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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二十門의 十住答
(1) 發心住
가. 菩薩의 十種普賢心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發十種普賢心하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發大慈心이니 救護一切衆生故며 發大悲心이니 代一切衆生受苦故며 發一切施心이니 悉捨所有故며 發念一切智爲首心이니 樂求一切佛法故며 發功德莊嚴心이니 學一切菩薩行故며 發如金剛心이니 一切處受生호대 不忘失故며發如海心이니 一切白淨法이悉流入故며 發如大山王心이니 一切惡言을 皆忍受故며 發安隱心이니 施一切衆生無怖畏故며 發般若波羅蜜究竟心이니 巧觀一切法無所有故라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疾得成就普賢善巧智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보현의 마음을 내나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크게 인자한 마음을 내나니 일체 중생을 구호하는 연고며, 크게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내나니 일체 중생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 연고며, 온갖 것을 보시하는 마음을 내나니 가진 것을 모두 버리는 연고이니라.
일체 지혜를 생각함으로 머리를 삼는 마음을 내나니 일체 불법 구하기를 좋아하는 연고며, 공덕으로 장엄하는 마음을 내나니 모든 보살의 행을 배우는 연고며, 금강과 같은 마음을 내나니 모든 곳에 태어남을 잊지 않는 연고며, 바다와 같은 마음을 내나니 온갖 희고 깨끗한 법이 모두 흘러 들어가는 연고이니라.
큰 산과 같은 마음을 내나니 일체 나쁜 말을 다 참고 받는 연고며, 편안한 마음을 내나니 일체 중생에게 두려움 없음을 주는 연고며, 반야바라밀다의 구경(究竟)의 마음을 내나니 온갖 법이 아무것도 없음을 교묘하게 관찰하는 연고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마음에 편안히 머물면 보현의 교묘한 지혜를 빨리 성취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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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문(二十門)의 십주답(十住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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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심주(發心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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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보현심(十種普賢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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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페이지 밑에 발심주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앞에까지 십신행법이 끝났다.
다음으로 20가지 질문으로 십주 질문에 답을 한다.
십주를 한 번 짚어보자.
발심주(發心住) 치지주(治地住) 수행주(修行住) 생귀주(生貴住) 어른스님이 생귀주를 아주 좋아하신다.
생귀주는 치문에서 ‘장양성태(長養聖胎)하야 지여미오심원(至如未悟心源)이라도 역재이근(歷在耳根)하면 영위도종(永爲道種)하야 세세불락악취(世世不落惡趣)’라고 배웠다.
장양성태(長養聖胎) 부처님의 태를 장양하는 자리가 바로 생귀주다. 귀한 데 태어난다.
‘장양성태하야 지여미오심원(至如未悟心源)이라도 마음의 근원자리를 깨쳐서 부처가 되지 못했다 할지라도 역재이근(歷在耳根)하면 귓부리에 한 번만 스쳐놓으면, 영위도종(永爲道種)하야 영원히 도의 종자가 되어서, 세세(世世)에 불락악취(不落惡趣)라. 세세에 악취로 떨어지지 않고 생생(生生)에 불실인신(不失人身)이라. 세세에 사람 몸 잃어버리지 않고 늘 화엄 속에서 살아간다. 일실인신(一失人身)하면 만겁(萬劫)에 불복(不復)이니라. 한 번 사람의 몸을 잃어버리고 나면 다시 회복하기 어렵나니라. 제발 지금 말한 것을 잘 들어라’
그 이야기를 어릴 적에 아주 많이 읽었다. 혓바닥이 땅에 떨어지도록 읽었다. 그래서 지금 혀가 좀 짧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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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발십종보현심(發十種普賢心)하나니 : 발십종보현심하나니
하등(何等)이 : 하등이
위십(爲十)고 : 위십고 ‘발보리심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보현심이로구나’ 보현심이 무엇인가? 보리심이다.
우리가 잘 아는 ‘보빼시’ 이세간품 저 뒤에 가면 보리심을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보리심을 빼면 어떤 착한 일을 하고, 선근공덕을 짓더라도 그것은 무효다, 보빼시다. 보리심 빼면 시체다,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여기 보현심에 대해서 청량국사는 ‘보현심자는 보리심이다’라고 해놨다. 보현심이라고 하는 것은 보리심이다.
