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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列國志 제106회
공자 측(側)은 어쩔 수가 없었다. 굴무(屈巫)가 장왕(莊王)에게 간하여 하희(夏姬)를 후궁으로 삼지 못하게 하고 또 공자 측의 요구도 가로막은 이유는, 본래 자기가 그녀를 데려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장왕이 하희를 양로(襄老)에게 내주자, 굴무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아! 애석하도다! 애석해!”
굴무는 속으로 생각했다.
“양로는 이미 늙었으니, 저런 여인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길어봤자 반년 아니면 1년만 있으면, 하희는 다시 과부가 될 것이다. 그때 다시 다른 방도를 강구하기로 하자.”
굴무는 자신의 생각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장왕은 주림(株林)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날 陳나라 도성으로 돌아갔다. 공자 영제(嬰齊)가 성 밖으로 나와 영접하였다. 장왕은 하징서(夏徵舒)를 율문(栗門) 밖으로 끌어내어 거열형(車裂刑)에 처하게 하였다. 제양공(齊襄公)이 고거미(高渠彌)에게 가한 형벌과 같았다.
[‘거열형(車裂刑)’은 팔과 다리를 각각 다른 수레에 매고 수레를 끌어서 죄인을 찢어 죽이는 형벌이다. 제26회에, 제양공은 정소공(鄭昭公)을 시해하고 공자 미(亹)를 옹립한 고거미를 붙잡아 거열형에 처했었다.]
사관(史官)이 시를 읊었다.
陳主荒淫雖自取 陳侯가 음란하여 비록 화를 자초했지만
徵舒弒逆亦違條 하징서도 시역(弑逆)을 저질러 국법을 어겼다.
莊王弔伐如時雨 장왕의 토벌은 마치 시우(時雨)와 같았으니
泗上諸侯望羽旄 사수(泗水) 가의 제후들은 楚王 편이 되었도다.
[‘시우(時雨)’는 때 맞춰 오는 단비이다.]
장왕은 하징서를 처형한 다음, 陳나라를 멸하여 초나라의 현(縣)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공자 영제를 진공(陳公)에 임명하여 그 땅을 지키게 하였다. 장왕은 陳나라 대부 원파(轅頗) 등을 데리고 영도(郢都)로 돌아왔다.
남방의 초나라 속국들은 楚王이 陳을 멸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영도로 와서 경하하였다. 각처의 현공(縣公)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때 대부 신숙시(申叔時)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때 제혜공(齊惠公)이 훙거하고, 세자 무야(無野)가 즉위하였으니 그가 제경공(齊頃公)이다. 초장왕은 제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신숙시를 사신으로 보내 국상을 조문함과 동시에 신군의 즉위를 축하하게 했던 것이다. 신숙시가 제나라로 갈 때에는 장왕이 陳나라 정벌을 떠나기 전이었고, 신숙시가 돌아왔을 때에는 장왕이 陳나라를 멸하고 돌아온 지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제98회에, 병촉과 염직이 제의공(상인)을 죽이고, 공자 원(제혜공)이 즉위했었는데, 그 제혜공이 훙거한 것이다.]
신숙시는 장왕에게 복명하고 물러나면서, 陳나라를 정벌한 일에 대해서는 경하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장왕은 신숙시에게 내시를 보내 책망하는 말을 전하였다.
“하징서가 무도하여 그 주군을 시해하였소. 그래서 과인이 그 죄를 다스려 하징서를 처형하고, 陳나라 영토를 거둬들임으로써 대의를 천하에 떨쳤소. 제후들과 현공들도 칭하하지 않는 자들이 없었소. 그런데 유독 그대만은 한 마디 말도 없으니, 과인이 陳나라를 토벌한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이오?”
신숙시는 사자를 따라 와서 장왕을 알현하고 말했다.
“왕께서는 ‘혜전탈우(蹊田奪牛)’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장왕이 말했다.
“듣지 못했소.”
