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20년]-4. 교활하고 한없이 간사한 임강순 전무와...[2막1장 - 끝.]
가을이다. 가을 하늘은 맑고 푸르다. 가을이 오면 잊고 지내던 것들이 생각난다. 문득 어린 시절의 추억의 얼굴들도 생각난다. 부끄러운 것도 있고 아련한 것도 있다.
이웃도 생각나고 외롭다는 생각과 사랑을 생각하기도 한다. 계절도 가을이고 내 인생도 가을이다. 이렇게 좋은 가을에 나는 유쾌하지 않았던 옛날의 추억 속에서 답답하다. 빨리 끝내고 벗어나고 싶다.
지금 나는 임강순이라는 한 인간을 매도하고 있다. 그렇지만 옛날 내가 당했던 그런 일들을 이제 와서 잘잘못을 가름하고 새삼스럽게 그 사람을 저주의 구렁텅이로 몰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마치 내가 심판자인 것 마냥 한 인간을 단죄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60을 넘어 살아온 날을 더듬어 보면서 내가 처했던 환경이나 사건들을 그동안 진솔하게 기록하려고 노력했다. 대부분이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것들이다. 감춘 역사, 미화시킨 역사는 교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깨끗하더라도 똥 묻은 사람과 뒹굴고 싸우다 보면 나도 더러워진다. 임강순을 옹호하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임강순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추종했던 것도 사실이다. 어찌 보면 내가 임강순보다 더 속물일 수도 있다. 비난과 저주 또는 한풀이를 떠나서 가능한 담담하게 사실을 적어 보려고 노력한다. 임강순이 내게 한 사실과 그에 대한 내 감정을 적을 뿐이다. 판단은 이글을 읽는 내 후손들이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할아버지의 인생이 참고가 되길 바랄뿐이다.
인터넷에서 알게 된 용혜원님의 시 하나 읽는다.
가을이 주는 마음 - 용혜원
푸른 물감이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이 맑고 푸른 가을날이다. 하늘이 너무도 푸르러 쪽박으로 한번 떠 마시고 싶은 마음이다.
가을은 기다림의 계절이 아닌가? 한 다발의 꽃을 줄 사람이 있으면 기쁘겠고 한다발의 꽃을 받을 사람이 있으면 더욱 행복하리라. 혼자서는 왠지 쓸쓸하고, 사랑하며 성숙하는 계절이다.
여름내 태양의 정열을 받아 빨갛게 익은 사과들, 고추잠자리가 두 팔 벌려 빙빙 돌며 님을 찾는다. 가을은 모든 것이 심각해 보이고 바람따라 떠나고 싶어하는 고독이 너무나 무섭기까지 하다. 그러나 푸른 하늘아래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은 더욱 아름답고 가을은 옷깃을 여미는 질서와 신사의 계절이기도 하다. ..........
가을은 혼자 있어도 멋이 있고 둘이 있으면 낭만이 있고, 시인에게는 고독 속에 한편의 시와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다. 외로움에 젖다 보면 다정한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고, 그 분에게는 조용히 기도를 드리며 시를 쓰고 싶다.
가을은 만나고 싶은 계절이다. 가을의 맑은 하늘에 무언가 그려 넣고 싶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
가을이 와서 바람이 되는 날, 가을이 와서 낙엽이 되는 날, 온 하늘이 푸른 바다가 되면 모든 사람들은 또 다른 계절로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우리는 늘 떠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
이 가을은 우리 마음에 무언가 주고 있으리라. 벌써 밤은 깊어가고 있다. 한잔의 따스한 커피의 향내를 맡는데 잊어버린 고향 열차의 기적 소리가 마음 속에서 울리고 있다. 가을! 이 가을은 사랑하고픈 계절이다. 사랑하고 있는 계절이다.
[용혜원]님은 1952년 2월 12일 서울 출생. 한국문인협회 회원. 목양문학회와 다락방문학회 동인으로 활동중. 지금까지 19권의 시집과 4권의 수필집. 5권의 예화집 출간 현재 서울 개봉동에 위치한 '한돌성결교회' 담임목사로 재직중 시인보다는 목사로 불리우고 싶다 면서 극동방송의 방송선교에도 힘쓰고 있다.
기획실 근무는 내가 바래오던 일이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기획실 근무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날 것이다. 매달 목표가 있는 영업부나 제조부, 그리고 반드시 처리해야하는 업무가 있는 경리부와는 달리 기획실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회장이나 사장이 지시하는 일만 대충하면 60점은 얻는 부서이다. 내가 다니던 그 회사도 그랬다. 전임 실장들은 티나지 않게 두루두루 원만하게 일하다. 중역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입사한지 10년, 광고. 판매. 차량 관리 업무 등 현장의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이 많았다. 전부터 만일 내가 기획조정실의 책임자가 된다면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마치 김대중씨가 자기는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한 말과 같을 지도 모른다. 하고 싶은 것은 많으나 가방끈이 짧다. 그때, 우연이겠지만 코카콜라 4사의 기획실장은 모두 S대 상과대학 출신이었다. 나도 S대는 나왔지만 경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두산이 운영하는 서울 코카콜라 실장은 선배였고 본토박이 서울 사람이라 샤프하지만 정을 느낄 수 없었다. 부산 코카콜라의 최실장과 대구 코카콜라의 이실장은 졸업 동기 였다. 부산 사람들의 특성인지는 몰라도 우성식품 사람들은 대부분 너무 발랄하고 화려해서 나 같은 촌놈이 접근하는 것이 주저됐다. 대구 범양식품의 이실장이 나를 많이 도와주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경상북도나 대구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
당시 회사의 기획실은 막강했다. 호남지역에서 처음 들여온 대형 컴퓨터를 운용하는 전산실 - 전북은행은 5년 뒤에 전산실을 운영했다. 회사 전체의 경비 지출을 통제하는 예산 관리. 회사 모든 부서를 정기, 수시로 점검하는 감사. 그리고 기획 업무 .이미 그 회사는 주식 상장 기업이었으므로 주주 관리와 이에 따른 업무.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매월 열리는 이사회 준비와 이사회 간사 역할이었다.
말로는 거창하지만 놀고먹자면 별 할 일이 없기도 하다. 코카콜라 4개사를 돌아보면서 나는 대구 범양식품을 벤치마킹하기로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고 입사 선배인 기획 과장 M을 교체했다. 나와 코드가 맞고 회사의 발전을 위해 헌신할 사람이 필요했다. M은 너무 감상적인 문학청년 타입이고 심성은 착했지만 입만 뚫려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여직원들에게 인기는 있었다. 과감하게 업무를 추진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 그 M부장은 퇴사 후 ‘ 두산 인삼, 두산 우유’ 대리점을 한 때 크게 운영했다. 사업이 잘 되어서 중장비 사업에도 손을 대다가 결국은 부도를 내게 되었고 투자한 전직 동료들에게도 막심한 피해를 입히고 하와이로 도망갔다.
