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결투 1
이성구 추적에 실패한 채 숙소로 돌아온 백수웅은, 이틀 동안이나 은신처에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몸만 움직이지 않고 있을 뿐, 그의 머리는 앞으로 움직여야 할 작전에 골몰하고 있었다.
남북 회담 정보 수집과 자신의 개인 복수 순서에 갈등하던 그는 순서를 결정지었다.
그는 누운 채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있었 다. 자기 자신에 대한 채찍이다.
8년 전 숨통을 조이게 만들었던 그 지나간 일들을 그는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 쓰라린 과거를 잊는다면 신(神)이 용서칠 않을 것이다.
나의 머리에 낙인처럼 찍어 놓아 가슴에 불꽃 같은 증오심을 타오르게 했던 과거...
지금까지 겪어 왔던 굴욕...겪어야 했던 모멸감 ...
나를 괴롭혔던 자존심은 그들의 욕지거리 하나 까지도 지우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얼굴, 음성...아니, 그들의 숨결 하나까지라도 적들에 대한 것이라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 기억들을 가슴의 불꽃 속에 영원히 간직할 것이다.'
지금까지 백수웅은 수많은 공포와 절망을 이겨 왔다. 그 힘은 가슴에 솟구치는 증오였다.
지금까지는 증오가 자신을 씹으며 살아 왔지만, 이제부터는 자신이 증오를 먹어 치울 것이라고 다짐했다.
대상은 바로 8년 전 그 녀석들이다.
앞당겨 귀국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녀석들을 해치우고 또 회담장소를 폭파시킬 것이다.
어차피 이 한국 땅덩어리를 유토피아로 만들자면 모두 사라져 주어야 할 인간 쓰레기들이다.
백수웅은, 자기의 적은 민족의 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증오와 적개심이 그를 지탱하게 한 힘의 원천인지도 모른다.
그는 하숙집을 벗어나 이틀 만에 거리로 나섰다.
서울은 8년전에 비해 몰라볼 만큼 발전되어 가고 있었지만,
백수웅에게는 그것이 한낱 신기루처럼 느껴기만 했다. 이것들은 모두 허상이다.
이제 머지않아 이 그림들은 지워질 것이며, 자신의 구상대로 새로 그려질 것이다.
'그 새로운 그림을 위해 서울에 온 것이다!'
백수웅은 공중 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서지아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는데,
이미 형사들과 내통을 시작한 이성구가 그녀를 감시하지 않을 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성구를 조심하라.
이것이 전화를 거는 목적이었다.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가 몇 번 울리자, 이윽고 침채된 듯 힘없는 여인의 목소리가 돌려 왔다.
"네, 스타 바입니다."
"지아, 나야, 백수웅."
"어머, 백수웅 무사해? 지금 어디 있어?"
"나는 안전하니 걱정하지 마...전화해도 괜찮아? 옆에 누구 없느냐구."
"괜찮아. 아직 손님 올 시간이 아니니까. 도대체 어디 있어?
여기 오는 게 위험하면 내가 찾아갈게."
서지아의 목소리는 격앙되다 못해 사뭇 떨리고 있었다.
창을 넘어 도주한 그가 사홀 만에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간단히 말할게. 이성구는 기관의 프락치야. 조심해. 그래서 전화한 거니까."
'다르륵, 다르륵.'
두 사람의 통화 내용이 반도 호텔 수사실 녹음기에 빠짐없이 수록되었다.
백수웅의 목소리는 세 군데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나는 지금 통화하고 있는 서지아에게였고,
또 하나는 수사실에 장치된 도청장치의 녹음기, 그리고 또 하나는 녹음기와 연결된 허열의 이어 폰이었다.
백수웅과 서지아의 대화가 계속 이어져 가고 있었다.
"그럴 줄 알았어. 백수웅, 사실은 이성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어.
그래서 내가 일방적으로 끊어 버렸지. 그 녀석이 나타난 후 형사들이 들이닥쳤거든."
"음, 어느 정도 추측은 하고 있었지. 배신자. 좋아, 그 문제는 내게 맡겨 둬.
그보다도 상의할 일이 있는데, 오늘 일 끝나고 나좀 만나야겠어."
"정말?"
지아의 목소리는 계속 들떠 있었다.
허열은 긴장된 채 두 고막에 힘을 잔뜩 주고 있었다. 드디어 꼬리가 잡혔다.
