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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 민족의 심판-마태복음 25장-
앞 부분의 내용이 계속된다.
1. 그리스도의 재림과 기독교 세계
2)지혜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들(25:1-13)-교회와 신랑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계시는 후에까지도 주어지지 않고 있지만 제자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과의 관계에 있어 그리스도는 신랑이심을 알고 있었다(마 9:15/요 3:29). 25장 1절에서는 “분리“가 나오고(그들은 처녀들이었다), 빛을 비춤 또는 증거(등불을 가졌음/ 빌 2:15-16)와 고대함(신랑을 만나러 갔다)이 나온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가 해야 하는 일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여기에 오늘의 “교회“(기독교 세계)와 마찬가지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모든 신자들은 참된 교회 안에 있으며 천국에 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세상이 말하는 “교회“ 또는 기독교 세계에는 외적으로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만 마음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마태복음 13장에서와 같이 곡식 사이에 가라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이래로 거의 2,000년이 흐르고 있다. 이 기간 동안에 “교회“는 잠에 빠져 있었다. 참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위대한 진리에 잠깨어야 하는 마지막 세기가 바로 지금이다. “보라, 신랑이 오신다“는 외침이 이미 있었다.
하나의 비유에 나오는 세부적인 사항들 모두가 반드시 무엇인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름은 성령을 말하는 것인데 모든 참된 신자들 안에 계신다(롬 8:9). 이 비유에서의 그리스도의 주된 교훈은 “깨어 있어 준비하라“는 것이다. 주님이 돌아오실 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알았던 사람들이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3)유익한 종과 무익한 종들(25:14-30)-첫비유는 집안에서의 봉사에 대하여 말하는 반면, 이 비유는 세상에서의 봉사를 다룬다. “재능(달란트)“은 “능력“(가능성)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유의하자. 왜냐하면 15절에서 “그는 각자에게 그 능력에 따라“ 주었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재능“이란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데 우리의 능력을 사용하는 다른 기회들을 나타낸다. 우리는 선천적으로 각기 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재능에 적합한 기회들을 주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참조).
처음 두 종들은 충성스러웠으며 이들은 달란트를 두 배로 늘렸다. 따라서 있는 달란트 그대로를 상으로 받았다(21, 23절). 비록 작더라도 자기의 봉사 영역에서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은 위대한 사역을 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같은 상을 받을 것이다. 세번째 종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그는 주님을 “굳은 사람“이라고 불렀고 “두렵다“고 말했다. 사실상, 그는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주신 기회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상을 거절하였다.
26절에서 그리스도는 종의 주인에 대한 부당한 고발을 반복해서 말씀하시며(그 말이 사실이어서 반복한 것은 아님) 27절에서 “그래, 이러한 일들이 사실이라면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훨씬 더 열심히 일했어야 하지 않는가!“라고 말씀하신다. 이 원리는 29절에서 주어진다. “많이 받은 자들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다.“ 주님이 주신 것을 사용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빼앗길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방인들(25:31-46)
사람들은 이 구절을 요한 계시록 20장 11-15절에 나오는 흰 보좌의 심판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종합적인 심판“이라고 불러 혼돈을 일으킨다. 성경에는 “종합 심판“(General Judgement)이란 말은 나오지 않는다. 성도들은 휴거 직후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그 행한 일들을 심판받는다(고후 5:1-11). 구원받지 않고 죽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천년통치가 끝날 때, 흰 보좌의 심판 때에 그리스도를 대면하기 위하여 부활하게 된다(계 20:1-15). 마태복음 25장이 언급하고 있는 심판은 환란 끝에 오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실 때 이스라엘을 통하여 땅의 모든 나라들이(이방인들)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 12:1-3). 환란 기간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정화하심으로, 7년 기간의 종말에 가면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기다리는 남은 신자들이 있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왕을 영접할 것이며 그리스도는 그의 왕국을 누가복음 1장 31-33절과 67-80절에 약속된 대로 이 땅 위에 설립하실 것이다. 문제는 이방 나라들 중에서 어떤 나라가 이 왕국에 들어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장면에 나오는 양과 염소와 그리스도께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른 이 들(40절)로 구별되는 세 부류의 사람들에 유의하자. 의심할 나위 없이 “나의 형제들“이란 환란 기간 동안에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한 믿는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적그리스도의 원수들이었을 것이므로 하나님께 인을 맞고 보호를 받았을 것이지만, 대 환란의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지도 팔지도 못하므로 배가 고팠을 것이다. 이들은 가정을 떠나야 했고(마 24:15-21) 거처할 장소를 필요로 할 것이다. 일자리가 없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았으므로(계 13:17), 옷을 구할 수도 없어 벗었을 것이며, 감옥에 던져진 이들도 많을 것이다.
