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가슴 떨리는 삶을 보았거든요.
(제가 워낙 책을 안읽다가.. 가끔 하나씩 보게되면 상당히 영향을 받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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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 **서문 中))
이제는 현대교육사에서 고전적 인물로 꼽히게 된 야누쉬 코르착의 작품 중, 아마도 가장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는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를 우리말로 옮겨 보았다. 이 책은 얼마 전 우리말로 펴낸 그의 [아이들을 변호하라](2000)와 어린이 동화 [안톤 카이투스의 모험](2000)에 이어, 기도문 선집 [홀로 하나님과 함께 -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2001)의 한국어 번역본 출간과 함께 계획한 작은 성과물이다. 이 역본은 원래 1929년 나온 폴란드어 2판(코르착 생전에 나온 마지막 판본)에 대한 최초의 독일어판인 Wie mam ein Kind lieben soll을 대본으로 한 것이다.
코르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생애와 사상을 간략히 소개하고, 마지막 장에서 이 책 번역에 관한 사정을 밝힌다.
1.
코르착은 1878년 바르샤바의 유대계 폴란드인 가정에서 태어나 1942년 2차 대전 중 폴란드에 진주한 독일군에 의해 트레블랑카의 집단수용소에서 자신이 돌보던 아이들과 함께 죽음을 맞기까지, 의료 및 교육 실천과 문학 작품 활동을 통해서 평생 동안 어린이들을 돌보고 사랑하고 이해하는데 이례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에 걸쳐 화려하게 개화되었던 교육개혁운동의 시기에 살았다. 하지만, 그가 그러한 운동의 흐름들과 무슨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차라리 고독하게 살았던 것 같다. 그는 오랫동안 현대사에 묻혀 있었다. 폴란드에서 그를 아는 사람들이 그를 알리기 시작했고, 그의 저서들과 생애가 한 둘 국경을 넘어 차츰 알려지면서, 사람들은 갑자기 그를 발견하게 되었다. 폴란드와 이스라엘을 넘어서 독일과 스위서에서, 프랑스에서, 북유럽의 여러 나라와 그리고 미국에서 사람ㄷ르은 그에 대하여 몰두하게 되었다.
그런 만큼 그의 삶과사상에 대한 크고 작은 수많은 논문들이 출간되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아마도 코르착 연구가 활발한 지역 가운데 하나인 독일에서는 1981년에 에리히 다우첸로트가 그의 전기를 썼고, 1987년에는 볼프강 펠처가 다시금 그를 조명하였다. 미하엘 랑항키는 코르착의 교육학을 처음으로 학적으로 자리매김하였다(1994). 한편 미국에서는 1988년 한 여류 연구가에 의해서 지금까지 나온 것 가운데서 가장 포괄적인 것이라고 할 만한 코르착 전기가 출판되었다.
아래에 소개하는 코르착의 생애와 사상적 특징은 주로 펠처가 쓴 앞의 책과 역시 앞서 언급한 독일어 역본 서문 및 여기에 함께 편집된 연표(폴란드의 코르착 연구가 이고르 네베를리가 쓰고 작성한)에 근거하여 그 중요한 대목을 토대로 간추려 풀어 쓴 것이고, 부분적으로 다우첸로트의 해석을 참조하였다. 마지막 코르착의 종교에 관한 부분은 얼마 전(1987년) 이 분야에서 새로운 연구 성과를 보인 미하엘 키르히너의 사상에 의거하였다.
2.
코르착은 누구인가? 그를 단지 이런저런 이론적 교육사상가라 부르기는 어렵다. 예술가요, 시인이요, 예언자라고나 할까? 그는 이른바 학문이라는 것, 말하자면 논리정연한 이념이나 자기들만의 정당함을 내세우는 학파들을 의도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는 형식적이고 놀리적인 체계 안에 숨겨진 권력과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통찰하면서, 차라리 병원과 기숙학교와 고아원에서 어린이의 삶의 문제에 매달렸고, 실천하고 사고하였다. 그렇게 하여 그는 강단 교육학과는 다른 교육학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그는 오랫동안 흙더머에 묻혀 있다가 세상에 나타나 이상한 빗을 발하기 시작한 진주와도 같다.
그는 본래 헨릭 골드쉬미트하는 이름으로 바르샤바의 한 성공한 변호사인 아버지 유제프 골드쉬미츠와 어머니 케칠리에의 아들과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저명한 의사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헬릭이 열 한 살 되었을 때 정신질환을 일으켰고, 그 후 7년 뒤에 죽었다. 그리하여 가정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졌는데, 이때부터 헨릭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식구들도 부양해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 무렵은 그의 삶의 방향이 뚜렷한 가닥을 잡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이 스스로 살아가고 결정할 권리에 대하여 눈뜨게 되었으며, 그러한 아이들의 해방된 삶과 권리를 되돌려주기 위해 그는 소아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던 것이다.