보현보살이 추구하는 마음은 바로 보리심이다.
그럼 보현행은 무엇인가? 보리행이다.
보리가 무엇인가? 부처의 길이고 부처의 마음이다.
보현의 마음을 보리심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보리라고 하는 것은 결과물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그러면 결과물은 보리라 하고 그 인과를 따져서 원인은 뭐라고 하는가? 바라밀이다.
원인으로 볼 때는 바라밀, 마하바라밀이요, 결과로 볼 때는 보리다.
보리를 지향하는 것이고 보리의 결과물에 도착한 것은 보리심이다.
보리심으로 가기 위해서 보현심을 일으킨다.
열 가지 보현의 마음을 내나니 무엇이 열 가지 보현의 마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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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발대자심(所謂發大慈心)이니 :첫번째 발대자심이다.
그대로 나왔다.
화엄경을 읽다 보면 아주 옹졸하고 표악하고 고집스럽고 깬 자갈 같은, 깬 자갈 아시지 않는가? 파쇄석이라도 화엄경을 읽으면 닳고 닳아서 하루종일 있어도 화가 안 난다. 화를 한번 내고 싶어도 화가 잘 나지 않는다.
다른 사람 말을 할 것도 없이 제자신을 돌아보면 그렇다.
누가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속여서 좀 잃어버리고 난 뒤에도 그것은 ‘니 소임이다’ 이래 버리고 만다.
대자심은 안 되더라도 그런 보현보살 마음으로 가는 데 있어서 보현행품에서 뭐라고 했는가?
화를 내지 말아야 된다고 했다. 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이다. 화를 내면 안 된다. 엄하게 살면 안 된다. 불화엄경이다.
화내거나 엄하게 살지 않는 것이 대방광불화엄경이다. 믿거나 말거나 그렇다.
내가 강의할 때 어떨 때는 화투 얘기도 하고 바둑 얘기도 하고 장기 얘기도 하고 골프 얘기도 한다.
하다 하다 안 돼서 화엄경이 삼칠일(三七日)간 설해졌다고 콜라병 뚜껑 주름이 21개라는 이야기도 하고, 병아리 부화도 21일만에 한다는 이야기도 한다.
아무거나 갖다 붙여서,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이 화엄경에 관심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다.
저는 사실 제 속눈썹이 몇 개인지 다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다. 진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은 제 속눈썹이 몇 개인지 잘 못 세기 때문이다.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엔간한 사람은 자기 이빨이 몇 개인지 다 헤아릴 수 있지만 제가 저번에 말씀드렸지 않는가?
이래 봬도 제가 임플란트를 할 때 서울말을 쓰려고 서울 가서 임플란트를 했다. 영어 좀 잘하려고 보스턴 치과 나온 사람한테, 보스턴 연세치과인가에 가서 했는데 아무 효과가 없다.
대자심이 1번으로 나왔다.
여기 법성게가 돌아갈 때 요 흙색부분이 자무량심이다. 뱅글뱅글 돌아가서 비무량심 희무량심 버릴 사(捨)자 사무량심 법성게가 돌고 돌고 돌고 돌아가서 쫙 펴보면 하나의 원이잖은가. 법성도가 원(圓)인 것은 무시무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무량심이 돌아가고 여기 사각으로 하얀 테두리가 되어있는 것은 보시섭(布施攝) 애어섭(愛語攝) 이행섭(利行攝) 동사섭(同事攝)이다.
제가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의상스님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놨다.
그러고 난 뒤에 법성게를 계속 보니까 여기 앞에 6구절 8구절 8구절 삼팔이 이십사 앞에 6개 하고 몇 구절인가? 30구절만 있는데, 원래는 32구절로, 안 보이는 두 구절이 있다.
그래서 어른스님께 한번 여쭤봤다.
스님은 그 두 구절 알고 계셨다. 그래서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한테 또 여쭤봤다.
여기에 30구절이라 하시면서 뜻을 설명하는데 뜻에서 두 구절이 나온다. 화엄경 소견이 있는 사람들은 32구절인 줄 알고 있구나, 했다.
그런데 화엄경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화엄경 법성게가 몇 구절이요?’ 하면 ‘30개’ 그런다. 2프로 부족이다. 두 개가 부족하다.