그 때의 상황은 명확하다. 이 기간 동안에 많은 이방 사람들이 유대 선교사들의 멧세지를 믿을 것이다(마 24:14/계 7:9-17). 이 때 이들은 고난당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보일 것이며, 먹이고, 옷을 입히고, 감옥으로 그들을 방문할 것이다. 바울이 주님의 성도들을 방해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것처럼 이방인들은 주님의 형제들에게 사랑을 보임으로써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보일 것이다. 이러한 친절한 행위들이 그들을 구원하는 선한 행실은 아니다(엡 2:8-9). 이런 행위들은 멧세지를 믿는 그들의 신앙의 증거이며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증거이다. 사자들을 거절한 이방인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이다(마 10:16-23/마 10:40-42). 그들의 종말은 바깥 어두운 곳, 지옥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방 나라들을 민족이라는 단위로 심판하시지 않고 개인으로 하실 것임에 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32절에 나오는 “모든 민족“이란 말은 헬라어에서는 개인들 각자를 가리키는 중성 명사이며 “그들“은 남성 명사이다. “나라“가 있고 “염소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나라의 “염소들“로부터 분리된 양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잘못 취급한 모든 나라들(애굽, 바벨론, 독일 등)을 심판하실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사하는 내용은 그 나라들 안에 있는 개인들이 심판을 받을 것과 “형제들“을 향한 그들의 사랑으로써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증거한 사람들만이 왕국에 들어갈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나, 다른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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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1-19
▣ 그리스도를 해치려는 모의-마태복음 26장-
갈보리로 가기 전, 주님의 마지막 몇 시간에 대한 설명에는 세 사람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즉, 예수님 자신과 베드로와 가룟 유다이다. 베드로와 유다가 이 장에서 대조를 이루고 있음에 주목하자. 두 사람 각각의 실패는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준다.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고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일에 대한 경고이다. 베드로는 신자가 어떻게 타락하여 간증을 잃게 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이다.
이 장을 가장 명료하게 요약하는 방법은 이 사건들이 발생한 각기 다른 장소들을 눈여겨보는 것이다.
1. 베다니에서(마 26:1-19)
이 사건은 요한복음 12장에도 나오는데, 그리스도께 기름을 부은 여자가 마리아라고 분명히 밝힌다. “종교적인“ 유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죽이려고 모의하는 동안 베다니에 있는 신자들은 주님께 찬양을 돌리고 있었다. 문둥이 시몬이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 치료를 받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결코 문둥이의 집에서 잔치를 하는 일이라고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은 아니지만 세 친구가 그 집에 있었고 마르다는 봉사를 했다(요 12:2).
마리아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행위를 그리스도는 받아들이셨으나 제자들은 비판하였는데, 유다가 주로 비난하였다(요 12:4-6). 요한은 왜 유다가 그녀를 비판했는지의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도둑이었고 공금을 꺼내어 자신만을 위한 돈을 챙기려 했다!
베드로가 유다와 동의하며 “악인(거룩하지 않은)의 꾀대로 행하는 것“(시 1:1)을 보기란 유감스러운 일이다. 머지않아 그는 죄인의 자리에 서며(요 18:18),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는데(눅 22:55), 거기서 그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자신이 한 그 심판이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이다(마 7:1-5). 유다는 마리아의 예배를 “낭비“라고 했으나 예수께서는 지속될 기념이라고 말씀하셨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어디나 마리아와 그녀의 사랑의 행위가 언급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리스도의 신랄한 꾸중은 유다로 하여금 더욱더 배반으로 치닫게 했다. 그는 베다니를 떠나 유대 지도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체포할 음모를 꾸미러 갔다. 그는 성경에 약속되어 있듯이(슥 11:12) 은 30냥에 타협을 보았다.
한편,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러 갔다(눅 22:8). 여러가지 실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사랑했으며 주님을 믿고 신뢰하였다. 반면에 유다는 “저희에게 속하지 않았으므로 저희에게서 나갔다“(요일 2:18-19)."
2. 다락방에서(26:20-35)
여기서 우리는 거짓말하는 유다와 장담하는 베드로를 본다. 예수께서는 누군가 자기를 배반할 것이라고 알리신다. 이것은 시편 41편 9절에 예언되어 있었다. 유다가 “주여(여기서는 하나님이란 뜻이 아니라 랍비라는 뜻) 내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그의 말로 보아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유다는 자신을 마귀에게 넘겨준 후 충성스러운 체 가장하고 있었다(요 13:2/요 13:27).