기획실장이 아무리 부장급이지만 각 부서의 중역들이 올리는 이사회 안건에 대해서는 반드시 기획실의 의견을 첨부했다. 첨엔 저항이 컸다. 중역이 올린 안건에 대해서 어떻게 부장이 가부를 판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저항이었다. 한 마디로 촌스런 발상이다. 그러나 회장은 “뭐, 기획실 의견이 합리적 이구만... 다른 말 말고 기획실 의견을 따르도록 해....” 하는 말로 더 이상의 논란은 없었다. 한 부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부장이건 전무이건 직위는 상관없다. 설령 부사장이더라도 그 사람은 자기 부서밖에는 모른다. 그러나 기획실은 다르다. 직급은 훨씬 아래지만 회사 전체를 조망하므로 한 부서의 독단은 쉽게 알 수 있고 제동을 걸어야 겠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 6.3 빌딩 옥상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전경과 남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다를 수밖엔 없다. 회사 전체 정보의 흐름과 매월 경리부에서 올라오는 제무제표를 보면 누가 실장을 하던 회사가 한눈에 보인다.
나는 모든 판단의 기준을 ‘생산성’에 두었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생명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그 무렵 많이 읽었던 link-피터 드러커의 여러 책 영향이 컷을 것이다. '격변기의 생존 전략' 이라는 책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익을 내지 못하고 적자를 내는 기업가는 사회의 죄인이다.
기업가라면 마땅히 회사의 이익을 창출하고 그 이익으로 종업원과 사회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획실에서 보면 각 부서는 자기 목표 달성하는 것에만 메달릴 뿐 이익 개념은 고려하지 않는다. 날씨가 청명한 날 목포를 떠나 제주도로 항해하는 배의 선장에겐 나침반이나 항해사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캄캄한 밤 폭풍우가 몰아 칠 때는 나침반이나 항해사 없이는 갈 수 없다. 기획실은 나침반과 항해사의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장 상황이 좋은 호황기에는 별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르지만 치열한 경쟁과 불투명한 상황에선 기획실의 기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첨 기획실 근무할 때는 청량음료 시장은 호황기였다.
[ 첨 갖은 내 집 ] - “집도 꼭 이선우처럼 지었구만....”
영업부서에서 7년 가까이 있다가 본사에 들어 와서 보니 계장만 돼도 자기 집을 장만하고 여유 있게 살고 있었다. 부장까지 된 놈이 아직 집이 없는 것이 챙피했다. 장남으로서 부모나 동생들을 표시 나게 도운 적은 없다. 그러나 가난한 집 장남은 돈 모을 겨를이 없다. 겨우 얼마 모으면 동생들 시집 장가 갈 때 조금 돕고 나면 다시 빈손이다. 받는 사람에겐 아무 것도 아닐 테지만 칠남매의 장남에겐 돈이 고일 틈이 없다.
돈은 눈(雪)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눈사람을 만들 때 주먹만큼의 눈덩이를 먼저 만들어 눈밭에 굴리면 금방 커다란 눈덩이가 쉽게 된다. 그러나 주먹 보다 적은 눈은 손에서 녹아 버리거나 눈밭에 굴려도 불지 않는다. 돈도 그런 것 같다. 얼만큼의 종자(種子)돈이 있으면 돈들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스스로 번식해서 불어나는 것 같다. 다소 지출이 있어도 표시가 나지 않는다. 이런 종자돈을 만들기 전에 손안에서 녹아 버리는 장남은 괴롭다. 그때에도 이렇게 살다가는 자식 둘 있는 것 대학도 가르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했다.
부동산에 일가견이 있는 동료 윤기창 부장이 택지를 선택해 주었다. 개발이 어느 정도 끝난 전주 역 근처의 6지구 였다. 내 생각은 주택들이 이미 들어선 곳이 맘에 들었는데 윤부장은 아직 벌판인 전북대 후문이 장래성이 있다며 추천해 주었다. 그말 듣기를 잘 했다. 내 맘에 들었던 곳은 지금도 그대로 인데 윤부장이 추천한 내 집 근처는 원룸 타운이 됐다. 어머님이 아직 사셔서 아직도 주택이지만 내가 더 늙으면 팔던지 원룸을 짖던지 해야 겠다. 그때 내가 갖고 있는 돈은 천만원이 전부였다. 마침 대림산업에 입사한 성국이 동생이 사우디 현장에 있어서 천만원 빌려 주었고 모자라는 나머지 천만원은 주택은행에서 대출 받았다. ‘구미 건축’에서 형식적인 설계 였다.
25,5평의 서민 주택인데 무슨 기발한 설계를 하겠는가? 그러나 외양과 내부는 당시 일반적인 것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때는 문 열고 들어서면 넓은 거실이 있고 거실에서 각 방으로 들어가게 돼 있었다. 나는 문을 열면 한 평쯤 되는 마루를 놓았고 그 마루에서 별도로 거실에 들어가게 했다 마루가 좁아 보여서 거실과의 문은 투명 유리로 했다.
거실과 부엌이 붙어 있는데 투명 유리창의 미닫이로 했다. 그리고 좁은 마루를 제하고는 부엌에도 동 파이프 난방을 했다. 장남이므로 집안이 모두 모이면 겨울이라도 잠 잘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거실 앞창은 구 할 수 있는 가장 큰 유리창으로 해서 좁은 집이지만 시원하게 했다.
벽은 원칙대로 이찌마이항(일본말 같다)으로 벽돌 두 겹으로 먼저 쌓고 외벽에 스티로폴로 완벽하게 싼 다음에 다시 외장 변색 벽돌을 쌓았다. 그러고 보니 벽 두께가 30CM나 됐다. 사람들이 대포로 쏴도 무너지지 않겠다고 웃었다. 슬라브는 먼저 집을 지은 김용수 사장님의 말씀을 따라 먼저 스티로폴을 깔고 그 위에 철근을 엮고 콘크리트를 부었더니 슬라브 집인 대도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난방 없이도 견딜만하다.
사람들은 모두 집을 그렇게 원칙대로 지을 필요가 없다고들 했다. 언제까지 살지 알 수도 없고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다. 그말이 맞다. 나는 그 집에서 일년 살다 부모님께 드리고 광주로 발령 났다. 그러나 내가 낳은 자식이나 내가 지은 집은 도저히 대충 대충할 수는 없었다. 하면 확실하게 그렇지 않으면 안 하는 것이 내 성격이다.
집을 짓고 이사한 첫날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생애 최고의 행복이었다. 마치 Bottler's Convention 에 가면 묵는 무궁화 다섯개의 호텔 같았다. 그리고 항상 미래의 불안감에서도 벗어 날 수 있었다. 이제 집이 있으니 내가 죽더라도 세상사는 재주라곤 하나도 없는 아내지만 하숙이라도 치면 굶지는 안겠다 생각하니 맘이 놓였다. 마침 전북대학교 후문 근처이기도 했다. 집을 구경 오신 김용수 사장님이 “집도 꼭 이선우처럼 지었구만....” 하신 말씀을 나는 칭찬으로 들었다. 집이 맘에 들어서 수고해준 서신동에 살고 아버님이 소개해준 도목수 이형제 사장에겐 보너스로 '가나 양복점'에서 최고급 신사복 한 벌 맞춰 드렸다. 이목수가 덤으로 파준 16평 지하실은 막내 남동생이 결혼할 때 전세 내준 오백만원으로 유용했다.
