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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공동체를 이야기할 때 보통 ‘한배를 탔다’라고 표현한다. 승선한 모든 사람이 ‘우리’이고, 그 ‘우리’는 출발지와 목적지, 귀항지를 공유한다. 탐험선이라면 승선의 목적과 각자의 역할도 분명하다. 서로의 삶이 묶여 있어서 불편하기도 하지만 함께 협력해서 각자의 꿈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항해하던 배에 구멍이 나면 한배를 탄 사람은 누구도 서로를 구할 수 없다. 어쩌면 제한된 구명정의 자리를 두고 목숨을 건 경쟁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근처의 다른 배만이 이 구멍 난 배의 승객을 구할 수 있다. 비슷한 예로, 흔들리는 장대에 매달린 사람은 함께 매달린 사람을 붙잡는다고 해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장대 밖의 누군가가 붙잡아 주어야 한다. 고층 빌딩 유리창 바깥 면의 얼룩처럼 외부에서 접근해야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일상에는 많다. 가까이 있다는 것만으로 혹은 같은 편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을 수 있다.
나는 늘 새로운 느낌의 ‘시’를 쓰고 싶어 많은 곳을 기웃거리지만, 아이디어를 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른 사람의 ‘시’를 읽지는 않는다. 읽는 순간 그 글이 설득하는 대로 따라가게 되고 글쓴이의 의도 속에 놓이게 되어, 내 속에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내 고유의 느낌이나 아이디어의 파생을 방해받을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느낌이 필요하면 다큐멘터리나 음악, 물리학 강의 등 ‘시’의 밖에 있는,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영역을 뒤지고 다닌다. 어떤 사물에 대해 혹은 감정에 대해 이미 다른 사람이 그의 언어로 엮어놓은 표현보다 아직 야성이 살아있는 날 것을 찾아내야 한다. ‘시’라는 문학 안에서의 새로움은 ‘시’ 밖에서 발견한 것을 자신의 언어로 다듬어서 ‘시’ 안으로 가져왔을 때뿐이다.
도서관의 책 중에 어떤 책이 전체 목록에서 빠져있는 경우를 상상해 본다. 분명 그 책은 도서관의 내부에 있지만 이용자의 입장에서는 없는 책이다. 존재가 인식과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없는 것(외부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문득, 예고도 없이 이 존재가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다. 모르는 사람을 만날 때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를 만날 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모습 중 상대와 가장 잘 반응할 수 있는 부분을 전면에 내세워 그 사람을 대하게 된다. 가끔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자신도 모르던 자신의 모습이 전면에 나서 상대를 대할 때가 있다. 단지 상대로 인한 나의 즉흥적 반응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숨어 있던 부분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나의 의도가 나의 내부라면 ‘자신의 숨어 있는 부분’은 내 의식의 외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롭게 만나는 사람은 터치되는 부분이 다르고 서로 공감을 나누는 영역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된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순간들,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던 순간들, 새롭게 만나는 사람을 통해 느끼게 되는 경이로움은 자신 밖의, 숨겨진 자신을 만나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 기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안과 밖 사이의 경계가 유동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여행은 장소이면서 시간이다. 낯선 곳이면서 낯선 순간이다. 일상이라는 내부를 벗어나 외부로 나갔을 때만 우리는 우리 앞에 닥쳐온 풍경이나 문화에 감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하지만 여행이 길어지고 감각의 피로가 쌓이게 되면 우리는 편하고 안전한 각자의 내부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처음부터 여행은 출발지로 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막대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안과 밖은 서로 등을 맞대고 붙어있다. 서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과학자들은 밖을 관찰해서 어떤 일의 현상을 자신의 내부로 가져와, 파악하고 그 원리를 알아내려고 밤새 몸부림을 친다. 이렇게 해서 안을 채우고 나면 또다시 밖을 꿈꾸게 된다.
어떻게 보면 밖은 안에 있다. 그리고 그 안 속에 밖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면서도 속하지 않는, 프랙탈 같은 구조를 가진다. 나는 늘 멀리 가고 싶지만, 또 간절히 돌아가고 싶어진다.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지만 익숙하고 편한 것 속에서 위로받고 싶어진다.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2014)
미주 중앙 신인 문학상 당선(2011)
시마을 동인
문협 워싱턴주 지부 회원, 워싱턴 문인회 회원
시집, 4인칭에 관하여(시산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