“어떤 사람이 소를 끌고 다른 사람의 밭을 지나가다가, 소가 밭의 작물을 짓밟았습니다. 그러자 밭주인이 노하여 그 소를 빼앗았습니다. 왕께서 이 소송을 맡았다면, 어떻게 판결하시겠습니까?”
“소를 끌고 가다가 밭을 밟았다면, 작물이 많이 상하지는 않을 것이오. 그런데 소를 빼앗는다는 것은 너무 심한 일이오. 과인이 이 소송을 판결한다면, 소 주인을 가볍게 꾸짖고 소는 돌려주라고 하겠소.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혜전탈우(蹊田奪牛)’는 죄보다 벌이 지나치게 무거움을 이르는 말로 사용된다.]
“왕께서는 그처럼 밝은 판결을 내리시면서, 어찌하여 陳나라에 대한 판결은 어두우셨습니까? 하징서의 죄는 군주를 시해한 것일 뿐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왕께서는 시군한 죄만 다스리면 족했는데, 그 나라까지 취하셨습니다. 그건 소를 빼앗은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어찌 경하할 수 있겠습니까?”
장왕은 발을 구르며 말했다.
“그 말이 참으로 옳소! 과인은 아직까지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소.”
신숙시가 말했다.
“왕께서는 신의 말이 옳다고 하시면서, 어찌하여 소를 돌려주지 않으십니까?”
장왕은 즉시 陳나라 대부 원파를 불러 물었다.
“陳侯는 어디 있소?”
원파가 대답했다.
“지난번에 晉나라로 갔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원파는 말을 마치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장왕은 슬픈 생각이 들어 말했다.
“과인이 그대 나라를 복원시켜 줄 것이니, 陳侯를 맞이하여 군위에 옹립하시오. 그리고 대대로 초나라를 섬겨 배반하지 말고 과인의 은덕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시오.”
장왕은 또 공녕(孔寧)과 의행보(儀行父)를 불러 분부하였다.
“그대들을 귀국시켜 줄 것이니, 함께 陳侯를 잘 보좌하도록 하시오.”
원파는 공녕과 의행보가 화근(禍根)이었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지만, 장왕 앞에서는 감히 말하지 못하고 대충 얼버무린 후 함께 사례하고 떠났다.
세 사람이 막 초나라 국경을 넘어가자, 마침 晉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던 진성공(陳成公)을 만났다. 진성공은 나라가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초나라로 가서 楚王에게 호소하려던 참이었다. 원파가 楚王의 은덕을 자세히 전하고, 君臣이 함께 陳나라로 돌아갔다.
陳나라를 지키고 있던 공자 영제는 이미 楚王의 명을 받고, 陳나라 영토를 돌려준 다음 초나라로 돌아갔다.
염옹(髯翁)이 시를 읊었다.
縣陳誰料復封陳 현(縣)이 된 陳을 다시 돌려줄 줄 누가 알았으랴?
跖舜還從一念新 도척(盜跖)과 순(舜)임금은 마음먹기 나름이네.
南楚義聲馳四海 남방의 초나라가 의기를 사해에 떨쳤으니
須知賢主賴賢臣 현명한 군주가 현명한 신하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네.
[‘도척(盜跖)’은 제77회에 등장했던 노나라의 현인(賢人) 류하혜(柳下惠)의 아우로서,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둑의 두목이다. 순임금은 善人의 대명사이고, 도척은 惡人의 대명사이다.]
공녕은 귀국한 지 한 달도 못 돼, 대낮에 하징서가 나타나 목숨을 돌려달라고 하는 바람에 미쳐서 연못에 빠져 죽었다. 공녕이 죽은 후, 의행보는 꿈속에 진영공·공녕·하징서에 의해 상제(上帝) 앞으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서 너무 놀라 갑작스런 병으로 죽고 말았다.
한편, 공자 영제는 초나라로 돌아와 장왕을 알현하고서도 여전히 스스로 진공(陳公)이라 칭했다. 장왕이 말했다.