서지아와 백수웅이 접선하고 있었고, 오늘 밤 그들은 극적인 도킹을 할 것이다.
녀석이 이렇게 쉽사리 노출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역시 스타다스트를 집중 공략한 보람이 있었다.
"어디서 만나지?"
"옛날 거기. 내가 자주 가던 거기 말야."
"아, 알았어. 그럼 영업 일찍 끝내고 "
허열이 이어폰의 볼륨을 좀더 높였다.
오늘 밤이다. 접선 장소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부터 스타다스트에서 서지아를 감시하다가 미행하면 녀석을 잡을 수 있다.
다시 백수웅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하지만 조심하라구. 날 뒤쫓는 녀석이 있는데 보통 머리가 아니니까. '
미행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잊어서는 안 돼."
"조심할게. 시간은?"
"지금이 6시니까 다섯시간 후 11시, 아니, 11시 30분에 만나자.
문 앞에서 기다릴게."
지아와 백수웅이 동시에 수화기를 내려놓았고, 이어서 허열이 이어폰을 뽑아 들었다.
돌아가던 녹음기 테이프도 동시에 멈추었다.
허열은 부하에게 허름한 작업복을 준비시킨 뒤,
정보부장이 하사한 콜트 코브라 구경 38 스페셜 권총 케이스를 가슴에 감았다.
뜻밖의 수확이다. 녀석을 보는 즉시 사살해 버릴 것이다.
가슴에 매달린 권총을 한 번 더 추스르고 작업복을 걸쳐 입었다.
"저희들이 뒤따르겠습니다."
부하 형사들이 잠바의 지퍼를 올렸다.
"아니, 됐어. 이미 녀석은 노출되었어. 여럿이 뒤쫓는 것보다 혼자 가는 게 편해.
지시 내릴 때까지 대기하고 있으라구. 알았지!"
부하들을 대동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 녀석을 보자마자 사살해야 한다.
그러나 녀석을 한 방에 날려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
그녀석에게는 알 수 없는 비밀이 너무나 많다. 그것이 참으로 궁금했다.
장인인 노범호 회장은 즉각 사살해 없애라고 하지만,
비밀을 알아 낸 뒤 없애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자면 부하들이 뒤 따라서는 안 된다.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벌써 30분이 흘러, 밤 6시 30분이 되었다. 1초가 하루같이 지루했다. 빨리 11시가 되어야 한다.
그는 기쁨과 호기심에 넘친 채 사무실을 배회하고 있었다.
권총을 꺼내 탄환도 점검하고 총구도 손질해 두었다. 그래도 시간은 1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녀석인지 알아봐야겠어."
허열이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밤 10시 정각. 앞으로 1시간 30분이 지나면 서울 어디에선가 서지아와 백수웅이 만나게 될 것이다.
녀석을 체포할 절호의 찬스다.
그는 부하들도 거느리지 않은 채 수사용 지프로 스타다스트가 위치한 종로 1가를 향해 달려갔다.
골목 어귀에 차를 세워 놓고 비상등 스위치마저 꺼 버렸다. '
그는 호텔 층계로 올라가 스타 바를 들여다보았다.
붉은색 가을 원피스를 시원하게 차려 입은 관능적인 여인 하나가 홀을 휘젓고 다녔다.
한 번 부딪친 일은 있지만,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했다.
호텔을 습격했을 때 그녀가 샤워 꼭지로 물을 퍼부어 도망친 일이 있었다.
두세 명의 여인이 있기는 하지만, 홀을 장악하는 모습으로 보아
바의 여주인 서지아는 붉은 원피스의 풍만한 가슴을 가진 저여자가 틀림없을 거라고 짐작했다.
허열은 움직이기 편한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홀로 들어가 기다리고 싶었지만,
이 복장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그는 호텔 입구로 다시 내려왔다.
스타다스트의 대형 입간판의 버팀 콘크리트에 엉덩이를 걸친 채 시간이 되기만 기렸다.
이제 1시간 남았다.
저 쪽에는 해드라이트와 비상등이 꺼진 자신의 지프가 시동이 걸린 채 대기하고 있었다.
어디로 튀든 뒤따를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다.
녀석이 서지아와 만나는 것을 보기만 하면, 허벅지에 총을 쏘아 쓰러뜨린 후,
서울 변두리로 끌고 가 자백을 받을 것이다.
