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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1-13. 오순절 날이 이르매. 2021. 5. 23. 성령강림주일.
1.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과 의미입니다. 오늘이 2021년 오순절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오순절이라는 헬라원어는 50이라는 뜻입니다. 이 날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에 지키는 절기입니다,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에 유월절 다음으로 중요한 절기가 오순절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의 축제기간 중 첫 이삭을 드린 다음날부터 계산하여 칠 주(49일) 후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오순절 날에 흩어져 있던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처음 익은 밀과 보리로 떡을 만들어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 한 것이라면, 오순절은 신약시대교회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령이 강림하신 시기가 구약 절기로 오순절 날입니다. 오순절은 유월절과 초막절과 더불어 3대의 절기중 하나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오순절은 가나안 땅에서 처음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추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추수의 절기에 성령이 강림하셨을까?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그 부활하신 날로부터 오십일 째 되는 날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고전15;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은 부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열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부활하신이후, 5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오심으로, 모든 성도들을 거두어들이는 영적인 큰 추수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이 오신 날은 구약의 안식일 다음날, 주일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매주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또한 성령의 강림을 소망합니다. 그러면 성령 강림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1-1.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1절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다 한 곳에 모였습니다. 모인 이유는 주님의 부탁과 명령 때문입니다. 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약속하시기를 1;5,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인 사람들이 주님의 부탁과 명령에 따라 열심히 기도하면서 성령강림을 기다렸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다 같이 라는 말은 한 마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모였습니다. 1;14,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여러분, 다 함께 모이는 것이 교회의 원리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다 주님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여러분, 지체는 더불어 있을 때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여러 부분의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눈, 코, 귀, 입은 그 위치에서, 손과 발 역시 제 위치에서 제 위치를 지키며 제 할 일들을 제대로 할 때에 문제가 없습니다. 지체의 위치와 기능은 서로 의존하며, 보완하는 밀접한 관계를 가집니다. 그래서 지체들이 그 본래의 위치를 지키지 못할 때에 아픔이 옵니다. 그런데 한 지체의 아픔은 온 몸에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몸의 어떤 지체이든지 그 지체에 대한 아픔은 온 몸의 고통이 됩니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한 지체들의 모임이며 그리스도의 지체의 연합입니다. 그래서 우리 몸의 지체 그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각기 고유한 역할분담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시은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은혜를 베푸는 곳으로 곧 교회를 가리킵니다. 주님 앞에 기도드릴 곳이 다 함께 모일 시은소입니다. 그래서 시온소인 교회는 미움이 아닙니다, 모이는 지체는 원망과 불평이 아니고, 한 마음으로 함께 모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 함께 모이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고 목적하는 바의 가치관이 일치해야 합니다. 이 것이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명령의 내용입니다. 공감대와 가치관이 일치했습니다. 다 같이 같은 마음으로 한 곳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일본에서 우리 비전 교회 구성원이 작은 인원이 아닙니다. 적용하기에는 그렇지만 일본의 100년 된 교회의 평균 구성원의 수가 18명입니다. 한국의 교회로 유추하면 400여명이 회집하는 교회입니다. 결코 작은 수가 아닙니다. 그러나 매주일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30여명 미만인데도 시끄럽지요? 생각이 다 다르지요? 공감대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지요? 그런데 주님의 명령 앞에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각 나라와 각 급의 지도자들은 생각이 동일하고 가치관이 같았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이 사람들 위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다 같은 마음으로 비전 교회 한 곳에 모였습니다. 성령 강림 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같은 공감대와 같은 가치관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이 시간 불같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와 같은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2-4,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성령 강림의 세 가지 징표 곧, 바람과 불과 방언이 나타났습니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는데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예기치 못한 순간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는 강하게 몰려와서 방안에서 요동치는 공기의 흐름과 같았고, 출19;19, 히12;19, 시내 산에서 울려 퍼진 나팔소리와도 같았습니다.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같은 공감대와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모여 있던 사람들의 방에 가득 채운 이 신비한 영적인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다락방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한 결 같이 이 것을 소리로 느끼었습니다.