또 회사 새마을금고에서 오백만원을 대출 받아서 소원이던 오디오 시스템을 교체했다. 토렌스 턴테이블, 꿔드 앰프, 탄노이 레드 모니터 스피커였다. 삼천만원 집에 오백만원 오디오는 과분했다. 매일 아침저녁 의무적으로 두 새끼들과 음악 들었다, 주로 모차르트 였다. 열 평쯤 되는 마당에는 잔디로 메꾸었다. 비온 뒤 아내와 잡초 뽑는 시간은 행복했다. 아내의 평생 친구인 송연숙 여사께서 마당에 이쁜 석등과 돌로 만든 복 두꺼비 한 쌍을 선물해 주었다. 가끔 그 복두꺼비가 내게 행운을 가져다 주는 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어느날 마당에 꽃봉투 하나가 던져 있었다. 등하교길 오가면서 적고 좁지만 너무 아름다운 집과 클래식을 들으면서 부러워서 편지 보낸다는 내용으로 보아 아마 전북대학교 다니는 어느 여학생이 쓴듯하다. 집 짖고 나는 겨우 일년 살았지만 참으로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 웬, 동시 통역사 ???... ]
그 시절 전주농림고등학교 학생이던 박주봉(朴柱奉, 1964.12.5~) 선수가 1982년 덴마크 오픈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입상한 뒤, 각종 국제대회를 휩쓸어 〈셔틀콕의 황제〉 〈셔틀콕의 귀재(鬼才)〉로 이름을 떨쳤다. 후엔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도 우승한 베드민튼 천재다.
회사 김용수 사장이 전북 베드민턴 협회장이셨다. 마침 영국 국가 대표단이 전지훈련을 전주로 오게 됐다. 김용수 사장님이 부르더니 환영식 행사가 도내 기관장이 참석하는 가운데 열리고 사장님이 환영사를 하고 영국 대표가 답사를 하는데 날더러 통역을 하라는 것이다. 물론 말도 안 돼는 말씀이라고 거절했다.
“사장님 저는 동시통역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 사람아...자네가 못 한다면 어떻게 하나....그리고 자넨 Mr. Wang 이 왔을 때 회사 연역과 제무제표 브리핑도 했잖아...” “사장님, 그건 통역이 아니고 미리 준비해서 연습한 것을 낭독한 겁니다. 저는 죽어도 통역은 못합니다....” “이 실장., 그래도 별 수 없어. 이미 체육회랑 도(道) 관계되는 사람이랑 결정 난 거야....”
정말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The Coca-Cola Far Eastern Division 의 사장인 중국계 미국인 Mr. Wang이 왔을 때 브리핑은 상당 기간 준비했었고 브리핑에 앞서 조크로 “I'm clumsy in English. I have a lot to learn. so, I hope no more Question....." Mr. Wang 일행은 그 말을 듣고 유쾌하게 웃어 주었고 다행히 질문도 없었다. ”Very Good Presentation, Excellent !!!..." 칭찬도 해주었다. Mr. Wang이 봐 준 것 같다.
김용수 사장님은 즉흥 연설을 잘 하신다. 그 회사는 매월 조회뿐만 아니라 각종 행사가 많았다. 이번에도 즉흥 스피치 하실 것이 뻔하다. 나는 사장님께 이 번 만은 즉흥 대신 제가 써드린 원고로 연설하실 것을 제의 했다. 그래야 사전에 대충 영문 대본을 만들어 준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장님은 사정을 듣더니 흔쾌히 O.K 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영국팀 감독이다.
행사 날 아침 식이 시작되기 전에 그 감독을 미리 만났다. 내가 당신 통역할 사람인데 영어를 잘 하지 못한다. 우리 사장이 이런 내용의 환영사를 할 예정인대 당신이 읽어 보고 당신이 말 할 내용을 대강 알려 주면 고맙겠다고 말했더니 늙수그레한 이 영국 신사는 미소 지으면서 내용을 말해 주었다. 다행이 짧은 내용과 의례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잔뜩 긴장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두분의 동시통역(?)을 했다. 식이 끝나고 참석했던 도지사, 시장 등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아이고, 김 사장님, 코카콜라에 이런 훌륭한 인재가 있었구만이요....” 라고 치켜세웠다. 정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 인재는 무슨 놈의 인재.....^^ 지금도 그 엉터리 통역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등에서 땀난다.
개는 주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사람은 나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모자라는 실력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기획실장 직분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전폭적으로 믿고 성원해준 김용수 사장님 때문일 것이다. 이사회 때 마다 의견 대립으로 부딪치는 중역들과 다투지 않기 위해서 ‘경영월보’ 라는 것을 만들었다. 국내 4개의 코카콜라 회사의 판매량과 그 추이. 제무제표를 분석해서 자산의 건전성. 유동성, 제고의 변동, 제조 원가의 분석, 자본 수익성, 매출 수익성, 수익과 비용 비율, 총 자본 회전율, 외상 매출 회전율, 손익 분기점 분석, 실제 원가 분석등 경영학 책과 범양 기획실의 이부장의 자문을 얻어 표와 그래프를 첨부해서 누가 봐도 회사가 어떤 상태인지 쉽게 알도록 만들었다.
경영월보를 보면 회사가 영업을 적정하게 잘 하고 있는지, 자본 자산은 건전한지 생산 활동은 경제적인지 바로 알 수 있으므로 서로 핏대 세우면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 둔 뒤에도 그 양식 그대로 하는 것을 봤다. 18개나 되는 영업소가 있어서 정기 감사, 수시 감사가 있었다. 나는 감사는 지도 감사여야 한다는 생각에 처벌 보다는 개선과 지도에 중점을 두록 했다. 그 기간 동안 적발된 잘못이나 문제는 수도 없이 많았지만 벌 받은 사람은 회사 돈을 유용하고 사생활이 문란했던 강진 영업소 K 주임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식당 개 3년이면 라면을 끓인다 한다. 기본 지식이 없던 나도 3년 쯤 되니 회사 전체가 한눈에 들어 왔다. 무었을 개선해야 할지 무엇이 문제 인지. 그럴 즈음 한 통의 투서가 내 앞으로 우송되어 왔다.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놓은 문제의 시작이다.
[ 자제과 감사 ] - 회사는 벌집이 됐고 후폭풍(後爆風)도 컸다.
투서의 내용은 자제과에서 제품을 몰래 영업부 직원들과 합작으로 팔아먹는다는 내용이었다. 임채홍 회장은 유득히 투명 경영을 강조했다. 고인 물은 썩는다면서 임강순 같은 천박한 인간을 고인물을 흔들라고 순사 주제를 중역으로 앉힌 사람이다. 그 사원 대부분이 공개 채용된 젊은 사람들이어서 그런 일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것이다. 만일 사실이라면 이것은 회사를 뒤집을 대형 사고임에 틀림없다. 구체적으로 해당 사원의 이름도 적시되어 있었으므로 나승균, 최규봉 과장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이런 것들이 근거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다.
나는 참으로 난감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김용수 사장님은 체격도 우람한데다 목소리도 우렁차고 호방하다. 그러나 성품은 자상하고 인정이 많다. 결재 받으러 들어가면 비틀어진 내 넥타이를 바로 잡아 주기도 하고 미원 경리부에서 회사 생활을 해서 인지 섬세하고 꼼꼼하시다. 그러나 약간은 우유부단한 단면도 있어 보였다. 내사를 한 두 과장은 사실 같다고 보고 했다. 조직표상으로 라면 당연히 사장에게 보고하고 그 지시를 따라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내가 잘못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김 사장님의 성격으로 보아 과단성 있게 지시하지 못하실 것으로 생각했다. 파장이 너무 클 것이고 회장과 친구인 김상무 아랫사람들이 관여되어 있어서 불똥이 김 상무에게도 번지면 전주 지역 사회에서 사장님의 평판이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회장님과 김상무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녔고 명문 전주고등학교 출신이다. 그때 전주를 움직이는 사람은 대부분 그 학교 출신이고 기관장이 새로 와도 대부분 그 학교 출신들이었다. 여러 모로 생각한 뒤에 회장에게 직보하기로 했다. 문제 제기를 내가 해야 될 것 같았다.
