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88올림픽고속도로 개통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고 14년이 지난 1984년 오늘, 대구와 광주를 잇는 88올림픽고속도로가 개통됐다. 공사비 2천39억 원을 들여 착공한 지 33개월 만에 완공됐다. 우리 나라 최초의 전구간 시멘트 콘크리트 포장도로다. 이 도로의 개통으로 영,호남 지역의 인적, 물적 교류가 원활해지고 주행시간도 종전 국도의 3시간 30분대에서 2시간 30분대로 줄었다. 개통식이 거행된 지리산휴게소에서는 영,호남 출신 신랑, 신부 여덟 쌍의 결혼식이 열려 동서 화합의 의미를 되새겼다.
[1909년] 독립운동가 이은찬 의병장 순국 1878 강원 원주~1909. 6. 27.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전주(全州). 일명 언찬(諺讚)·은찬(殷贊)·헌찬(憲讚). 원주의 유생으로 1907년(융희 1) 고종이 강제 퇴위를 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그해 9월 이구재(李九載)와 함께 기의하여 원주 일대에서 활약했다. 그는 해산병 80명을 포함하여 의병 500여 명을 모은 뒤, 경상북도 문경으로 이인영(李麟榮)을 찾아가 의병의 총대장이 되어줄 것을 청했다. 이인영의 승낙을 얻어낸 후 원주로 돌아와 사방으로 격문을 띄워 의병을 규합하고 서울진공을 위해 양주(楊州)로 집결할 것을 전국의 의병들에게 촉구했다. 이에 호응하여 양주에 모인 의병들로 13도의병연합부대가 편성되자, 원수부십삼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인 이인영의 중군(中軍)이 되었다. 그러나 1908년 1월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일본군의 공격으로 서울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서 퇴각하고,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문경으로 돌아가면서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했다. 그뒤 소속부대를 이끌고 양주방면으로 이동하여 임진강 유역에서 허위(許蔿)의 의병부대에 합류, 임진강 의병연합부대를 편성하고 허위를 총대장에 추대한 뒤 활동했다. 1908년말 허위와 농민출신 의병장 김수민(金秀敏)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순국하자 잔여부대를 이끌고 양주·포천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기습공격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1909년 1월 중순 일본군의 탄압이 본격화되자 부대원을 이끌고 연평도의 일본군 기습대를 공격하는 등 이전의 의병투쟁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해도(海島)에서의 대담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같은 해 2월에는 약 300명의 병력으로 양주군 석우리 북방 고지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타격을 주었으나, 의병부대 역시 수십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그후 간도로 옮겨 그곳에서 정병을 양성하여 보다 완강한 항전을 해나가려고 계획 했으나 군자금을 제공하겠다는 밀정 박노천(朴魯天) · 신좌균(申左均)의 꾐에 빠져 서울로 유인되어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1909년 5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해 6월 27일 32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968년] 체코 지식인들, 언론자유를 호소하는 ‘2000어 선언’ 발표
←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당 지도자 알렉산더 두브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를 주창하며 언론의 자유를 도입하는 등 개혁정책을 폈다. 1968년 6월 27일 작가동맹 기관지 등 체코슬로바키아 4개 신문에 자유화를 촉구하는 `2000어 선언`이 발표됐다. 작가 바츠리크가 기초한 선언에는 마라톤 영웅 자토펙과 체조 선수 차프라후스카 등 유명 스포츠 선수를 포함, 70여명의 지식인이 서명했다. ‘자유민주화 노선을 줄기차게 추진해 보수세력을 몰아내라’는 호소를 담고 있는 이 선언으로, 공산당 독재의 완화와 기업경영의 민주화 등 개혁을 추진해 온 두브체크와 당원들은 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1946년 총선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본격적인 공산화로 들어섰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경제 정책 실패로 사회 전반에 비판이 일어나면서 ‘프라하의 봄’이 시작됐다. 이러한 자유화 운동을 대담하게 표현한 서명문서가 바로 ‘2000어 선언’이다. 1968년 1월 노보트니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인 두브체크가 그 자리를 이으면서 시작된 프라하의 봄은 그해 4월 공산당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자유화 노선을 천명하면서부터 불붙기 시작했으나 8월 20일 소련군을 비롯한 바르샤바 조약기구 5개국 군대가 체코를 침공하면서 막을 내렸다.