너의 배후 인물이 누구냐, 왜 남한과 북한 모두 증오하느냐, 왜 일본으로 도망쳤느냐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못하면 심장에 탄환을 박아 단숨에 제거해,
장인 어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다.
야망에 넘치는 이 젊은 검사 허열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2층의 현란한 불빛이 어른거리는 스타 바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11시가 지나도록 서지아는 밖으로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붉은 원피스의 여인은 여전히 바쁜 모습이었다.
서지아는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아예 출근조차 하지않은 것일까!
그는 재빠른 동작으로 튀어나와 길가의 공중 전화를 찾아 동전을 넣었다.
"거, 거기 스타다스트죠? 서 마담 좀 바꿔 주쇼."
술 취한 목소리로 서지아를 찾았다. 어려 보이는 여자가 전화를 받는데,
서지아는 지금 막 옷을 갈아 입으러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허열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 실패하는가 하는 우려가 말끔히 가셔진 것이다.
11시 20분 정각. 마침내 그 훤칠한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허열은 처음으로 서지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았다. 매우 아름답게 생긴 여자였다.
긴 판탈롱 바지에 꽃무늬 잠바를 입고 있고, 손에는 작은 핸드백 하나만 들고 있었다.
허열은 천천히 일어나 그늘 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서지아가 호텔 현관 문을 나서며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11시 20분. 10분 남았다.
백수웅과 만나기로 한 장소. 백수웅이 자주가던 그 곳.
그 곳은 지금 낙지를 팔고 있는 옛날의 민속 주점을 말한다.
그녀는 좌우를 살펴본 후 무교동 낙지집 골목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지아와 백수웅이 만나기로 한 11시 30분까지는 불과 5-6분 밖에 남지 않았다.
허열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시간으로 보아 둘이 접선하기로 한 장소는 이 근처가 틀림없다.
"음, 이 두 사람은 무교동에서 만나기로 한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멀리 뛰지는 못할 거야!"
거미줄같이 얽혀 있는데다가 무교동 낙지 골목은 비좁기 짝이없다.
아무리 재빠른 백수웅이라고 해도, 총알보다 빠르지는 못할 것이다.
게다가 사격에는 절대 자신 있는 허열이다 .
'오늘 밤 네놈이 끌장나는구나,'
그는 작업복 단추를 풀었다. 탄환은 장전되어 있고, 권총 꺼내기는 아주 편했다.
5-6미터 앞에서 서지아가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앞서 걷던 그녀가 한 지점에서 우뚝 멈추어 섰고,
허열은 골목 벽에 몸을 밀착시켰다. 이제 3분 정도 남았다.
허열도 서지아도 긴장을 풀지 못해 몹시 초조한 표정이었다.
서지아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으나, 자신을 미행한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볼 수 없었다.
통금이 가까워져서인지, 귀가하려는 젊은 연인들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모습만 눈에 간간이 띄는 정도였다.
그녀는 핸드백을 잔뜩 움켜쥔 채 백수웅이 나타나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허열이 반도 호텔에서 백수웅 생각에 골몰하고 있던 저녁 9시경,
백수웅은 영등포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공업 지대로 터를 잡은 영등포 일대는 저녁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기계 부속 상회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는 골목에서 한 시간을 서 있었다.
이 곳 분위기와 길목을 파악한 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한 청년의 앞을 막았다
갑작스러운 사람 출현에 오토바이 사내가 휘청하며 옆으로 쓰러졌다.
"야, 임마. 죽고 싶어 환장했어?"
쓰러진 사내가 욕지거리를 퍼부으며 주춤주춤 일어섰다.
"아이구, 미안합니다. 다치지는 않았습니까?"
백수웅이 쓰러진 사내를 부축하며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허리를 펴는 사내의 아랫배를 있는 힘을 다해 주먹으로 내질렀다.
"윽!"
사내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어디 아프십니까?"
백수웅이 몸을 구부리며 이번에는 팔굽으로 목덜미를 갈겼다.
지나가던 한두 사람이 흘끔 바라보기는 했지만, 자기 일처럼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오토바이의 사내가 완전히 늘어졌다. 백수웅이 혀를 차며 일어났다.
"쯧쯧, 술 마시고 운전하면 다친다니까."
그는 쓰러진 오토바이를 일으켜 세운 다음, 번개처럼 시동을 걸고 튀어나갔다.
정말 눈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고, 이를 눈치챈 사람도 없었다.
