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백년의 역사속 골목의 숨결
삼학도 김대중노벨상기념관
김대중노벨기념관 휴게실모습
김대중노벨기년관 전시관 입구 김대중대통령은 세계가 인정하는 큰 인물이다. 그가 태어났던 고향 신안군 하의도 정신이 자란 '목포'를 시대의 눈으로 바라보고자 아랫글을 <펌>했습니다.
일본인 화장터가 있던 죽교동 일대 뒷개 뻘바탕 '둑보'의 아련한 추억의 시발점 바닷물 막는 매립…서민의 삶 터전으로 탈바꿈 도시의 확장과 갯뻘 매립의 역사는 곧 목포역사 일본인 화장터·분뇨장 인근 유달산 기슭에 거주 덕인재단·홍일학원 등 지역 인재육성 초석다져 목포 사람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가 있다. 뒷개 뻘바탕이다. 한번쯤 이곳 뻘바탕을 걸었음직하다. 목포 사람, 아니 목포 출신 인사들은 이곳을 입에 오르내릴 때 꼭 '각시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살았다'고 회상한다. 앞으로 신안군 압해도가 보이고 압해도 철부선, 과거엔 배가 입출항하는 선창이 있었다. 그래서 목포만의 전라도 말도 생겨났다. 사람들의 억세고 생활력 강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단어이다. '둑보'이다. '둑보'는 전라도 말로 성깔 있고 오기가 많아 남에게 무턱대고 지기 싫어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이 말은 이곳 출신 아이들의 별명이 되기도 했다. 뻘바탕,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하기 위해 통학을 해야 했고 여름 뙤약볕에서 뻘바탕에서 공놀이, 게잡이 등을 하며 놀면서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뻘바탕을 피해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어 만든 마을이 죽교동이다. 유달산 기슭에 자리한 곳이다. 죽교동 일대의 마을 형성은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 다만 1932년에 행정구역 확장에 의해 무안군 일로면의 죽교리와 산정리, 용당리를 편입하면서 도시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정병조의 제방공사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일본인들의 거류지역인 만호동, 유달동의 조계지를 비롯해 배 사람들의 보금자리인 온금동, 그리고 오거리를 중심으로 한 북교동 일대, 목포역 호수를 매워 조성한 남교동 등이 1920 ~ 30년대 대표적인 마을이다. 유달산 기슭에 자리한 죽교동의 형성은 바다 매립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목포 시가지 역사는 매립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목포 시가지는 매립을 통해 도시가 확장되고 시민들이 이곳에 거주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 목포의 첫 매립 시가지는 1907년 일본인 거주 구역 마련을 위한 조계지의 대규모 매립이 이루어졌다. 매립으로 확장된 지역과 기존의 지형에 그리드형 필지구획으로 일본인 거주구역이 마련됐다. 목포 도시 확장의 시작이다. 이후 1926년에는 1914년 호남선 철도 개통으로 현 목포역 일대의 매립으로 철도역 부지가 조성되고 철도역 부지 조성으로 인해 역 앞에 호수가 생겼다. 목포와 광주 등 전남지역으로 연결해 주는 도로 목포에서 신의주까지의 국도 1호선을 따라 시가지가 확장됐다. 1930년대는 목포역 앞의 호수 매립 및 시가지화가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다. 목포역의 철도 증설, 목포역 위쪽 현 산정도 일대에 매립을 위한 제방 축조가 이루어졌다. 제방위에 도로가 조성됐다 현재 2호광장 ~ 3호광장은 그때 제방을 따라 조성된 도로이다. 당시 정병조의 제방도 1932년 만들어졌다. 정병조 제방은 뒷개 현 죽교동 앞 뻘바탕이 주거지역으로 바뀌는 역할을 했다. 일본인과 소유권을 싸고 재판까지 가면서 정병조씨는 이곳의 토지를 소유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먹을거리가 풍족하지 못한 조선인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면서 지역에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36년 매립과 관련해 별다른 특징을 보이지 않지만 현 산정동 일대의 매립을 비롯해 유달산 기슭(현 북교동 일대)에 도로가 신설되고 이를 통해 이 일대에 주거구역이 조성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963년 목포역 부근의 확장, 현 산정동 일대가 시가지화 된 것을 통해 구도심에서 북동쪽으로 목포의 확장을 확연히 알 수 있다. 