'이라니요? 저는 가장 확실한 증명 방법을 설명하였습니다. 저의 주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인가요? 정응준 선생님은 제가 언급한 내용을 직접 확인하여 보셨습니까? 제가 지금 생업이 없고 연구만 한다면, 일본으로 들어가서 모든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조차 해보시지 않고, 무조건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시면.....
저는 눈팅족에 불과하지만 더러운 짓거리를 많이 봐서 그런지 정치쪽 센서는 남다르다고 자부하지요. 나름 읽을 거리를 제공해 주시는 홍진영님을 대놓고 공격하시는 것부터 시작해서 저는 님의 정치적 색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대개 자기가 아는 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저의 행위가 "더러운 짓거리" 같다는 것인데... 저는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고, "정치적인 행동" 또한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저를 오해하고 계십니다. 저는 순수한 아마추어 역사 연구자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더 이상 제 이야기를 하지 마시고, 역사 관련 쟁점을 잡아서 논의하시길 바랍니다. 역사 이야기만 합시다. "정치"라는 단어는 매우 싫습니다. 정치적 센스가 남다른 분들은 전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궁금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당대 동아시아 전체의 조선술이 대동소이하니...그 기본 기술은 한 뿌리에서 파생됐다 보입니다.
햐 임진왜란 한반도 아닌건 진작 알았지만 홍선생님의 주옥 같은 글을 보니 확신이 되네요,,세상에 뭐 먹을게 있다고 그당시 한반도에서
그 당시 한반도 부산인구가 만명정도 였다는 말도 들어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