1898년 그는 바르샤바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문학적 재능은 천성적인 것이었다. 이듬해 그는 '야누쉬 코르착'이란 필명으로 <길은 어디에>란 4막으로 된 극작품을 바르샤바 쿠리어라는 문학경연대회에 출품하여 수상한다. 대학에 입학하기 2년 전 그는 이미 첫 번째 작품 [고르디우스 왕의 매듭]을 출판한 바 있었다. 1900년 그가 주도한 유머러스한 주간 화보잡지 [가시]에서 그는 '하수인, 어는 탈선자의 일기'란 제목으로 센세이셔날한 풍속소설을 발표했다. 이것은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쓰는 연작 소설로, 집필자들은 대부분이 대학생과 신진 작가들이었다. 이렇게 하면서 한편으로 그는 바르샤바의 한 빈민 지역에서 한 무리의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쳤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유랑대학"의 한 일원이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폴란드 대학의 상황은 다른 유럽 지역과는 달리 열악하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이들은 좀더 발전된 다른 나라 대학을 찾아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 나라에는 국민들이 아주 아끼고 자랑할 만한 비밀스런 모임 - 다른 나라에는 존재하지 않는 모임이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대학과는 별도로 가정 집을 돌아가며 자유로이 모여 연구하고 가르치는 "움직이는 대학"으로, 여기에는 당시 폴란드의 저명한 혹은 아주 독창적인 학자들이 여러 학문 분야(사회학, 지리학, 철학, 교육학, 동양학 등)에 걸쳐 참여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역시 불법적인 초등학교에서 비밀 수업을 통해 새로운 교육의 방향이 모색되던 때이기도 한데, 코르착은 이모임에도 역시 관여했다. 이렇게 그는 급진적인 지식인 운동의 중심에 서서 생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친구를 찾았고, 우정은 평생 계속된다.
1901년 코르착은 주간지 [가시]에 최초의 문예란 기사를 발표하고, 이 덕분이 이 잡지는 대중적 인정을 받게 된다. 이것은 나중에 [농담]이란 책으로 출판된다. 이해에 그는 최초의 소설 [거리의 아이들]을 펴내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뛰어들었다. 이 작품은 바르샤바 빈민가에서 나락에 떨어진 삶의 현장을 목격한 후 분노에 차서 쓴 소설이었다. 그는 대학시절 내내 이렇게 글을 쓰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1904년 그는 의학공부를 마치고, 바르샤바의 바우만-베르송-어린이 병원에서 소아과 의사로서 활동을 시작한다. 이 해 정치적, 문학적 성향을 띤 주간지 [목소리]는 창간호에서 코르착의 두 번째 소설 [살롱의 아이]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의사로 일하면서 의술에 대한 것과 어린이를 대하는 방법을 주제로 라디오 방송이나 강연 활동을 벌여 나갔다. 또한 소논문을 비롯해서 다양한 유형의 교육이야기, 동화, 희곡 등과 같은 작품들을 계속해서 발표하여 대중으로부터 하나같이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이렇게 하여 '의사로 일하면서', '교육에 관하여', '글쓰는 일'은 그의 평생을 특징짓는 세 가지 동기를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혹시 아버지의 정신병이 유전될 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작용한 때문이었다. 그 대신 그는 수백 명의 아이들을 책임지려고 하였다. 이런 실천적인 관심사는 이미 대학시적에 확고히 나타나 있었다. 재학 중 그는 바르샤바 복지회에서 일하고 있던 동료의사 엘리아스베르크의 요청을 받게 된다. 노동자 자녀를 위한 "여름거주지" 혹은 "여름 계절기숙학교"에서 함께 일하는 것이었다. 1903년부터 1908년가지 이곳에서 일한 경험은 그의 교육적 관심사의 활동의 새로운 방향으로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폴란드에 있던 복지회란 국가적인 규모로는 준재하지 않았고, 다만 공인되지 않은 형태의 비합법적인 사설단체로서 낙후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19세기 초에 시작된 이 단체에서는 곤경에 처함 아이들을 종교와 글쓰기와 산수를 기본으로 가르치면서 수공업 기예를 익히도록 하였다. 이를테면 1908-1913년 사이에 복지회는 47개의 유치원, 11개의 고아원, 17개의 작업실, 23개의 도서실과 아울러 부엌, 수영장, 응급실을 포함한 병원, 은행, 구직 알선소들도 갖추고 있었다.
