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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아 시집,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 >, 푸른사상, 2024년 8월
부드러운 물의 역동적 상상력
맹문재
1.
금시아 시인의 시 세계는 깊은 물과 무거운 물과 넓은 물과 난폭한 물을 부드러운 물로 끌어안고 역동적인 상상력을 펼치는 것으로 의미화할 수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물은 바다, 강물, 호수, 비, 빗방울, 소나기, 국화차, 술, 장대비, 눈물, 우물 등으로 변주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동검리에 있는 동검도, 충남 홍성군 서부면 남당항로 인근에 있는 궁리포구, 그리스의 섬 가운데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에게해에 있는 히오스섬 등 실제의 지명도 등장한다. 춘천 의암호의 섬인 중도,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 무산에서 발원하여 남서류한 뒤 춘천에서 북한강과 합류하는 소양강, 강원도 춘천시에 있는 북한강의 지류인 공지천도 그러하다. 포구, 머구리, 물때, 수몰, 물소리, 피라미 떼, 물고기, 뗏목, 수위, 방수, 우기 등의 어휘도 물의 상상력을 심화하고 확장한다.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물과 꿈』에서 물을 무의식 세계의 근본적인 요소라고 보고 부드러운 물과 난폭한 물로 구분했다. 물질적 상상력의 세계에서는 부드러운 물이 난폭한 물보다 우월성을 갖는데, 그것이 일상적이기 때문이다. 바다가 부드러운 물인 시냇물이나 강물만큼 상상의 세계를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이 바다에 접촉하거나 감지하는 기회가 적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물은 원초적이며 절대적이고, 난폭한 물은 인간의 의지력에 대한 대립자로 나타난다. 노아의 홍수가 좋은 예이다. 난폭한 물은 공기와 결합해 파도로, 흙과 결합해 지각 변동이나 지진으로 등장한다. 부드러운 물은 물의 물질적 상상력, 문화의 콤플렉스, 역동적 상상력, 모성적 상상력으로 분류된다.
물의 물질적 상상력은 인간이 직접 물과 접촉해 관능미를 느끼는 것으로 봄의 물, 깊은 물, 복합적인 물로 나타난다. 봄의 물은 맑은 물로 그 속성이 반영과 신성함이다. 거울의 이미지, 즉 나르시스의 이상화가 작용한다. 깊은 물은 잠자는 물로 어둡고, 죽음의 이미지이다. 봄의 물을 물의 표면적인 넓이로 본 것이라면, 깊은 물은 물의 양적인 깊이로 본 것이다. 복합적인 물은 물과 다른 요소가 결합한 것이다. 물과 흙의 결합으로 반죽의 이미지, 물과 불의 결합으로 알코올의 이미지, 물과 공기의 결합으로 안개의 이미지가 생겨난다.
문화의 콤플렉스는 물리적인 물과 접근해서 물질화된 세계가 아니라 책, 전설, 신화에서 비롯된 이야기의 영향이 무의식 세계에 뿌리박은 것이다. 문화의 콤플렉스는 카롱의 콤플렉스와 오필리아의 콤플렉스로 나눌 수 있다. 카롱의 콤플렉스는 카롱이 사람을 나룻배에 태워 저승으로 데려간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죽음에 의한 이별의 이미지이다. 깊은 물에서의 죽음 이미지가 조용하고 고독하고 관조적이라면, 카롱의 콤플렉스에서의 죽음 이미지는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는 이별이다. 오필리아의 콤플렉스는 죽음에 대해 수동적인 카롱의 콤플렉스에 비해 갈망하는 성격이다. 여성적이고 마조히스트적인 이미지이다.
