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째 수필집은 1999년에 발간한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제목으로 보아서는 두 번 째 수필집과 크게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또 대학을 다니면서 힘들게 공부하였던 이야기도 더러 나온다. 안정된 생활을 누리는 내가 힘들었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그렇더라도 오늘의 안락함은 예전에 힘들게 노력한 결과라는 자부심도 들어있으리라. 지금도 같은 생각을 한다. 아이들이 자랄 때 ‘나는 시골 농삿집에서 태어나서, 너희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도 오늘의 내가 ------. 이럴 때면 아내는 내 말을 막았다. 자랑처럼 들린다면서, 자랑은 아이들 교육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단다. 나의 지난날은 내가 선택한 나만의 길이다. 내가 지난날의 수필을 읽으면서 준비해 둔 나의 길을 따라 뚜벅뚜벅 걸었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하다. 하루도 뻬먹지 않고 계속하고 있는 오늘의 산책이며, 이때 팔공산 등산을 시작하였다는 사실도 내 글을 읽고 알았다. 아내와 함께 갓바위를 자주 오른 것도 이때였다.
수필집에 실린 글을 읽어보면, 취미생활로 ‘돈(옛날 동전) 수집’도 했고, 골프 이야기도 있고, 무협 영화를 무척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대가 바뀌어 가는 이야기도 있다. 빨리 적응하지 못해서 놀라움을 나타내는 글이 많다. 호박 농사가 호박을 수확하는 농사가 아니고 잎 농사라서 호박은 미리 따버린다는 농사법에 내가 무척 놀랐다는 내용은 내가 변화하는 시대상을 따라가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식탁에 고기가 많이 올라오는 이야기며, 텔레비젼이 로터리 방식에서 리모컨 방식으로 바뀌는 이야기도 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유행어가 퍼져나가던 날이 어제 같은데, 지금은 다시 공자를 살려낸다고 야단들이니, 나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였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런 것이 ‘우리 시대 이야기’가 되어 있다.
‘떡값과 촌지’가 구시대와 신시대가 부딪히는 것으로 비유했고, 구질서가 신질서에게 자리를 양보하면서 툴툴거리기도 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바통 텃치가 순조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부작용도 있으리라. 그때의 글을 지금 읽으면서 내가 혀를 차면서 분노하였던 일을 두고, 정말 그렇게 분노해야 할 일이었을까도 생각하게 해준다.
‘우리 시대의 이야기’에 실린 글 하나를 소개하자.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내용이다, 싶어서 여기에 소개하려 한다.
흥부가 잘 살게 되면
이동민
판소리 흥부가 한 대목에 이런 말이 나온다.
“야, 흥부야 너도 늙어가는 놈이 겻말에 손 넣고 서리맞은 구렁이 모양으로 어슬렁어슬렁 다니는 꼴 보기 싫고 밤낮 없이 내방 출입만 하여 자식새끼만 도야지 이물돛 퍼낳듯 허고, 날만 못 살게 구니 보기 싫어 살 수가 없구나.”
겻말에 손넣고 어슬렁거린다는 말은 요즘의 영락없는 건달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가난뱅이 흥부는 돼지 새끼 낳듯 줄줄이 자식들을 만들어내지만 흥부가의 어느 구절에도 놀부가 아들이 있다는 말은 없다. 더더욱 흥부는 매품을 팔러가서 벌어온 돈으로 실컷 포식을 하고는 그날 밤에 또 아이 하나를 더 만들어내는 기막힌 정력가이다. 그러니까 놀부는 더부살이 주제에 자기 처지도 가늠하지 못하는 흥부가 눈꼴이 시어서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개인만이 아니고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보다 월등 잘 살고, 국토도 남한의 다섯 배나 된다는 프랑스는 인구가 겨우 5천 만인데 더 늘지 않아 정부가 골치를 앓는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보다 못 사는 나라들의 인구 증가율은 우리보다 높다.
우리나라도 못 살았던 지난 날에는 인구 증가율이 몹시 높았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어떻게 하면 인구 증가율을 둔화시킬 수 있을까 하여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는 새마을 구호 중에서도 일품이다. 심지어는 ‘둘도 많다’라는 구호도 있었다. 그때 보건소에서 벌인 가족계획 사업이란 오로지 아이 적게 낳기 운동이었다.
