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치 이외의 주성치는 없다. 하늘 아래 주성치는 하나뿐이다. 주성치 영화는, 포스터의 이름을 가리고 봐도 주성치 영화다. 오직 주성치만이 만들 수 있는 독특함으로 넘쳐 난다. 이런 강한 개성이 오랫동안 그를 주류 영화의 바깥에 머물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너무나 달라서, 그는 소수의 지지자들만 열광하는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제 상황은 변했다. 그 동안 바깥에서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던 대중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던 것에서 한 발자국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림축구]가 그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이제 [쿵푸허슬]이 나왔다.
주성치의 [쿵푸허슬]은 백문이불여일견이다. 일단 봐라.
그리고 씹든지 그의 숭배자가 되든지 결정하자.
무협적 과장의 세계가 주성치식 유머와 함께 흐드러지게 펼쳐진다.
[소림축구]에서 선보인 바 있는 컴퓨터그래픽과 주성치적 상상력의 만남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영화가 [쿵푸허슬]이다.
주성치의 영화를 외면하는 사람들은, 허풍이 쎄다고 말한다.
맞다. 주성치 영화는 허풍이다. 그런데 인간의 삶 자체가 허풍이 아닌가?
진실된 삶, 삶의 리얼리티? 다 쫒까라 그래. 살아보면 안다, 왜 인생이 일장춘몽인지. 인생이야말로 거대한 허풍덩어리다.
주성치 영화는 노골적으로 허풍 떨며 그 속에서 진짜 인생을 찾아낸다. 얼씨구!
할리우드의 러브콜로 만들어진 [쿵푸허슬]에서 주성치는 하나를 얻고 하나를 잃었다. 역시 할리우드는 거대한 용광로다. 제 3세계의 잘 나가는 감독들도 할리우드로 스카웃되면서 자본과 타협하고 순응화의 길을 걷는다. 그 과정에서 감독이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리면 할리우드의 데뷔작으로 끝나고 물러나는 수밖에 없다. 할리우드 연착륙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 동안의 영화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홍콩 무협영화라면, 장풍이 날아가고 인체가 공중으로 부양하는 황당무계한 영화라는 선입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성치는 대표적 표적이다. 도대체 주성치의 영화는 논리나 이성이 먹혀들 틈이 없다. 더구나 엽기에 가까운 극단적 표현방법은 대다수의 사람들의 눈을 찌푸리게 한다.
그러나 [소림축구]가 금상장 영화제에서 감독상 남녀주연상 등 7개 부문을 석권하고 역대 홍콩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세우자, 콜럼비아 영화사가 주성치의 다음 프로젝트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300억원의 제작비를 투자하여 비밀리에 만든 영화가 [쿵푸허슬]이다. 300억원의 제작비는 할리우드 규모로서는 소액이지만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나 [영웅]의 제작비를 웃도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할리우드가 주성치에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소림축구]에서 선보인 과장된 액션과 코믹한 캐릭터의 결합은 [쿵푸허슬]에서도 이어진다. 오히려 확대 재생산된다. 주성치가 얻은 것은 거대한 자본과 기술력의 도움으로 획득한 짜임새 있는 완성도이다. 그러나 그가 잃은 것도 있다.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좌충우돌 예기치 않은 웃음을 선사해 주었던 주성치 초기 영화의 활달함은 많이 가라앉아 있다. 그것이 또 다른 발전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라고 해도 마니아들에게는 아쉬운 부분이다.
[쿵푸허슬]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림축구]를 건너야 한다. 비현실적 과장과 무협적 상상력으로 넘쳐나는 [소림축구]의 세계는 낯선 것이었다. 주성치는 [소림축구]에서, 그동안 홍콩 영화의 가장 큰 축이었던 무협의 세계를 축구라는 스포츠에 접목시키고, 또 코믹한 과장으로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의 서구인들에게 감성적이고 신비적인 동양의 무술을 활달한 상상력과 거대한 우주적 비전으로 보여주었다면, 주성치는 무협 대신 서구인들에게도 익숙한 축구라는 현대 스포츠를 그 자리에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쿵푸다. 축구가 범지구적 스포츠라면 쿵푸는 가장 동양적 무술이다. 주성치는 [쿵푸허슬]을 통해서 가장 동양적 무술을 소재로 가장 보편적 영화언어를 만들려고 한다. [쿵푸허슬]의 무대인 돼지촌 분위기가 마치 흙먼지 휘날리는 서부극이나 마카로니 웨스턴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의도된 연출의 결과다.