역동적인 상상력은 물의 상상력이 물질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의 의지력을 지배한다. 가령 맑은 물은 순수화에 대한 의지이다. 모성적 상상력은 어머니 또는 여성에 대한 추억이 무의식에 남아 있어 물을 갈망한다. 어머니의 모유에 의해 알게 된 액체가 무의식에 스며들어 상상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금시아 시인의 작품들에서도 바슐라르가 분류한 물의 상상력이 지배한다. 맑은 물, 봄의 물, 흐르는 물, 깊은 물, 잠자는 물, 죽은 물, 무거운 물, 복합적인 물, 모성적인 물, 여성적인 물은 물론이고 우주의 물, 운명의 물, 슬픔의 물, 그리움의 물, 동백꽃의 물 등으로 변주한다. 난폭한 물을 지배하는 부드러운 물이 작품 세계를 이끌어 시간 의식과 세계 인식을 펼치는 것이다. 혈기 왕성한 젊은 날을 “우당탕탕, 소나기가 한낮을 훔쳐”(「완장」)간 것으로, 통증이 심한 어머니의 삶을 “우울한 심기를 봉합하고 방수해도 우기는/어느새 관절을 뚫고 들어”(「비의 관절」)온다고 표현한다. 춘천 대보름 축제로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함성을 “강물이 춤춘다”(「독륜차전(獨輪車戰)」)라고, 삿갓을 쓰고 바랑을 짊어진 채 방랑길에 오른 김삿갓을 바람에 날리는 버들개지로 비유하고 그의 책 읽기를 “바람 한 겹에, 물살 한 장에/유유히 필사”(「비서(飛絮)―김삿갓 1」)하는 것으로 이미지화한다. 강의 수면을 바라보면서 “어떤 골칫거리에도 편견 없다는 듯 단정이나 의혹이나 명령 아닌 그저 말갛고 차가운 수평을”(「소양강」) 유지하는 것을 발견하고, 수십 수의 의병가를 지어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킨 것은 물론 3대에 걸쳐 의병활동을 뒷바라지한 윤희순 독립운동가를 “망망대해 부표처럼 서 있는 그녀”(「기억한다는 것,― 윤희순 동상 아래에서」)로 소개한다. 시의 밑밥이 눈부신 어휘들로 풍성해져 “시어들 피라미 떼처럼 꼬리”(「밑밥」) 치는 시론까지 제시한다.
2.
한여름이 탐욕스레 그림자를 잘라먹고 있었다
그날처럼 장대비가 내린다
기척을 통과한 시간들
폐쇄된 나루에 주저앉아 있고
물과 뭍에서 나는 모든 것들의 적막
파닥파닥 격렬을 핥기 시작한다
한여름이 햇살을 변호하고
그림자가 그림자의 풍문을 위로하면
열 길 넘는 금기들
장대비처럼 세상을 두들기며 깨어날까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
왜 휘몰아치는 격렬마저 쓸쓸한 것일까
조용히 상을 물리면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가득해
서늘하거나 다정한 그리움 하나,
소용돌이치며 자정을 돌아나간다
간혹, 이런 장대비의 시간은
그림자 떠난 어떤 기척의 쓸쓸한 자서전이다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한여름이 탐욕스럽게 그림자를 잘라먹고 있는” 날을 깨우는 장대비를 만난다. 화자는 “기척을 통과한 시간들”이 “폐쇄된 나루에 주저앉아 있고/물과 뭍에서 나는 모든 것들의 적막”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장대비를 만나면서 “파닥파닥 격렬을 핥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화자는 “한여름이 햇살을 변호하고/그림자가 그림자의 풍문을 위로하면” 자신이 품고 있었던 “열 길 넘는 금기들”이 “장대비처럼 세상을 두들기며 깨어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화자는 그 바람이 이루어지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인지한다.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라고 토로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외롭고 허전한 세상의 무게가 물밑에 있는 화자의 격렬함이나 두들기는 힘을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왜 휘몰아치는 격렬마저 쓸쓸한 것일까”라고 토로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그렇지만 세상의 쓸쓸함이 화자의 마음을 삭제하거나 소멸시킬 수는 없다. 화자의 마음은 “조용히 상을 물리면/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도 가득”하고, 또 “서늘하거나 다정한 그리움 하나”로 남은 것이다. 화자의 그리움은 물에 결코 용해되지 않는다. “소용돌이치며 자정을 돌아나”가는 모습에서 보듯이 생성물로서 움직인다. 수심이 깨어나는 봄날에 물밑에서 쓸쓸하게 있던 그림자들이 “버들개지 속눈썹을 열고 나와/화들짝, 비상”(「수몰」)하는 모습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간혹, 이런 장대비의 시간은/그림자 떠난 어떤 기척의 쓸쓸한 자서전”이라는 화자의 자조는 눈길을 끈다. 화자가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열렬한 목소리를 내는 의식은 아니지만, 근원적인 감정이기에 존재를 견지한다. 그것으로 화자의 물밑 파문은 소멸하지 않는다.