[1941년]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파데레프스키 사망
← 피아니스트이자 정치가였던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세기를 장식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그리고 독립 폴란드의 초대 총리를 지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1941년 6월 27일 뉴욕에서 사망했다.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특별배려로 미군 만이 안장될 수 있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혔다. 장차 폴란드가 자유의 땅이 될 때까지라는 잠정적 조치였다. 결국 1992년 서거 51주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1860년 러시아령 폴란드 쿠릴쿠프카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12세 되던 해에 바르샤바 컨서버토리에서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연주가로서는 다소 늦은 나이인 27세부터 빈, 파리, 런던, 뉴욕 등 세계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명성을 얻었다. 1차세계대전 무렵 그는 폴란드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 폴란드 국가위원회의 일원으로 워싱턴 주재 외교관으로도 일했다. 파데레프스키는 피아니스트로서의 재능을 조국을 구하는 데 십분 발휘했다. 미국순회공연을 하면서 우드로우 월슨 미국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고 그 결과 윌슨 미국 대통령은 1918년 그의 요청에 따라 의회에서 폴란드 독립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해 줄 것을 요청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는 폴란드가 16세기 야젤로왕조 이후 이웃 독일과 러시아 등 열강들에 의해 계속 유린당하는 역사적 운명을 극복하는 데 헌신했다.
[1977년] 지부티, 프랑스로부터 독립
1977년 6월 27일 동아프리카의 지부티 공화국이 독립했다. BC 3세기경에 아블레 이민들이 아라비아로부터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말리계의 이사족이 아블레 이민들의 후손인 아파르족을 축출하고 해안지방에 새로이 정착했다. 16세기까지 아랍인들이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가 1862년 프랑스가 오보크를 획득하고, 1888년에 프랑스 소말리 해안령을 창설했다. 지부티 시는 1892년에 이 프랑스령의 공식 수도가 되었다. 1946년 프랑스령 소말릴란드는 해외 준주(準州)의 자격을 얻었고, 1958년 해안령은 제5공화국하의 프랑스 공동체에 해외 준주의 일원으로 가입하기로 가결했다. 1977년 프랑스령 아파르족과 이사족 준주는 지부티 공화국으로 독립했으나, 두 종족 사이에 긴장상태가 조성되어 에리트레아와 오가덴의 교전지대 난민들로 인해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1977년 12월 정식 수교하고 이어 1979년 2월 경제기술협력협정과 1980년 6월 항공협정을 체결했다. 그동안 한국은 지부티에 몇 차례 소규모 원조를 제공한 바 있으며, 1991년 교역에 있어 대한 수입 1,893만 달러에, 대한 수출 9,000달러를 기록했다. 이 나라는 남한단독수교국으로서 북한과는 외교관계가 없으며, 인적·물적 교류도 거의 없다.
[1950년] 유엔 안보리, 한국 원조를 결의 1950년 6월 24일 밤 10시(한국시각 25일 낮 11시), 장면 주미 대사에게 급보가 날아들었다. 북한이 남침했으니 대책을 세우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다급한 전화였다. 비슷한 시각, 무초 주한 미 대사도 미 국무부에 이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토요일이라 고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트루먼 대통령에게 즉시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에 상정해야 한다는 동의를 얻어냈다. 전쟁 발발 7시간 만이었다. 국무부로 달려간 장면 대사는 딘 러스크 아태담당 차관보와 미국의 지원문제에 관해 협의했다. 국무부 유엔담당도 취침 중인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화로 안보리 소집을 요구했다. 25일 오후 3시, 유엔 안보리가 긴급 소집됐다. 전례없는 일요일 긴급회의였다. 공산군의 침략행위 중지와 38선 이북으로 철퇴하라는 미국의 결의안이 9대0으로 채택됐다. 소련대표가 불참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북한으로부터 반응이 없자 27일 다시 474차 유엔 안보리가 소집됐다. 밤 11시30분,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이에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이 7대1로 채택됐다. 그리고 6월 30일 미 지상군의 투입이 결정됐다.