어제 아레 어른스님께서 저에게 ‘니는 강사로서 95점이다’하셨다. 웬만하면 100점을 주시지, 그래도 저는 아주 기뻤다. 95점이어서 상당히 기뻤다. 오점이 없다는 것 아닌가.
스님은 제가 모자라서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저는 해석하기를 ‘아 나는 오점이 없는 사람이구나’ 했다.
화엄경을 하다 보면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편하다.
여러분은 몇 점인가? 여러분은 95점이 아니고 그냥 5점이다.
제발 95점이 되자. 오점이 없는 사람, 그것을 대자심이라고 한다.
구호일체중생고(救護一切衆生故)며 : 구호일체중생고로, 십회향품 첫 대목이 뭐였는가? 구호일체중생이중생상회향(救護一切衆生離衆生相廻向) 이름이 상당히 길다.
12자인가, 화엄경 십회향품 말씀이다.
제1번 회향이 여기 보현심이라는 것이다.
무조건 대자비심을 일으키는 마음이 뭐냐, 일체중생을 구하는 것이 대자비심이다. 일체중생은 고사하고 ‘니나 잘하세요’ 내 중생도 못 구한다. 자성중생서원도라. 자비심을 가지고 지금 그렇게 이야기한다.
발대비심(發大悲心)이니 : 그다음에 대비심이 나왔다.
그러니까 아까 조금 전에 했지만 법성게에 나오는 자무량심 비무량심 희무량심 사무량심, 이것은 한 세트다.
기쁨이 폭발해버린 사람들은 집착이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가볍고 안정되어 있고 홀가분하기 때문이다.
기쁨이 올 수 있는 전제 조건은 자비심 이런 것보다 기뻐하면 된다. 특히 남이 잘될 때 수희동참하는 것, 기뻐하는 마음이 전제조건이다.
사촌이 논을 살 때 사람들은 대부분 정로환을 사는데, 남이 좋을 때 억지로라도 계속 좋아하다 보면 기쁨이 저절로 폭발할 때가 온다.
그런 기쁨은 어떤 데서 오는가? 12연기 50연기 9연기 이런 것이 있는데 기쁨은 어디에서 올까? 즐기는 게 먼저겠는가, 기쁨이 먼저겠는가? 연기법에는 즐기는 자한테 찾아오는 것이 기쁨이라고 나와 있다.
즐기는 자의 특성이 무엇인가? 싫으나 좋으나 계속 가는 무피염심이다.
칭찬과 헐뜯음에도 그냥 묵묵히 ‘본래 없나니라’하면서 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즐기는 태도다.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이익이 되면 엎어지고, 손해가 되면 자빠진다. 그래서 기쁨이 오는 게 아니고 고통이 계속 수반된다. 기뻐도 고통, 괴로워도 슬퍼도 고통, 모두 고통이다.
모든 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인다.
크게 인자한 마음을 내나니 일체 중생을 구호하고자 하는 연고며, 크게 어여삐 여기는 마음을 내나니 측은지심이 우리가 유교에서도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이야기할 때 수오지심이나 측은지심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반드시 창피스러운 마음이나 측은한 마음을 본연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것이 대자심이다.
억지로 만들어서 사려고 하면 이것이 얼마나 비싸겠는가.
그런데 나한테 본래 있는 것도 다 못 쓴다.
대자심이나 대비심이나 나한테 충분히 있잖은가? 그것이 번뇌에 쪼그라들어서 안 드러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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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일체중생수고고(代一切衆生受苦故)며 : 일체중생을 대신하여 고통을 받는 연고며, 그 고통을 남에게 대신 안 시키면 다행이다.
발일체시심(發一切施心)이니 : 발일체시심이니
실사소유고(悉捨所有故)며 : 실사소유고니라. 가진 모든 것을 버리는 연고이니라. 정확하게 무소유다.
발염일체지위수심(發念一切智爲首心)이니 : 일체지를 생각함으로써 그것을 으뜸으로 삼는 마음으로 여기나니
낙구일체불법고(樂求一切佛法故)며 : 일체 불법을 구하기를 좋아하는 연고다. 이 결과물을 구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반드시 뭐가 있어야 하는가?
한 번 두 번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내가 이루어질 때까지 가는 마음이다.