내 꼬리뼈 근처에는
끓는 물 속에 살던 물고기가 있다
온도마저 흐릿해져 지느러미만 남은 흉터, 그렇지 흉터 지느러미는 전생이 물고기여서
쏜살같이 내달린 적 많았다
살랑살랑 꼬리 친 적 있었다
슬픔은 울음 쪽으로 굳은살이 박이지만 흉터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어떤 슬픈 흉터는 물고기 지문의 본분으로 온몸을 이끌고 다닌다
휘몰아치는 비탈길이나 급류 앞에서
머뭇거린다거나 뒷걸음질이라도 칠 때면
꼬리 흉터는,
할머니처럼 곱은 손을 내밀거나 부표처럼 발칙하게 도드라져 복숭아벌레처럼 유유한 키잡이가 되고
꿈자리 파도치는 날이면
꼬리지느러미,
나풀나풀 춤추는 한 마리 나비가 된다
―「흉터 지느러미」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내 꼬리뼈 근처에는/끓는 물 속에 살던 물고기가 있다”라고 신체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이 고백에서 주목되는 면은 꼬리뼈 근처에 물고기가 살았는데, 그 물고기의 생존 환경이 끓는 물 속처럼 악조건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물고기는 “온도마저 흐릿해져” 가는 시간이 흐른 뒤 “지느러미만 남은 흉터”를 남긴 채 소멸했다.
그렇지만 화자는 물고기가 자신의 몸에서 소멸했다고 여기지 않고, “흉터 지느러미는 전생이 물고기”라고 간주한다. 물고기가 자신의 몸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고 여기는 것으로, 살아오는 동안 “쏜살같이 내달린 적 많았다”라고, “살랑살랑 꼬리 친 적 있었다”라고 고백한 데서도 볼 수 있다. 화자는 자기의 모습을 “슬픔은 울음 쪽으로 굳은살이 박이지만 흉터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어떤 슬픈 흉터는 물고기 지문의 본분으로 온몸을 이끌고 다닌다”라고 의미화한다. 자기가 겪어야 했던 슬픔이나 울음이나 흉터를 배척하지 않고 포용한다. 흉터가 물고기 지문의 본분으로 자기를 이끌고 다닌다고 긍정하는 것이다.
화자는 자기가 “휘몰아치는 비탈길이나 급류 앞에서/머뭇거린다거나 뒷걸음질이라도 칠 때면” 꼬리 흉터는 “할머니처럼 곱은 손을 내밀거나 부표처럼” “유유한 키잡이가” 된다고 소개한다. 자기가 나아가는 길을 이끌어주는 푯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꿈자리 파도치는 날이면//꼬리지느러미,/나풀나풀 춤추는 한 마리 나비가 된다”라고 노래한다.
3.
바다는 그를 발탁했다
물고기 숨으로 바다를 통역하는 머구리의 본능과 천리안으로 물을 물색하는 사내 K가 바다에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바닷속에 들어가 바다를 제시간에 건져내는 일은 자신을 소생시키는 골든타임,
그러나 K는 바다를 배신하지 않았다
긴 호스로 공급되는 지상의 탯줄을 끊고 물속에서도 물 밖을 유유히 들이쉬는 물고기 근육과 아가미를 가진 K는 이미 바다의 생물체,
바다를 가장 오래 걸을 수 있는 그의 몸은 어떤 수압에도 끄떡없어 혹등고래 지느러미처럼 유려하겠다
바다를 박차고 높이 뛰어오른다거나 폭풍우 치는 밤 아무도 몰래 부둣가를 순찰하고 돌아간다면 그도 물 밖이 그립다는 것일 게다
바다를 향해 수저 한 벌 가지런히 올린다
K, 그는 지금 심해 어느 수심을 유영 중일까
― 「머구리 K」 전문
위의 작품의 “머구리 K”는 바다에서의 잠수부로 삶을 영위했다. 수십 킬로그램이나 되는 잠수복을 입고 한 가닥의 공깃줄 가닥에 목숨을 맡긴 채 물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공깃줄이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깊은 바닷속에서 사투를 벌였다.