회장은 한 달에 한번 이사회만 참석했다. 본인이 직접 경영하지 않으므로 투명 경영을 강조했고 임상무 같은 감시견(犬)도 필요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미소를 잃지 않는 호감 가는 분이다. 전주에 오시면 다가동에 있는 관광호텔에 머무셨다. 칵테일 라운지에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다음 날 이사회에 그 투서를 보고하라는 것이다.
우여 곡절이 많았다. 감사 결과 자제과장 J 를 비롯해서 십여 명이 넘는 자제과 직원 전부가 퇴사했다. 회장 친구인 김 상무는 연루는 없었지만 책임자로서 용퇴했다. 얼마 뒤 김용수 사장님은 내쇼날 푸라스틱 사장과 정기 인사 교류 형식으로 교체 됐다. 그전에는 나만큼 애주가인 김상무님과도 원만한 관계였지만 내가 기획실 업무를 본후 의견 충돌이 많다가 내가 한 감사의 여파로 회사를 그만 두시게 되어 항상 미안한 마음이다. 작년에 전북은행 로비에서 뵜다. 상처(喪妻)하고 혼자 사셔서 인지 많이 늙고 초라해 보였다. 안쓰럽고 미안하다.
마무리 하고 호텔에서 만난 회장은 수고했다며 금일봉을 주었다. 사양했지만 그렇게 이선우 사기를 북돋으라고 김우황 부사장이 말했다고 한다. 김우황 부사장은 S 보험사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긴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초대 기획실장을 했고 회장에게 코카콜라 사업을 최초로 권유한 사람이다. 명석한 두뇌와 임기응변은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임강순과 힘든 대결했을 때도 전화로 위로 격려 해 주었다. 그 돈으로 직원들과 회식했다.
그리고 감사 과정에서 회사 정식 장부에 기재 되지 않고 노트에 기록한 은밀한 것을 발견했다. 병 깨진 것을 파병이라 하여 병유리 공장에 팔았는데 그 대금은 잡수입으로 등재 돼야하는데 별도로 회장에게 드린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그 비밀 노트를 회장에게 드렸다. 회장은 “멍청한 놈들....닭고기를 줄려면 털도 뽑고 잘 요리해서 소화가 되도록 해서 줘야지. 이렇게 주면 좍 설사 하는 거 아냐???” 하면서 안주머니에 넣었다. 바로 이 노트가 임강순과 문제가 됐다. 그리고 회장은 “자네도 임강순 상무 잘 알지? 회사가 어수선한데 임강순 상무를 다시 데려 오면 어떨까? 어떻게 생각해 ? ” 물었다. 나는 회장이 부장에게 중역 인사를 상의 하는 것이 황송하기도 했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제가 어떻게 중역 인선에 대해서 말 하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임 상무는 좋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 고만 답했다.
얼마 뒤 백화양조로 갔던 임강순이 다시 왔다. 다시 만난 임강순은 “회장님에게서 이 실장 고생이 많았다는 얘기 들었어. 앞으로 서로 도우면서 열심히 해 보자고....”라고 말은 그럴듯하게 했지만 3년 전의 불쾌함을 잊지 않는 듯 했다. 그때쯤 나는 그 회사가 싫어 졌다. 존경하던 김용수 사장님은 서울로 가버렸고 항상 후원자 였던 김진섭 부장은 진즉 그만 두고 없었다. 그리고 맘에 맞던 김상낙, 이태식, 함대식등 멋있는 동료 선후배도 모두 그만 두었다. link-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 은 시장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조직 속에도 그 법칙은 적용되는 것 같다. 쓸 만한 사람은 모두 떠나고 나를 비롯해서 무지렁이들만 남은 듯 했다. 회사도 이제 호황기를 지나 link-쇠퇴기 에 접어 들어 앞날이 불투명해 보였다. 기업은 기업가의 그릇이상으로 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임채홍 회장이 한 인간으로서는 훌륭한 분이지만 더 이상의 회사로 키우기에는 그 그릇의 한계에 다다랗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이선우가 김용수 사장을 배반했다고 말한다는 소리도 들렸다. 좁은 전주 지역 사회에서 도대체 이선우가 어떤 놈인데 회사를 발칵 뒤집어 동문인 김승현이를 물러나게 했는지 모르겠다는 여론이 많았다고 한다. 또 나로 인해 직장을 잃은 자재과 직원들에게도 가슴 아프고 미안한 맘이 들었다. 그만둔 직원 중에는 성실하고 착한 고교 후배 이기준 군도 끼어 있었다. 마지막 기획실장으로서 한 일은 영업 목표 수정이었다. 각종 데이터를 보면 현 상태로 나간다 해도 다음 해에는 창립이래 처음 적자를 낼 것으로 나는 예측하고 있었다.
그런대 회장, 사장, 임강순이 자매 회사인 일본의 ‘미까사 보틀러’를 다녀와서는 붕 떠 있었다. 가당치 않는 판매 목표를 세우고 여러 개의 영업소 증설, 판매사원 채용과 차량 구입등 내가 볼 때는 황당하고 무모해 보였다. 회장을 다시 만나 지금대로 간다면 내년에는 20억 적자가 예상된다는 보고를 했다. 회장은 내가 제시란 데이터를 보더니 “과연 그렇군, 내일 이사회에서 정식 안건으로 올려서 토의하도록 하지...” 했다. 다음날 영업을 맡은 임강순은 무척 괴로웠던 모양이었다. 부풀렸던 모든 계획은 백지화 됐다. 그리고는 총무부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온 임강순은 은연중 기획실을 통해 내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귀띔도 있었다. 아직 45도 안되었고 준비도 없었다. 나는 본사를 떠나 광주 공장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청을 회장께 했다.
그동안 직장을 바꿀 기회도 몇 번 있었다. 영업소장 시절 이태욱(李太旭) 당시 미원 판매 본부장 초청으로 미원 판매사원들에게 특강을 한 적이 있다. 강의가 끝나고 이태욱 본부장은 혹시 미원에 와서 근무하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 물어 왔다. 그때 미원과 미풍의 마켓팅, 판촉활동은 우리나라 영업 역사에 남을 치열한 공방이었고 이태욱 본부장은 그 사령탑이었다. ROTC 1 기생이다. 미남형에 날카로운 인상인 그분은 정치를 했다면 대성했을 것이다. 미원 사장을 거쳐 지금은 코리아세일즈아카데미 이사장과 ROTC서울클럽 회장으로 있는 것으로 안다. 또 미원에서 처음으로 만든 ‘한남화학’ 이라는 석유 관련 회사를 만들 때도 김용수 사장이 의향을 물어 왔다. 회장이 운영하는 내쇼날 푸라스틱으로 갈 기회도 있었다. 그러나 장남으로서 부모님과 함께 집을 구하고 움직인다는 것에 큰 부담을 느껴서 모두 사양했다.
[ 귀양살이 광주 공장 - 직장 생활 중 가장 편하고 공부 많이 했다. ]
2005.10.27 아내랑 담양 점심 먹으러 가다 찍은 광주 공장 사진이다. 쇄락의 빛갈이 보여서 안타까웠다. 차안의 아내는 안보인다.