[쿵푸허슬]의 내러티브는 이중적이다. 강호를 평정한 조직세력 도끼파와 돼지촌에 숨어 사는 강호 고수들의 한판 대결을 그리고 있는 외형적 흐름 속에, 주인공 싱과 그의 부하 삼겹살, 싱의 어릴적 친구인 말 못하는 소녀 퐁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우선 돼지촌 구성원들은 전부 이중적 캐릭터다. 돼지촌의 뚱뚱한 악질 여주인은 늘 입에 담배를 물고 다닌다. 입에서는 험한 욕이 쏟아져 나온다. 거의 속옷에 가까운 파자마를 걸치고 다니며 마음에 안드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 [방빼!]라고 소리친다. 그런데 사실은 전설 속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사자후의 고수다. 커다란 고함을 질러 산천초목을 떨게 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비기를 지니고 있고 게다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놀라운 분광경공의 달인이다.
그녀의 남편인 바깥주인은 늘 부인에게 얻어맞고 산다. 몸매도 비실비실하다. 젊은 여자의 몸매만 훔쳐보는 그는 영락없이 한량이지만 사실은 유들유들한 몸놀림으로 어떤 공격도 피해가는 영춘권의 고수다. 쌀을 배달하는 쿨리나, 만두를 만드는 도넛, 여자 같은 섬세한 모습의 테일러도 사실은 모두 숨은 고수들이다. 이런 캐릭터들은 무협지 속에서는 흔하게 등장하지만 주성치 영화에 모여들게 되면서 그들은 강렬한 후광을 발휘하게 된다. 주성치의 허허실실, 비어있는 듯 하면서도 결코 만만치 않은 연출 스타일과 내외가 다른 캐릭터의 양면성이 묘한 어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도끼파의 보스나, 두 명이 함께 붙어 다니며 거문고를 연주해서 소리로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킬러 [심금을 울리는 가락], 당대 최고의 킬러 야수 등이 돼지촌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으로 등장한다. [매트릭스]의 무술감독 원화평은 [쿵푸허슬]에서도 놀라운 액션을 보여준다. 상상하는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컴퓨터그래픽 기술과 와이어 액션은 주성치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만나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1940년대 중국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는 [쿵푸허슬]은 굉장히 정치적인 영화다. 권선징악의 주제를 설파하는 이런 변형된 무협영화들은 서부극이 그런 것처럼 악이 횡횡하는 시대에 선이 승리한다는 믿음으로 대중들을 안심시킨다. 왜 지금 이런 영화들이 홍콩에서 등장하는지 우리는 마땅히 정치적 분석을 시도해야만 한다. 홍콩 반환으로 심리적 위협을 느낀 홍콩인들은 1국 2체제의 과도기적 실험 속에서 자신의 삶을 안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것이다.
어떤 영화든지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지배 이데올로기의 적극적 수혜자이든 아니면 도전적 체제전복의 혁명가이든, 영화적 허구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발언하고 있다. 한 편의 영화 속에는 당대 지배 세력의 힘의 균형이 암암리에 삼투되어 있는 것이다.
주인공 싱의 캐릭터는 매우 복합적이다. 우선 그는 비겁하다. 삼류 건달 싱은 도끼파의 일원이 되고 싶어 허장성세로 큰 소리 치며 돼지촌을 접수하려고 한다. 결국 이것이 빌미가 되어 돼지촌과 도끼파의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돼지촌의 숨은 고수들이 몸을 일으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운다. 그 과정에서 돼지촌의 전설적 고수 세 명이 목숨을 잃고, 도끼파는 [심금을 울리는 가락]과 [야수] 등을 동원하여 돼지촌을 접수하려고 한다. 돼지촌을 지키는 사람은 사자후의 여주인과 비실비실 남편뿐이다. 그 과정에서 비겁하고 소심한 주인공 싱이 서서히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거대한 힘을 깨닫는 자기발견의 과정이 영화의 핵심으로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내면적 깊이를 획득하게 된다.
결국 주성치는 싱을 통해서, 혼란기의 현 단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내부에 스며 있는 자기의 힘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대화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려 한다. 매우 대중적인 제스처로 넘쳐나지만 [쿵푸허슬]은 정치적 발언도 무섭게 잠복되어 있다.
미국 내 1,500개 극장에서 개봉하는 [쿵푸허슬] 속의 정치적 발언이 미국인들에게 노골적으로 가시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홍콩 반환 이후에도 홍콩을 지키고 있는 거의 유일한 영화인 주성치는 할리우드 자본으로 할리우드 배급망을 타고 미 전역에 개봉하는 영화를 만들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쿵푸허슬]의 묘미는 행간에 숨겨진 정치적 독해를 읽어낼 때 극대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