그것을 원심(願心)이라고 한다. 원은 어디에서 얻는가? 무생법인을 얻었을 때, 아집이 다 빠진 사람한테 원력이 있는 것이다. 아집이 있는 사람은 원력이 아니고 오락가락한다.
아집이 빠져버리면, 집착이 빠져버리면, 쉬라고 해도 쉬지 않는다.
제가 표현하기를 ‘아집이 싹 뒤로 빠져버린 사람은 쇠덩어리에 불붙은 것 같다’ 그 불을 끌 수가 없다. 자기도 감당이 안 된다. 용광로에 불붙은 도가니처럼 되어서 ‘이제 화엄경 고만하죠’ 그게 안 되는 것이다. 우리 어른스님처럼, 그것이 원심이다.
했다가 안 했다, 했다 안 했다 이런 조작 마음이 아니고, 내가 지금 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르고 원력 속에 있다.
원(願)은 어디까지 들어가는가? 방편이 완전히 솜씨가 무르익어진 사람한테 오는 것이 원이다.
그다음은 정도냐 사도냐 가리는 힘, 선정삼매를 가리는 힘만 남아 있다.
그때부터 원이 있는 사람한테만 오는 것이 법력이다.
원도 없는 이가 법력은 무슨 법력인가, 아집이고 고집이다. 법력이 아니고 집착력이다.
집착력을 다 버려버린 상태, 무착력을 원이라고 한다.
일제의 불법을 구하기를 좋아하는 마음이고
발공덕장엄심(發功德莊嚴心)이니 : 공덕으로 장엄하는 마음을 내나니
학일체보살행고(學一切菩薩行故)며 : 일체 보살행을 배우는 까닭이니라.
일체 보살행, 공덕장엄이라고 하는 것은 신심이 근본이 된다. 현수품에 나오는 ‘신위도원공덕모요 장양일체제선법이라’
오늘 서울이나 해남이나 멀리서 오신 분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 몇 분들 계시잖은가.
그분들은 이미 자기 자신하고 결탁해서 가시는 길이기 때문에 자기의 철길을 자기가 밟고 가신다.
여기 우리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또 문수강당도 아니고, 어디를 가든지 자기의 길이잖은가. 그런 마음들이 여기 나온 것처럼 공덕장엄심이라.
그것을 화엄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바깥에 분칠해서 화장하는 장엄이 아니고 단청 장엄이 아니고 속까지 장엄에, 뼛속까지 피까지 장엄해버리는 상태를 자작장엄이라. 남이 장엄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자도자수 자작장엄 그걸 바라밀행이라고 하고 바라밀행을 꿰뚫어서 응관법계성하라. 법계의 성품은 본래 없다. 무착력으로 무한공덕을 짓는다.
발여금강심(發如金剛心)이니 : 금강과 같은 마음을 내나니.
인간이 끝까지 올라가서, 유정중생이 끝까지 올라가서 한 발짝만 뛰면 부처님까지 될 수 있는 미륵보살 같은 경지를,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할 수 있는 마지막 마지노선을 우리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고 한다.
법리적으로는 금강간혜지(金剛幹慧地) 마를 간(幹)자를 쓰는 금강간혜지라고 하고 그것을 등각이라고 한다.
십지보살이 끝나고 그다음 상태다.
이것을 굳이 금강이라고 해놓았다.
반야바라밀이 환하게 밝은 그 마음을 표현했다고 치더라도, 금강유정이 되는 것은 마지막 한 발짝 횡경막을 다 뚫고 나가서 십바라밀이 완성된 것이다.
십바라밀이 완성되는 법운지(法雲地)를 네 가지로 뭐라고 비유하는가?
‘그 사람은 매일 산이 하나 생겨진다.’
‘매일 바다가 하나 생겨진다’
‘매일 쏟아지는 여의주 보배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십지보살 법운지에 가서 네 가지로 그렇게 비유한다.
바다에는 모든 것이 다 살잖는가.
오늘 비유에도 나온다. 산도 있고 뭐도 있고 다 있다.
금강과 같은 마음을 내서
일체처수생(一切處受生)호대 :모든 곳에 태어남을
불망실고(不忘失故)며 : 잊지 않는 연고이고
또 그 뒤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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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여해심(發如海心)이니 : 바다와 같은 마음을 내나니.
오늘 화엄경을 우리가 한번 제대로 봤다면 ‘내 바다가 하나 생겨졌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된다.