“과인이 이미 陳나라를 돌려주었으니, 경에게는 다른 것으로 상을 내리겠소.”
영제가 신려(申呂) 땅을 청하자, 장왕이 허락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굴무가 아뢰었다.
“신려 땅은 북방의 요지로서 우리나라가 晉의 침공을 막을 수 있는 곳이니, 상으로 내리실수는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장왕은 영제에게 신려 땅을 주지 않았다. 신숙시가 늙었음을 이유로 벼슬에게 물러나자 장왕은 굴무를 신공(申公)으로 봉했는데, 굴무는 사양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영제와 굴무 사이는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때가 주정왕(周定王) 10년, 초장왕 17년이었다.
초장왕은 陳나라가 비록 복종하고 있지만, 정나라가 晉나라만 섬기고 초나라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괘씸하여, 모든 대부들과 상의하였다. 영윤 손숙오(孫叔敖)가 말했다.
“우리가 鄭을 공격하면 晉이 필시 구원하러 올 것이니, 대군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장왕이 말했다.
“과인의 생각도 그와 같소.”
장왕은 대군을 일으켜 정나라 도성 형양(滎陽)으로 쳐들어갔다.
연윤(連尹) 양로가 전대(前隊)가 되어 막 출발하려는데, 장수 당교(唐狡)가 청하였다.
“정나라는 소국이라, 대군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부하 백 명을 이끌고 하루 앞서 나아가, 대군을 위해 길을 열겠습니다.”
양로는 그 뜻을 장하게 여겨 허락했다. 당교는 이르는 곳마다 역전(力戰)하여 鄭軍을 모조리 패퇴시켰다. 병사들은 쉬지 않고 전진하였으며, 매일 저녁 영지를 소제하고 대군을 기다렸다.
장왕은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곧바로 형양 교외에 이르렀는데, 한 번도 적을 만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행군이 지연된 적이 없었다. 장왕은 진격이 너무나 순조롭고 신속한 것을 이상히 여기며 양로에게 말했다.
“생각지도 않게 이처럼 신속하게 전진하다니, 경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용맹해지는구려.”
양로가 대답했다.
“이는 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부장 당교가 역전한 덕분입니다.”
장왕은 즉시 당교를 불러 후한 상을 내렸다. 당교가 말했다.
“신은 이미 왕으로부터 두터운 은혜를 입었습니다. 오늘 조금이나마 그 은혜를 보답하고자 한 것이니, 어찌 다시 외람되이 상을 받겠습니까?”
장왕은 의아해 하며 물었다.
“과인은 지금껏 경을 몰랐는데, 어디서 과인의 은덕을 입었단 말이오?”
“절영회(絶纓會) 때, 미인의 소매를 끌어당긴 자가 바로 신입니다. 그때 왕께 불살지은(不殺之恩)을 입었기에, 목숨을 바쳐 보답하려 한 것입니다.”
장왕은 탄식하였다.
“아하! 과인이 그때 불을 밝히고 죄를 다스렸다면, 어찌 이런 용맹한 장수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절영회(絶纓會)는 제102회에 있었다.]
장왕은 군정(軍正)에게 명하여 당교의 공을 첫 번째로 기록하게 하고, 정나라를 평정한 후 중용하고자 하였다.
당교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주군께 죽을죄를 지었는데, 주군은 그것을 덮어주고 나를 살려 주셨소. 이제 그 은혜에 보답은 하였으나, 어찌 감히 죄인이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날 밤, 당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장왕은 그 말을 듣고 찬탄하였다.
“진정한 열사(烈士)로다!”
초나라 대군은 정나라 교외의 관문을 격파하고 곧장 형양성 아래까지 당도하였다. 장왕은 명을 내려, 사면으로 형양성을 포위하고 공격하게 하였다. 楚軍의 공격은 17일 동안 밤낮으로 계속되었지만, 정양공(鄭襄公)은 晉이 구원하러 올 것을 믿고 강화를 청하지 않았다. 정나라 군사들은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
마침내 형양성 동북쪽이 수십 길이나 무너져 내렸다. 楚軍이 성을 오르기 시작하자 성중에서는 곡성이 천지를 진동했다. 장왕은 성중의 곡성을 듣자 측은한 생각이 들어, 군대를 10리 후퇴시켰다.