영등포를 빠져나온 백수웅은 오토바이에 몸을 실은 채 종로를 향해 유유히 달려가고 있었다.
일본에서 자동차와 오토바이 운전을 완벽하게 습득한 백수웅이었다.
11시 30분이 지나고 다시 5분이 더 흘러갔다. 백수웅을 기다리는 서지아나 이들을 체포하려는 허열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채 백수웅이 나타나기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25분만 지나면 통금이 시작된다.
허열이 권총을 뽑아 손아귀에 움켜잡았다. 여차하면 심장이든 허벅지든 쏘아 버릴 작정이었다.
서지아가 계속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11시 45분. 만나기로 한 시간이 15분이나 지났다.
'사고가 생긴 것일까?'
서지아는 초조하고 불안했다. ]
형사들이 백수웅의 뒤를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욱 불안했다.
아무래도 사고가 생긴것이 틀림없다.
그녀는 백수웅을 포기하고 몸을 돌렸다. 이 때다.
어디선가 귀를 찢을 듯한 엔진음이 어둠 속에서 들려 왔다.
"부르릉--."
오토바이 한 대가 쏜살처럼 달려왔다.
그 오토바이에 타고 있는 남자가 서지아의 허리를 움켜쥐고 좌측 골목으로 빠져나갔다.
불과 3-4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깜짝 놀란 허열이 권총을 움켜쥔 채 뒤따랐으나,
오토바이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골목 어디선가 멀어져 가는 엔진음이 허열의 허탈한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개자식, 또 튀었어."
무교동을 벗어난 오토바이는 광교 네거리에 잠깐 멈추어 섰다.
서지아는 뒷자리로 옮겨 탄 채 백수웅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쥐었다.
"놓치지 말라구!"
백수웅이 뒤를 향해 고함을 지른 후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성난 맹수처럼 달리던 오토바이는 12시 5분 전에야 남대문 근처에 도착했고,
그는 알 수 없는 골목으로 파고들었다.
"어디 가는 거야?"
놀란 서지아가 고함을 질렀고, 오토바이는 양동 한가운데 있는 낡은 한옥집에서 멈추어 섰다.
백수웅이 서지아를 그 한옥집의 구석방으로 안내했다.
늠름하게 생긴 옆방의 노총각이 깨끗한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다.
밤 여인들이 문을 열고 키득이며 훔쳐보고 있었다.
"어쭈, 괜찮은 거 물어 왔네!"
"어쩐지 외눈 하나 깜빡이지 않더라."
서지아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갑자기 코를 손가락으로 틀어막았다.
구토라도 일으킬 것 같은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세상에 , 어떻게 이런 데서 생활을"
더럽고 악취가 나기는 했지만, 방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방 한가운데 늘어진 줄에는 깨끗이 빨아 널어 놓은 내복들이 열병하는 군인들처럼 질서 있게 널려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깜짝 놀랐잖아!"
그렇게 번개처럼 낚아채 오고도, 백수웅은 마치 커피 한 잔 마신 것처럼 무표정했다.
그는 펴놓은 담요 위에 벌렁 누웠다.
"혹, 미행자 없었어?"
그는 누운 체 지아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지아는 너무나 놀라 아직도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녀의 놀란모습을 보며 백수웅이 미소를 지었다.
"지아는 그들을 몰라서 그래. 나로서는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지.
미행자가 없다는 보장을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밤 우리가 옛날 민속 주점 앞에서 만난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잖아.
게다가 나도 여간 조심한 것이 아니라구."
"그래서 지아는 그들을 모른다는 거야.
그 사람들은 우리가 한발짝 걸으면 두 발짝 뛰는 사람들이니까."
지아가 그들의 생리를 알 턱이 없다.
그들이 뒤쫓는 사람은 일본에서 밀입국하여 테러를 자행하려는 백수웅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병아리 형사들을 따라붙이지는 않을 것이다.
정보 수집과 정보 판단, 추적과 체포에는 귀신 같은 전문가들을 파견했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지휘관은 대단한 센스를 소유한
탁월한 인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이 백수웅의 판단이었다.
막대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의 전문 수사 요원들이,
한 번 습격했던 스타다스트 호텔을 포기할 리가 없다.
그러한 그들이 스타 바의 전화를 도청하지 않는다면 바보일 수밖에 없다.
백수웅이 옷을 벗고 담요에 누웠지만, 지아는 도무지 옷 벗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담요에서도 역겨운 냄새가 지독히 났다. 그녀는 백수웅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후후후 "
"뭐가 우습지?"