.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불의 혀는 실제로 불이 타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불은 구약시대에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현상이 시내산 사건의 현상과 같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성령이 강림하는 모습은 율법이 시내산에서 공포되는 모습과 비슷했습니다. 성령이 임할 때,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도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로 인하여 온 산이 진동하고 연기가 자욱했으며,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 강림하셨다고 출19:16-19에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을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모든 사람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이는 선지자 요엘의 예언(욜2:28-32)과 예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강림이라는 하나님의 임재는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서 특정한 사람에게만 한정되었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모든 무리 가운데 성령이 임재하심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각 사람 위에.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한 마음과 한 목적을 가지고 모였을 때, 그들 각자 위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여러분, 마25장의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의 재능을 따라서 각각 분량을 다르게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이후에 종들과 회계할 때, 숫자를 가지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성실함과 충성됨을 가치기준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령의 은사도 이와 같습니다. 일률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는 것은 주님의 약속과 명령에 대하여 얼마나 간절함이 있고, 얼마나 성실하고, 얼마나 충성되는가에 따라 주어집니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은 한 결 같이 여기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각 사람 위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1-3.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4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모두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여러분, 주를 믿는 120명의 무리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충만은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에 이미 거하시는 성령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신앙의 삶을 말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빈 항아리에 물을 붓듯이 성령이 공간적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성령의 지시하시는 대로 행동을 합니다. 4절,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그들은 성령을 받고, 자신들이 아직 배운 바가 없었던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을 했고, 그들 앞에 모여든 각 족속들의 방언을 말했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이상한 언어를 제자들의 입에 넣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고,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을 주님께서 원하셨던 방법으로 역사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얼마나 사모하던 은혜입니까? 이 내용은 요엘이 예언했던 사모함입니다. 생각지도 못했고, 경험되지 않았던 은혜입니다. 그래서 7-8, 다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다른 여러 지방에서 모여 온 사람들은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였고, 다 놀라 기이히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놀라게도 합니다. 기대하게 합니다. 감동하게 합니다. 사람이 달라지고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전혀 생각 밖의 일들이 일어나니까 기이히 여겼습니다. 여러분, 성령은 매일 매일의 용기와 능력의 원천입니다. 1;8절,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셨을 때 권능을 받았습니다, 행4;31, 산헤드린에서의 베드로의 용기와 설교의 말씀은, 성령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행13;8-12, 구브로에서 무당 엘루마를 소경이 되게 한 바울의 승리는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사태에 대처하는 신앙인의 용기와 능력이,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투지나, 이해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담대함이나, 주위 환경과는 관계없이 신앙인이 갖는 기쁨과 소망은 모두 성령의 역사로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을 따라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성령의 기적을 더욱 많이 체험하게 됩니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 내려오셔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됨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시고, 지도하게 될 율법을 주셨으며, 그들을 시내 산으로부터 광야를 지나 약속된 땅까지 가나안까지 인도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오순절에 그의 백성 가운데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가 되심을 선언하셨으며, 우리에게 믿고 행할 바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운데 거하시면서 최종적으로 영원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될 때까지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 가지로 힘들고 마음이 흔들리고 약하십니까? 아픔과 고통이 엄습하십니까?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근심하지 말고 주님을 믿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신다는 이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께서 여러분을 조명하시고 인도해 주셔서 여러분의 목표와 소망을 이루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19-20. 기사와 징조, 그리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요엘서의 이적을 기사와 징조로 재해석하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로 재해석했습니다. 기사와 징조는 하나님께서 임박한 심판을 알려주기 위해서 베풀어주시는 자연 현상의 변화입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은 주님의 재림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마24장에 말세의 징후들이 나오는데 베드로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성령의 강림이 있는데 지금 이 때이고, 모든 육체에 임합니다. 성령의 강림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편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는 또한 고난의 기간입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 재림이 있기 전에 환난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요한 계시록의 천년과도 같은데, 말세의 기간은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그 고난과 핍박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결정한 신앙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이 고난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형식적으로 예배하고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말세의 기간에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하는데 오순절 성령 강림은 우연이 아니고, 예언이 성취입니다. 여러분! 요14:26절과 29절을 기억하시지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이 일이 임하자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합니까? 과연 그렇다고 하고 예언되어진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기초하고 담대함으로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잘났고 공로가 있어서, 함께 모여서 기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베드로와 제자들이 위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폭우처럼 쏟아 부어 주시겠다고 했는데, 지금 너희들에게도 성령이 임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의미가 예언의 성취이고, 이 예언의 성취인 성령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폭우처럼 임하는데 언제 그렇게 됩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말세의 기간에 그렇게 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어디에 기초합니까? 말씀에 기초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담대함의 믿음이고,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중요한 원리입니다. 성령시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육체가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환난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강림은 삶을 안정적으로 이끄시지만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난 가운데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께서 말씀이 생각나도록 도우시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과거에는 깨닫지 못하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참된 의미입니다.
3.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나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믿음의 태도입니다. 성령 충만함으로 이루어지는 믿음의 태도는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긍정 gain 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낙관 joy 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종말 end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최대의 사건은 성령이 강림하신 일입니다. 성령의 강림은 구원의 역사에 최대의 전환점이며 교회의 시작입니다. 성령강림으로 성령님의 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居住란 말은 어떤 장소를 떠나지 않고 계속 산다는 뜻입니다. 잠깐 다니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히 함께 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강림이란 말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성령의 강림이후에 충만을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의 태도 3가지 때문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3가지 태도가 무엇입니까?
