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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영 감독(1919-1998)은 살아생전에 경험하지 못한 유명세를 고인이 된 후에 누린 특이한 이력(履歷)의 소유자다. 1960년 개봉한 영화 <하녀>가 서울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하여 성공을 거둔다. 그 이전에 연출한 영화는 1955년 데뷔작 <주검의 상자>를 비롯해 모두 7편이지만, 딱히 주목할 만한 작품은 없다. 따라서 <하녀>는 김기영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인 셈이다.
1960년대 한국 영화의 황금기 이후 군사정권의 검열과 영화 관객의 지속적인 감소로 1970년대 한국 영화는 기나긴 침체기에 접어든다. 영화계는 김기영이 연출한 <충녀>(1972)와 <이어도>(1977)를 1970년대 한국 영화 걸작선 반열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1998년 작고하기 전까지 김기영은 대중에게 망각(忘却)된 감독으로 남아 있었다.
인생의 전변(轉變)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법이고, 김기영도 예외가 아니다. 1996년에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가 잊힌 김기영을 되살려낸다. 영화제 ‘회고전’으로 김기영의 작품이 상영되면서 일본과 미국, 프랑스와 도이칠란트 등지에서 새로운 관객이 생겨난다. 김기영 사후에 <베를린국제영화제>와 프랑스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김기영의 유작 영화를 상영한다.
<하녀>는 한국영상자료원과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세계영화재단>의 노력으로 2008년 복원된다. <하녀>는 같은 해 <칸영화제> 회고 작품으로 초대받아 상영된다. 오늘날 한국의 박찬욱과 봉준호, 류승완, 미국의 스코세이지 감독이 김기영 감독의 열혈팬이라 자부하고 있으며,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은 윤여정도 김기영을 소환(召喚)하는 형편이다.
김기영 감독은 모두 32편의 영화를 연출했는데, 1950년대 7편, 60년대 9편, 70년대 10편, 80년대 5편, 90년대 1편이다. 동시대 영화감독 김수용이 1960년대 연출한 영화가 37편이고, 신상옥이 연출한 영화가 49편에 이를 정도로 다작(多作)이었던 반면에, 김기영은 현저한 과작(寡作)의 영화인으로 남아 있다. ‘작가주의’를 향한 김기영의 고집 때문이었을까?!
<하녀>의 시공간과 등장인물
1960년 서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녀>에서 우리는 손에 잡힐 듯한 서울과 만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아니다! 김기영은 서울의 그때와 그 모습을 재연하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주의’에 기초한 시공간 구축, 개연성에 터를 둔 인물들의 관계와 갈등 설정, 사회-역사적인 맥락에서 당대를 읽어내고 영화화하는 작업에 무심하다.
한국 관객에게 익숙한 사실주의 개념으로 <하녀>를 들여다보면 곳곳에 허방다리와 실망의 덫이 부설돼 있다. 수많은 불륜 드라마에 열광하고 일상적 미니멀리즘의 충실한 애호가이자 추종자라면 <하녀>는 극약과 같은 영화다. 방직공장 여공이 여대생처럼 택시를 타고 다니며 우아하게 피아노 개인교습을 받고, 맨발의 하녀가 구두 신은 주인과 전희(前戲)에 몸을 떠는 장면을 어찌할 것인가?!
따라서 막연하고 추상적으로 <하녀>에 그려진 1960년 서울을 상상해보는 편이 관객의 정신건강에 이로울 터다. 방직공장 여공들을 대상으로 피아노 연주와 합창 지도로 생계를 꾸려가는 가장(家長) 동식. 밤낮으로 재봉틀을 돌려가며 부업으로 2층 양옥집을 짓는 데 성공하는 착하면서도 악착같은 아내. 잘생긴 음악선생을 흠모하여 편지 보냈다가 억울한 마음에 자살해버리는 여공 선영.
선영을 부추겨 편지를 보내게 하고는 정작 자신이 그에게 열렬하게 구애하는 화려한 옷차림의 여공 조경희. 대걸레로 공장 바닥을 청소하다가 동식의 집에 하녀로 들어온 명숙의 느닷없는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갈망. 장애아로 그려진 맏딸 애순과 그런 애순을 놀리는 남동생 동순의 어설픈 대사와 거친 몸짓에 담긴 허망한 유희의 그늘. 이런 불협화로 촘촘하게 엮인 영화가 <하녀>다.