"천하의 백수웅 꼬라지가 우습지 않아?
8년 전에 사라질 땐 삼양동 꼬방 동네 골방에서 뒹굴더니,
오늘 밤엔 겨우 이런 데나 데려오고....왜 사서 고생이야?"
"그렇게 되었나? 하지만 난 여기가 좋은걸."
지아는 무릎을 감싸안으며, 눈을 감고 있는 백수웅을 내려다보았다.
참으로 예측할 수도 조정할 수도 없는, 한 마디로 아무도 못 말리는 사내다.
1964년 12월, 그가 교도소에서 풀려난 후 행방 불명되었다는 소식을 그의 어머니를 통해 들었을 때,
서지아는 그의 대학 동료들이나 그를 담당했던 검사, 형사들을 찾아 미친 듯이 돌아다녔지만,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이 없었다.
정확히 1964년 12월 24일 저녁, 어머니 감기약을 지어 오겠다며
밖으로 나간 뒤 그의 모습을 8년 동안이나 볼 수 없었다.
그의 증발이 신문에 단신으로 보도되기는 했지만,
연말 연시의 들뜬 분위기 때문에 누구도 나서서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학교 선배들과 이성구 정도가 몇 번 다녀갔을 뿐, 경찰들조차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8년 세월을 보낸 뒤 이렇게 불쑥 나타난 것이다.
"어머니는 찾아보았어?"
"금호동 옛날 집엘 가 보았지만, 주인이 바뀌어 있더군."
"그 동안 도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묻지 마. 아무튼 지금 경찰에 쫓기고 있는 몸이니까."
"뭘 도와 줄까?"
뭘 도와 줄까, 그렇게 말했지만, 당장 내일 새벽에라도 어디론가 옮겨야 한다고 맹세했다.
창녀들이 득시글거리고 악취가 코를 찌르는 이 소굴에서 탈출시켜야 한다.
이 지적이며 용기 있는 사내가 이런 소굴에 머물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백수웅이 스타 바에 처음 나타났을 때, 그는 지난 8년 동안의
긴 세월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고, 서지아도 묻지 않았다.
그 날 밤 고작 경찰에 쫓기고 있다는 말 이외에 자신의 신변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를 돕고 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지아 때문에 큰일이야."
엉뚱하게도 백수웅은 자신보다도 지아 걱정에 몸달아했다.
백수웅은 지아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도. 자신을 기관에 밀고했다고 믿는
이성구를 향해 끊임없이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지옥에도 못 갈 녀석. 녀석이 나에게 지아 있는 곳을 알려 주더군."
"그건 고마운 일이지."
"그래 놓고 밀고한 거야. 내가 탈옥했다고 말했거든.
우리가 스타다스트에 있던 날 밤 형사들이 들이닥쳤던 건 그 죽일 놈이 밀고한 때문이었어.
그래서 지아 걱정을 하는 거라구, 녀석들은 틀림없이 지아를 연행해서 고문할 거야. 날 내놓으라구."
"흥---, 그렇게는 못 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 입을 열게하지 못해."
"그렇지 않아. 넌 그들을 몰라. 입을 열지 않고는 못 견딜 거야.....만일 그 지경이 되거든 일러 줘.
내가 이 양동 사창굴의 무허가 하숙집에 있다고."
"미쳤어? 차라리 함께 죽지."
"그런 뜻이 아냐. 생각이 있어 그러는 거니까 시키는 대로만해.
녀석들이 지아를 연행할 건 틀림없어. 적당히 버티다가 불어 버리기만 하면 돼.
이성구 그 녀석에게 복수하는 방법이기도 하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라는 말을 벌써 두 번째 듣는다.
이럴 때는 그의 말대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좋다.
백수웅은 스타 바가 문열지 않는 날이 연행되는 날이라고 말했다.
"그 다음엔, 또 그 다음엔 뭘 하지? 허구헌 날 쫓기기만 할 거야? 어디 가서 정착하자.
산골도 좋고, 사람들 손이 닿지 않는 어촌이라도 좋으니까. 돈은 있어."
"2년만 기다려. 좋은 세상이 올 거야."
"2년? 왜, 세상이 뒤집어지기라도 한대? 천만에, 이 정부, 지금 잘 굴러가고 있어.
뒤집힐 가능성이 전혀 없다구."