1905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면서 적어도 이론적으로나마 이러한 사설단체들이 합법성을 가질 수 있게 되자, 어린이 구호와 교육을 위한 단체들이 여럿 생겨났다. 앞에서 말한 "여름계절기숙학교"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는 실상 1890년부터 이미 시행되고 있던 것으로 노동자 가족의 자녀 가운데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얼마 동안 농촌에 데리고 가서 자유로은 공기를 마시면서 재미있게 뛰어 놀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이제는 그 일을 합법적으로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단체들은 실상 부유층의 도움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코르착에게 이러한 단체들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었는데, 그 이유는 부유층의 과장이나 위선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그래도 존재하였고 기능하였던 것이란 그런 것들뿐이었기 때문에, 코르착은 거부감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단체와 관계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코르착은 매년 여름이면 여기에 와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경험이란 쓰디쓴 것이었다. 현장에서 부딪치는 아이들과의 일상사란 의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자주 혼란스러워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의 교육학은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상상은 풍부하였지만 박약한 경험과 아직은 감상적이고 연천한 그의 교육학적 시도는 여기저기서 좌초하였다. 어린이에 대한 그의 사랑과 신뢰, 박식한 아동심리학적인 지식을 현장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현장에서 처음으로 "한 떼의 어린이들"을 만났고, 여기서 "스스로 교육학적 실천의 첫걸음"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그는 자기를 비판적인 눈으로 되돌아볼 수 있었고, 이러한 자세는 앞으로의 과제를 향하여 그가 전적으로 새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904~1905년에 노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군의관으로 소집되어 약 2년 동안 만주의 한 중국인 마을에 있는 야전군 병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1904년에는 [살롱의 아기]가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는데, 이 작품은 이내 "문학적 사건"으로 떠오르면서 코르착이란 이름은 폴란드 문단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906년 그는 바르샤바의 노동자 주거 지역에 있는 소아과 병원에서 소아과 과장 대리로 부임한다. 그는 헌신적이었을 뿐 아니라 열렬한 학구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는 다른 유럽 국가들의 의학 연구 및 의료활동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베를린의 한 병원에서 일년간, 파리에서 반년간, 그리고 런던 등지에서 1개월 동안 실습 경험을 쌓았다. 이렇게 하여 그는 명망 있는 소아과 의사로 인정받게 된다.
1909년과 1910년에는 각각 [모이쉐스, 요쉐크와 다른 아동들]과 [요쉐크, 야쉐크와 프라넥스]를 출간하였는데, 이는 여름계절기숙학교의 경험을 기초로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의 교육활도은 차츰 그 경계를 넓혀 갔다.
그러다가 1909년, 그에게 하나의 결정적인 전기가 이루어진다. 그 해 겨울, 그는 엘리아스베르크로부터 유대인 어린를 위한 한 고아원의 기념행사에 초대를 받았는데, 여기서 엘리아스베르크와 함께 이 아이들을 정기적으로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것이다. 그는 생각 끝에 이 청을 기꺼이 수락하였다. 코르착이 보기에 그 집은 아이들에게 전혀 좋지 않았다. 코르착은 새집을 짓기로 하고 '고아복지회'와 모금사업을 벌인 결과 자금이 모아졌다. 1911년 새 집이 완성 되자, 복지회는 코르착에게 이 고아원의 책임을 맡도록 부탁하였다. 이것이 '고아들의 집'이라는 뜻의 '돔 시에로트'와 맺은 인연의 시작이었다. 이것은 의사로서의 코르착에게 다시금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번창하던 자신의 의사활동을 포기하는 대신, 그간 자신의 문학 작품에서 다룬 교육적인 내용을 가지고 실제 현장에서 전적으로 씨름해보려 하였다. 아마도 그에게 아이들 문제는 다만 의료활동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보다 전적으로 몰두해야 하는 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는 독일군의 침공으로 1942년 고아원이 해체될 때까지 이 고아원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아이들과 더불어 살고 이들을 의학적으로 또 교육학적으로 연구하고 돌보았는가 하면, 체계화된 아이들 공동체를 마련하고 아이들이 독자적이고 자치적인 행정 관리법을 통해 살 수 있도록 "어린이 공화국적" 삶의 방식을 발전시켰다.