지나가는 배도 바다고 바닷물도 바다고 조개도 바다고 미역도 바다고 문어 명태 꼴뚜기도 다 바다다.
우리는 그냥 바다에서 참치처럼 살다 가는 것이다.
참치가 제 집에 있으면 안 되잖는가. 끝까지 달리다가 멈추는 날이 죽는 날이다.
화엄경 하다가 죽는 것이다.
아까 우리 입승스님 회장스님께서 말씀하실 때 ‘내보고 우리가 죽을 때까지 하자는 말인가’ 막 겁이 났다.
‘내가 참치도 아니고 왜 나한테’
화엄의 바다를 죽을동 살동 달려야 하니까, 그래도 많이 달릴수록 육질은 좋아진다.
참치 참치.
바다와 같은 마음을 내나니 바다와 같은 마음은 뭔가?
하심이자 평등이자 그런 것이다.
일체 백정법이다.
잘 아시다시피 백법은 선법이고 흑법은 악법이고 백정법은 선악을 초월한 법이다.
일체백정법(一切白淨法)이 : 온갖 희고 깨끗한 법이, 불법의 바다에 무위법이
실유입고(悉流入故)며 : 실유입고라.
일체(一切)의 현성(賢聖)은 개이무위법(皆以無爲法)으로 이유차별(而有差別)이니라.
여기까지가 위로, 원력을 얘기하고, 그다음부터는 아래로 또 이야기하는 것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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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여대산왕심(發如大山王心)이니 :발여대산왕심이라 큰 산과 같은 마음을 내나니
일체악언(一切惡言)을 :일체 악언을.
여기서 하화중생이라고 하는 원력이 나온다. 악한 말을 하는 것은 중생들이기 때문이다.
개인수고(皆忍受故)며 : 다 참고 받는 까닭이다.
일체 못된 말을 내가 다 털어버리는 연고다.
중생을 제도하려면 어떻게 하는가? 그 사람 것을 다 들어주는 수밖에 없잖은가? 귀가 따갑더라도 들어줘야 된다.
어떤 때는 한참 듣다 보면 귀에 피난다고 하지 않는가.
발안은심(發安隱心)이니 : 편안한 마음을 내야 되나니
시일체중생무포외고(施一切衆生無怖畏故)며 : 일체 중생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주는 연고다. 참고 편안하게 해주고
발반야바라밀구경심(發般若波羅蜜究竟心)이니 : 반야바라밀다에 구경하는 완벽한 마음을 내나니.
구경심은 더이상 하자 없는 완벽이다.
교관일체법무소유고(巧觀一切法無所有故)라 : 교관일체법, 교관은 반야를 뜻하는 것이다. 반야가 환하다.
행심반야 관자재보살이, 관이 자재한 것이 교관이다.
일체 법에 대해서 비파사나로 꿰뚫어서 관하면 일체법이 본래 없다. 무소유라. 일체법이 자성 무소유라.
초발심시변정각 하고 난 뒤에 그다음 나오는 구절은 뭔가? 지일체법이다.
계속 반복한다.
이것은 무조건 외우셔야 된다.
초발심시변성정각은 80화엄경에 어떻게 나오고 어떤 품에 나오는가? 범행품에 나온다. 초발심공덕품 바로 들어가기 직전에 깨물고 있잖은가? 초발심 공덕을 설명하기 전에 초발심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초발심이 이만큼 중요하다. 초발심이 바로 깨달음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초발심은 구경심, 열반심보다 더 위대한 것이다,라고도 이야기한다.
열반경 같은 데에는 ‘초발심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위에 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한다.
발심필경이불별(發心畢竟二不別) 발심하는 마음과 구경심,구경열반이 둘이 아니다. 이불별이다. 나눌 수 없다.
여시이심선심난(如是二心先心難), 이 두 가지 마음 중에 선심난이다. 발심이 진짜 어렵다.
중생이 발심한다는 건 기적이다.
21세기의 기적은 지금 우리가 여기 앉아서 화엄경을 공부하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우와 저 못된 사람들이 공부한다’ 기적 같잖은가. 악독 중생이 공부한다는 것은 기적 같다.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 같은 분들이 화엄경을 공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지만, 여기서 우리끼리 모여서 화엄경을 공부한다는 것은 해외토픽감이다.