작품의 화자는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한 “머구리 K”의 삶을 인정하고 있다. “바다는 그를 발탁했다”라거나, “물고기 숨으로 바다를 통역하는 머구리의 본능과 천리안으로 물을 물색하는 사내 K가 바다에겐 안성맞춤이었”다고 인식한 데서 볼 수 있다. “바닷속에 들어가 바다를 제시간에 건져내는 일은 자신을 소생시키는 골든타임”이라고 말한 데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K는 바다를 배신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긴 호스로 공급되는 지상의 탯줄”이 끊겨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화자는 그 모습을 “물속에서도 물 밖을 유유히 들이쉬는 물고기 근육과 아가미를 가진 K는 이미 바다의 생물체”라고 여긴다. “바다를 가장 오래 걸을 수 있는 그의 몸은 어떤 수압에도 끄떡없어 혹등고래 지느러미처럼 유려하겠다”라고 상상한다.
화자가 “머구리 K”의 삶을 역설적으로 기술한 것은 그의 삶의 의미를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머구리 K”는 사고로 목숨을 잃기까지 잠수부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바다가 부른 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여기고 기꺼이 감당했다. 경제적 소득을 추구하는 것 이상으로 머구리 생활에 진력한 것이다.
화자는 “머구리 K”가 “바다를 박차고 높이 뛰어오른다거나 폭풍우 치는 밤 아무도 몰래 부둣가를 순찰하고 돌아간다”라고 상상한다. 그도 인간이기 때문에 식구들과 친척들과 이웃들과 친구들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머구리 K”가 일하고 있는 “바다를 향해 수저 한 벌 가지런히 올린다”. “K, 그는 지금 심해 어느 수심을 유영 중일까”라고, 다른 세상에서도 머구리로서 잘 살아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화자는 바다를 공상적인 장소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먹을 수 있는 대상으로 삼는다. 바다는 폭풍으로 무서운 파도가 쳐도 포기할 수 없는 삶의 터전이다. 거칠고 난폭한 삶의 조건에 물러서지 않고 “머구리 K”는 맞섰다. 힘으로 대항할 수 없는 경우에는 인간다운 지혜를 발휘했다.
포구들이란
망망(茫茫)을 뒤지던 배들이 돌아와
흘수선 끝에서 잠드는 곳
두 눈과 귀를 틀어막아도 가득한 곳
막다른 길목의 궁리는 포구로 간다
잘생긴 궁리의 일몰 속에는
에베레스트(초모랑마? 일본어이므로 배제하는 것이 필요함)를 넘는 양치기의 얼굴이 있고
밤 외출하는 여자 같은 모호한 입술이 있어
사막고원을 넘는 시원(始原)처럼
바다의 서쪽 시간들
황금빛으로 끼룩거린다
뒤죽박죽 얽히고설킨 궁리의 초점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다
내게 주는 구제처럼
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에만 골몰할 수 있는
‘아멘 코너’ 같은 궁리포구,
기억 저 밑바닥에서부터 젖어오는
슬픔을 다독거리는
궁리의 잠, 무탈하다
―「궁리포구」 전문
“궁리포구”는 충청남도 남당항로에 있는 실제의 장소인데, “포구들이란/망망(茫茫)을 뒤지던 배들이 돌아와/흘수선 끝에서 잠드는 곳”이라고 기술했듯이 다른 포구들과 유사한 풍경이다. 돌아온 배들이 “두 눈과 귀를 틀어막아도 가득한” 장소인 것이다.
위의 작품의 화자는 “막다른 길목의 궁리는 포구로 간다”라고 밝히고 있다. 살아가는 일이 얽히고설켜 복잡할 때 궁리를 마련하려고 찾아간 것이다. 포구는 배들이 바다로 나아가는 시점이면서 출항했던 배들이 돌아와 정박하는 종점이기도 하다. 배들이 만선을 기대하며 출항을 준비하거나 항해를 마친 배들이 돌아와 쉬는 거점이다. 불어오는 태풍이나 밀려오는 파도를 막아주는 지상의 집과 같은 곳이다.
