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4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광복주일 * 홍지훈 목사
이사야 5:1-7
요한복음 16:25-33
“내가 세상을 이겼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나면 우리는 언제나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우리 주님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평화>라는 단어 앞에 평화를 규정하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라는 수식어가 의미하는 것은 막연하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평화”가 아니라, 주님이 말씀하시는 평화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빌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생각에 “평화스러운” 것이, 주님의 평화가 아닐 수도 있고, 우리 생각에 “혼란스러운” 것이 오히려 “주님의 평화”일 수도 있다는 역설이 존재합니다.
사실 성경에 평화라는 말은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184번이나 나오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만 72번 나오는데, 찾아보면 대부분이 “평화를 빌어주는 인사말”입니다. 평화하면 생각나는 도시가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성지순례라는 이름으로 근동을 여행할 때에 반드시 가보는 곳이 “평화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예루살렘>입니다.
하지만 그 도시는 오랜 세월 동안 정복자들의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를 지닌 곳이고, 전쟁으로 파괴된 흔적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도시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영토 내에 팔레스타인 거주지에는 높디높은 장벽이 설치되어 있고, 팔레스타인 사람은 그 통로에서는 아주 엄중한 검문검색을 받아야 유대 거주지로 드나들 수 있는 살벌한 모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악연은 1차 대전 후 오스만 제국이 퇴각하고, 영국이 점령하여 이스라엘 사람이 다시 돌아오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부터 팔레스타인 거주지와 이스라엘 지역 사이의 전쟁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중동 여러 나라에 거점을 두고 무장투쟁을 주도하다가, 1993년에 UN의 중재로 상호 인정하는 합의(오슬로 협정)를 하여 대화상대로 삼고 있지만,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무장 투쟁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팔레스타인 이슬람주의 무장단체인 <하마스>도 있고, 레바논 시아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도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이슬람 지하드(PIJ)는 지난 8월 6일 이스라엘이 먼저 폭격한 무장단체인데, 3일 동안 어린이를 포함한 팔레스타인 사람 20여명이 사망하고 수 백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작년 5월에 11일 동안 벌어진 양국의 전쟁 때문에 수 백 명이 죽은 일이 이제 겨우 1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담고 있는 레위기 24장에는 이런 법이 있습니다. “부러뜨린 것은 부러뜨린 것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레24:20) 이것은 같은 정도로 보복하라는 “동태 보복 법”인데, 고대 세계의 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법의 원래 의도는 분명합니다. “남에게 해를 가하면 같은 정도의 보복이 정당하게 돌아오니, 남에게 원치 않는 위해를 가하지 않도록 하라.”는 의도입니다.
하지만 이 법을 뒤집어서 사용하면 전혀 다른 양상이 되고 맙니다. 당한 만큼은 반드시 되갚아 주어야, 다시는 상대방이 나에게 위해를 가할 꿈도 꾸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되고 마니, 끝없는 보복행위가 반복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군비증강을 하게 만드는 것이고, 때로는 무력시위를 감행하게 하여, 매우 불안한 상황을 연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엊그제 가까운 대만에서 중국 무력시위를 벌인 일이 있었고, 잊을 만하면 미사일을 공해상으로 쏘는 북한도 같은 이유입니다.
여기서 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나누는 <평화의 인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연 우리는 지금 “평화롭게” 살고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질문인 동시에. 과연 <진정한 평화>는 무엇인지 되물어 보자는 것입니다.
마침 오늘은 광복절을 기념하는 광복주일입니다. 내일은 광복 77주년입니다. 해방둥이라고 부르는 1945년 생 어르신들이 만 77세가 되는 해입니다. 분단된 지 77년이 지났다는 말입니다. 30년을 한 세대라고 본다면, 벌써 2세대가 훌쩍 지났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동안 우리는 진정한 평화의 시기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36년간의 식민지 지배에서 해방된 기쁨은 곧바로 77년간의 분단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13년간 자유롭지 못한 세월을 살고 있는 셈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서는 66장이나 되는 매우 긴 성경입니다. 그만큼이나 긴 시대를 지나며 이사야 예언자 그룹의 <예언>을 기록하여 남겨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속에는 분열된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성쇠의 역사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의 영화로운 통일왕국 시대는 약 120년 동안이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것은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왕권이 세습되고, 다시 그 아들 르호보암에게로 넘어가자, 이스라엘 북쪽 지파에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파의 연합으로 세워진 왕국인데, 유다지파에서 왕권을 독차지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나머지 10개의 지파가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그런 분열이 일어난 시기가 B.C. 930년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주전 740년 유다와 웃시야의 사망부터 주전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한 때까지 약 40년간 활동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인 이사야 5장은 바로 그의 활동 초기에 남긴 예언입니다.
