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신화적 해석
그러면 이제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제목을 들어서 우리가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2) 이것을 먼저 주석을 하려고 할 때,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 말은 고대 동방 발생사發生史에 흔히 나오는 신화적인 용어입니다. 신화 말고 고대 무용담 사가(saga) 같은 데에 나타난 대로 보면, 반신半神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취리히의 유명한 구약학자 루돌프 쾰러 박사 같은 이는 “그건 분명히 반신 인물이나 혹은 천사와 같은 인물일 것이다.”고 합니다. “헬라든지 혹은 로마든지 고대 여러 민족 가운데 신들의 자녀들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의 자녀들 즉 딸들과 합해 가지고서 거기서 위대한 인물들이 발생한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러한 고대 바벨론적인 혹은 그 이후에 거기서부터 발생한 여러 동방의 다른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신화적으로 발생한 설화에 영향을 받아 성경을 쓴 것이다.” 하는 이론을 내세우며 “상당히 그럴듯하고 학적으로 연구할 만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 건국 신화 가운데에도 또한 하나님 아들 환웅桓雄이 환인桓人에게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얻어서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때 태백산에 곰 한 마리하고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서 둘이 사람이 되고 싶어 하니까, 산신령이 그러면 백 일 동안 해를 보지 말고 마늘을 먹으며 기도하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굴속에 들어가서 백 일 동안 마늘을 먹으며 지냈습니다. 이 마늘이라는 것은 동양뿐 아니라 서양에도 부적符籍 노릇을 하는 데가 있습니다. {드라큐라}라는 영화를 보면 드라큐라가 마늘 있는 데 못 갑니다. 그래서 드라큐라를 막기 위해서 집에다 마늘을 잔뜩 걸어 놓습니다. 그렇게 서양에도 일종의 민속적인 신앙이라고 할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늘을 먹으라고 한 것이 어디서 왔는지는 좀 더 찾아봐야 알지 확실히는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호랑이는 백 날을 하루 못 채우고 이제 이만하면 됐다 하고 떡 나가서 해를 보고 따져 보니까 99 일이라, 아직 100 일이 채 못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낙제를 하고, 곰은 하루를 더 지내서 급제를 하고 변화해 여자가 됐습니다. 그래서 신단수에 내린 분하고 혼인을 해서 박달나무 아래 아드님을 낳았다고 했는데, 그 아들을 단군檀君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시초 설화에도 신과 인간의 결합이 있습니다. 신과 인간의 결합이라는 것은 고대 전설을 가지고 있는 어느 나라든지 대단히 비슷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괴상한 신화를 도입해서 성경을 편집했을 리가 없습니다. 원문서 설(documentary hypothesis)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문서에서 땄다는 얘기입니다. J문서, E문서, D문서, P문서라는 것, 그런 얘기 많이 들어서 아시지요? 구약에 원문서가 있다는 얘기, 여호와 문서, 엘로힘 문서, 신명기 문서, 제사 문서가 있다는 가설, ‘원문서 설’이라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론과 상관이 없이 하나님 말씀을 모세가 기록했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히 믿는 터 위에서 볼 때, 창세기 6장 2절은 분명한 의미가 있는 중요한 선언이다 하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성경적 해석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이 칭호는 “사람의 딸”이라는 말의 대구對句로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말인데, 지금 이런 사건이 있을 당시에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모세가 이것을 기록할 때에는 명백하게 그러한 사상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너희는 내 장자라.”(출 4:22) 해서 이스라엘을 벌써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코 반신적인 천사나 혹은 공중에 있는 어떤 신령한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 위에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님께서 구별해 하나님의 산업으로, 하나님의 오이코노미아로서 전진할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벌써 모세 당시 이스라엘 민족 조직을 할 때 있던 얘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발생할 때 벌써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또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냈다.”(호 11:1) 하는 말로 적용해 썼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모세의 기록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때는 이스라엘이 선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거룩한 에코노미를 진전하게 할 민족적인 단위로 땅 위에 존재하듯이 그때 인류 가운데에는 집단으로서 벌써 하나님의 거룩하신 창조의 본래 목적과 큰 경륜을 진행할 부족적인 단위가 존재했다는 그것입니다. 그것이 명백하게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로 “사람의 딸들”이라는 말에 대척해서 표시한 말이 됐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을 썼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입니다.
모세가 쓰는 이 리얼리즘 스타일의 문체를 연구를 해보면 해볼수록 간명簡明히 혹은 장절壯絶하게 크게 탁탁 던지면서 건너가는 그런 방식을 썼지 세세하게 묘사해 가면서 쓰는 방식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 스타일이라는 것은 아주 독특합니다. 원래 전장에서 지휘하던 그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간결한 스타일을 씁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아들들”, 이 한마디로 딱 표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을 보면,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다 하고 셋 계통 사람들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셋 계통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아벨을 가인이 죽인 이후로 아벨을 대신해서 셋을 세웠다 하는 건 분명합니다.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해서 셋을 세웠다고 할지라도, 셋의 계통은 전부가 다 아름답다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아벨이 살았더라면 계속해서 가지고 나아갈 역사 방향이라는 것을 셋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리해 셋은 자기 자손에게 그런 역사의 방향을 제시하면서 나갔을 것입니다.
여러분, 셋의 나이를 한번 따져 보세요. 몇 살까지 살았나? 그리고 자기 자손 몇 대하고 같이 살았나? 여러 대 모두 같이 살았습니다.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 다 같이 살았습니다. 현손玄孫들하고 혹은 6대, 7대하고 다 같이 번성해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당대에 가르치기는 하지만 원로들이 하나 가고 둘 가면서 차츰차츰 부패해 나가는데, 부패하는 과정에서 현저한 부패의 동인이 되는 사실이 무엇이냐 하면, 혼인을 잘못해 가지고 이렇게 됐다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모세가 창세기 6장에서 얘기해 놓은 세 가지입니다. 어떤 혼인을 했다, 어떤 자식들을 낳았다, 땅은 그 다음에 어떻게 됐다….
* ‘김홍전 {혼인, 가정과 교회} (서울: 성약출판사, 1994)’ [제11강: 혼인의 조건]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