그럼 들어가겠다.
초발심시(初發心時)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렇게 나오잖는가?
지일체법, 일체법이 뭔지 알아야 된다.
지일체법(知一切法)이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를 여기 어떻게 해놨는가?
즉심자성(卽心自性) 마음의 자성으로 되는 줄 알아야 된다.
그래서 그걸 알고 나면은 성취한다. 성불한다.
성취혜신(成就慧身) 지혜의 몸을 성취하는 데는 불유타오(不由他悟)다, 남으로부터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지 마음 지가 다 가지고 있다. 어떻게 가지고 있는가? 없는 듯이 가지고 있다. 진공묘유다. 집착심만 떨어버리면 자기의 본래면목이 쑥 나온다.
본래면목은 어떤 면목인가? 무면목이다.
본래면목은 면목이 없다.
일체요지일체법 자성무성. 그러니까 본래 면목은 면목이 없다, 이걸 갖다가 깨끗하게 얘기해놨다. 일체유위법(一體有爲法)이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다.
‘면목이다 면목이다 하는 것은 일체유위법이 여몽환포영 같은 것이다’ 이 말이잖은가.
온갖 법이 아무것도 없음을, 일체법이 무소유임을 교묘하게 관찰하는 연고이니라.
시위십(是爲十)이니 : 이것이 열 가지다.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니고 화엄경에 있는 얘기를 했을 뿐이다.
여러분들 제가 얘기하니까 기분 나빠서 잘 안 들으려 하잖는가. 제 얘기가 아니고 화엄경에 그렇게 나온다는 말씀이다.
여러분들은 다 저보다 잘나신 분들인데 제 말씀을 듣겠는가. 저는 이 스피커하고 마이크 비슷한 것이다. 있는 것 그대로 대독했다.
제가 설명한 것도 없다.
혹시 제가 설명한 것이 있으면 그냥 듣지 말고 빼버리면 된다. 거의 대부분은 제가 경전에 있는 것을 복사해서 베껴서 한 것이다. 저는 가만히 있는데 입이 그냥 말했을 뿐이다.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일 보살들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 안주차법에는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질득성취보현선교지(疾得成就普賢善巧智)니라 : 질득성취보현선교지하니. 즉득즉득 하다가 이제 싫증난 것이다.
질득이나 천수경에는 뭐라고 했는가? 속득이나 똑같은 말이다.
가루라왕 중에 일륜속질가루라왕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빠른 것은 뭔가?
날개 있는 것은 빠르지 못하다. 발이 있는 것도 빠르지 못하다. 날개도 없고 발도 없는 건 진짜 빠르다.
제일 빠른 것은 허공이 제일 빠르겠지만 안 움직이니까 허공 다음에는 빛이 제일 빠른 것 같다.
빛의 속도 있잖은가.
화엄경에서는 일륜속질가루라왕이라고 했다. 일륜, 빛이 속질이다. 태양빛처럼 빠른 속도다.
일륜속질가루라왕이 중생을 딱 잡아서 제도해줄 때는 어떻게 한다고 했는가? 그 가루라가 뭘 잡아먹는가? 금시조(金翅鳥)가 재수 없이 용을 잡아 먹는다고 했다. 사실 그 책이 잘못된 것일 거다. 용이 아니고 이상한 걸 잡아먹었을 것이다.
고기를 잡는다, 중생을 잡는다, 라고 하는 것은 제도한다는 뜻이잖은가.
일륜속질가루라왕이 딱 고기를 잡아서 고기도 어떤 고기인가? 깔딱깔딱 죽을 만한 고기다. 이제 생명이 끝날 만한 것을 딱 잡아서, 인연이 다 익은 중생, 성숙 중생을 잡아서 철위산 꼭대기까지 데려오는데 얼마나 속도가 빠른가? 파도가 갈라져서 잡아 돌아올 때까지 파도 물이 다시 덮이지 않았다. 일륜속질이다.
세주묘엄품을 자세히 보면 화엄경 전체가 환하게 열리는 게 많다.
또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폐일광당(蔽日光幢)이다. 아마 이 책에는 패목광당(蔽目光幢)으로 되어있을 것이다. 그 주약신 이름을 폐일로 바꾸시기 바란다.