일부 관객은 <하녀>에 그려진 방직공장의 깔끔함과 화려함, 동식의 집에 들어온 대형 진공관 흑백 텔레비전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여기에 이질감을 덧대는 대목이 있으니, 선영의 연애편지를 들고 동식이 찾아간 사람은 공장의 기숙사 사감이고, 그녀는 준열하게 선영을 나무라며 사흘의 정직을 선언한다. 그야말로 당대 일류 여자대학의 기숙사와 사감의 면모와 행태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2층 양옥도 모자라 부부가 들여놓는 텔레비전은 어떤 의미인가?! 1960년대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의 서울 중산층에 편입되고자 열망한 동식 내외의 수입원을 생각할 때 말도 아니 되는 설정이다. 집을 짓고 난 후 부족한 돈 때문에 과외(課外)로 피아노 개인교습을 해야 하는 동식과 밤낮으로 재봉틀을 돌려대는 아내의 수입으로 텔레비전을 산다는 어불성설의 신화적 상황!
1960년 11월 3일 개봉한 영화 <하녀>에서 당대 시대상을 사실주의로 포착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노릇이다. 그것은 감독 자신의 말에도 드러난다. “인간의 본능을 해부하면 검은 피가 난다. 그것이 욕망이다.” 혹은 “나는 무슨 주의 같은 것을 젊은 시절부터 싫어했다.” 반면에 그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존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모순’이 그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사건과 갈등
<하녀>의 모든 사건과 갈등의 중심에 명숙이 자리한다. 애순과 동순을 이어 태기(胎氣)가 있는 데다가, 집도 커진 동식의 아내가 하녀를 요구한다. 공장에서도 낮은 곳에 서식하면서 바닥을 청소하던 명숙을 경희는 동식 내외에게 ‘착하기는 하지만 모자란 여자’로 소개한다. 실제로 명숙은 뭔가 빠진 듯한 표정과 동작을 보이고, 새로 온 집에 아무런 이질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즉각 먹을 것을 찾는다.
바닥 생활을 전전하던 명숙의 거처는 신축 양옥 2층이며, 그녀의 맞은편 공간에는 피아노가 있다. 동식은 제 몸처럼 피아노를 아끼고, 명숙에게는 손도 대지 못하도록 한다. 명숙은 친구처럼 여기는 경희가 개인교습을 받으러 올 때마다 질투와 선망을 경험한다. 교습을 핑계로 동식에게 온몸을 던지는 경희와 그녀를 거부하는 동식의 신파성 일장활극(一場活劇)이 명숙의 눈앞에서 전개된다.
이 장면이 <하녀>의 등장인물들이 겪게 될 운명적인 전변(轉變)을 예비한다. 동식은 오로지 아내와 아이들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소시민의 전형이다. 선영의 연애편지를 자신의 생각과 의지가 아니라, 기숙사 사감에게 전달하여 판단하도록 하는 그의 태도가 그것을 입증한다. 반면에 그의 아내는 남편의 내조뿐만 아니라, 집안 중대사에 관한 결정권을 독점하고 있다.
이들을 파국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되는 불가항력의 일탈은 바닥 모를 심연까지 도달한 연후에야 비로소 멈춘다. 하녀 명숙의 요구와 지배권은 나날이 강력하고 모질어진다. 그녀는 동식의 첩(妾)이자 애인 나아가 아내 자리까지 탐하고, 동식과 동침하는 권리도 쟁취한다. 이런 사건 진척의 근저에 자리하는 것이 ‘가정’과 ‘새집’을 지키려는 아내의 욕망이다.
그녀의 욕망은 아들을 살해한 명숙의 협박에 더욱 빛을 발한다. 살인자가 적반하장격으로 부부를 경찰에 신고하여 가정을 파탄 내겠다고 하자 하녀에게 굴종하면서 가정을 지키려는 맹목적인 아내. 그녀의 욕망만큼 허망하게 다가오는 것이 명숙의 끝없는 집착과 탐욕이다. 그녀는 동식 내외의 집안을 완전 소유함으로써 신축 양옥의 인간적-물적 기반 전체를 독점-지배하고자 한다.
탐욕은 분노를 낳고, 분노는 어리석음을 잉태한다. 신기루의 사막에서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갈증처럼 동식의 사랑과 육체를 탐하지만, 명숙은 그와 함께 죽음으로써 최후의 지배권 확립을 시도한다. 지상에서 이룰 수 없는 절정의 탐욕에서 태어난 분노에 치를 떨면서 그녀는 동식에게 동반자살을 요구한다. 죽어서라도 동식과 하나 되고자 욕망하는 명숙이 도달한 기이하고 어리석은 결론.
여러 면에서 <하녀>는 기괴하지만, 두 인물의 자살 장면은 동식의 내면과 상충(相衝)되어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하녀의 호출을 받고, 혹은 아내의 허락이나 명령에 따라 그녀들의 거주공간인 1-2층을 오르내리는 그가 극단적인 선택 직후에 아내를 향한 순애보를 선보인다. 하녀를 향한 오래도록 참았던 분노의 폭발인가, 아니면 죽음 직전에 분출한 최후의 단말마(斷末摩) 같은 저항인가?!