[1950년] 미국, 해공군 한국전 출동명령 정부는 25일 새벽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한 즉시, 주미 한국대사 장면(張勉)에게 긴급훈령을 내려 미국 국무성에 알렸고, 전쟁 발발 소식을 접한 미국은 25일 상임이사국의 하나인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북한군의 즉각 철퇴 촉구를 결의케 하는 한편 유엔회원국들에게 남한에 원조를 제공할 것과, 북한에 대하여는 어떤 원조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다. 북한군의 즉각 철퇴를 요구하는 유엔의 요청은 북한에 의해 묵살된 채 전쟁은 계속되었고, 27일 미국대통령 H.S. 트루먼은 한반도의 전쟁이 타이완 등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 제7함대를 급파, 중국의 움직임을 견제하면서 미국의 해·공군을 파견하여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리고 28일 도쿄[東京(동경)]에 있던 미국 극동군사령관인 D. 맥아더 원수가 내한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국 국방성에 지상군 파견을 요청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보고를 받은 트루먼대통령은 6월 30일 지상군 투입을 명령하였고, 7월 7일에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그 관할권을 미국에게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남한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 원수에게 주어졌으며, 남한을 원조하기 위하여 파견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1884년] 프랑스의 철학자, 시인 바슐라르(Bachelard, Gaston, 1884~1962) 출생 구조주의(構造主義)의 선구자이며 시론(詩論) ·이미지론(論)으로도 유명하다. 1927년 《근사적 인식(近似的認識)에 관한 시론》으로 학위를 취득한 후 디종대학의 강사·교수를 거쳐 1940년 소르본(파리대학)에 초빙되어 과학사·과학철학을 강의하는 한편, 동 대학 부속인 과학사 ·기술사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54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20세기 초두, 약 4분의 1세기에 걸친 ‘물리학의 혁명’을 목격하면서 과학을 그 동적(動的)인 변화발전의 위상(位相)에서 파악하는 가운데, 이 변혁기의 과학활동에 맞는 의미를 종래의 철학이나 일상적 인식 또는 과학자 자신에게 투영시키는 데에서 ‘과학의 철학’의 위치를 구하였다. 초기의 대표적인 저작 《새로운 과학적 정신》(1934)은 상대성이론의 비(非)뉴턴 역학적(力學的)인 성격이나 양자역학(量子力學)의 비결정론(非決定論)에 대한 세밀한 검토를 통하여 현대과학에서의 인식의 양식(樣式)을 ‘비(非)데카르트적 인식론’으로서 제시한 것인데, 이러한 파악이 《부정(否定)의 철학》(1940)에서 ‘비(非)의 철학’으로서 결실되었다. 이상의 저작에서 과학이 초래하는 새로운 인식에 대하여 개방된 정신, 나아가서는 과학의 발전을 촉구하는 정신의 추구와 같은 자세를 볼 수 있다면 《과학적 정신의 형성》(1938)의 목표는, 그것을 방해하는 ‘인식론적 장해’의 정신분석에 의한 배제였다. 이러한 방향은 앞서 말한 과학의 진전을 촉구하는 정신의 추구와 근저(根底)에서 교착되면서 시와 이미지의 자유분방한 역동성(力動性) 자체를 구하는 ‘4원소(元素)’에 매개된 심층심리의 분석으로 발전하였다. 이 양자를 끊임없이 ‘상보적(相補的)’으로 전개시킨 바슐라르의 사상적인 영위는 프랑스의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현대적인 의미 확립에 기여한 동시에 J.피아제와 L.알튀세르 또는 G.캉길램을 통하여 M.푸코에게로 다채로운 영향을 끼쳤다.
[1880년] 장애자의 희망 헬렌 켈러(Keller, Helen, 1880~1968) 출생
미국의 교육자, 저술가 헬렌 켈러는 앨라배마주의 투스컴비아에 있는 아이비 그린이란 저택에서 1880년 6월 27일에 예비역 장군이자 지방신문사 편집자였던 아서 H. 켈러와 케이트 애덤 켈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시각·청각 장애인이 아니었다. 생후 19개월 후 당시 성홍열이나 수막염이라 생각되는 병으로 인해 위와 뇌에 심한 출혈이 생겼다. 병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그 결과 시각과 청각을 잃고 말았다. 7살까지는 약 60개가 넘는 수화를 만들어 가족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1886년 어머니인 케이트 켈러는 찰스 딕큰의 《American Notes》에 나온 시청각 장애인 로라 브링맨의 성공적인 교육에 대한 글을 읽고 감동해서, 조언을 얻으러 볼티모어의 특수 의사를 찾아갔다. 그녀는 당시 청각 장애인 치료 전문가이자 전화 발명가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을 만났는데, 벨은 보스턴에 있는 펄킨스 시각 장애 학원을 찾아가보라고 조언했다. 그 학원에서 스스로 시각적인 장애를 앓고 당시 겨우 20살이었던 졸업생 앤 설리번을 특수교육 선생님으로 맞이하게 된다. 이것이 헬렌 켈러와 설리번의 49년간의 관계의 시작이었다. 시각장애인 특수학교인 보스톤의 퍼킨스 학교와 뉴욕의 라이트-휴머슨 학교에 졸업한 헬렌은 16세의 나이에 래드클리프 대학교에 입학했다. 1904년 대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독일어를 비롯해 5개의 언어를 구사했으며, 미국 역사 최초로 학사학위를 취득한 시청각 장애인이 되었다. <내 삶의 이야기 The Story of My Life>(1902)·<나의 선생님 앤 설리번 메이시 Teacher : Anne Sullivan Macy>(1955) 등 많은 책을 썼으며, 그녀의 어린 시절은 연극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헬렌 켈러라고 하면 흔히 설리번 선생의 인내와 사랑으로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 여성으로 생각하지만, 역사 속의 헬렌은 사회주의 지식인이었다. 헨렌 켈러는 29세 때인 1909년 미국 사회당(1901년 창당)에 입당하였으며, 공개서한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발표와 방송출연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또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라고 선언하자, “(미국 백인들이) 수많은 흑인을 학살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지배자는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비판으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도덕주의(Moralism)가 얼마나 표리부동한 것인지를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로 헬렌 켈러는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직설적으로 고발했으며, 여성 참정권 운동, 사형 폐지 운동, 아동 노동과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실천했다. 그녀의 이러한 활발한 사회참여에 대해 보수 언론들은 '헬렌 켈러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며 비난했는데, 이에 대해 헬렌은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 빈민가에도 방문했다. 볼 수 없을지라도… 냄새는 맡을 수 있었다.”라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회참여를 하는 것임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헬렌 켈러의 사회참여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이 당원으로 활동한 미국 사회당의 분열을 막지 못한 것이다. 당시 미국 사회당은 1913년 1월, 11만 당원 중 2만 명이 빌 헤이우드 집행위원에 대한 제명 조치에 반발, 탈당할 정도로 엄청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해 헬렌 켈러는 일치하여 민중의 편을 들어야 할 사회당이 두 파벌로 갈라져 서로 비열한 싸움을 벌인다고 비판했지만, 결국 내분을 막지 못했다.