1912년에는 이야기 [영예]가, 1913년 에는 이야기 [보보]가 출간된다. 또 이 시기에는 사춘기 시절 청소년의 일기장인 [나비의 고백]과 학교 생활을 소재로 한 [불행한 일주일]이란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던 중 1차 대전(1914~1918)이 발발하자 그는 야전군의관으로 징집당한다. 전장의 혹독함과 혼돈에도 불구하고 그는 글쓰기를 계속했다. 피와 고통으로 얼국진 삶의 처절한 시간에 간간히 주어지는 짧은 여백을 이용하여 그는 쓰고 또 썼다. 그 결실이 바로 그의 대표작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1918)이다. 연구 보고서와 문학 작품의 중간 형태를 띠고 있는 이 책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책이라 할 수 있는데, 바르샤바 고아원에서 의사이자 교사로서 일한 4년간의 경험을 보고한 것이다.
여기서 그가 끊임없이 몰두했던 주제는 어린이였다. 마치 20세기 개혁교육학의 다양한 흐름들이 제작기 어린이를 발견하였던 것처럼. 코르착이 그드로가 어떤 직접적인 교류를 나누었다는 흔적은 없다. 하지만 그는 칸트와 루소와 페스탈로찌를 알고 있었다. 19세기 계몽주의 철학의 주제라 할 수 있는 "개인의 가치와 소중함"이 그의 이야기 도처에서 생생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숱한 연구와 사색과 실천을 통해서 일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모른다."
키예프의 군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코르착은 마리나 팔스카가 이끌어 온 폴란드 소년들을 위한 기숙사오 교류하면서 그녀를 도왔다. 1918년 말 경에 간신히 바르샤바로 다시 돌아온다.이것이 인연이 되어 바르샤바 근처의 프루쉬쿠프에 폴란드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가 세워지는데, 이것이 바로 "나쉬 돔"이다. 코르착은 이 집의 기초적 체계를 세우고 마리나가 운영을 맡았다. 이 무렵 그는 작자가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 이전 어른이었들 때의 생활을 완전한 의식을 가지고 기록하는 환상적인 이야기 [내가 다시 어른이 된다면]을 발표했다. 이런 일련의 활동 속에서 코르착은 갈등하면서 성장하는 아이들의 생활과 심리에 관한 탁월한 전문가로 입증되었다.
1923년 그가 쓴 가장 훌륭한 작품 중 하나인 [헨센 1세]가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불행히도 왕으로 태어나 세상을 바꾸어 보려던 감수성 풍부하고 영리한 소년의 비극을 다룬 것이다. 최근 쉬체친 지방 독자들은 그들의 사랑하는 주인공 헨센 1세의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는데, 이를 보면 이 자품이 가진 인기를 짐작할만하다.
코르착은 종교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이런 면모는 그간 제대로 퍙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실상 그의 모든 삶의 활동의 근저에서 우리는 그의 독특한 종교적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 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근의 연구는 한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적인 삶의 양태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하시디즘적 신비주의로 각인된, 하지만 코르착 스스로 아주 독특하게 체현해 낸 어떤 것으로 밝혀 보려 하고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홀로 하나님과 함께 -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1922 - 이 책은 송순재와 김신애가 우리말로 옮겨 <내일을 여는 책>(2001)에서 출간하였다.)를 읽어 보면 좋을 것이다.
1926년에는 단지 어린이와 청소년들과 함께 꾸민 어린이 잡지 [마위 프쉐글롱드]를 편집, 발간하였다. 뿐만 아니라 바르샤바 지방법원에서 미성연자의 문제를 위한 자문으로 임명되었따.이 즈음 나온 작품으로 [꼬마 약크의 파산](1924)이 있다.
1928년에는 나쉬 돔이 바르샤바 교외별장 지역인 비엘라니에 있는 아름다운 독립 건물로 옮겨가고, 코르착도 이 기관과 계속해서 같이 일했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그곳에서 보냈다. 또한 코르착은 자유 폴란드 대학에서 강의를 맡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와 함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는 [아이들이 존중받을 권리](1928)가 출간되었따.
1930년에는 바르샤바의 아테네움 극장에서 <미친 사람들의 의회>라는 극작품이 '끔찍한 유모레스크'라는 부제를 달고 초연되었다.
