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강대나무로 서 있던 큰 나무 하나가 쓰러져 누웠다. 언제 강대나무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십여 년 전 내가 이 나무를 만날 때부터 강대나무였다. 이리 큰 나무로 살아오자면 내가 살아온 햇수보다 더 많은 나이테를 둘렀을 것이다. 강대나무가 되기 전에는 여느 나무들처럼 왕성한 가지에 푸른 잎이며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고 했을 것이다. 새들이 날아오면 안아주기도 하고, 짐승이 몸을 기대면 품어주기도 했을 것이며 그들에게 잎이며 꽃이며 열매를 내주어 먹이가 되게도 했을 것이다. 찾아오는 이들에게는 그늘을 드리워 쉬게도 해주고, 그 싱그러운 자태로 위안과 편안도 주고, 어려운 사정을 하소연하는 이들에게는 사연을 묵묵히 들어주며 달래주기도 하고 어루만져도 주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잎도 꽃도 다 떨어뜨린 채 하얗게 말라간다. 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마르지 않을 때도 그랬듯 찾아오는 것들에게 쉬고 머물 자리를 내어주는 일은 그치지 않는다. 몸을 파고드는 것들에게는 살점마저도 마다치 않고 내어준다. 그러다가 땅 위로 몸을 누인다. 아직 한살이가 다하지 않았다. 서 있을 때처럼 온갖 생명체들, 이를테면 팡이실 같은 미생물에서부터 뭇 날짐승 길짐승들이며, 이끼 풀꽃들에까지 놀이터며 살 집이 되어 주면서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기다가 흙으로 돌아간다. 강대나무로부터 150년쯤은 걸린다고 하는 그 세월이 다하도록 남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일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는 나무를 두고 어느 불법 수행자는 배고픈 호랑이를 위해 절벽에서 자기의 몸을 날린 인욕태자(忍辱太子)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도 있다. 나무는 늘 자기를 찾아와 함께 즐겁고 재미나게 놀아주는 소년을 사랑하게 되고, 소년도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다. 소년이 자라면서 발길은 띄엄띄엄 이어졌지만, 청년, 중년, 노년이 되어 나타난 소년에게 그때마다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돈이 필요하다면 열매를 주어 돈을 마련하게 하고, 집이 필요하다면 가지를 내주어 집을 짓게 하고, 배가 필요하다면 몸통을 주어 배를 만들게 하면서 그때마다 나무는 줄 수 있어서 즐겁다 했다. 노년이 되어 찾아온 소년에게 남은 것은 밑동밖에 없다며 미안하다 했지만, 쉴 곳이 필요한 소년이 그 그루터기에 앉아 편히 쉬는 것을 보며 나무는 행복해했다.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 1930~1999)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야기다.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는 나무의 삶을 우화적으로 그리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나무를 쓰는 일과 다르지 않다. 나무가 받는 것은 뿌리가 빨아올리는 물이며 잎과 가지가 누리는 햇살뿐이지만, 자기를 살게 해준 그것들에 감사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세상에 다 내어주는 것일까. 장기려(張起呂 1911~1995) 박사는 29세 때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 간 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받으며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6·25 때 평양에서 부산으로 피란 와서 살면서 부산복음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간호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죽을 때까지 이렇다 할 재산 하나 남긴 게 없었다. 늘 가난하고 소외당하는 이웃들의 벗을 자처하며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았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자신의 월급을 털어 넣으면서까지 치료를 해주었고, 치료비 처리를 자기 뜻대로 할 수 없게 되자, 환자를 병원에서 살그머니 탈출시켜 도와주기도 한 일화가 전설처럼 남아 있다. 장 박사를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삼아 소설 『사랑』을 쓴 춘원 이광수는 장 박사를 두고 ‘성자 아니면 바보’라 했다고 한다. 춘원은 그를 일러 왜 성자가 아니면 바보라 했을까. 『노자(老子)』는 “생기게 하되 가지려 하지 않고. 이루어주되 기대지 않고, 길러주되 간섭하지 않으니, 이를 일러 현덕이라 한다.(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道德經」 51章)”고 했다. 나무며 장 박사의 생애가 이와 같지 아니한가. 그런 삶의 덕을 노자는 ‘현덕’이라 했지만, 이 말을 ‘성자’로 바꾸어도 별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이런 삶을 영악한 존재들이 볼 때는 ‘바보’라 하기 십상이다. 배알도 없는 것처럼 어찌 모든 것을 빼주고만 산다는 말인가.
이렇듯 나무도, 장 박사도 성자 아니면 바보다. 사람은 가도 나무는 영원하건만, 세상에는 성자도 바보도 갈수록 귀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내어주려는 이는 드물고 거두어들이려는 이들만 끓고 있는 세상에서 이들이 어찌 귀한 존재가 아니라 할까. 제 잇속만 앞세우려 하고, 자기 집만 돌보려 하고, 저네들 진영만 챙기려 하는 세상이다. 그러다가 남을 짓밟아도 당연한 거로 알고,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닌 척 뻔뻔해 한다. 세상에 정의란 게 무엇인지, 사랑이란 게 어디에 있는지 인걸은 가고 없고 나무에나 물어봐야 할까. 하기야 누가 나에게 ‘당신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할 말 없기는 저이들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무람하다. 바보 나무만 민연하게 우러러볼 뿐-.♣(2020.2.9.) |
첫댓글 선생님께서는 나무 같은 삶으로 은은하게 베풀어 주십니다
비오는 아침에 좋은 글이 마음에 비처럼 젖어듭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글은 독자에 의해 완성이 된다고 합니다.
언제나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