"아무튼 좋은 세상 온다면 오는 줄 알아."
"허 참, 세상 모르네. 지금은 박 대통령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고,
경제 사정도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다구. 8년 전 데모 할때의 공화당 정부가 아냐.
쫓기고 있으면 도망치는 게 상책이라구.
김일성이가 또 탱크 몰고 내려오기 전에는 끄떡없어. 생각 잘해."
백수웅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말하고 싶은 것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이 여자에게 그 엄청난 계획을 다 말할 수는 없다.
"아무튼 내일 이성구를 데려다 야단을 좀 쳐야겠어. 이 자식, 옛 동지를 배신하다니."
그의 가슴은 아직도 이성구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내일은 다시 영등포 법원에서 기다렸다가 낚아첼 것이다.
이번에는 기관원들의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쪼그리고 앉아 있던 서지아가 일어나 불을끄고 기어이 옷을 벗어 버렸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좋다. 백수웅만 옆에 있다면, 시궁창이면 어떻고 화장실 바닥이면 무슨 관계냐.
목숨까지 함께할 나의 남자다. 도둑이라도 좋고 살인범이라도 좋다.
간첩으로 몰려도 이 사내의 품에서 운명을 함께 할것이다.
캄캄한 방구석이 잠시 조용해지더니, 이윽고 서지아의 발악하는듯한 괴성이 터졌다.
유난히 큰 신음 소리를 내밸는 서지아였다. 더구나 오늘 밤은 가장 자유로운 날이다. ]
마음껏 비명을 질러 대도 걱정할 자리가 아니다.
웬일인지 이 날따라 백수웅도 한껏 애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지아를 조금씩 사랑하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서지아를 돌려 보냈다.
지난 밤 무교동에서 오토바이를 이용해 낚아채는 데는 성공했지만,
추적자들이 지아나 스타 바를 쉽게 포기할 리가 없다. 앞으로 연락하는 방법도,
도청의 우려가 있는 전화보다는 메모 전달이나 기타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서지아가 돌아간 후 백수웅은 페인트 가게에서 빨간색 페인트를 구입하여 정성껏 오토바이를 싸발랐다.
노란색 오토바이가 빨간색으로 바뀌었고,그는 퇴계로에 밀집해있는
오토바이 상회로 달려가 오토바이용 헬멧을 구입해 뒤집어 썼다.
소형이라 번호판이 없어 당분간은 숨어 다니기에 적절한 도구가 될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무기도 될 수 있다.
몇 가지 부속을 갈아 끼우고 액세서리를 구입해 달아 놓으니, 아주 훌륭한 새 물건으로 변해 버렸다.
아직 교통이 혼잡할 정도로 자동차가 보급된 것은 아니어서,
기동력 있게 움직이는 데는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
도쿄에서 소유했던 신형 혼다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성능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낡은 것이 오히려 묻혀 다니기에는 더 적절할 것이다.
그는 오토바이를 몸에 익히기 위해 시내를 네 바퀴나 돌아 보았다.
1972년 3월 18일. 이 날은 토요일이다.
백수웅이 대마도를 통해 밀입국한 지 열하루째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틀 동안 정성을 들여 수리를 끝낸 오토바이를 타고, 그는 다시 영등포 법원으로 갔다.
이성구. 친구를 배신한 그에게 아무래도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 한다.
지난번에는 수사관들 때문에 놓쳤지만, 오늘은 반드시 낚아채고야 말 것이다.
"더러운 자식!"
오후 1시 30분이 되자, 퇴근하는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백수웅의 눈이 다시 번뜩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문보다도 주위를 살피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오늘도 기관원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허리가 구부정한 이성구의 모습이 나타났다.
검은 가죽 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터덜터덜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백수웅이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었다.
오토바이의 뒤에는 잡다한 청소 도구들이 잔뜩 쌓여 있어, 장사꾼으로 완벽하게 변장되어 있었다.
그가 천천히 뒤따르기 시작했다. 이성구는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알을 닦은 다음,
시내 버스 정류소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백수웅은 끝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자신을 찾기 위해 그들은 모습을 감춘 채 이성구 뒤를 미행하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버스 하나가 도착했고, 버스는 사람을 태우고 천천히 몸체를 굴리기 시작했다.
영등포를 벗어난 시내 버스는 속력을 올리며 상도동 쪽을 향해 달렸다.
