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한국 교회는 해마다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6월 29일)이나 이날과 가까운 주일을 교황 주일로 지낸다. 이날 교회는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한다. 교황 주일에는 교황의 사목 활동을 돕고자 특별 헌금을 한다.
본기도
하느님,
천상 은총으로 저희를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다시는 오류의 어둠 속을 헤매지 않고
언제나 진리의 빛 속에 살게 하소서.
제1독서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니,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4,8-11.14-16ㄴ
8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사는 한 부유한 여자가 엘리사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엘리사는 그곳을 지날 때마다 그의 집에 들러 음식을 먹곤 하였다.
9 그 여자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여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10 벽을 둘러친 작은 옥상 방을 하나 꾸미고,
침상과 식탁과 의자와 등잔을 놓아 드립시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오실 때마다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11 어느 날 엘리사가 거기에 갔다가 그 옥상 방에 들어 쉬게 되었다.
14 엘리사는 종에게 “저 부인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을까?” 하고 물었다.
게하지가 “저 부인은 아들이 없는 데다가
남편은 나이가 많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5 그러자 엘리사는 “여자를 불러라.” 하고 일렀다.
종이 여자를 부르니 그 여자가 문간에 섰다.
16 엘리사가 말하였다. “내년 이맘때가 되면 부인은 한 아들을 안게 될 것이오.”
제2독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6,3-4.8-11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복음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7-42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는 왜 교회를 믿는가?
오늘은 ‘교황 주일’입니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신 베드로의 후계자가 교황님이고 그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당신 예언자들임을 왜 믿어야 하는지 묵상해야 하는 주간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파견하시면서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라고 하시고,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라고 하시며 교회를 받아들여야 교회가 받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직접 오셔서 죄를 용서해주시면 되지 교회를 파견하셨을까요?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피로 교회 안에 묻혀 계시기 때문입니다.
6·25 전쟁 추운 어느 겨울날, 연료가 소진된 미군의 트럭이 한 다리 위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군인들이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니 아기를 자기 옷으로 감싸고 죽어있는 한 어머니를 발견합니다. 한 군인이 어머니를 다리 주위의 큰 나무 밑에 묻고 전쟁 후 한 군인이 아기를 미국으로 데려가 키웠습니다. 아기가 청년이 되자 양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한국을 다시 찾았습니다. 아들에게 친어머니의 무덤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날도 아기를 발견한 날처럼 매서운 추위가 몸을 움츠러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자기 겉옷을 어머니 무덤에 덮어주며 “어머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는 이웃을 위해 나의 겉옷을 벗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기적인 자아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이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가능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리스도이고 미군은 교회이며 아들이 우리들입니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죽음을 가르치셨듯이 그리스도께서도 죽음으로 죽음을 가르치시기 위해 죽으셔서 우리에게 보여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다만 더 나아지기를 희망하고 믿는 사람 곧,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만 받아들입니다.
존 오리어리는 어렸을 때 불장난을 하다가 자신은 온몸에 화상을 입고 집을 전소 시켰습니다. 자신이 죽는 것이냐고 묻자 어머니는 “네가 죽고 싶으면 죽어도 돼. 그것은 너의 선택이야!”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될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것이 예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착해지기를 방해하는 유일한 원수는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존 오리어리가 사고를 극복하고 훌륭한 강연가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게 된 이유는 어머니를 예언자로 받아들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방식은 예언자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와 십자가의 성 요한은 소위 개혁 갈멜회를 만든 인물들입니다. 이전의 수도회는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모습이 아니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철저히 주님 뜻을 따르는 수도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전 생활을 하던 수도자들과 신자들에게 커다란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교회를 위해 물 한 잔을 주는 모습입니다. 과부의 헌금처럼 재정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하겠지만, ‘교회를 위해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분명 교회를 예언자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부와 권력으로 교회가 타락해 갈 때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의 모범으로 교회를 개혁하였습니다.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죄를 용서해 주라고 파견하신 교회를 부정하였습니다. 교회를 받아들임은 교회에 유익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 교회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교회로 가서 당신 부활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비록 잘못하는 면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은 교회 자체를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교회 개혁에 힘썼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결국 저는 교회의 딸입니다”라는 말씀만 반복하셨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위해 걱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나의 구원과 직결됨을 깊이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서울 신학교에 다닐 때, 매년 원로 신부님들이 오셔서 고해성사(총고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보러 갔다가 엄청나게 혼난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것도 아닌데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성사 볼 준비가 안 되어 있어. 나가!!!”
결국 쫓겨나서 다시 성찰한 뒤에 무서워서 그 신부님이 아닌 다른 신부님께 가서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처음으로 고해소에서 쫓겨난 것이라 많이 당황했었습니다. 그리고 화해의 성사라는 고해성사를 이렇게 공포 분위기로 만드는 신부님이 잘못이고, 신부님께 문제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봅니다. 즉, 부족한 저를 위해 신부님께서 충격 요법을 쓰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올해 초, 우리 성당 난간에 한 아이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난간이 계단 형태로 되어 있어서 사다리 올라가듯이, 난간에 올라가 있던 것이지요. 너무 깜짝 놀라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장 안 내려와!!” 그 아이가 미워서 이렇게 말했을까요? 아닙니다. 난간 위로 올라가 아래로 떨어질 수 있기에 다급하게 큰소리친 것입니다.
사랑은 부드럽고 달콤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상대를 위해 큰소리를 내지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측면에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통이나 시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전능하신 하느님의 일이니 그분 뜻을 100%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역시 사랑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 자체이신 분을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아버지나 어머니보다 또 아들이나 딸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시지요. 우리나라처럼 조상의 핏줄을 귀하게 여기는 유다인에게도 이 말씀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자녀에 대한 사랑은 얼마나 대단합니까? 하지만 주님의 사랑은 더 대단합니다. 때로는 아픔을 동반하고 상처까지 날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사랑 안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까지도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예수님 다음 자리에 남겨 놓아야 하고, 궁극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제2독서를 통해, 세례를 통해 주님과 함께 묻히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음을 밝히십니다.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주님과 함께하는 삶, 주님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쁘게 짊어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합당한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은 도가 높아질수록 편안해지고 권세가 높아질수록 위태로워진다(사마천).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