조직표에는 광주 공장 총무 부장이 있었지만 내 전임은 없었다. 없어도 되는 자리였다. 전주에 집을 신축한 뒤라 전세 얻을 돈도 없었다. 서울 동생들이 얼마간 마련해준 돈으로 주공이 짖고 분양이 안 된 16평 아파트를 800만원에 전세 들었다. 아침이면 공장장 방에서 커피 타임에서 먼저 온 제조부 강부장은 자기는 집주인을 잘 만나서 몇 년째 집세도 올려 달란 말도 없다고 약 올리기도 했다. 얼마 안돼 광주가 직할시가 되면서 모든 미분양 아파트가 팔렸다. 학군 때문에 지방에서 광주로 줄지어 이사했기 때문이다. 주공도 집을 비워 달라고 독촉장, 최고장을 보냈다. 울며 겨자 먹는 셈으로 전세보다 싸게 700 만원에 구입했다.
아이들이 크자 16평은 너무 적었다. 어깨가 부딪쳐서 살 수가 없어 32평을 추첨으로 분양받아 졸지에 집이 세 채나 되었다. 얼마 뒤 강부장은 전주로 발령 났다. 적은 전세금으로 전주에서 집 얻기 힘들었다고 한다.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우선 싼 전세에 만족하고 불쌍한 이선우를 고소하게 봤던 강부장은 집 한채 얻을 돈이 없었고 울며 겨자 먹은 이선우는 광주에 아파트가 둘이나 생겼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런데 본사로부터 이상한 소문이 들려 왔다. 임강순이 내 뒷조사를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입사원 때부터 모든 사람들이 유별나게 나만을 주시했으므로 남에게 책잡힐 짓은 하지 않았으므로 해볼 테면 해봐라 라고 괘념치 않았다. 이선우가 집지을 때 외출을 많이 했고 자재과에서 불량품(SS제품이라 불렀고 간부들에게 마실 수 있게 했다)을 가져다 인부들에게 주었다는 등 회장에게 보고했더니 회장은 집을 진다는 것은 평생 기대하는 일인데 외출 좀 많이 할 수도 있고 SS제품이야 갖다 판 것도 아니고 인부들이 마신 것인데 뭐 문제가 되나? 했다는 말을 들었다,
역시 임강순은 link-마타도어(Matador - 흑색선전[黑色宣傳]) 의 대가(大家) 답다. 그러나 전라북도 경찰국에 투서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 투서자가 이선우 다라는 말이 들렸을 때 참 어이도 없고 분개했다. 투서 내용은 위에서 말한 자제과에서 파병을 판돈을 회장이 가져갔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만일 그 서류가 남아 있었다면 회장은 정말 우세스럽게 망신을 당했을 것이다. 투명 경영을 강조하고 두 사람의 대통령으로 부터 우수 경영 회사라는 표창과 훈장을 받은 사람이 그런 짓을 했다면 큰 우세일 뿐 아니라 그 금액은 당연히 ‘대표이사 인정 상여’로 분류되어 그 금액 이상의 세금을 추징당하게 된다. 그 건이라면 관련 서류를 내 손으로 회장에게 드렸던 것인데 어이가 없었다. 본사에 올라가서 임강순을 만나 이런 전후 사정을 얘기 해 주었다. 그런대도 모락모락 나는 연기처럼 소문이 번져 나갔다. 점점 나는 밀고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내용을 설명했다.
회장은 “응, 다 알고 있어. 자네가 그 서류를 내게 주었잖아? 그 때 그 서류를 자네가 챙기지 않았다면 이번에 망신당할 뻔 했어. 내가 임전무에게 사실을 말해 둘게......” 그런대도 임강순은 회사 요소요소에 심은 밀대들을 통해서 내게 악 선전을 한 것이다. 살아 오면서 사람들은 타고난 성품에 따라 사고방식의 틀이 제 각각 다른 것을 본다. 이를 쉽게 말한 link-무학대사 와 이성계의 우담 에서 본다.
이성계 : 『내가 보니 스님은 돼지처럼 생겼소』 무학 : 『제가 보니 대왕께서는 부처님 같습니다.』 이성계 : 『어째서 스님은 같이 농담을 안 하시오』 무학 : 『아닙니다. 농을 한 것입니다. 용의 눈에는 모두 용으로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모두 부처님으로 보인다고 뽀?것입니다.』
임강순의 생각과 눈에는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남의 약점을 파헤치거나 지가 회장에게 하는 것처럼 밀고나 하는 것으로 보이나 보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세상을,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서울에 있는 회장만 진실을 알고 있으면 뭐 할 것이냐? 일상에서 만나는 사원들은 임전무와 그 졸개들의 말을 믿어 가는 눈치였다. 임강순은 전무로 승진했고 그 밑에 이민효가 총무 담당 이사로 있었는데 이민효와도 원만하게 지냈는데 그 사람이 판단을 잘못 한 것 같다. 이민효는 사람도 좋고 영리하지만 약간 경솔한 면이 있었다. 도경에 불려 다니던 이민효 입에서 처음 내 얘기가 나온 모양이다. 일 년 가까이 나는 이 일로 고통을 받았다.
내가 이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오는 길은 내손으로 투서자를 밝히는 방법 외에는 없어 보였다. 도경에 가서 담당 형사를 만났다. 김학경 경사였다. 규정상 절대로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임강순은 이점을 악용한 것 같다. 경찰 출신이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투서자가 밝혀지지 않을 테니 이번 기회에 이선우를 그 길로 밀어 넣으려고 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가 아무리 미워도 생각할 수 없는 발상이다. 더불어 회장에게 이선우를 키워서는 안 됩니다. 마치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이선우가 이 회사를 가로 챌지도 모릅니다. 등등 근거 없는 황당한 얘기로 회장에게 지속적으로 나쁜 인상을 갖도록 한 모양이다. 이런 얘기를 회장에게서도 들었다. 이미 그 회사에 미련은 전혀 없었다. 임강순은 내가 그 회사에 클려고 발버둥 치는 사람으로 보았나 보다. 이미 기우러 지고 있는 재무 구조도 보았고 임강순같은 사람이 설치는 회사는 내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김진섭 부장 말처럼 나도 노예근성에 젖기 전에 독립하고 싶었다. 내가 월급쟁이 체질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잘 안다.
전주는 적은 도시다. 반면에 그 회사는 전주에서는 가장 큰 회사여서 회사 내부의 소리는 바로 시내에 번졌다. 꽤나 크고 역사도 있는 서신 교회 장로로 있던 아버님의 귀에도 이 나쁜 소식이 들어 간 모양이다. 신도들 중에는 사원도 있었으니 당연하다. 불같고 불의를 보면 나보다 참지 못하는 아버님은 길길이 흥분해서 회장을 만나던지 회사를 방문해서 항의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아버님이 나서면 나는 더 창피하고 문제해결에 도움도 되지 않으니 내가 해결하는 것을 답답하지만 보고만 계시라고 겨우 달랬지만 무척이나 맘 상해 하셨다.