주전 930년 왕국분열, 주전 721년 북이스라엘의 멸망, 주전 587년 남 유다의 멸망(포로는 605년부터) 그리고 포로귀환이 주전 538년입니다. 대략 계산해도 이스라엘은 분단부터 포로귀환까지 약 400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 지역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이 지배하던 시간은 이스라엘에게는 피지배의 역사입니다. 그러고 나서 흩어진 유대인들은 전 유럽을 떠돌다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사야는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고 좋은 포도를 심었는데, 열린 것이라고는 들포도 뿐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말입니다.(사5:2이하)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남유다 왕국의 작품이라 남유다의 신앙이 정통이라고 항상 말합니다. 그런데 남유다의 예언자인 이사야의 예언에 따르면, 남 유다 왕국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받들지 않고 악한 열매만 맺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런 남유다 왕국에게 멸망을 선포하시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경고>입니다. 그런데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 경고가 현실로 나타납니다.
이사야서를 계속 읽어보면, 그들의 잘못에 대한 상세한 언급이 나옵니다. 악을 선이라고 바꾸고, 어둠을 빛이라고 부르고, 쓴 것을 단 것이라고 먹이는 잘못은 재앙을 부르는 큰 잘못이라는 것입니다(사5:20) 거기에 더하여 뇌물을 받으며 악인을 의롭다고 하여, 의인의 정당한 권리는 빼앗는 일도 멸망의 징조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닌 것을 옳다고 하고, 맞는 것을 틀리다고 하다가는 큰일을 당한다는 경고입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성철스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생각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이 화두를 두고 많은 사람이 해석하느라고 애썼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뜻입니다. “아무리 산을 물이라고 하거나 물을 산이라고 우겨본다 한들, 어쨌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별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이 이제야 스승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임을 믿는다고 말하는 순간, 스승 예수는 “제자들이 각기 흩어져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반전(反轉)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하시는 예수의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제자들이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것을 믿으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제자들 곁은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더라도, 그들 사이에 연결된 사랑의 끈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전히 스승이 언제나 제자들 곁에서 지켜주고, 이끌어주고, 나중에는 힘 있는 자리에라도 앉혀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승 예수는 완전히 다른 소리를 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또 반전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기대하는 세상의 평화도 마찬가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분쟁은 분쟁이고, 평화는 평화”인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준다고 하면서,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역설적인 말을 합니다. 예수께서 지금 “환란이 평화”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주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선언하십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어떻게 세상을 이기셨을까요? 곧 이어서 십자가 처형을 고통스럽게 당하게 될 분이 어떻게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실 수 있나요? 정말 주님 말씀대로 “세상을 이기신 것”이 맞는 말인가요?
오늘날 세상에는 정말로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또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일어납니다. 작게 보면, 수해를 당한 현장에 나가서 자원봉사로 복구사업을 돕는 사람들, 크게 보면, 전쟁의 현장에 나가서 피해자들 구호사업을 하는 단체들, 민족을 초월하여 재난현장을 지키는 도움들 등등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 온난화로 인한 환경파괴와 그 결과 벌어질 재앙들을 막으려고 동분서주하는 환경단체들과, 지구촌 가난한 지역의 생명을 구호하고자 애쓰는 복지단체들의 노력 등등이 있습니다.
비록 세상 안에는 불행과 고통이 끊임없이 인간을 괴롭히고 있지만, 인간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투쟁합니다. 욕심 때문에 벌어지는 전쟁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전쟁이 멈추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고, 또 그 피해자들을 어떻게든 도우려고 합니다.
비록 세상은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으라!”고 주장하지만, 우리 주님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들었지만(레24:20), 악한 자에게 맞서 싸우지 말라.(마5:39)”고 하셨습니다. 인도의 간디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눈에는 눈으로 갚으면, 우리의 눈이 모두 먼다.”고 말입니다. 예수는 또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레19:18)을 들었지만,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마5:44)라고 말씀하면서, 인간의 생각을 바로잡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악을 행하는 일들이 세상에서 사라지지는 않겠지요.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오히려 기도한다고 해서, 박해를 당장 멈추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을 이기는 길은 이것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싸우고 누르고 정복해서 세상을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환난을 당하는 가운데에서도 그 환난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평화를 외치는 것 아니겠습니까?
평화목 교우 여러분,
분단과 전쟁으로 인한 평화의 위협을 오랜 동안 겪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남겨진 위로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뿐 아니라 온 세상이 같은 환난 가운데 있다는 것이고,
둘째, 이런 환란 속에서도 평화를 지켜야겠다는 목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셋째, 주변 강대국의 온갖 간섭과 위협 속에서도 지금까지 버티어 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냥 “평화!”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평화!”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는 자기중심적인 평화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평화로우면 남들도 다 평화롭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평화는 정의로운 평화이고, 악에게 악으로 대적하지 않는 평화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수준의 평화가 주님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요한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16:33)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는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평화목교회 교우 여러분의 삶 속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평화가 세상의 모든 환난 앞에서도 세상을 이겨내는 힘이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