“잘생긴 궁리의 일몰 속에는/에베레스트를 넘는 양치기의 얼굴이 있”다. “밤 외출하는 여자 같은 모호한 입술”도 있다.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각자 지향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사막고원을 넘는 시원(始原)처럼/바다의 서쪽 시간들/황금빛으로 끼룩거린다”라는 묘사도 그러하다. 화자는 그 궁리포구에서 “뒤죽박죽 얽히고설킨 궁리의 초점/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긴다”.
화자가 삶을 힘들어하는 이유는 슬픈 일들 때문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삶의 상황이기에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화자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 위해 “궁리포구”를 찾았다. 그리고 “내게 주는 구제처럼/오직 자신의 심장 소리에만 골몰할 수 있는/‘아멘 코너’ 같”은 위로를 받는다. “기억 저 밑바닥에서부터 젖어오는/슬픔을 다독거리는” 포구의 따뜻한 손길도 느낀다. 화자는 “궁리의 잠, 무탈”한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에게도 무탈한 일상이 영위되기를 기대한다.
새빨갛게 물든 한 폭의 안골포
저녁 해가 횃불처럼 포구를 밝히는 동안
바다와 갯벌 그 배접 끝에서
노부부가
노을을 캐고 있다
늙은 아내가 호미로 한 움큼씩 노을을 캐내면
노인은 깜짝 놀라 입을 꼭 다문 노을을
얼른 망에 주워 담는다
횃불이 사그라지기 전에
딱 하루만큼만 채운 노을 자루를
비척비척 밀며 끌며 가는 노부부의
느리고 굼뜬 실루엣,
저리 더딘데 어느새 이리 멀리 왔을까
캐낸다는 것은
자벌레처럼
수없이 구부정한 허리를 폈다가 구부리는 수행
생채기 덧나고 덧나 굳은살 박인
오체투지 같은 것
끝없는 이야기처럼
막다른 아픔과 적막한 슬픔이 물든
안골포의 하루 퇴장하면
호밋자루처럼 접힌 노부부의 긴 그림자
가로등 환한 언덕을
달팽이처럼 기어 올라간다
큰 대야 속의 노을
뻐끔뻐끔 밭은 잠을 해감하는 동안
밤새 칠흑 같은 갯벌은 두근두근 여울지겠다
―「노을을 캐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새빨갛게 물든 한 폭의 안골포”에서 “저녁 해가 횃불처럼 포구를 밝히는 동안”에 “바다와 갯벌 그 배접 끝에서/노부부가/노을을 캐”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늙은 아내가 호미로 한 움큼씩 노을을 캐내면/노인은 깜짝 놀라 입을 꼭 다문 노을을/얼른 망에 주워 담는다”.
노부부가 노을을 캔다는 것은 평생 함께 일을 해온 것을 상징한다. 의식주 해결을 위해 일하는 동안에는 당연히 힘들고 피곤하고 고통스럽다. 노을을 “캐낸다는 것은/자벌레처럼/수없이 구부정한 허리를 폈다가 구부리는 수행”이고, “생채기 덧나고 덧나 굳은살 박인/오체투지 같은 것”이 그 상황이다.
일은 이념 이전의 일상이고 노동이다. 생산을 이루기 위한 목적이나 수단에 국한되지 않는 삶의 과정이다. 능률이나 생산성을 추구하는 것 이상의 가치이다. “횃불이 사그라지기 전에/딱 하루만큼만 채운 노을 자루를/비척비척 밀며 끌며 가는 노부부의” 모습이 그러하다. 화자는 노부부의 “느리고 굼뜬 실루엣”을 바라보며 “저리 더딘데 어느새 이리 멀리 왔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일해온 삶이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목격하며, 유한한 생의 나머지 시간을 살펴보는 것이다.
화자는 “끝없는 이야기처럼/막다른 아픔과 적막한 슬픔이 물든/안골포의 하루 퇴장하”는 길을 떠올린다. “호밋자루처럼 접힌 노부부의 긴 그림자”가 “가로등 환한 언덕을/달팽이처럼 기어”오른다. 함께 일한 노부부는 함께 하루를 마감한다. 함께하기에 그들은 부드럽게 움직인다. 삶의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아픔과 슬픔에 굴복하지 않은 힘을 내는 것이다.
4.