몇 차례 도경 김 반장을 만났지만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우연히 같은 회사를 다니다 그만 둔 고교 후배 김성주와 동기 동창이란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당연히 내 후배도 된다. 나는 선배 입장에서 인간적으로 호소했다. 김 반장은 규정상 이름은 정확히 밝히지 못하지만 누구인가 충분하게 짐작이 가도록 설명하겠다며 말해 주었다. 나도 퇴직 사원인 그 친구가 투서자일 것으로 생각은 하고 있었다. 김 반장에게 임강순에게도 그렇게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
눈앞이 훤해 졌다.(오른쪽 사진은 이민효 이사가 아버지앞으로 보낸 사과편지다. 장 본인인 임강순은 쏙 빠지고 아래 위로 퍼 넘긴 것이 역시 쭈꾸미 답다. ) 이제 어떻게 임강순에게 결정타를 날릴 것인가 만을 생각했다.
임강순은 그때까지도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겠어.....” 하면서 뒤에서 꾸준히 나를 먹어 대고 있었다.
거의 일년 내내 나는 힘들 때는 음악을 크게 들었다. 시디가 없던 시절이라 녹음테이프에 베토벤 영웅과 운명 4악장,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 5번의 4악장을 녹음 한 것을 집과 자동차에서 크게 들었다.
그 웅장하고 스케일이 크면서 인간의 숙명을 헤치고 이겨 나가 승리하는 것 같은 음악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간간이 나를 성원해 주는 동료 부하 직원들이 밤에 집으로 전화를 주어 위로 해주기도 했다. 같이 근무한 적도 없는 본사 경비실의 고 아무개와 변전실의 김 아무개의 전화는 정말 고마웠다. 김 아무개는 다시 전주로 발령 났을 때 집전기를 수리해 주면서 임전무가 알면 자긴 미움 받을 텐데....하면서도 수고 해 주었다. 이런 사연으로 지난 일막 일장 서두에 상스런 욕설을 임전무에게 퍼 붇고 이사회에서 정식으로 내게 사과 하도록 약속을 받은 것이다.
역사를 보아도 교묘한 모함과 간교가 많았다. 우리나라 역사 발전에서 가장 개혁적 조처를 했던 link- 조광조(趙光祖) 를 제거하기 위해 반대파의 홍경주,남곤, 심정 등 훈구파들은 후궁인 경빈 박씨를 동원해 중종에게 조광조를 비방하도록 했다. 궁중 나인을 시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走와 肖를 합하면 趙가 되므로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글씨를 만들고 이곳에 꿀을 발라 벌레가 갉아먹게 하여 궁중과 민심을 흉흉하게 했다. 모두 훈구파들의 계산된 음모다.
흔한 말로 “재산을 잃는 것은 적게 잃는 것이요, 명예를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요, 건강은 잃는 것은 모두 잃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건강이 아니라 명예를 잃는 것이야 말로 모두 잃는 것이라 생각한다. 나처럼 재산도 없고 갖은 것이 없는 사람이 정직하고 성실함마저 없다면 무슨 힘으로 살 것인가? 투서나 하는 밀고자라는 누명을 쓰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쇼펜하워는 “명성은 획득해야 하는 것이지만, 명예는 잃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명성을 잃는 것은 이름을 잃는 소극적인 것이지만, 명예를 잃는 것은 치욕이며 적극적인 것이다. 명예를 잃음은 곧 생명을 잃는 것이다. 명예를 잃었을 때 그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8년의 회사 생활을 하면서 규모는 적지만 조직의 생리는 한 국가에서 권력을 놓고 끝없는 암투를 벌리는 것과 꼭 같은 양상을 많이 보았다. 편 가르기, 충성 경쟁, 낯 뜨거운 아부와 아첨, 적으로 생각되는 사람을 죽이기 위한 비열하고 야비한 술책등 마치 사색당파로 혼란스러웠던 조선의 역사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그 한가운데 임강순이 있었다. 이런 야바위 같은 회사에서 단 한번 상사 집에 선물 들고 찾아 간적이 없는 내가 떳떳하다. 내가 존경하던 김용수 사장 집에도 간적 없고 따르던 김진섭 부장 집에도 간 적 없다. 단 한번 임강순 집에 간적은 있다.
둘 사이의 불화를 보다 못한 회장이 광주에 있던 내게 전화로 “이부장, 임전무가 만날 때마다 자네 험담을 하는데,,,듣기에 딱해,,우리 회사에 link- 굿윌(Good Will) 이라고 있잖아? 자네가 직급도 낮고 나이도 한참 어리니 시간 내서 임전무 한번 찾아가서 굿윌 한번 해보라고.....” 라는 전화를 받고 회사 최고 어른이 충고하는 것이니 따르지 않을 수 없어 용기를 내어 코아 백화점 옆에 있던 임전무 아파트에 간적이 있다. 임강순은 면전에서는 절대로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날도 내 설명을 주욱 듣더니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런대 얼마 뒤에 내 귀에는 임전무가 이선우가 자기 집으로 찾아 와서 무릎 꿇고 빌더라고 소문내고 있었다. 어이없었다. 퍼붓을 때 그말도 임전무에게 해 주었다, 내가 언제 당신 앞에서 무릎 꿇고 빌더냐고.
약속한 이사회에서 임강순은 마지못해서 사과했다. (오른 쪽 사진은 노건택 사장이 아버지 앞으로 보낸 사과 편지다. K 대 나왔다는 사람의 글체가 성격과 닮았다. ) 끝까지 이민효 이사 말만 믿고 했다고 발뺌했다. 회장이 이선우도 할말 있으면 하라기에
“제가 감사해서 뒷 탈이 없도록 모든 서류 등 근거를 없앤게 저인데 정 반대로 투서를 제가 한 것인양 은근하고 꾸준하게 중상 모략을 해온 임강순 전무님 때문에 일년간 마음고생이 매우 컸습니다. 그때 만일 제가 그 장부들을 회장님께 드리지 않았다면 이번에 꼼작없이 회장님과 회사가 망신을 당했을 겁니다. 노건택 사장님의 말씀처럼 이선우가 할 이유도 없고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것입니다. 저뿐이 아니고 제 가족과 아버님도 많이 괴로워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 한다면 제 아버님께도 서신으로 정중하게 사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또, 이번 일로 회사에 대한 기대나 흥미를 잃었습니다. 당장 그만 두고 싶습니다마는 아직 준비도 되지 않았고 임전무님의 그 동안의 처사를 보면 내가 먼저 나가면 또 내 등 뒤에서 뭐라고 나를 헐뜯을 지 알 수 없고 또 마치 임강순 전무에게 밀려 나가는 것같은 모양새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임 전무님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임전무가 회사를 그만 두면 저도 미련 없이 회사 그만 두겠습니다. 이것이 제 명예 회복입니다.
여러분도 다 기억하시겠지만, 일년전 회장님과 중역들이 일본 다녀와서 과도한 판매 목표와 투자를 한다고 했을 때 그렇게 되면 20억의 첫 적자를 낼 것이라고 말 한바 있고 그것이 채택되어 일년간 긴축 경영을 했는데도 불행하게 적자를 내고 말았습니다.
제 의견에 가장 불만스러워 하고 불쾌해 하던 임 전무께서 그동안 백화양조에서 대단한 마켓팅 공부를 하고 오셔서 잘 하실 줄 알았는데 유감입니다. 중역이란 낱말은 무거운 일을 맡은 사람이다는 뜻일 겁니다. 제가 볼 때 회사는 호황기에서 쇠퇴기로 이미 접어 들었습니다. 부디 중책을 맡은 중역들께서 지혜롭게 회사를 잘 운영해 주시기 바라고 이번 경우와 같이 회사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어리석고 소모적인 모함이나 모략이 없어지길 바랍니다. ” 고 말을 마쳤다.