1931년에서 1939년 사이에 코르착은 두 군데 아이들의 공동체에서 일하면서 틈틈히 바르샤바에 있는 두 군데 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이 즈음 나온 중요한 작품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학인 [삶의 규칙], 동화 [안톤 카이투스의 모험](1934) 그리고 "고집스러운 소년"이라고 제목을 부친 루드비히 파스퇴르에 관한 문학적인 전기가 있다. 코르착은 이 즈음 파레스티나로 첫 번째 여행을 하였고, 1934~1935년에는 폴란드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어린이 프로그램 '노의사(老醫師)의 라디오 정담'을 기획 방송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았고, 청중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다. 이 대화 가운데 몇 편은 뒤에 "즐거운 교육학"이란 제목의 책으로 발췌, 출판되었다(1939). 마침내 1937년 폴란드문학학술원은 그의 교육적 문필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금 월계수상'을 수여하였다.
1939년에서 1942년 사이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바르샤바가 독일군에게 점령되자 이 도시는 상상할 수 없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노의사는 라디오 방송을 재개했다.
그는 폴란드 소령 군복을 벗지 않았으며, 독일군이 명령한 대로 유대인의 노란색 완장을 차지 않았기 때문에 형무소에 들어갔다. 이전에 그에게 배운 학생들은 갖은 노력을 다해 간신히 그를 구출해 냈다. 그는 돔 시에로트로 돌아왔고, 다시 유대인 게토 지역에 갇혔다. 그곳은 생존을 위협하는 끔찍한 것들, 기아와 경며로가 학살 같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친구들은 코르착을 빼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그는 이 노력을 거부하고 돔 시에로트의 아이들을 돌보기를 고집했다. 이때의 기억을 기록한 것이 폴란드어판 코르착 선집 4권으로 출판되었다.
오늘날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삶의 마지막 순간으로부터 하나의 충격적인 인상을 받는다. 그의 죽음은 독일군의 인종말살정책에서 비롯된 비극적인 상황에서, 어린이들과 삶과 죽음에 끝까지 동행하는 데서 비롯된 자발적인 헌신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이미 유명해진 이름 덕분에 충분히 살 수 있었고, 그리하여 절정에 오른 자신의 활동을 번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의 수용소로 집단 이송되는 2백여 명의 아이들 곁에 끝까지 남아 있고자 하였고, 그리하여 같이 일하던 스테파니 발킨스카와 함께 가스실이 있는 트레블랑카로 송치되었다. 1942년 8월 5일의 일이었다. 역사는 이를 실종으로 기록하고 있다.
3.
코르착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종종 소크라테스나 페스탈로찌에 비교한다. 그는 먼저 기발한 이야기꾼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는 자기가 말하려는 바를 학적인 논술의 형식이 아니라, 길고 짧은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목소리는 "이야기 교육학"에 관한 하나의 탁월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이야기는 멀쩡하게 전개되다가 사이사이 독자를 갑자기 멈추어 서게 하는 힘이 있고, 그러다가 갑가지 독자의 뒤통수를 때리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소크라테스적이다.
그가 말하는 이야기는 다만 단순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일상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문제와 시련과 고통으로 얼룩진 삶의 현장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하루를 넘기기가 버거웠고, 하루의 과제를 해결하느라 늘 허덕이며 씨름하였다. 그는 실천을 소중히 여겼다. 온통 실천과 뒤범벅이 되어 생을 불태웠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혹자는 코르착을 페스탈로찌의 화신으로 부르기도 한다. 실로 이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닮았다.
그의 실천정신은 현실에 대한 엄밀한 과학정신에서도 여실이 나타난다. 그는 현상 앞에 멍추어 서서 재어 보고, 달아 보고, 숨을 죽이고 들어보았다. 그리고 나서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말할 정도로 현실에 대해 엄밀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자연과학자는 아니었다. 그는 경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사유하고 또 사유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교육적인 주제를 놓고 철학하는 하나의 비범성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읽기가 그리 쉽지 않다. 또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그 맛을 자극적인가 하면, 때로 깊고, 때로 아련한 아픔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쓴 동화들은 아주 재미가 있다.
그래의 그의 글은 흔히 논리적인 주장이나 체계적인 이론을 기대한 독자들을 당혹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언제쯤이나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이나 설명이 나올가 하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장르를 구분하기 좋아하는 문학도들은 그의 글을 두고 혹 당혹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한 글쓰기야말로 읽는 이들로 하여금 창조적 사유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던 독특한 힘이었다.
4.
다우첸로트가 요약한 바와 같이, 우리가 코르착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다음 세가지이다.
(1) 지칠 줄 모르는 관찰
그는 "의학은 아주 작은 현상에 대해서라도 수년간의 연구를 기울이는 데 비해, 교육학은 경솔하고 또한 빠르게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특징이 있음"을 지적하면서, 문제를 까다로우리만큼 정확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관찰하려 하였다.