혹시 뒤에 이 책을 받으신 분들은 제1권(민족사 刊)에 주약신 중에 폐목이 아니고 폐일이다. 눈이 닫혔다는 폐목이 아니다. 태양을 닫아버린다. 폐일, 태양빛을 닫으려면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이어야 한다.
번뇌를, 캄캄한 무명의 번뇌를, 확 치료해 주려면 태양보다 더 밝은 빛으로 치료를 해야 한다. 태양이 떠버리면 가로등이 무색해지듯이 폐일광당이다.
폐일광당주약신이나 일륜속질가루라왕이나 주가신 같은 경우도 유연승미주가신이라 하잖는가.
유연하고 아주 뛰어난 맛의 곡식이다.
곡식은 부드럽고도 맛이 뛰어나야 된다. 제가 뭐라고 했는가? ‘수승한 맛이라고 하는 것은 남녀노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가 먹어도 맛이 있다고 느껴질 때 수승한 맛이다’
유연승미가 뭔가? 딱 잘라서 이것이다.
그게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그것은 남에게 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내 마음이다.
자신감 있게 우리가 뚫고 들어가면 화엄경이 재미있다.
저는 재미있다. 몰라서 그렇지, 상당히 재미있다.
지루하신가?
(아니오)
입만 떼면 거짓말한다.
지루 안 할 수가 없다. 지루하다.
만약에 보살이 이 법에 질득성취 바로 성취한다. 무엇을?
보현의 선교지, 보현의 아주 교묘한 지혜를 성취한다.
아주 악독한 놈들은 교묘하다고 안 하고 뭐라고 하는가? 교활하다고 한다.
교활한 사람들하고 교묘한 것은 다른 것이다.
그것도 소초에 딱 기록해 놨다.
악심을 가진 사람은 뺀질뺀질 잔머리를 쓰기 때문에 그것은 교활하다. 미꾸라지처럼 숫돌뱀장어처럼 잘 빠져나간다.
뱀장어는 가만히 놔둬도 미끄러운데 숫돌에 갈아놓으면 어떻겠는가? 아주 잘 빠져나간다.
그걸 숫돌뱀장어라고 한다. 편법으로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그것은 교활한 것이고 교활한 자는 특색이 이렇다.
손을 비비면서 얇고 높은 목소리로 “아유 반갑습니다.호호호 예 오랜만입니다.”
공자님이 ‘교언영색한 자’치고 교활하지 아니한 자가 없다고 했다. 말이 뻔지르르 하고 얼굴에 반색하고 있는 사람들은 교활하다.
무심한 표정으로 “왔어요. 예.” 이 정도가 좋다. 그것도 음성을 너무 낮춰서 “아이고 요즘 오랜만입니다.” 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보이스피싱에 가깝다. 진짜다. 제가 계속 경전하고 사람하고 임상실험을 해 봤다. 저는 신발 질질 끌고 오는 사람들은 돈이 있대도 안 준다. 뚜드려 패버리고 욕이나 바짝 한다.
“스님 왜 그래 못되게 하십니까?”
그 사람한테는 그렇게 하는 게 약일 뿐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 볶인다.
저는 잘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볶아본 적이 없다.
참기름 짜려면 볶아야지 어떻게 하는가.
보현의 교묘한 지혜를 빨리 성취하니라.
왜 빨리 성취하는가? 지가 가지고 있는 거니까 불유타오라.
나. 菩薩의 十種普賢行法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普賢行法하니 何等이 爲十고所謂願住未來一切劫普賢行法과 願供養恭敬未來一切佛普賢行法과願安置一切衆生於普賢菩薩行普賢行法과 願積集一切善根普賢行法과願入一切波羅蜜普賢行法과願滿足一切菩薩行普賢行法과願莊嚴一切世界普賢行法과 願生一切佛刹普賢行法과 願善觀察一切法普賢行法과 願於一切佛國土에 成無上菩提普賢行法이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勤修此法하면 疾得滿足普賢行願이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보현의 행하는 법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미래의 모든 겁에 머물기를 원하는 보현의 행하는 법이며,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기를 원하는 보현의 행하는 법이며, 일체 중생을 보현보살의 행에 두기를 원하는 보현의 행하는 법이니라.