<하녀>를 이채롭게 하는 장치
<안개>와 <장군의 수염>처럼 <하녀>의 실내공간은 양키 아메리카인들의 거주공간을 빼닮았다. 등장인물들은 구두와 하이힐을 신고 방을 드나들고 담배꽁초도 함부로 버리고 비벼 끈다. <안개>의 공간이 무진의 들판과 가옥을 중심으로 설정되어 평면적이고 단순한 반면, <장군의 수염>에서 김철훈이 살아가는 2층은 주인집 모녀의 1층과 완전히 분리됨으로써 주인공의 고독과 소외를 강조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반면에 <하녀>에 설정된 복층의 공간은 여주인과 하녀, 하녀와 가장의 대립과 갈등을 낳고, 1층과 2층 사이의 중간지대인 계단도 사건 진행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아내의 공간은 1층으로 고정돼 있고, 그녀를 대표하는 소품은 재봉틀이다. 아내는 언제나 재봉틀을 돌리거나, 고단한 살림 혹은 과도한 노동에 따른 육체적 고통으로 괴로워한다. 명숙의 공간은 2층이지만, 언제나 피아노를 열망하고 그것을 두드림으로써 자신의 열망을 숨기지 않는다. 하녀는 주인의 아래에 있는 여자를 의미하는데, 그녀가 2층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녀와 여성 상전의 지위가 실질적으로 역전돼 있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줄타기를 거듭하는 동식은 전통적인 가장의 구실이 아니라, 하녀에게 목줄 잡힌 사냥개 형상이다.
봉준호가 지적한 것처럼 히치콕에게 새가 있다면, 김기영에게는 쥐가 있다. <하녀>에서 가장 인상적인 소품은 쥐와 쥐약이다. 1960년대 내내 한국 전역을 떠돌았던 무수한 쥐와 쥐 잡는 쥐약이 <하녀>의 처음부터 끝까지 동행한다. 아내는 쥐의 등장에 소스라칠 정도로 심약(心弱)하지만, 하녀는 맨손으로 쥐 꼬리를 잡고 흔들 만큼 담대하다. 하녀와 안주인의 대비가 현저한 장면이다.
쥐를 잡을 쥐약으로 자살의 길을 택한 1960년대 한국인은 수없이 많았다. 저렴한 가격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쥐약은 생활고와 신병, 실패한 사랑으로 괴로운 사람들의 마지막 출구였다. 하지만 <하녀>에서 쥐약은 살인과 타의에 따른 동반자살의 기제로 쓰임으로써 쥐약 본래의 기능과 무관하다. 명숙과 쥐 그리고 쥐약의 연관성이 현저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신석기 농업혁명 이후 인간을 괴롭혀온 쥐와 인간의 유구(悠久)한 대결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세계의 심장이라 불리는 뉴욕처럼 쥐로 인해 아직도 심각하게 괴로운 지역이 세계 곳곳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쥐는 인간의 생산물을 축내고 망치며, 페스트 같은 전염병을 전파하는 주범이다. 안정적인 거주-생활 조건을 파괴하는 틈입자(闖入者)로서 쥐는 인류의 연면부절한 불청객이자 적대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명숙은 동식 내외가 가사노동에 필요한 존재로 돈을 주고 불러온 유용한 인물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명숙은 인간에서 파괴적인 쥐로 변신해간다. 그녀는 자신과 동렬에 있지 않은 경희나 동식의 아내와 같은 높은 수준을 바란다. 나아가 그녀들을 능가하는 높이에서 그들뿐 아니라, 동식까지도 지배하려 한다. 그런 과정에서 쥐약으로 동순을 살해하고 동반자살도 주저하지 않는다. 마룻바닥과 찬장에서 천장에 이르기까지 서식하는 쥐와 바닥을 닦다가 이층 양옥을 독점하는 명숙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아 보인다.
여기 더하여 김기영이 연출한 계단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내 곁의 죽음을 고집하는 동식과 그를 저지하려는 명숙 사이의 실랑이 끝에 동식이 계단을 따라 그녀를 끌고 내려온다. 계단 하나하나에 머리를 부딪치면서 점차 정신을 잃어가는 명숙. 동식이 아내 곁에서 남편이자 아버지로 죽음을 맞이할 때, 명숙은 계단 하단 지점에서 온몸이 축 늘어진 채 쥐처럼 널브러져 있다.
1층도 아니고 2층도 아닌 중간지점에서 시체로 화하는 명숙. 이 지점에서 명숙은 지배자도 아니고, 하녀도 아니며, 인간도 아니고, 쥐도 아닌 채 뒤범벅된 제삼자(第三者)가 된다. 쥐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쥐약으로 자신을 포함한 타자들을 죽인 명숙은 쥐와 인간 사이의 기괴한 존재로 생을 마감한다. <하녀>에서 김기영이 실현한 그로테스크 미학의 정점(頂點)이다.
