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카미니토 거리를 거닐며
답사를 끝마칠 때나 어떤 큰 행사를 마쳤을 때
사람들이 내게 말한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닙니다. 잘 놀았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어느 날부터 나는
내가 하는 모든 행위를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잘 논다.‘ ’즐긴다‘고 생각하지,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인생을 걸어서 팔자를 바꿀 만큼이 아니라면,
일을 한다고 여기지 않고 논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일한다고 여기면 그 얼마나 짜증나는 일이겠는가,
내가 몸이 성해서 길을 나서는 그때까지는
나는 잘 놀아야겠다.
어떻게 놀 것인가?
“참례하러 이름난 산을 두루 다녔으니(參禮名山遍),
소요하는 곳이 바로 나의 집이라.(逍遙卽我家)“
김시습의 <죽장암竹長菴>이라는 글이다.
내가 머무는 곳이 나의 집이고,
내가 가는 길이 나의 길이라.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도 그랬다.
“바람과 산마루를 두루 다 찾아 구름과 달을 좇아서 다닐 때면,
절로 마음에 맞아 슬픔과 고통이 몸에 있는지
알지 못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니,
산천은 나에게 정말 좋은 벗이요, 뛰어난 의사라 하겠소.”
조선 중기의 문장가인 김창흡金昌翕이
두 달 동안 산천을 유람하고 돌아와
이징하李徵夏라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더 없이 좋은 친구, 더 없이 유능한 의사를
두었는데, 무엇이 모자라겠는가?
니체는 한 술 더 뜬다.
“우리 몸의 감각이나 관능을 죄스럽거나 부도덕한 것,
또는 우리의 의식이 개입 되지 않는
단순한 뇌의 화학적 반응이라고 생각하며
의식적으로 멀리하지 마라.
자기의 감각을 마음껏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신체적 감각과 관능을 예술로 승화하여
문화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에 실린 글이다.
일하는 것을 노는 것이라 여기고,
노는 것을 예술이라고 여긴다면
매 순간 순간이 예술이 아니겠는가?
“바람 채찍 우레 신발로 조선을 돌았으니,
남북으로 달리고 날아 8만 리를 다녔다네.
쇠잔한 몸 이끌고 집으로 와 문을 닫으니,
그 무엇이 내 머리에 아직 남아 있는가?“
다시 김창흡의 <갈역감영>이라는 글이다.
그래, 인생 뭐 별 것 있는가.
남아 있어도 남아 있지 않아도 좋은
그 순간을 잘 사는 것,
그것이 삶이고, 놀이가 되길 바라며 사는 것,
원색의 양철지붕과 벽돌로 유명한 알록달록한 작은 골목의 2층 3층에서
그 유명한 메시가 손님을 유혹하고 길거리 어디서나 탱고 춤을 추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카미니토 거리를 거닐며
나는 왜 저렇게 못 놀고 있지,
생각했던 그 시간도 이미 먼 추억이 되었으니,
나는 앞으로 어떻게 놀다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인가?
2024년 2월 9일, 섣달 그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