피임에 참여하는 사람은 국가에서 얼마의 보상금까지 지급하였다. 어느 지역에서는 이제는 거의 쓸모가 없도록 기능이 저하 되어 있는 노인들이 보상금 때문에 집단으로 정관수술에 지원하여 돈을 받았다. 받은 보상금으로 계를 모았다. 계의 이름이 ‘불알계’라고 하여 배꼽을 쥐고 웃었다. 보건소에서는 뻔히 알면서도 실적을 올리려 피임 시술을 시행해주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가족계획사업이란 것이 없어졌다. 인구증가율이 0.6% 밑으로 내려가면 다시 끌어올리기는 가족계획 사업에 투자하였던 돈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하더라도 쉽지 않다고 하였다. 프랑스가 넓은 국토를 가지고도 적은 인구로 고심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문제 때문이라고 하였다.
먹을 것이 없어서 영양상태가 엉망이 되면 질명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지고, 수명도 짧아진다. 이럴 때 나타나는 자연현상은 내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씨를 많이 퍼트리는 일이다. 많은 씨를 퍼트려서 그 중의 얼마라도 살아남게 하는 것이 확률 게임이다. 씨를 많이 퍼트리려면 흥부처럼 밤낮 없이 내방으로 기어들어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기왕성한 성욕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흥부처럼 배를 곯아야 가능한 일이다.
놀부는 성욕도 강하지 않고, 딸린 자식도 없으니까 흥부가 하는 일에 심술이 났다. 사실은 부러웠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부자인 놀부는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 영양실조에 걸려 골골거릴 일이 없다. 아플 때는 마음 놓고 병원을 찾아갈 수 있으니 생명의 윙협을 받을 일도 없다. 종족이나 개체보존을 위해 내 몸을 바칠 일이 없으니 성욕이 흥부를 따를 수가 없다.
이런 논리라면 성욕이 왕성해진다는 것은 내가 건강하다 징표이기보다는 생명의 유지에 위기가 왔다는 신호임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욕이 바로 건강의 지표가 되는 듯한 착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건강식품이라는 별별 희얀한 식품은 거의가 정력제이다. 우리나라 때문에 세계의 희귀 동물이 멸종의 위기에 빠졌다고 하니, 소위 문화인이라는 사람들이 쏘아대는 눈총이 아만저만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도 잘 살게 되었으니 정력제에 연연하지 않아도 될법한데. 더 깊은 다른 뜻이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혹시나 못 살던 시절의 왕성하던 성욕이 잘 사고 나서 자꾸 수그러드니 더럭 겁이 나서 반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못 살던 시절의 그 미망에서 깨어나지 못하여서 일까. 이러다가는 내 종족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이어서 일까. 아니면 동물들ㅇ 지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도망을 가듯이, 우리에게도 종족 보존에 신경을 쏟아야 할만큼 위기가 찾아온 것일까.
얼핏 이런 생각이 들었다. 흥부가 톱질한 일곱 개의 박 중에 처음 세 개는 먹을 것, 입을 것, 호화주택이 나왔다. 마지막 일곱 번 째 박에는 양귀비도 울고 갈 절세 미인이 나왔다. 치마에 설명문을 달고 나왔는데, ‘시앗’이라고 적혀 있었다. 흥부는 작은 마누라도 선물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내 짐작으로는 몇 달 뒤에 친정을 간다는 쪽지 한 장 남기고 사라졌으리라 생각된다.
이미 흥부는 씨가 끊길 걱정을 해야하는 비루먹은 흥부가 아니다. 놀부처럼 부자가 되었으니 종족보존을 위해 내방으로 기어들어 갈 일이 없다. 자연히 작은 마누라를 찾아가는 일이 뜸해 질테고
-수필집 ‘우리 시대 이야기.(1999),흥부가 잘 살게 되면. p56-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니고, 세 달이 지나도 흥부가 꼬뻬기도 안 보이면 어느 작은 마누라가 붙어 있겠는가. 그래선지 우리의 일상사에서 ’작은집‘, ’첩‘이라는 말이 사라지는 것도 이 시대의 이야기가 아닐까.
어머니, 고향을 그리는 글도 여러 편이나 실려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나의 서정성을 구성하는 바탕이 되어 있으므로, 앞으로도 내 글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