그리스도께서 만찬을 시작하신 것은 유다가 그리스도를 떠난 후였다. 29절에서, 주님이 유대인들에게 문자 그대로의 왕국을 약속하시는 것에 유의하자. 그들은 시편 115-118편에 있는 찬송을 노래했는데, 이 시편들을 읽고 메시야적 교훈들을 알아보자(특히 118편). 베드로가 장담하는 것은 겟세마네를 향하여 떠날 때인데, 그는 제자들이 주님을 버릴 것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부인하였다(슥 13:7).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할 때 문제를 초래한다."
3. 동산에서(26:36-56)
유다는 계속해서 주님께 입맞추면서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체하였다. 그리고 베드로는 기도를 해야 할 때에 잠을 잤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를 실망시킨 것이 분명하다. 그는 항복해야 할 때에 칼로 싸우고, 주를 위해 죽겠다고 장담하고는 달아났다.
“잔“(39절)은 십자가에서 죄인 취급을 받음으로써 치르게 될 값이었다. 주님의 거룩한 성품은 죄인 취급을 받게 될 것을 예상하고 이에 저항감을 느꼈으나 주님의 거룩한 뜻은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였으므로, 주님은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놓으셨다.
어부인 베드로는 군사가 되려고 하며 육신의 무기로써 영적인 승리를 거두려하였다 ! 그리스도께는 방어가 필요없다는 것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혈과 육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단을 대적하는 것이며(엡 6:10-18), 또한 우리가 사용할 무기는 육체가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고후 10:3-5/히 4:12). 모세도 이 같은 실수를 범하였는데(행 7:22-28), 그의 전쟁을 하나님께서 싸우시도록 내어맡기는 것을 배우는 데에 40년을 보내어야 했다.
4. 대제사장의 집에서(26:57-75)
어쨌든 베드로는 따르지 말았어야 했다. 스가랴 13장 7절(마 26:31)에는 양들이 흩어질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으며,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각기 제 길로 갈 것“을 고통스럽게 말씀하셨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베드로에게 사단이 그의 배후에 있음을 경고하셨는데(눅 22:31-34), 그밤에 그는 주님을 부인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지 않는 신자는 항상 문제에 빠진다.
유대인의 공회(산헤드린)가 밤에 소집되어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불법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결정사항이 백성들 보기에 “적법한“것이 되도록 이튿날 아침에 다시 소집하였다(27:1). 대적 앞에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침묵은 이사야 53장 7절을 성취하였다. 64절에서의 그리스도의 말씀은 다니엘 7장 13절과, 마태복음 22장 41-46절에서 “주의 우편에 앉는다“는 것에 대해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셨던 내용을 상기시키신 것이다.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주장하시자, 대제사장은 신성 모독 죄를 언도하였다(레 24:16).
베드로는 “속수무책“으로 원수들의 틈에 끼어 불을 쬐고 있었다(요 18:18). 그 추운 밤에 그리스도는 많은 피를 흘리셨다 ! 베드로는 냉정한 사람이었고 그의 마음이 바르지 못했으므로, 그는 자기에게 질문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대답하기가 어려웠다(벧전 3:15). 닭이 울기 시작하자,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 냈다! 그가 죄에 빠졌던 까닭은 말씀을 잊어버린 때문이었다. 이제 말씀을 다시 기억하게 되자 그의 마음은 다시 따뜻해졌고(눅 24:32) 회개하며 울었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만나 교제를 회복하셨다. 유다와는 대조적이다 ! 유다가 죄를 깨달았을 때는 그리스도께가 아니라 제사장에게 죄를 고백하였으며 나가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 베드로의 슬픔은 회개와 용서를 가져온 경건한 슬픔이었고, 유다의 슬픔은 죽음을 가져오는 세상적인 슬픔이었다(고후 7:10).
베드로가 내리막길을 가기 시작한 것은 베다니에서 유다가 마리아를 비판할 때 이에 동조한 일로부터였음을 명심하자. 다음으로, 자신의 헌신을 장담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 실패하였다. 특히, 그리스도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깨어 기도하는 대신 잠에 빠졌다. 그러면서도 검을 사용하여 자신의 영성을 과시하려고 했다. 주님은 그 곳을 떠나가라고 주의를 주셨는데도 그리스도를 따라 갔다. 그리스도께서 큰 고통과 수치를 견디고 계실 때 베드로는 육신적인 위로를 얻으려고 원수들과 섞여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할 만큼 정직하였고, 죄를 고백하였다(요일 1:9). 베드로는아들의 권한이 아니라 제자의 권한을 잃었으며, 요한복음 21장에서 회복되었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거부하였고 지옥으로 갔다(행 1:1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