공자 영제가 장왕에게 아뢰었다.
“이 기세를 타면 성을 곧 함락할 수 있을 것인데, 왜 군대를 후퇴시킵니까?”
장왕이 말했다.
“정나라는 나의 위세만 알게 되었을 뿐, 아직 나의 덕을 모르고 있소. 그래서 잠시 후퇴하여 나의 덕을 보여주는 것이오. 저들이 복종하는지 안 하는지를 보고서 진퇴를 결정하겠소.”
정양공은 楚軍이 후퇴했다는 보고를 받고 晉軍이 구원하러 온 줄 알고, 성중의 백성들을 남녀 구별 없이 모두 동원하여 무너진 성벽을 쌓고 성 위로 올라가 지키게 하였다. 장왕은 정나라 항복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고서 다시 진격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정나라는 성을 굳게 지켜 석 달을 버텼지만,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려웠다. 초나라 장수 악백이(樂伯)이 군사들을 이끌고 황문(皇門)으로 먼저 올라가, 마침내 성문을 부수어 열었다. 장왕은 약탈을 금한다는 명을 내렸다. 楚軍은 질서 있게 성중으로 들어가 대로(大路)에 도열하였다.
정양공은 육단견양(肉袒牽羊)하여 초군을 맞이하며 말했다.
[‘육단견양(肉袒牽羊)’은 윗옷 한쪽을 벗어 어깨를 드러내고 양을 끌고 간다는 뜻으로, 신하가 되겠다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孤)가 부덕하여 대국을 잘 섬기지 못하였기에, 군왕의 노여움을 사서 대군이 폐읍에까지 이르게 하였습니다. 고(孤)는 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정나라의 존망생사(存亡死生)는 오직 군왕의 명에 달려 있습니다. 선대의 우호를 생각하셔서 이 나라를 멸망시키지 않고 종묘의 제사를 이어갈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부용(附庸)이 되어 대국을 섬기겠습니다. 군왕께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공자 영제가 말했다.
“정나라는 힘이 다하자 어쩔 수 없이 항복하는 것입니다. 용서해 주면 또 다시 배반할 것이니, 멸망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왕이 말했다.
“신공(申公; 신숙시)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또 ‘혜전탈우(蹊田奪牛)’ 얘기로 과인을 꾸짖을 것이오.”
장왕은 군대를 30리 후퇴시켰다. 정양공은 친히 楚軍 진영으로 와서 사죄하고 동맹을 청하였으며, 공자 거질(去疾)을 인질로 남겨두고 갔다.
장왕이 군대를 북쪽으로 이동하여 연(郔) 땅에 당도했을 때 첩보가 들어왔다.
“晉나라에서 순림보(荀林父)를 대장으로 삼고 선곡(先穀)을 부장으로 삼아, 병거 6백승을 거느리고 정나라를 구원하러 오고 있는데, 이미 황하를 건넜습니다.”
장왕이 장수들에게 물었다.
“晉軍이 오고 있다는데, 돌아가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저들과 싸우는 것이 좋겠소?”
영윤 손숙오가 말했다.
“정나라를 아직 이기지 못했다면 마땅히 晉軍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정나라를 얻었는데, 또 晉나라와 원수가 될 필요가 있겠습니까? 돌아가는 것이 만무일실(萬無一失)입니다.”
장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오삼(伍參)이 말했다.
“영윤의 말씀이 틀렸습니다. 정나라는 우리의 힘이 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晉나라를 섬긴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晉軍이 오는 것을 보고 우리가 피한다면, 진짜 우리가 晉나라보다 약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나라가 초나라를 섬기게 되었다는 것을 晉軍이 알게 되면 필시 정나라를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晉軍이 정나라를 구원하러 온 것처럼, 우리도 또 정나라를 구원하러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손숙오가 말했다.