이 점에서는 곤충의 생명을 전혀 다치지 않고 단순히 관찰을 통해서 연구해 낸 곤충연구가 앙리 파브르는 그에게 큰 놀라움의 대상이었다. 코르착은 교육학에서도 그러한 의미의 진단학이 발전해야 하리라고 생각했다. 실상 그는 25년간에 걸친 나날들에서 간단한 기록을 남기고, 써넣고, 보고하고, 단편들을 기록해서 모으고, 도표를 작성하는 식으로 34개의 기록상자를 만들었다.
(2) 조심스러운 진단과 사유하는 태도
그는 단정을 피하면서 주의에 주의 를 기울여 평가해 보려 하였다. 두 번째 특징을 아주 세심한 진단방식에 관한 것으로, 그는 진단하는 데 절대로 서두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의 움직임이나 몸짓에서 재빨리 결정정인 진술을 이끌어내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라 할 수 있다. 서두르는 대신 그는 개개의 현상에 대하여 사유하려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면서 추구하는 삶의 자세를 발견하게 된다.
(3) 망상에 빠지지 않는 교육행위
그는 어린이가 처해 있는 현실에 철저하려 하였다. 1910년에 나온 그의 첫번재 소설 [거리의 아이들]에서 그는 바닥에 떨어진 인간의 현실적 상황과 비루함을 그렸는데, 이는 평생에 걸쳐 자신이 다루고자 한 주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의 교육적 상상과 독창적인 방법은 이러한 현실에 발붙인 그의 근본태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5.
이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주제는 '어린이의 권리'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아이들을 사랑해야 하는가]와 함께 이제는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된 [아이들이 존중받을 권리](1928)에서 아주 이색적으로 표현된 그의 세가지 명제에서 그것을 찾아볼 수 있다.
(1) 자기 죽음에 대한 어린이의 권리
자기 죽음에 대한 어린이의 권리라니,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이 말은(어쩌면) 자살할 수 있는 권리라는 말로도 들린다. 하지만 이는 당시의 교육이 어린이를 지나치게 감싼 나머지 아이 스스로는 아무런 경험도 할 수 없도록 강요된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반어법에 다름 아니다.
"지나치게 감싸는 것은 어른들의 두려움으로부터 나온다. 혹시 다치면 어쩌나, 그러다가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하여 부모들은 애들이 다칠만할 것들은 아이 눈앞에서 다 없애버리거나 심지어는 대신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아이들이 무얼 해 볼 만한 기회는 없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행위는 어린이의 권리를 빼앗는 것이라는 말이다.
자 이제, 아이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돌려주자!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을, 아이들을 홀로 내버려두라는 말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어른들의 과보호, 즉 아이들이 갈등에 던져지지 않도록 하는 대신 그들로 하여금 경험을 상실하게 하는 행위에 대한 고소일 뿐이다.
그보다 어른들이여, 아이들을 믿어보라. 그리하면 아이들에게서 자발성과 자기 책임성이 자라날 것이다. 신뢰하는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은 일찍 자발적이 되고, 차츰 어른들의 도움에서 자신을 풀어놓을 수 있게 된다. 코르착이 생각하는 교육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교사는 아이들 앞에서 쓸모 없게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오늘 하루에 대한 어린이의 권리
이는 하나의 지배적인 통념, 즉 교육이란 미래 사회의 시민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는 통념으로부터 어린이를 변호하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뛰어넘어 멀리 놓여 있는 미래를 지향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은 근본적으로 결손된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 코르착은 이렇게 말한다.