3-1. 성령 충만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의 태도는 주님 안에서의 긍정입니다, gain oriented person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언제나 얻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궁핍과 핍박과 어떤 환경에서도 얻은 것만 생각했습니다. 핍박이 올 때 얻은 것은 참 믿음입니다. 환난을 당할 때 얻은 참 소망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더 큰 것과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합니다. 허상을 잃고, 진실을 얻고, 명예를 잃고 겸손을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변에 보면 항상 피해 의식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피해를 찾아냅니다. 태어난 것도 피해, 죽는 것도 피해, 가난과 실패와 병드는 것과 헤어지는 것 등 모든 사건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늘 원망과 늘 불평을 하는데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삶입니다. 부당한 대우와 대접을 받으면 다음번에 두고 보자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 화가 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불평가운데 있으면 더 나을 것이 무엇입니까? 부당한 대우와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 나는 공정한 룰과 공정한 판정이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자세가 바로 얻는 자세입니다. 성령의 충만이 왜 필요한가요? 긍정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반면교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악의 모습을 보고도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을?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교훈입니다. 비난하면서 같은 길을 걸으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비난은 교만이고, 배움은 겸손입니다. 결국 겸손이 교만을 이깁니다. 이런 삶의 영적인 혜안이 어디서 나올까요? 성령 충만에서 나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영적인 혜안이 있습니다. 보게 하고 보여 지고, 생각하고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3-2.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삶의 태도 두 번째는 주님 안에서 낙관입니다. joy oriented person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소망을 둡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 안에서도 항상 기뻐했습니다.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에 10번 넘게 기뻐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빌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절대 기쁨입니다. 그런데 절대 기쁨은 바닥 체험에서부터 나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핍박자이고 포행자이었던 바울을 부활의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바울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바닥체험에서 주신 은혜의 결과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억울함과 분노와 원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기쁨이고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사람들의 평가보다 자신을 더 잘 알고 더 잘 봅니다.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이고, 만삭되지 못하여 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인식이 있는 사람에게 비난과 공격은 의미가 없습니다. 죄인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표현에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나는 죄인이다. 바닥까지 떨어진 존재이다. 그런데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신 주님이 있다. 라는 고백은 모든 상황에서 절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뿌리가 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3-3. 성령 충만한 사람의 삶의 태도는 종말의 승리입니다. end oriented person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결국과 최종 승리입니다. 그래서 중간 과정에서 실망하지 않고 끝까지 선을 생각합니다. 순리와 역경도, 핍박과 환난도 다 주님이 콘트롤 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콘트롤 하시기 때문에 결국 끝은 해피엔딩입니다. 주님께 맡긴 인생은 end 의 승리입니다. 여러분, 맡긴 인생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맡긴 인생의 반대말은 자기 수고에 연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절망을 합니다. 자기 뜻대로 안됩니다. 자주 억울해 하고 몰라준다고 합니다. 가끔 무엇인가를 이루면 나는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너는 무엇을 했느냐는 식으로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기 수고에 연연해하는 사람은 오래 못갑니다. up and down이 심하다 보니, 꾸준히 못합니다. 성실성이 없고 신실하지 못합니다. 오래 가고 싶습니까? 성실하고 싶습니까? 자기 수고를 잊어야 합니다. 나의 수고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맡기고 충성하고 맡겨진 삶의 걸음을 계속 걸으면 최종적으로, 결국에는 승리를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믿음이고 인생입니다. 크리스천 저술가인 켄 가이어는 하나님의 침묵(The North Face of God)이라는 책에서 고통이 있을 때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고 고통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라. 마음 쏟는 곳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고 그 하나님께서 인생의 문제에 해답을 주실 것이다. 주님은 지금도 말씀으로 성도들의 영안을 열어주십니다. 사람은 육의 눈과 지식의 눈과 영의 눈인 믿음의 눈이 있습니다. 이 믿음의 눈이 활짝 열려야 하늘의 신령한 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North Face라는 브랜드가 있는데 그 뜻은 북쪽 면 즉 북쪽비탈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면 마치 에베레스트 산의 북쪽 경사면처럼 싸늘하고 꽁꽁 얼어붙은 얼굴이라는 것입니다. 찬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일어나는 표정으로 우리를 향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번역하는 분이 하나님의 침묵이라고 표현했는데 정말이지 하나님은 우리가 힘들고 어려워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응과 답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책에서 말하는 저자의 숨은 의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데 한 마디로 그냥 믿고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아무 말씀을 안 하셔도 믿고 따르는 그것만이 성도가 할 수 있는 결정입니다. 결국 켄 가이어가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책을 쓴 것은 하나님은 원래 우리에게 일일이 대답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르고 대답하지 않으신다고 하나님을 에베레스트 산처럼 생각하지 말고 믿음으로 따르라는 말입니다. 벧전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2021년 성령 강림 주일을 맞이해서 예배드리는 모든 분들이 이렇게 사시기를 그래서 결국에는 주님 안에서의 긍정 gain과 주님 안에서의 낙관 joy와 주님과 함께 하는 종말 end의 승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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