낯설고 뜨악한 결말?!
<하녀>는 정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동식의 육체와 사랑을 욕망한 선영과 명숙이 죽고, 중산층에서 더 높은 곳을 욕망한 아내가 쓰러지고, 그런 아내와 하녀의 틈바구니에서 고통받던 동식이 죽어 나가고, 그의 어리지만 야비한 아들 동순마저 죽었는데 영화는 끝나지 않는다. 아직 아닌가, 하는 관객들의 뜨악한 표정이 이어지고, 이윽고 동식이 환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며 살아난다.
신문을 읽던 아내가 남편에게 남자들의 저급한 육체적 욕망을 힐난한다. 교양과 인격 있는 남자가 하녀한테 유혹당한다는 일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식의 생각은 다르다. 그것이야말로 남자의 속성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여자를 보면 남자는 원시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동식의 말에 아내는 ‘하녀는 범의 입에 날고기’라고 응수하며 명숙을 앞세우고 안방을 나간다.
마침내 동식은 객석을 향해 점잖게 일갈한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젊은 여자를 두고 생각을 많이 하는 법이죠. 그러다가 잘못 걸려들기도 하고, 패가망신하기도 하는 법이죠. 누구나 매한가집니다.” 이 놀라운 자세 전환은 무엇을 뜻하는가?! 혹자의 말처럼 <하녀>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 관객을 교육하는 용도의 1960년대 계몽영화로 전락한 것인가?!
김기영은 그런 의도로 마지막 장면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나름의 복안(復案)이 있다. 죽은 인물이 살아나 관객에게 말을 걸고, 넌지시 충고까지 하는 장면은 일반적인 영화와 결이 아주 다르다. 그래서 영화배급업자들의 요구에 감독이 돈 때문에 순응한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설핏 그럴듯하다. 하지만 작가주의로 일관한 김기영의 생애를 보면 뭔가 석연치 않다.
딱 한 번의 일탈로 자식과 가정이 파탄 나고, 자신마저 생과 작별하고 돌아오지 못하는 먼 길 떠나야 했던 주인공의 신산(辛酸)한 삶에서 일상의 개연성을 찾는 관객은 많지 않다. ‘영화니까!’ 하는 관객이 많을 것은 당연지사. 문제는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 누구나 무너질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상황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방심하지 마시라!'
이런 사실을 엄숙하고 근엄하게 설교조로 늘어놓으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 계몽이 된다. 하지만 동식은 편안하고 여유로운 자세와 목소리와 표정으로 지나가듯 가볍게 덧붙인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므로 당신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웃으면서 슬며시 일깨운다. 이것을 가리켜 ‘낯설게 하기’라 한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여기는 명제나 윤리-도덕 혹은 생활 습관이나 익숙한 판단기준 등에 낯선 시선과 인식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자명한 이치를 낯설게 하는 방식이 '낯설게 하기'다. 영화가 끝났는데, 왜 다시 시작하는 거지?! 아니, 김기영이 낡아빠진 설교를 영화 말미에 삽입했다고?! 여러 억측을 불러일으킨 감독이 의도한 최종적인 목표지점은 무엇일까, 다시 생각한다.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그다지 어리지 않은 딸은 침대에서 깊은 잠에 곯아떨어져 있다. 창밖에는 굵은 비가 쉬지 않고 내리고, 비바람을 뚫고 열차가 굉음을 울리며 철로를 질주한다. 그리고 갓난아이의 커다란 울음소리가 두 구의 시신을 앞에 두고 울려 퍼진다. 그들의 죽음이 저지하지 못하는 생을 향한 무한질주와 간절한 희구가 어제와 내일처럼 공존한다. <하녀> 마지막 직전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아내의 나지막한 독백이 이 장면을 빛내준다. ‘내가 새집을 탐내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이것은 성실한 가정주부이자 세 아이의 엄마이며 자상한 소시민 남편의 아내가 욕망한 새집이 불러일으킨 참사를 반성적(反省的)으로 돌아보는 독백이다. 남편의 죽음에 담긴 의미와 성찰보다 자신의 죄업(罪業)을 먼저 책망하는 아내의 맹목적인 반성이 남편의 시신 옆에서 고요하게 이뤄진다.
삶에 내재한 모순과 부조리를 아프도록 그려내는 김기영. 그가 다시 반전(反轉)을 준비한다. 사자(死者)를 이 세상에 귀환시킴으로써 지금까지 진행된 사건과 갈등과 죽음을 무화(無化)함으로써 부조리와 모순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적잖은 위력을 가진다. 인간 세상과 인생에 담긴 본원적인 아이러니의 그림자 한 자락을 우리에게 휙, 소리 나게 던졌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