간간이 정류소에 멈추어 서기는 했지만, 이성구가 내리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숭전 대학(현 숭실 대학) 정문 앞에서 멈추어 섰고,
이성구는 거기서 내렸다. 같이 내린 사람은 젊은 군인 한 명과 여인 네 명이었는데,
그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뿔뿔이 흩어졌다. 백수웅의 오토바이가 이성구 뒤로 바싹 달라붙었다.
이성구는 백수웅의 추적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성구의 가슴은 불안으로 짓눌려 있었다.
치안국에 끌려가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던히 노력은 했지만,
백수웅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때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버스 속에서도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백수웅이 탈옥한 이유는 노옥진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지아 아니면 도움받을 곳이 없다는 것도 이성구는 잘 알고 있었다.
밀고, 이성구는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공개 수사도 하지 못한 채 눈이 뒤집혀 백수웅을 찾고 있다면,
그가 무엇인가 큰일을 저지른 것만은 틀림없다. 옛날의 동지를 팔아넘기면 장래가 보장된다.
그들의 약속은 믿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옛 동지를'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두려웠는지, 그는 버스 의자에 앉아 부르르 몸을 떨어 댔다.
그래서 하차할 정류소를 지났다는 것을 버스가 출발한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한 정거장을 지난 다음에야 버스에서 내렸다. 가난에 찌들어 고생하는 아내,
철없는 어린 것. 그들을 생각하면 눈 한번 질끈 감고 밀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제 겨우 28세의 나이, 아직도 자신의 장래는 예측 할 수 없다.
더렵게도 장래를 담보로 잡힐 수는 없다. 밀고하다니, 내가!
끝없는 생각에 잠긴 채 걷는 그의 고막을 금속성 소리가 찢어댔다.
"끽--."
이성구는 소스라치게 놀라 멈추어 섰다. 헬멧을 뒤집어쓴 한 사내가 오토바이로 길을 가로막고 섰다.
"이성구!"
사내가 소리쳤다. 이성구는 이를 악물었다. 또 기관원이 찾아 온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간 것이다.
"뒤에 타. 짐은 내버리고."
헬멧 때문에 목소리가 분명히 들리지 않았다.
"누구요, 당신?"
"타. 나 백수웅이야. 만일 거절하면 네 집구석에 불을 싸지를 테니까."
헬멧이 벗겨졌다. 턱수염이 더부룩한 백수웅의 얼굴이 드러났다.
"백, 백수웅...여길?"
심장이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이런 데에 이렇게 나타나다니, 형사들이 찾고 있는 백수웅이가.
"무, 무슨 소리요, 백 형? 집에 불을 싸지르다니....그렇지 않아도"
"시간 끌지 마. 10초의 여유를 준다. 선택해, 가든지 날 따라 오든지."
'그래, 이 친구가 오해하고 있는 거야. 서지아가 오해하고 있듯. 아직 밀고한 일은 없어.'
"좋다. 조용한 데로 가자. 나도 할 얘기가 있으니까."
이성구는 짐을 내리고 오토바이 뒤에 올라탔다. 그가 백수웅의 허리를 껴안자,
백수웅은 미친 듯이 오트바이를 몰았다.
백수웅은 관악산으로 갔다. 험한 산길을 용케도 비집고 올라갔다. 오토바이를 공터에 멈춰 세웠다.
오토바이에서 내리기 무섭게 이성구를 끌어내렸다. 그의 행동은 몹시 난폭했다.
미처 설명할 틈도 주지 않고 무릎이 올라가 명치를 박았다.
"윽!"
이성구가 배를 움켜쥐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쓰러져 엎어진 그의 등에 백수웅이 침을 뱉었다.
"배신자. 난 비겁한 놈을 용서해 본 일이 없어."
이성구가 겨우겨우 허리를 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었지만,
백수웅에 대한 증오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백, 백수웅....당신은 "
"8년 만에 탈옥한 나를 밀고해? 너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때를 묻혔구나.
내가 말하지 않던가. 나를 도우려면 나를 잊어 달라고."
"어리석은 친구. 백 형은 너무 어리석어. 그래서 넌 항상 위험스럽지."
"그래서! 무얼 변명하겠다는 거야?"
"어리석은 사람은 깊이 생각할 사이가 없다는 거지. 난 밀고하지 않았어.
그들이 나를 미행해서 스타다스트까지 따라왔을 뿐이라구. 난 그걸 말해 주려 했지만,
서지아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어."
"변명!"