회장은 임전무와 사장에게 지시했다. “오늘 바로 이 부장 부친께 사과드린다고 정중하게 편지 보내. 알았어 ?” 라고 지시했다 그 지시대로 노건택 사장과 이민효 이사에게서 아버님 앞으로 온 편지를 저번 아버님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발견했다. 한없이 교활한 임강순 전무는 말로만 사과했을 뿐 위로는 노건택 사장에게 아래로는 이민효 이사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편지는 보내지 않았다. 아버님은 회장에게 써 놓고 내가 만류해서 보내지 않는 편지와 함께 두 편지를 묶어 철해 두었다. 오늘 다시 보니 이 이사는 타이핑으로 노사장은 마치 초등학생 하기 싫은 숙제 내둘 기듯 회장의 지시라 억지로 쓴 필체가 역연하다.
[ 컴퓨터와 나의 인연...]
이런 한바탕의 광풍이 지나 가자 나는 할 일이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던 아들이 어느날 “아빠, 오락기 한나 사주라, 반 친구들 중에 오락기 없는 거 나 뿐이다....” 라는 말에 당장 사줄 형편은 되지 않아서 “응 그래?,,, 니가 반에서 일등하면 아빠가 사줄게....” 라고 어물쩡 넘겼다. 딸은 똑소리 나게 공부도 말도 잘하면서 자랐지만 아들은 말도 늦 터지고 행동도 어눌해서 걱정이 많았다. 다행히 전주 금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만난 담임선생님이 훌륭하신 분이셨다. 나처럼 칭찬을 교육의 수단으로 생각 하시는 분이라 적은 일에도 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장승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은 아들에게 “이세민은 장차 대통령이 될 것 같다....” 는 말을 해 주신 모양이다. 어디 그 교장선생님이 내 아들에게만 그런 소리 했겠냐? 다소 괜찮은 아이들에게 교육상 그런 덕담을 남발 했을 터이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듣는 아들은 점점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초등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마칠 때까지 한번도 반장을 맡지 않는 적이 없었다.
얼마후 아들은 “아빠,,, 나 일등 했어....” 라며 성적표를 보여 줬다. 아이들 성적표는 그때 처음 봤고 그 이후로는 본적이 없다. 이제 어쩔수 없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새마을 금고에서 대출이라도 받으려고 했다.
“알었어 다음 일요일에 시내 가서 사자..”
옆에서 듣고 있던 6학년 딸이 “아빠, 그 오락기 사면 오락 밖에는 못하는데 이왕이면 컴퓨터를 사지요. 그러면 오락도 하고 컴퓨터도 배울 수 있으니 좋잖아요?” “물론 좋겠지만 아빠가 무슨 돈으로 컴퓨터를 사냐?....” “컴퓨터 산다면 내 저금 돈이라도 다 드릴게요.....”
그렇게 해서 새마을 대출과 딸 저금 돈으로 막 나오기 시작한 애플 8비트 컴퓨터를 마련했다. 아직 한글화가 안돼서 모두 영어였다. 아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컴퓨터 공부를 시작했다. 정작 회사 전산실을 운영할 때는 김용수 사장이 컴퓨터 공부하라고 할 때는 흥미가 없었었다. 주말이면 아들과 함께 컴퓨터를 구입한 가게에 가서 하나씩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다.
또 Seven Club 이라고 동호인들이 있어서 그 분들에게서 많이 배웠다. 그 가운데는 아들과 한반이고 친구인 아이의 아빠도 있었는데 광주공장 바로 앞에 있는 롯데 칠성사이다 공장 과장이었다. 대단히 머리가 좋은 사람이고 서울 사람답게 세련된 사람이었다. 밤에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같은 아파트 단지라 찾아 가서 배웠다. 아들은 Ultima-6 라는 고급 게임에 푹 빠졌고 나는 파스칼 프로그래밍에 빠졌다. 판매 예측 프로그램을 만들 때는 전남대학교 통계학과 다니던 유진오 군을 알게 되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유진오 군은 거의 천재다. 내 학창 시절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더부룩 깎지 않는 수염과 허름한 옷을 보면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이글을 쓸려고 하니 유군이 생각나서 수소문해서 전화 통화했다. 전공을 전자 공학으로 바꾸고 박사 학위 논문을 거의 마무리 하고 있다면서 반가워했다. 그 친구에게서 link- 라그랑지 다항식(Laguerre's polynomial) ’ 과 ‘link-시계열(時系列 time series)분석 ’이라는 것을 배웠다. 내가 봐도 그럴듯한 판매예측(Sales Forecast)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유진오 군이 반드시 성공하는 인사가 될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나는 회사 누구에게도 그 프로그램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겨우 2차 방정식이나 이동평균법으로 예측하는 사람들에게 라그랑지나 시계열이라는 고등 수학을 알리도 없고 또 무슨 말들을 할지 몰라서 였다. 한마디로 돼지들에게 진주를 던지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2년 공부하니 프로그래밍에 자신이 생겼다. 회장 배려로 맡은 ‘대호 용역’ 회사는 코카콜라 임시직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시간급으로 월급을 주기 때문에 월급 계산이 매우 복잡했다. 이를 위해서 전주에 3명, 광주에도 한명의 여직원이 있었다. 김승현 사장은 너무 복잡해서 전산화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했지만 한 달간 씨름해서 결국 해냈다. 상고 나온 직원 4명이 일주일 이상 걸리던 작업이 불과 한 시간이면 월급봉투에서 급여 명세서 그리고 회사에 청구하는 청구서까지 말끔하게 처리 됐다. 아무말 하지 않았는데도 직원 둘이 할 일이 없다고 그만 두었다. 컴퓨터 배우고 처음 본 덕이다. 나중에는 건설회사 급여, 재고 관리 등의 프로그램으로 더 벌었다.
모두 딸 덕이다. 사회에 나와 처음한 일도 컴퓨터와 관련된 일이었다. 쭈꾸미 때문에 귀양살이 같았던 광주 공장 총무부장 시절이 이나마 오늘의 내가 있게 만들었다.
딸아 !, 너에게는 항상 고마울 따름이다.
2년인가 후에 임전무는 정년을 마쳤다. 임전무가 나가자 본사 총무부장으로 발령 났다. 임전무 자리는 김의현 전무가 이어 받았다. 이제 3년 전에 말했던 대로 이 회사를 그만 둘 때가 됐다. 내 나이도 45가 됐다. 김의현 전무가 회장께 말했는지 중역이 그만두면 3년 맡게 된 회사의 방계 비슷한 용역회사를 운영하라는 회장의 배려가 있었다. 내 감사 때문에 그만 둔 김승현 상무가 맡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18년간 청춘의 시간을 보냈던 회사를 나가려니 앞일이 암담하기도 했다. 그리고 썩 유쾌하게 그만 두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회사가 있어서 부모 봉양하고 장남 노릇도 하고 가정을 가꾸었으니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겠다고 생각했다.