현 북항일대의 매립이 완료돼 경작지화 된 것이 가장 큰 변화이다. 이후 동명동, 삼학동 일대 매립에 이어 하당 1 ~ 2단계 매립이 이루어지면서 도시가 영산강 하구언 쪽으로 확장해 갔다. 매립과 함께 도시가 형성됐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조선인들의 주거지는 유달산 기슭에 자리를 잡을 수 밖에 없었다. 일본인 거주지 인근에서 자리한 조선인들에 비해 죽교동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사정은 훨씬 좋지 않았다. 이곳은 일본인들이 화장장과 공동묘지, 분뇨 집합장이 있었다. 주거지역으로 볼 때 최악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 처음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화장장에서 나오는 부산물이 큰 생활의 보탬이었다. 특히 일본인 공동묘지는 이들에게 생활의 주 수입원이었다. 일본인들이 춘·추분절과 4·4절 등 명절 때 묘지에 남겨놓고 간 각종 음식과 돈 등을 훔쳐 살았다. 일본인 분뇨집하장에서 일하는 조선인들이 이곳에 거주했다. 일본인 분뇨집하장은 '똥통'이란 지명을 낳았다. 이곳에 모아진 분뇨는 인근 밭에 비료로 사용됐으며 이곳에 생산된 채소 등으로 당시 학생들의 기생충 발생이 높았다. 이곳이 본격적으로 거주지로 개발된 것은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나면서 공동묘지를 파내고 이곳에 조선인들이 집을 짓고 살면서 동네가 형성됐다. 현재 이곳에 죽교동 시장 옆으로 넓은 도로가 있는데 일제 강점기 화장장으로 올라가는 도로로 처음부터 넓은 도로로 개설됐다. 일본인 화장터는 현재 쌈지공원으로 조성돼 있으며 교회가 들어서 있다. 이곳에 구도재생원 분원 자리가 있다. 일제 강점기 사용했던 건물이 그대로 보존 돼 있다. 구도 재생원은 국가적으로 어려웠던 일제시대 때 호남선의 종착역인 목포에 있던 많은 불우 아동들을 위하여 1930년도에 전남에서 최초로 전남 신안군 압해면 장감리 구도에 정재현씨가 설립하였다. 1954년도에 목포시 죽교동 92번지에 분원을 설립하고 1956년에 시설을 목포로 전체 이설하여 운영하였다. 외국후원금으로 불우한 아동들에게 매월 장학금을 지급하기도 하였다. 1962년에 제 2대 원장 정진태가 취임한 후 발전을 거듭하였다. 1989년에 전남 신안군 압해면 동서리 808-11번지에 시설을 이설하여 '신안보육원'으로 명칭을 개명하고, 제 3대 원장 정성덕씨가 조부의 뜻을 이어받아 아동들을 건강한 사회인으로 배출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북교고아원이라고도 불렀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재생원은 와가였으며 위아래 상하체가 있었다. 집주인은 박흥식씨였으며 그 일대 밭을 거의 소유하여 경작하였다. 하채는 암태 소작쟁이 운동을 주도했던 고 서태석씨가 월세방으로 입주한 적이 있다. 또한 현재 목포 대표적인 사학(私學)인 덕인재단의 기틀을 마련한 곳이 남아 있다. 성덕어린이집이다. 성덕어린이집은 덕인재단 이복주 이사장이 화덕을 제작, 판매하여 경제적 부를 마련하여 덕인재단을 설립하는데 기여한 곳이다. 덕인 사학재단은 덕인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지역 인재 육성에 주력했다. 이와 함께 옛 동광중학교가 있다. 현재 홍일중·고등학교의 전신으로 전복운씨가 설립하였다. 1976년 6월 16일 동광학원에서 홍일학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홍일학원은 초대 이사장은 권이담 전 목포시장이 취임했다. 이곳 죽교동에서 북항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뒷개 나루터가 나온다. 압해도까지 운항하던 도선장이다. 압해도까지 운항하던 도선장은 이곳에서 현재 삽진 산단 위쪽에 자리한 포구로 이동을 했다가 최근에 현재 북항으로 다시 옮겼다. 압해도는 목포에서 배로 20 ~ 30분 이동하는 곳에 위치해 있어 목포 인근 섬이다. 현재 행정구역이 신안군에 포함돼 있지만 과거엔 목포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일제 강점기 총독부는 목포와 압해도간에 연륙교가 설계돼 추진됐을 정도로 가까운 섬이다. 최근에 압해대교가 준공돼 연륙이 됐지만 100여년 넘게 지역 주민들에게 숙원사업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신작로 등이 모두 연륙교 설계를 중심으로 섬 도로 계획이 수립될 정도였다. 일제 강점기 일본사람들의 화장장이 들어섰던 곳으로 현재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지금의 제일극장 서북쪽 뒤에 있는 언덕위이다. 별망평(別望坪)이라 불리였다. 출처 - 목포시민신문(2009.4.7)