"천만에. 나는 두 번이나 끌려갔었어. 너를 찾아 정보를 제공하면 내 장래를 보장해 준다고 했지.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어. 조금 전 네 등 뒤에 매달려 오면서 무얼 생각했는지 알아?
이젠 나도 서울 생활 끝이야. 고향 충주로 내려간단 말이야.
너를 만나고도 제보하지 않으면 범인 은닉죄로 처벌한다고 그랬어.
어차피 공무원 생활은 끝난 거야."
이성구가 바위에 걸터앉았다. 아랫배 통증이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다.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백수웅을 노려보며 뱉듯이 말했다.
"넌 내게 거짓말했어!"
"거짓말?"
"탈옥은 거짓말이야. 그 동안 넌 어디서 무얼 했지? 말하라구.
8년 전 증발되었을 때 너는 무죄 석방된 뒤였어. 증발될 이유도 없고,
지금까지 경찰이 뒤쫓을 필요도 없어, 한데, 넌 지금 쫓기고 있단 말이야.
평양에 가 있었나?"
"평양? 허허, 허허허 "
백수웅이 하늘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공허한 웃음을....
웃고 있는 그의 양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허허, 난 그런 데 안 가, 나는 빨갱이라면 자다가도 진저리치는 놈이지."
"그렇다면 도대체 쫓기는 이유가 뭐냐고? 말해."
"넌 조국을 사랑하고 있나? 어때? 이성구. 말하지 않겠어?"
"사랑하지. 갈 데도 없고, 그래서 이렇게 버티고 사는 거라구."
"조국이 너에게 무엇을 해 주었지?"
"조국이 내게 무엇을 해 주었건, 그건 아무 상관 없어. 무조건 사랑이지.
같은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여자와 결혼했고, 또 한국어로 살아갈 아이를 낳았고,
그리고 여기서 일해서 먹고 살고있어. 그뿐이야."
백수웅이 또 껄껄대며 웃었다.
"넌 행복한 놈이다. 조금 전 널 오해했던 걸 사과한다. 네가 밀고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믿겠어.
그래, 나더러 그 동안 어디서 무얼 했느냐고 물었지?
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 어느 날 죄 없이 체포된 이후,
나는 내 의지로는 무엇 하나 할 수가 없었어. 모두가 타인의 의사에 의해 결정되었지."
"구체적으로 말해 줄 수 없겠나?"
"언젠가는 알게 돼.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하지. 조국이 나를 버렸어."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홀렀다. 그 동안 이성구는 고향으로 내려 갈 것을 결심하고 있었고,
백수웅은 한없는 상념에 빠져들고 있었다.
침묵을 이성구가 먼저 깨뜨렸다.
"조심해, 널 체포하려는 자가 있어."
죄 없는 죄인이 탄생되는 것은 불행한 시대의 부산물이기도 하다.
이성구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8년 공백의 백수웅의 과거를 묻지 않기로 했다.
강직한 성격의 백수웅이 월북 후 다시 남파된 사상범이 아니라 하면 믿어도 좋다.
그렇다면 쫓기고 있는 이 옛날 동지에게 줄 선물이 있다.
"내가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갔을 때, 그러니까 두 번째였군.
그 때의 느낌으로, 그들은 자네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어."
"존경한다는 뜻이군."
"존경하다니?"
"두려움, 그것도 존경심의 일부지."
"마음대로 생각하게. 한 가지 정보를 주겠네. 자네 체포를 위해 특수 조직이 결성되었어.
기관원들의, 말하자면 백수웅 체포조라고나 할까. 본부는 반도 호텔 3층의 6호. 306호가 그 본부라구.
왜 쫓기는지는 모르지만, 웬만하면 잠적하든가 자수해 버리라구.
더 이상 버티기는 힘들 거야. 옛날 동지로서의 우정있는 충고로 받아 주게.
자넨 너무 위험에 빠져 있어. 물론 서지아나 나도 동행할 처지이긴 하지만
"반도 호텔 3층!"
첫댓글 빨리 다음글이 읽고싶어지네요 ㅎㅎㅎㅎ
박정희정권이 끝나고 백수웅이 어찌 됐는지 그것이 궁굼해요!
잘봤어요..
잘 읽었습니다.
흥미진진 하고 예측을 불허하는 심경의 변화가 오는군요
잘읽고갑니다. 전개가 조금 빠른감이 있지만 재미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있습니다~~
감사
좋아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