퇴직금 중 30만원을 주고 백화점에서 가장 크고 그럴 듯한 시계에 ‘퇴직 사원 이선우 증’이라 써서 이층 휴게실에 기증했다. 이를 본 노건택 사장은 나를 사장실로 불러 왜 필요 없는 짓을 하느냐고 힐난했다. 자기는 미원 그룹에 30년 다녔는데 부장이나 중역이 회사 그만 두면서 기념품을 기증하는 것을 보지 못했단다. 나는 이미 그 회사 직원이 아니므로 노사장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고 그 말에 수긍할 수도 없었다. 이 얘기를 들은 권 전무는 “부장이 그만 두고 30만원 기증하면 사장은 그만 두면 300만원 짜리는 해야 될 것 아니겠어?....노사장 정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부담됐을 거여....” 라고 말하며 웃었다. 당시에는 나가는 퇴직 사원 마다 노동청에 불법 노동이니, 시간외 근무니 해서 고발했다. 나도 총무 부장할 때 이를 해결하느라 노동청에 많이 다녔다. 나만이라도 몸담았던 회사에 고마워하고 싶었다. [ 지금 돌이켜 본다. ]
인생은 한 순간이다. 어쩌다 그 회사에 들어가서 멌있는 분들도 많이 만났다. 정확히 1972년 3월 9일 입사해서 1990년 2월 15일 퇴사했다. 전공이 아닌 분야이지만 살어 남기위해서 공부하다 보니 공부하는 것이 습관이 됐다. 광주공장에서 남고 쳐지는 시간을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빠졌던 인연으로 사회에서도 관련 있는 분야의 일을 하게 됐다. 불행하게 내가 일찍이 예측했던 대로 내가 퇴사하고 6년 뒤 1996년 IMF 오기 일 년전에 미국 본사로 넘어 갔다. 망한 것이다. 전주 오가면서 화려했던 그 회사 건물을 보면 감회가 많다.
아프리카 대 趾坪?보면 지금도 많은 동식물들이 살고 있다. 거기에는 힘 있고 사나운 포식자들, 예를 들면 사자나 표범들, 시간이 지나면 힘 있는 동물만 남을 것 같아도 여전히 힘없는 초식동물이나 더 힘없는 토끼나 개구리들이 오히려 포식자들 보다 번성하는 것을 본다. 무릇 사람은 타고 난데로 살 일이다. 사자는 사자답게, 토끼는 토끼같이. 회사 시절 어쩌다 서울 가면 택시는커녕 시내버스 타는 것도 힘들었다. 중간에 날쌔게 새치기로 끼어드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이렇게 살벌한 세상에 나가면 나 같은 사람은 살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다.
또, 대 평원에는 사자처럼 정면 공격을 하는 당당한 동물도 있지만 야비하게 커다란 등치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동물이 사냥한 것을 가로 채거나 죽은 동물만 먹고 사는 하이에나 같은 동물도 있다. 그런 동물도 있어야 뺏기지 않으려고 긴장하기도 할 것이다. 이 처럼 어느 조직이든 하이에나 같은, 또는 여우같은 임강순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다 자기 직분이 있는 것 같다.
돌이켜 보면 임강순 덕분에 집이 세 채나 되었고 회사를 그만 두고 자영업을 하면서 돈도 조금 벌었다. 만일 그대로 승승장구해서 그 회사 사장을 했다고 한들 내 형편에 어떻게 아들 유학 보낼 꿈을 꾸었을 것이며 딸에게 Quilt Shop 은 무슨 돈으로 차려 주었을 것이냐? 시골이라서 그러겠지만 함께 다니던 동료 선후배 통털어서 아들 낳아 서울대, 딸 낳아 이대, 그리고 유학 보낸 사람 못 봤다. 퇴사하기 전에 임전무 패거리들에게 말했다. “어이 임전무 만나거든 내가 식사 한번 크게 대접한다고 전해 줘, 덕분에 광주에도 아파트가 두 채나 갖게 됐으니 고맙잖아? ” 했다. 반은 진심이었다.
달리 생각하면 아첨과 아부를 잘 하는것도 타고난 재능이다. 원숭이가 나무를 잘 타는 재주를 갖고 물개가 포유동물이면서도 물속에서 자유로운 것도 재능이다. 모사를 잘하고 궁중 내시가 살아 남기 위해선 산들산들, 유들유들 해야 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내가 지금까지 임강순 전무를 일방적으로 매도한 것은 잘못일 수도 있다. 아부, 아첨, 중상 모략, 간교한 지략, 교활하고 간사함은 임강순이 타고난 재능이다. 그 사람은 그 재능으로 그 인생을 성공했을 것이다.
주임시절부터 부장까지 마치 영화 ‘엑소시스트’에 나오는 악령(惡靈)처럼 집요하게 괴롭힌 그 사람 때문에 항상 책잡히지 않으려 행동을 조심한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임강순 전무께 고마움도 가지고 있다. 구강암으로 한쪽 턱을 잘라 내어 언듯 보면 괴물처럼 생긴 얼굴로도 큰 회사 실세 전무를 한 사람이다. 노년을 편안 하고 행복하게 보내고 만수무강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저승에서라도 또는 다음 세상에서는 당신을 만나는 일 없길 바란다.
[ 끝. ]
[코카콜라 20년을 마치고 나니 새삼 김용수 사장님, 김진섭 부장님이 그립다.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랐다. 가끔 전화 주시는 김용수 사장님 건강이 썩 좋지 않으신 것 같아 걱정이다.
회사를 그만 둔 뒤에도 관심을 갖고 도와 주신 김의현 사장님도 고맙다. 연세대 출신 답게 젠틀한 메너와 훤출한 키의 미남이다. 그 회사에서 유일한 Gentleman 이었다.
그리고 부자답지 않게 소박하고 친절하신 임채홍 회장님은 고마우신 분이다. 별 한일 없는 내게 용역 회사 3년간 맡게 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회장님의 여생이 부디 건강하고 편안하시기 빈다.
그리고 마치 악령처럼 18년간 나를 괴롭혔던 쭈꾸미 임강순에게도 일말의 고마움이 있다. 쭈꾸미가 없었다면 오늘의 풍족한 내가 없었을 것이다. 쭈꾸미의 여생이 행복하기 바란다.
인생은 link- 장자(莊子) 의 말처럼 한 바탕의 연극이고 꿈이다. 김용수 사장이 일군 성공이 불안해서 쭈꾸미를 데려 왔을 테고, 그러나 무식한 쭈꾸미가 걱정돼서 동키호테 같은 이선우도 필요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임채홍 회장의 각본에 충실한 우리 모두 연극 배우 같았지만 그런 것을 꿰뚤어 본 이선우의 눈에는 인생은 한 편의 코미디 인 것이다. 이를 이미 알고 있었던 김진섭 부장은 그래서 '노예근성'이랬을 것이다.
우리 모두 늙어 가고 죽어 가고 있는 것인데 끝까지 악바쳐 미워할 필욘 없다. 썩 유쾌하지 않았던 회사 생활, 그것도 쭈꾸미와의 얘기를 마치니 앓던 이빨 뺀 것 같다.
나는 싸울줄도 모르고 싸운 경험도 거의 없다. 내 인생에서 단 세번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어렸을적 회진 시절 내 아버지의 말씀처럼 만일 싸운다면 나는 결코 지지 않는다. 힘이 없으면 돌맹이라도 집어 던질 것이다. 이런 정신이 이 험한 세상에서 나를 살아 남게 했을 것이다. 가신 아버님이 다시 그립다..................]
아버지가 열 받아서 회장에게 보내려다 내가 만류해서 발송하지 않았던 편지다. 아버님의 익숙한 필체를 보노라니 작년에 돌아 가신 아버님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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