"미래 때문에 아이가 즐거워하고, 그를 슬프게 하고,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하고, 화를 내고, 흥미를 보이는 오늘을 하찮게 여긴다. 아이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이 내일이라는 것 때문에, 사람들은 아이들을 수년 동안이나 속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교사가 져야 하는 책임의 몫이 있다. 아이가 장차 커서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학교에 다니고 이런 저런 직업 훈련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이런 미래에 대한 요구 때문에 현재의 욕구와 상태가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코르착은 아이들이 오늘에 대하여 가지는 권리에 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이것은 바로 어린 시절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코르착은 이런 요구 때문에 교육학적인 행위 자체를 파기하지 않는다. 교육이란 순간의 만족 때문에 다른 편에서 금지와 연기와 수정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있을을 잊지 않는 것이다. 미래에 고착된 교육관이 맹목이라면, 현재와 순간이 만들어내는 광란도 역시 맹목인 것이다. 그는 다만 아이들의 현실을 변호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코르착이 말하고 있는 현재와 미래 사이의 이같은 긴장은 프리트리히 쉬라이어마허가 일찍이 그의 [교육론]에서 교육의 중심적인 윤리적 과제로 설파한 바와 아주 흡사하다. 쉬라이어마허는 현재와 미래가 빚어내는 이 긴장 사이에서, 즉 한편에서 미래를 포함하는 교육학적 관심과, 다른 편에서 개인이 살아가는 현재라는 시간을 단순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차디차게 계산해 버리지 않도록 하는 윤리적 요구 변증법적인 긴장을 모색하였다. 미래에 대하여 관계하는 삶의 활동은 동시에 현재에서 만족되어야 하고, 이러한 방식으로 미래에 대하여 관계하는 모든 교육적인 현재적 순간은 동시에 인간 - 그가 존재하는 바 - 을 역시 만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코르착은 쉴라이어마허를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는 코르착의 종교적 사유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아마도 유대교 '하시디즘'적 배경에서 현재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아이들이ㅡ 존재방식을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롭게 꿰뚫어 보지 않았는가 싶다. 하지만 그가 이 "현재성"을 다시금 미래와의 긴장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의 사유형식을 오늘날 대두되고 있는 반교육학( - 미래를 지향하는 성인 중심의 교육을 전혀 쓸데없는 것으로 일련의 교육무용론적 관점들..)과 같은 단순한 어린이 중심적 범주와 관련지을 수는 없으리라.
그런데 이 오늘이라는 시간적으로 구획되어 있는 전체가 제기하는 요구에 대하여 책임을 다히기는 쉽지 않다. 코르착은 이 문제를 삶의 일상성과 관련하여 사유하고 있다. 즉 교육이란 그에게(하루씩 살아가는) 삶의 실천이었데, 이는 규범이나 명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교류를 통해서 아이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일상적인 욕구에 대하여 사려 깊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사가 그에게는 몹시 어려운 과제로 여겨졌던 것이다.
교사는 멀리 떨어져 있는 미래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에 대하여 전적으로 책임진다. 나는 이러한 명제가 오해를 부러일으킬 줄을 안다. 사람들이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란다. (다만 분명한 것은)오늘 마쳐야 할 책임을 안개에 싸인 내일로 미루기는 쉬운 일이라는 것이다.
(3) 원래 자기 모습대로 있을 수 있는 어린이의 권리
이는 앞의 두가지 것과는 연관이 없는 별도의 사항인데, 아마도 코르착이 고아원의 일상생활에서 늘 부딪치던 아주 전형적인 일과 관련이 있는 듯히다. 능숙하고 좋은 뜻을 가지 교사가 잘만 하면 아이들에게 효과적인 영향력을 기칠 수 있으리라는 가정에 대한 하나의 반론이다. 당신은 아마도 활기에 넘쳐 뛰놀고, 공격정인 아이를 조용히 앉아 있도록 하지는 못할 것이다. 경쟁적이고 반항심이 많은 아이를 부드럽 순종하는 아이로 만들 수도 없을 것이다.
코르착은 금지나 제한이나 압력을 행사라는 교육을 불신하였다. 우리들은 억지로 시켜서, 압력이나 폭력을 행사해서 이룬 것은 어떤 것이나 지속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불확실하고, 기만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만일 순종을 잘하던 선량한 아이가 갑자기 까다롭고 반항적으로 변한다면, 우리는 아이가 그렇게 있는 모습 그대로 행동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화를 내서도 안 될 것이다. 어릴 때는 압력이 먹혀 들어가지만, 이는 확신을 주지도 못하고 현실에 나쁘게 적응하는 태도를 기를 뿐이다.
교사는 아이들에 대하여 긴 숨을 쉴 줄 알아야 한다. 성숙이란 하루 아침에 대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이는 교사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교육할 수 없는 것이고, 아이가 천성으로 가지고 나온 소질과 능력에 반하여 어른이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어 낼 수도 없다.
이렇게 해여 전지전능한 교육학 - 머리를 씻어내고 의지와 본질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 - 과 그리고 교육에 대한 옛 관점, 즉 교육이란 의지를 부서뜨리는 것이라는 점에 대한 항거가 표출되어 있다. 코르착에게 교육학이란 변화시키고 재형성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었다. 만일 환상에 빠지지 않고 사실대로 평가한다면, 교사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모든 아이들을 모든 경우에 전적으로 용서하는 것 - 투덜대고 소리를 지르고 호통을 치고 위협하고 벌을 주는 것 말고는 할 줄 모르는 교사는 일체의 비행과 과실과 죄에 대해서 관대해야 한다. 아이는 그가 알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잘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한 번 해보았다는 사실 때문에, 달리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죄진 몸이 된다. 만일 아이가 그렇게 태어나서 혹은 그가 한 경험대로 자라나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실쭉해지고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은 교사라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것"이다. 아이가 비뚤어진 길을 걸어와서 그렇게 고독한 모습으로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 말이다. 화를 내지 말고 슬퍼하라. 복수가 아니라 연민의 정을 가지는 것이다.
