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H영농법인 사무실. 최근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에 있는 장뇌삼농장의 지분 투자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의 일간지 광고를 내보내자 투자자들의 전화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간간이 전화벨이 울리는 가운데 10여명에 달하는 분양 직원(일명 ‘판매원’)들의 전화 상담이 한창이다.
이 업체가 현재 투자자를 모집 중인 장뇌삼농장은 영월군 소재 임야 41만여 평 규모. 대부분 보전임지로 개발행위가 엄격하게 제한된다.
하지만 H영농법인은 농장부지 일부(5만여평)에 농가주택형 펜션단지를 조성한다며 20여명의 투자자로부터 분양대금 명목으로 10여억 원을 받았다.
올해 초부터 이 업체가 일간지 광고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모집한 장뇌삼농장 투자자는 모두 250여명에 달한다.
업체 L사장은 한때 수도권과 강원ㆍ충청 땅 수만 평을 쪼개 판 D개발의 ‘바지(또는 몸빵, 명목상 사장을 말함)’ 출신이다. L사장은 “정부 단속으로 전화를 통한 땅 분양이 어렵게 돼 영농법인을 따로 냈다”며 “현지 농민 다섯 사람만 내세우면 법인설립이 가능해 합법적으로 땅을 팔 수 있다”고 말했다.
신종수법 동원해 투자자 모집
토지시장 침체와 투자자들의 외면으로 한동안 잠잠했던 기획부동산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부의 단속으로 설자리를 잃게 되자 간판을 ‘영농조합’으로 바꿔 달았지만 본업인 땅 ‘쪼개팔기’는 여전하다.
변한게 있다면 규제를 피해 ‘땅’ 을 직접 분양하는 대신 ‘농장지분’을 주식형태로 바꿔 투자자를 모집하는 등 신종수법이 동원된다는 점이다.
신사동 H영농법인의 경우 땅 1평을 주식 4주로 환산해 주당 4750원에 투자자를 끌어 모으고 있다.
실제로는 500∼2000평 단위로 땅을 분양하면서 명목상으로는 125∼500의 주식을 950만∼3800만원에 투자자를 모집한다고 내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정부의 규제와 단속을 피하고 땅을 쉽게 분양할 수 있다는 게 H영농법인 L사장의 설명이다. L사장은 “투자 규모가 소액인 만큼 수요층은 무궁무진하다”며 “주로 불안한 노후, 불황이 시달리는 서민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털어놨다.
분할 어려운 지분등기 많아
이 업체는 사실상 땅을 팔면서 투자자들에게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주당 6000만원에 재매입해준다는 내용의 수익이행증서를 발행해 준다. H영농법인 명의로 발행한 증서에는 6년 후에 재배한 장뇌삼을 팔아 79.2%의 확정 수익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와 함께 계약 후 6년에 걸쳐 매년 11월에 분양받은 땅 면적 비율만큼 쌀ㆍ인삼ㆍ토종꿀ㆍ더덕 등을 준다며 투자자들을 현혹하고 있다. 대신 땅은 분할이 어려운 공유지분 형태로 등기를 해준다.
토지전문업체 다산서비스 이종창 대표는 “최근에는 사슴이나 타조농장 지분도 투자 권유 대상”이라며 “영농법인의 권유로 현장을 체험하고 들뜬 마음에 투자를 결정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땅 헐값에 사들여 박리다매
업계에 따르면 이처럼 영농법인 등의 간판을 달고 수도권과 강원도 등지에서 땅 쪼개 팔기에 나서고 있는 ‘변종’ 기획부동산들은 서울에만 10∼15여개 업체에 달한다.
이들은 대개 대부분 대규모 땅을 싸게 매입한 다음 ‘땅 대신 농장 지분을 사면 몇 년 내 큰 이익을 돌려준다‘며 시세보다 2∼3배 높은 값에 되팔고 있다.
대부분 서울에서 비교적 가깝거나 개발 호재가 있는 경기 철원, 강원 평창ㆍ홍천 등이 주요 활동무대다.
주로 농지에 비해 도시인의 취득이 비교적 자유로운 임야가 영농법인형 기획부동산의 작업 대상이 된다. 현행법상 도시인의 농지 취득은 300평 이하로 제한되지만 토지거래허가구역이 아닌 임야는 면적에 상관없이 매입이 가능한 때문이다.
영농법인형 기획부동산업체들은 땅을 고를 때 대개 ’똠방’(현지 무허가 중개업자)을 통해 값이 싼 5∼10만평 규모의 임야를 집중 매입한다. 주로 보전임지 등 개발이 어려운 땅을 헐값에 사들인다. 박리다매로 신속하게 처분하기 위해서다.
기획부동산이 영농법인을 내세우는 이유는 정부의 집중 단속을 피할 수 있는데다 설립이 쉽기 때문이다. 현행법상 영농법인은 설립에 제한이 없고, 농지나 임야의 소유와 처분이 자유롭다.
농민 5명만 있으면 영농법인 설립
현행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상 영농법인은 5명 이상의 농업인 발기인만 있으면 설립할 수 있다. 영농법인형 기획부동산은 현지인을 조합장으로 영농조합을 설립한 다음 영농조합에 고문 등으로 참여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지자체의 관리는 허술한 편이다. 99년 영농조합 설립시 지자체에 통보하도록 했던 의무규정이 삭제돼서다.
이 때문에 피해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평창군의 경우 군청에서 파악한 피해건수가 올해만 3∼4건에 이른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개발이 불가능하거나 분할 자체가 어려운 땅을 공유지분 형태로 분양받는 투자자들이다.
사정이 이렇자 군청은 홈페이지에는 이례적으로 ‘토지 분양광고 소비자 유의사항’이라는 공고문을 띄워 놓은 상태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는 피해까지 합하면 피해규모는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평창군청의 한 관계자는 ”주로 노인, 가정주부 등 서민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며 “판이 깨질 때까지는 정확한 피해 규모 파악이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속은 어렵다는 게 관계 당국자의 설명이다. 법률구조공단의 허정경 팀장은 “정상적인 토지 매매계약인 경우 법적 처벌 대상이 아니다”라며 “계약서에 수익률 등 세부 내용을 상세하게 기재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투자금 묶일 수 있어 주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수요자들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우선 분양대상 토지의 지번과 지목을 확인하고 해당 지자체에 개발 가능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또 지분등기인지 분할등기인지 소유권 이전 형태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정부가 지난 3월부터 비도시지역의 토지분할을 사실상 금지한 이후에도 일부 영농조합들이 땅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분할이 어려우면 환금성에 제한이 많아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 때문에 영농법인의 말만 믿고 투자에 나섰다간 돈만 묶일 가능성이 크다.
또 투자 대상이 되는 작물이나 동물의 수익성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주의를 요한다. 기후나 작황, 판로, 수요변화 등 변수가 많아서다.
OK시골 김경래 대표는 “급조된 영농법인은 사업내용이 부실해 조심해야 한다”며 “특히 장뇌삼은 전문 재배기술이 없으면 성공 확률이 낮아진다”고 말했다.
대정하우징의 박철민 사장은 “대개 평당 2만∼5만원 정도로 싸게 분양해 전체 피해액은 크지 않은 편”이라며 “하지만 10만 이상 대규모 임야를 대상으로 하는 만큼 피해자 숫자는 매우 많다”고 말했다.
광개토개발 오세윤 실장은 “그 동안 ‘땅 쪼개팔기’로 재미를 봤던 기획부동산들이 정부 단속을 피해 변형적인 땅 팔기 방식을 동원하고 있다”면서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투자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자료원:중앙일보 2006. 1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