<골목길 탐사>-4 온금동 서산동 일대 따뜻한 곳에 따뜻한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 삼학도 전설 바라보는 학암사 학바위 위엄 일본인 위한 유달산 자락 수원지 맥수지탄 다순구미 서민들의 물길 찾는 희망 이야기 “풀잎에서 상처가 있다/ 꽃잎에도 상처가 있다/ 너와 함께 걸었던 들길을 걸으면/ 들길에 앉아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상처 많은 풀잎들이 손을 흔든다./ 상처 많은 꽃잎들이/ 가장 향기롭다.” 정호승시인의 ‘풀잎에도 상처가 있다’라는 시(詩)이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이 시는 하루 하루 힘겹게 사는 사람에게 위안을 준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병든 사람에게는 이 시가 위로가 되지 않을 듯싶다. ‘가장 향기로운’ 몸 하나로 역경을 이겨내며 살아가며 바다를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들. 따뜻한 햇살이 비추고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는 다순구미, 온금동의 삶은 처절하고 아름다운 몸부림이 였을 것이다. 『1900년대 초 목포는 유달동을 중심으로 한 외국인 거류지에 조선인들이 살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부분은 조선인 마을에서 조밀하게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돼지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시작한 조선인 마을은 쉽게 그 처지를 벗어날 수 없었고, 일본인 마을과의 차별이 계속되었던 일제 강점기 내내 시설상의 차이를 좁힐 수 없었다. 1905년 이곳 조선인 마을에 처음으로 계획된 시설이 들어섰다면 그건 묘하게도 창기가(娼妓家)였다. 이로써 죽동 유곽이 자리 잡았다. 이렇듯 축복받지 못한 출발을 맞았던 조선인 마을, 그러나 어찌 50년후의 일을 알았을까? 무덤자리에서 터 잡고 일어난 ‘조선인 마을’이 어느 덧 목포의 중심지가 되었고, 또 땅값도 제일 비싼 동네가 되었으니 세상 참 모를 일이다.』<고석규 작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에서>
이번 주는 조선인 마을인 온금동 골목길을 돌아보았다. 이번 모실돌기는 조선내화 이훈동 회장의 자택 앞 작은 슈퍼에서 시작했다. 이곳은 온금동과 유달동은 잇는 아리랑고개의 끝과 유달산 노적봉을 오르는 길, 일제강점기 조선인과 일본인의 만남의 거리를 이어지는 국도1호선이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길은 100년전에도 많은 사람이 밟고 섰을 것이다. 계단으로 이루어진 골목길을 따라 1946년 진 씨가 토굴로 창건했다는 학암사로 올랐다. 유달동 인근 유달산 낮은 지역에 고급 저택이 자리하고 산으로 오를수록 서민주택이 자리잡도 있다. 유달산과 주택의 경계를 이루는 작은 길을 걸어가면 옛 목포제일여고가 있다. 이곳은 해방 후 목포상과대학이 있다가 해양고등학교로 바뀌었다가 1979년 목포제일여고가 이전해 2002년 옥암동으로 이전할때까지 학교로 사용됐다. 제일여고가 이전하고 현재는 이곳은 임마누엘수양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달산으로 걸어 오르면 목포 최초의 상수도 시설인 제 2수원지가 나온다. 일제강점기 외국인 거류지역에 수돗물을 공급하던 시설이 여기 전기 남아있다. 당시 수도관 매설보다는 이왓장과 돌로 정비된 도랑을 이용해 수돗물을 공급했다. 이곳은 1910년 상동 대박산 자락의 제1수원지와 같이 축조됐다. 다음 해인 1911년엔 제3예비 저수지를 이곳 좌측에 증설하였다. 당시는 일본인 거주지 구역의 중요한 급수원이 였다. 일본인들은 이곳 주변에 벚나무를 심어 유원지를 만들어 놓았다. 일제강점기 말엽엔 이 자리를 신사의 신축지로 사용하려고 저수지와 여과지와 배수지의 중요시설을 전부파괴 매몰하였다. 광복 후 1955년 파괴되지 않았던 예비지를 복구하고 배수지로 사용했다. 1984년까지 이용됐으며 인명사고가 자주 일어나 목포시가 1985년 5월 폐쇄해, 현재 자취만 남아있다. 이곳을 지나면 유달산의 무안반도 끝자락이 나온다. 장사바위가 우람하게 버티고 서있다. 