물길을 젓는다
호수 한가운데에서 가만히 노를 놓고
출렁이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어느새 멀리 떠내려와 버린 삶의 오감,
호수에 청진기를 꽂고 물의 심장 소리를 읽는다
눈을 뜨면 자욱했던가
휘청거리던 봄날은 자꾸 설익었던가
검은 구름 휘몰아치며 부서지던 범람들
자각몽은 얼마나 파닥이던 꿈이었을까
쾌속으로 달리는 모터보트의 날갯짓
글썽글썽 묽어지고 헐거워져
투명해지는 동안
삶의 가속만큼 골짝을 굽이쳐온 물의 파장
조용히 섞이고 나누어진다
좀체 오리무중인 호수
그 눈부신 몰두와 채록을 읽고 있는
윤슬의 아미, 진중하다
―「호수를 읽다」 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물길을 젓”다가 “호수 한가운데에서 가만히 노를 놓고/출렁이는 눈을 지그시 감는다”. “어느새 멀리 떠내려와 버린 삶의 오감”을 느껴 “호수에 청진기를 꽂고 물의 심장 소리를 읽는다”.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나타내는 데 한정되지 않는 삶의 실재를 들으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이란 온몸을 써서 일하는 것으로 부단하게 움직이는 물과 같다. 화자가 호수에 청진기를 꽂고 심장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그 행동이다.
화자는 호수의 심장 소리를 들으면서 “눈을 뜨면 자욱했던가”, “휘청거리던 봄날은 자꾸 설익었던가”라고 지나간 시간을 회상한다. 그러면서 “검은 구름 휘몰아치며 부서지던 범람들”을 떠올리고, “자각몽은 얼마나 파닥이던 꿈이었을까”라고 되돌아본다. 자각몽이란 꿈을 꾼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꾸는 꿈이다. 화자는 꿈을 꾸는 동안 견고한 의식을 가지면 꿈을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들을 꿈속에서 이룰 수 있다고 여겼고, 실제의 삶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희망했다. 그렇지만 화자는 파닥거리기만 했을 뿐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화자는 그것을 안타까워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호수의 물이 청진기를 통해 일러주었기 때문이다. 화자는 시간의 흐름을 이해하라는 호숫물의 충고를 받아들여 흐르는 시간에 몸을 실었다. 그러자 “쾌속으로 달리는 모터보트의 날갯짓/글썽글썽 묽어지고 헐거워”지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시간의 흐름이 “투명해지는 동안/삶의 가속만큼 골짝을 굽이쳐온 물의 파장/조용히 섞이고 나누어”지는 것도 보인다.
화자는 “좀체 오리무중인 호수”를 새롭게 바라본다. 이전에는 짙은 안개 속에 있는 호수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마치 갈피를 잡기 어려운 일상과 같은 것이었다. 화자가 호수를 다시금 바라보자 “그 눈부신 몰두와 채록을 읽고 있”고, 그 “윤슬의 아미, 진중”한 모습이 눈에 띈다. 아름다운 눈썹뿐만 아니라 시간에 몰두하는 진중한 자세가 보이는 것이다.
화자에게 진중함을 일러준 호수는 풍경이 아니라 시간의 물이다. 삶의 시간이 스며든 호수는 깊고 무겁고 넓고, 그리고 움직인다. 움직이는 호수는 마중 나온 나비처럼 창문을 두드린다. 두꺼비의 등을 타고 물꼬를 보러 나선다. 은신처가 있는 집을 찾아 물소리가 졸졸 흐르는 길을 따라간다. 절명한 김유정의 문장들이 안타까워 소낙비에 젖으며 꽃점을 친다. 우기에 젖는 동안 사람에 들거나 사람을 들인다. 바람을 흉내 내는 고독을 출렁이는 방죽으로 데려간다. 쓸쓸한 그림자들의 목덜미를 물의 습성으로 간질인다. 징조도 없이 거듭하는 시행착오의 눈물을 닦아준다. 탱자나무 울타리에 촘촘하게 끼인 그리움을 꺼내 물 위에 띄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깃발을 물의 기운을 넣고 흔든다. 소멸하지 않고 수백 년 만에 눈뜬 연꽃 옆에 멀고 먼 전략으로 부드러운 시를 심는다.
맹문재 | 문학평론가 · 안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