[1040년] 헝가리 왕 라슬로 1세(Laszlo I, 1040~1095) 출생 1192년에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6월 27일. 헝가리의 왕. 영토를 크게 넓히고 왕국을 내적으로 강화함으로써 역대 헝가리 왕 가운데 국민들의 존경을 가장 많이 받은 왕이다. 헝가리 왕 벨로 1세와 폴란드 왕녀 리크사의 아들로, 부모가 망명하고 있을 때 태어났다. 형제인 게자와 헝가리로 돌아온 뒤 사촌인 잘로몬과의 왕위 다툼 끝에 잘로몬을 나라 밖으로 쫓아내고(1073) 게자가 왕위에 올랐다. 게자가 죽자(1077) 그 뒤를 이어 헝가리 왕 라슬로 1세가 되었다. 헝가리 국경을 트란실바니아까지 넓히고 크로아티아 군주 즈보니미르의 미망인인 자기 누이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크로아티아를 점령했다(1091). 주교 지명과 서임(敍任) 문제를 둘러싸고 황제와 교황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을 때는 교황편을 들었지만 한편으로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는 화해정책을 폈다. 헝가리 영토에 사는 이교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크로아티아에 로마 가톨릭을 전파했으며 자그레브 주교구를 신설했다(1091). 훌륭한 법전을 만들어 국내 질서를 바로잡고 나라를 번영시켰으나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할 준비를 하다가 갑자기 죽었다. 헝가리의 이상적인 기사로서 국민들에게 성인으로 칭송받다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나 성인으로 추증되었다.
그밖에 2005년 가수 김창남, 간암으로 자택서 사망 2005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망포동에서 ‘박지성길’ 개통식 2000년 일본 대중문화 3차 개방 발표 2000년 북한, 남북적십자회담 취재차 방북한 김인구 조선일보 기자 입북 거부 1998년 클린턴 미대통령,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과 북경에서 정상회담 1996년 007시리즈 제작가 앨버트 브로콜리 사망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1990년 서울지하철 5호선(방화동-고덕동) 건설공사 착공 1990년 문학평론가 김현 사망 1989년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으로 구속 1988년 5공비리특위 구성 1976년 팔레스타인 게릴라, 항공기 탈취해 엔테베공항에서 농성 1973년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 대전권, 울산권, 마산-창원-진해권, 춘천권, 청주권, 전주권, 진주권, 통영권 지정 1972년 영국과 아일랜드공화국(IRA)간의 무기한 정전 발효 1970년 경부고속도로 완공 1954년 변영태 제5대 국무총리 취임 1951년 이승만 대통령 휴전반대 성명 1950년 정부, 대전으로 이전 1950년 소련, 유엔안보리 복귀를 신청 1947년 입법의원 보통선거법 통과 1946년 북한, 농업현물에 관한 결정서 발표 1941년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파데레프스키 사망 1918년 각도에 금융조합연합회 설치 1907년 모병령 공포 1905년 포템킨호 수병 반란 1904년 일본의 황무지개간요구 거절 1889년 언론인 유광렬 출생 1883년 기기국(군기창) 신설 1869년 배(胚)발생 유도를 발견한 독일의 슈페만 출생 1844년 미국의 예언자 조셉 스미스 사망 1550년 프랑스의 왕 샤를9세 출생 1388년 최영장군, 고봉현에 유배
첫댓글 구름님이 보내주신자료로 시험삼아 해봤는데 안되던걸요.하지만 또 시도해볼거예요^^..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