호남정맥의 산줄기가 유달산에서 한바탕 푸르락 올라섰다 고하도로 건너뛰기 위해 장사가 잠시 다도해의 바람에 땀을 훔치며 숨을 가다듬은 곳인 듯하다. 거대한 바위가 이곳에 우뚝 솟아 목포 내항과 저 멀리 막아선 듯 열린 듯, 열린 듯 막아선 다도해를 관장하고 있는 듯하다. 바위에 1921년에 음각한 것으로 보이는 ‘경상도우회기념회장’이란 문구가 새겨져 있어 세월의 무상(無常)을 말해주고 있다. 당시 개항 목포에 돈을 투자하고 벌었던 상인들은 대부분 목포보다 먼저 개항을 경험해 부를 축적한 부산 사람였다고 전해진다. 모실돌기를 주관하는 목포문화원 조상현 국장은 “당시 목포의 대부분의 조선인 상인들은 경상남도 부산 사람들였으며 이곳 사람들은 항만, 철로 공사의 잡부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목포 음식이 전라도 지역의 음식과 약간 상이 한 것은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온금동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저마다 가슴속에 아픔과 희망을 간직한 채 목포로 몰려들었던 조선인들은 이곳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온금동은 매립권을 둘러싸고 조선인 무안 출신 정래성과 일본 상인 후쿠다 간의 분쟁에서 시작됐다. 목포의 포구를 막아 매립하면서 형성된 온금동은 자연스럽게 아리랑고개를 사이에 두고 일본인 거류지역과 통하면서 자리를 잡아갔다. 『온금동 어항(漁港)의 개착은 주요사업의 하나였다. 1912년에는 온금동의 움푹 들어온 부분에 있는 간석지 전부를 매축하여 해벽공사를 한 다음, 그 중앙에 폭 30칸, 깊이 15칸, 연장 70칸을 개착해서 어항의 출입과 정박을 편하게 하고 개착한 대거(大渠)의 좌우로 도로를 종횡으로 내고 택지 만연평을 일용잡화 및 기타 필수품점의 자리로 채우기 위해 차가(借家)를 세웠다. 공비는 약 6만 원에 달하였다고 한다.』<고석규 작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에서> 1910년대의 목포는 주로 구 거류지 내의 정비에 치중하고 호남철도와 관련된 시설공사, 약간의 매립을 시행하여 도시발달의 단초를 마련하는 정도였다. 매립사업은 1924년까지 지속됐다. 째보선창은 매립이 차츰 이루어지면서 그 모습이 사라졌다. 그 모습이 완전 사라진 것은 1981년 전국소년체전때 유달산 일주도로 확장 정비되면서 소멸됐다. 목포의 모든 조선인 집단촌이 그러하듯 온금동도 물을 찾기는 서민들에게 힘든 삶 중에 하나였다. 『서산초등학교에서 유달산으로 넘어가는 언덕길(일명 아리랑 고개) 중간쯤에는 아마 목포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독특한 비가 하나 있다. 1922년 5월에 세워진 이름하여 “유학정인호시혜불망비(幼學鄭麟浩施惠不忘碑))”물론 시혜불망비와 같은 비는 전국 어디서나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 할 수 있지만, 이 비가 각별한 이루는 그 시혜의 내용 때문이다. 즉 정인호가 천금의 돈을 출연하려 우물을 파서 물 없는 마을에 단비와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 그 덕을 기리고자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우물을 판 일로 송덕비를 세우는 일은 극히 드물 터인데 목포에서라면 송덕비를 세울 만한 일이었다. 이 우물을 지금도 남아 있다.』<고석규 작 근대도시 목포의 역사 공간 문화에서> 이런 힘든 삶을 살아가는 민중들은 항상 신(神)에 의지한다. 이들이 의지한 터가 이곳에 남아있다. 산제당 터이다. 산신당에는 매년 정원 보름날 동네 제사(洞祭)를 지냈다. 지 제사는 유달산 산신령을 모신다고 하며 산신당의 벽에는 하얀 수염이 난 신선이 호랑이 등에 앉아있는 그림이 있었으며 풍어를 빌고 출어의 안전을 기원하였다. (출처 - 목포시민시민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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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해설이 있는 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큐ㅌ1★
첫댓글 막내데리고 돌아보고 싶네요~^
목포!20대 황금시절을 유달동 이훈동씨댁 앞 집에서 살았던 추억많은고장입니다 .아침산책때 염소에서 바로짠 따끈한우유도 일품이였고 저녁이면 유달산에서 불러주던 트럼벳! "나는 범부가되겠으니 부디 영부인이 되시요"라는 엽서한장 띄우고간 사람 생각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