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과 멀지 않은 장소에 무령왕릉이 있었다.
주차장에서 부터 주위의 환경이 아늑하고 옛스러움을 잃지 않으려는 자연미의
배려가 관광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곳이였다.
경주의 릉과 그 합장물이 화려 하다면 백제의 것은 수수하고 장식이 화려하지
않다는 대비점이 엿보였다.
백제 25대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릉이다.
묘실 전체를 벽돌로 쌓은 무덤으로 입구 통로에 해당하는 연도와 시신을 안치하는 현실의
두 부분으로 만들어졌다.
송산리 5.6호분 과 무령왕릉의 모형은 실물 크기로 제작하여 관람객들이
직접 내부에 들어가 관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절개 모형을 통해 내부를 한눈에 볼수 있으며 무령왕릉의 내부를
한눈에 보며 축조방법 및 무령와의 생애에 대한 영상을 상영하고
축조 과정과 방법을 순서별로 모형화하여 소개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무덤들도 지하건축 이지만, 돌을 재료로 한 것인데 비하여,
무령왕릉은 그 제작에 새로운 첨단 기술을 요구하는 벽돌을 재료로 되여 있는것이 틀린 부분이였다.
무령왕은 공주 천도 이후 오랫동안 혼란했던 백제의 정치, 사회를 안정시킨 왕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백제 중흥의 기치를 높이 올렸던 성왕, 그가 무령왕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백제 중흥의 비전이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무령왕이었음을 암시한다.
삼국사기에 인기 높은 임금으로 쓰여져 있다.
그는 백제 중흥의 기틀을 다진 훌륭한 업적의 임금이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인 인품으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기도 하였다 한다.
그리고 더욱 흥미 있는 사실은 그가 훌륭한 체격을 가진 보기 드문 절세의 미남자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후궁에 관한 시끄러운 야사는 잘 들어 보지 못한듯 하다.
그야말로 왕으로써의 처세도 깨끗했던것 같은 마음이 든다.
삼국사기의 이러한 기록은 무령왕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막연한 역사적 인물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한 인물에 대한 것으로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언서판를 갖춘 인재가 더 들어남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옛날 할머니가 하시던 말씀 거지도 인물이 좀 수월해야 밥 얻어 먹기도 좋다고
늘 머슴아 새끼를 저리 코 납작이를 낳아서 어찌 하겠냐고 자기 손주들 걱정은 안 하시고
아랫채 자식들 걱정을 하시던 말씀이 생각난다.
. 빼어난 외모에 훌륭한 인품이란 것도 그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고질적인 귀족 세력의 반란을 잠재우고 전국에 왕족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22담로제를 실시하여
중앙집권적 지배 체제를 강화하여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였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그런가 하면 고구려의 잦은 침입에 군대를 이끌고 나가 격퇴시키고 새로 많은 성을 쌓아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는 등 국방을 더욱 강화하였다 한다.
공산성만 보아도 산성의 위치 선정이라던가를 보면 그렇게 전체를 다스릴수 있는 산성의
발견이라던가는 그 옛날에 무럭으로 전체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전체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산성 위치 선정 요지가 수만명의 군사 보다 나았으리는 생각이 든다.
또 밖으로는 중국 남조(南朝)에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고 신라, 가야와도 화친하여
강성한 고구려의 침입에 따른 국난을 외교적으로 극복함과 동시에 국가적 지위를 높이고자 하였다고 기재되여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많이 받아들여 무령왕릉 출토 유물에서 보는 바와 같은
독창적인 백제 문화를 꽃피우기도 하였다 한다.
이와 같이 무령왕은 나라 안팎으로 여러 가지 선정을 펼쳐 국가 안정을 이루어, 이후
사비도읍기(泗都邑期) 성왕 때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전성기를 이루는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할 수 있다.
좋은 아버지 밑에 휼륭한 아들의 선정이 빛을 발하여 무령왕능과 같은 백제 문화의
역사적 자취를 볼 수 있게 남겨주는 증언의 현장이다.
1971년 송산리 5,6호분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벽돌무덤 1기가 발견되었다 한다.
무덤입구는 벽돌과 회로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었고,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봉분이였다.
무덤의 입구에는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놓여 있었고
지석에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돌아가셔서 이곳 대묘에 안장했다는
내용이 수려한 남조풍(南朝風) 해서체(楷書體)로 새겨져 있었다 한다.
1442년 간 긴 역사의 흐름속에서 조용히 침묵하였던 무령왕과 왕비가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되는 순간이었으며,
백제사와 백제고고학연구가 햋빛을 보며 진일보하게 되는 서막의 시작이였다.
지금은 그곳을 영구 패쇠 한다고 우리가 그 입구까지 가서 보니 팻말이 붙어있엇다.
대신 모형고분군에 들어가서 실물 크기의 내부도 들어가 보고 실지 출토되였던
부산물 귀중품들을 구경 할 수 있어서 좋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에 들어가서
관심을 가지고 보고 들으며 백제시대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게되여
참 보람있는 여행이였다.
경주 신라의 능에 비하면 무슨 능선같은 초라한 능이였지만, 왕권을 강화하여 민생 안정과
국력을 신장하여 국제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겨 백제 문화의 빛을 남긴 무령왕능을 보게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늘 삼국의 깃발이 하늘 아래 흔들렸던 나라, 잠시 신라의 통일로 한 깃발 아래 있었고
고려와 이조선 백의 민족으로 이 나라를 지켰으나
일제의 망령으로 고통 받은 슬픈 내 나라, 지금도 두 깃발 아래 하나 되지 못하는 이 큰
서러움, 갑자기 내 조국의 한 깃발 아래 발을 딛고 서 보고 갈 수 있을지
마음 숙연 해지며 공주의 하늘을 보며 왜 내 가슴 이리 슬퍼질까.
두개로 갈라진 슬픈 내 조국에서 그것도 또 갈라지려고 헐 뜯고 정적을
괴롭히는 정치판의 참새와 억새들 과연 이래야만 되는가.
어느 글에선가, 일본에 국민성은 찰흙과 같아서 뭉치면 더 하나가 되고 우리나라
국민성은 모래알과 같아서 뭉치려 손에 쥐면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 나간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다 각자 혼자 잘나서 셋만 모이면 시끄러워지고
갈라지는 성질들 때문에 정치판도 이리 X 판인가.
대한민국 건국이래 많은 세월이 흐른 후 후손들이 그들의 역사적 치정을 낱낱이 읽어 보며
휼륭한 지도자로 추앙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아니면 지금 내 살아 생전에
꼽으라면 과연 누구를 꼽을 것인가, 잠시 생각 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쓴 웃음이 나온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를 향해 떠난다.
달리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병천도 아닌데 병천 순대국밥집이 있어서
들어가니, 소머리 살이 풍족히 들어 있는 순대 국밥 맛이 일품이였다.
다음 행선지를 찾아 떠나며 조용필 오빠의 노래를 들으며
배고픈데 밥도 먹었겠다. 두 마누라는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