“우리는 지난해에 陳나라를 정벌했고 올해는 또 정나라를 정벌하여, 우리 군사들은 이미 지쳐 있습니다. 만약 晉軍과 싸워 이기지 못한다면, 비록 오삼의 살을 씹어 먹는다 하더라도 어찌 속죄가 되겠습니까?”
오삼이 말했다.
“만약 晉軍과 싸워 이긴다면, 영윤에게는 지모가 없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만약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오삼의 살은 晉軍에게 먹힐 것이니, 초나라 사람들 입에 들어갈 것이 있겠습니까?”
장왕은 장수들에게 붓을 주면서 싸움을 주장하는 자는 ‘戰’ 字를 후퇴를 주장하는 자는 ‘退’ 字를 손바닥에 쓰게 하였다. 장수들이 손바닥에 글자를 쓰자, 장왕은 모두 손바닥을 펴게 하였다. 중군원수 우구(虞邱), 연윤 양로, 비장(裨將) 채구거(蔡鳩居)와 팽명(彭名) 등 네 사람만 ‘退’ 字를 썼다. 그 외에 공자 영제, 공자 측, 공자 곡신(穀臣), 굴탕(屈蕩), 반당(潘黨), 악백(樂伯), 양유기(養繇基), 허백(許伯), 웅부기(熊負羈), 허언(許偃) 등 20여 명은 모두 ‘戰’ 字를 썼다.
장왕이 말했다.
“노신(老臣) 우구의 견해가 영윤과 같으니, 후퇴하는 것이 옳다.”
장왕은 내일 남쪽으로 회군한다는 명을 내렸다.
밤중에 오삼이 장왕을 찾아와 말했다.
“군왕께서는 어찌하여 晉을 두려워하여 鄭을 버리고 돌아가려고 하십니까?”
장왕이 말했다.
“과인은 아직 鄭을 버리지 않았소.”
“우리 楚軍이 정나라에 주둔한 지 90일 만에 겨우 정나라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晉軍이 오자 楚軍이 떠난다면, 晉으로 하여금 鄭을 구원하여 얻는 공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초나라는 이로부터 다시는 정나라를 얻지 못할 것인데, 그것이 어찌 정나라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까?”
“영윤이 晉軍과 싸우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니, 후퇴하려는 것이오.”
“신이 이미 잘 살펴보았습니다. 순림보는 이번에 새로 중군원수가 되어 아직 군사들의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부장 선곡은 선진(先軫)의 손자이며 선차거(先且居)의 아들로서 선대의 공훈만 믿고 그 성질이 강퍅하고 어질지 못하여 장수의 재목이 되지 못하는 자입니다.
그 외 난씨(欒氏)와 조씨(趙氏)의 무리들은 모두 대대로 명장의 집안이기 때문에 각기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하여 호령이 통일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晉軍이 비록 숫자는 많지만 패퇴시키기 쉽습니다. 왕께서는 한 나라의 군주로서 어찌 晉의 신하들을 피함으로써 천하의 비웃음을 받으려 하십니까? 그렇게 해서 어떻게 정나라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장왕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과인이 비록 용병을 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찌 晉의 신하들보다 못하겠소? 과인은 그대의 말을 따라 싸우겠소.”
그날 밤 장왕은 영윤 손숙오에게 명을 내려, 군대를 북쪽으로 진군시키게 하였다. 楚軍은 관성(管城)에 당도하여 晉軍을 기다렸다.
첫댓글 드디어 춘추5패의 제3 패군주 초장왕이 등장하는고나.
제4 패군주인, 원수를 갚기 위해 섶위에서 잤다는 오왕 부차와
마찬가지로 반대로 원수를 갚기 위하여 쓸개를 맛봤다는
제5 패군주 월왕 구천은 언제 나오려나. 기대가 된다.
오늘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