교사는 슬픔을 아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적어도 당면한 교육의 현실을 적절한 의도와 노력을 통해서 정복하고 승리를 구가하는 자는 아니다. 오히려 최선의 의도와 노력이 난파를 당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교사란 이러한 상황을 온몸으로 짊어질 수 있는 자이다.
6.
코르착은 단순한 방법론의 사람은 아니었다. 삶의 근본적 물음에 철저하였고, 또한 역경 속에 있는 아이들과의 관련 속에서 이 물음을 추구해 나갔다. 삶과 진리에 대해 전적으로 헌신적인 태도는 그의 실천적 삶의 도처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강렬한 근본주제였다. 그의 이런 자세는 그 삶의 종교적인 성격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이 삶에서 종교적 차원이 가지는 비중과 그 의미는 오랫동안 제대로 평가되지 않다가, 차츰 새로이 조명 받고 있는 주제이다.
그의 가계는 다른 동족처럼 유대교에 속하지 않고, 가톨릭 교회를 택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의 종교성은 고유하고 개별적인 성격을 강하게 동반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운명에 가까이 비추어 볼 수 있는가 하면 - 그의 단순하면서도 겸손한 태도, 어린이와 특히 모든 박탈당한 자와 함께 자신을 동일시한 그의 근본자세는 예수 그리스도적인 것이 가깝다. 이 종교적인 띠는 그에게 참으로 본질적인 것이었다. - 다른 한편으로 거의 동족인 유대인의 운명과 그들의 종교적 전승에도 깊이 경도하였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에게는 18세게 동유럽에서 유대인 중, 하층민을 주축으로 성장한 하시디즘( - 18세기 초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유대인 사이에 널리 전파된 성속일여(聖俗一如)의 신앙을 주장하는 종교적 혁신운동)과의 연관성이 무엇보다 두드러져 보인다.
코르착에 대한 하시디즘의 영향에 대해서는 미하엘 카르히너가 1987년 자신의 논문에서 거론한 바 있는데, 여기서 그는 코르착의 사상 가운데 하시디즘과 연관지어 볼 수 있는 세 가지 모티브를 읽어냈다.
첫째는 "오늘" 혹은 "순간"을 삶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척도로 보고, 이를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시간"과 긴장관계 속에서 살아내기, 이러한 긴장관계는 역시 가까우신 하나님과 멀리 계신 하나님 사이의 거리에서도 나타난다. 둘째는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론 그자체로서 존재하는 것", 즉 삶 안에서 실천적으로 사는것,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눈 앞에 서는 것", 즉 "모든 피조물 안에서" 곧 돼지, 코끼리, 나비와 메뚜기, 개똥벌레, 혹은 귀뚜라미의 음악회오 푸른 언덕의 독주자들, 고아원의 가련한 식물인 꽃, 새들 슬픔에 가득 찬 아이들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하시디즘적 유대교는 코르착의 교육적 활동기 처음부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맥락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마르틴 부버를 상기해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하시디즘에 깊이 뿌리박아 자라난 그의 교육학이 상당 부분 코르착의 그것과 연관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종교성을 어느 종파적인 관심사에서 범주화하기 어렵가는 것이 지금까지의 견해이다. 코르착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서도 다시금 자신만의 종교 이해, 자신만의 종교적 삶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교적 맥락 없이 그의 삶과 교육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삶에 대한 경외, 미천한 피조물에 대한 경외, '이' 같은 벌레와 참새에서, 그리고 먼지에서 생긴 본질과 하나님이 자리하신 곳이라면 어디서곤 경외하는 태도, 이것이 그의 종교적인 삶의 특징을 말해 준다.
7.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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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지 못하는 부모들이 알지 못하는 상활에서 알지 못하는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나는 모르겠고, 알 수도 없다. ... 어떤 사람에게 이런 식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 완성된 해답을 달라고 요구해 보라. 그 생각이란 어떤 낯선 여자에게 당신의 아이를 낳아 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우리 스스로가 고통스럽게 낳아야하는 생각들이 있고, 바로 그것이 가장 값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