온갖 착한 뿌리를 모으기를 원하는 보현의 행하는 법이며, 모든 바라밀다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보현의 행하는 법이며, 모든 보살의 행을 만족하기를 원하는 보현의 행하는 법이며, 일체 세계를 장엄하기를 원하는 보현행의 법이니라.
모든 부처님 세계에 나기를 원하는 보현의 행하는 법이며, 모든 법을 잘 관찰하기를 원하는 보현의 행하는 법이며,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서 위없는 보리 이루기를 원하는 보현의 행하는 법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을 부지런히 닦으면 보현의 행과 원을 빨리 만족하게 하느니라.”
*
보살(菩薩)의 십종보현행법(十種普賢行法)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보현행법(有十種普賢行法)하니 : 열 가지 보현의 행하는 법이 있으니
하등(何等)이 : 무엇이
위십(爲十)고 : 열인가.
보현행품에 보면 보현행을 뭐라고 했는가?
‘화를 내지 않는다’고 하였다.
저도 얼마나 화가 많았는가? 가랑잎처럼 바르르 끓어올랐었다. 그런데 화엄경을 읽으면 무조건 화가 안 나온다. 불화엄경이기 때문에. 무조건 화가 안 나게 되어 있다.
80권 화엄경에서 보현행품은 제49권에 나온다.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은 바로 49재를 지내버리라고 49권에 해놓은 것이다.
50권 딱 넘어가면 뭐가 나오는가?
여시미밀심심법(如是微密甚深法)
백천만겁난가문(百千萬劫難可聞)
정진지혜조복자(精進智慧調伏者)
내득문차비오의(乃得聞此秘奧義)
49권째에 화가 다 제압된 사람들이 50권으로 넘어가서 여래출현품이 나온다.
거기서부터 여래가 출현한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화내는 놈들은 화에 사로잡혀서 여래출현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 이세간까지 온다는 건 꿈만 같은 이야기다.
여기도 화내는 사람들은 지금 다 나갔잖은가.
화 안 내는 우리끼리 다 남아 있다.
우리 어른스님이 ‘니는 말만 좀 천천히 하면 좋은데’ 이러시겠다.
소위원주미래일체겁보현행법(所謂願住未來一切劫普賢行法)과
:이른바 미래의 모든 겁에 머물기를 원하는 보현의 행원이며, 여기서는 대원력의 마음이다.
점차적으로 나가는 것이다.
또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공경하기를 원하는 보현의 행이다.
이런 데서 참 인생에 기대가 있다.
청량국사의 행장을 보면 청량국사가 태어나기 29년 전에 현수법장스님께서 60권 화엄경 탐현기를 쓰시고 돌아가셨다.
맨바닥에 헤딩하듯이 쓰시지 않았겠는가.
그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아이가 29년 뒤에 태어나서 나중에 그 유명한 청량국사가 된다.
29년 뒤, 30년 뒤에 청량국사가 태어나셔서 법장스님의 얼굴도 이름도 성장할 때는 모르다가, 나중에 출가해서 법장스님 행장을 보다가 60권 화엄경을 너무 잘 써놨으니까, 청량국사는 그것을 바탕으로 80권 화엄경 소초를 썼다.
화엄경 소를 60권 짓고 초를 90권 썼지 않은가. 150권 해설서를 덧붙여놨다.
저는 지금도 현수 법장스님 글을 청량국사의 글보다 잘 참조하는 편이다.
청량국사의 글은 현수법장 스님의 것을 요즘 얘기로 치면 그대로 표절했다. 저는 표절이라 안 하고 칭양이라고 한다. 찬탄하고 칭양해서 드날렸다, 더 발전시켰다, 이렇게 이야기한다.
원공양공경미래일체불보현행법(願供養恭敬未來一切佛普賢行法)과 : 여기 ‘미래의 일체불 보현행법’이라는 대목을 현수법장의 해설로 보면서 ‘지금 우리가 그분들의 미래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든다.
의상스님께서도 이걸 남겨놨을 때 ‘미래 일체불의 중생에게’ 남기지 않았을까.
‘천 년 뒤에 중생에게까지도 공양하고 공경하고 내가 이것을남겨놔야 되겠다’ 하셨을 것이다.
대장경을 조각하면서도 당신들이 쓰시려고 하는 것보다, 해인사 대장경을 미래의 불자들을 위해서 ‘미래불을 위해서 내가 이걸 새겨놔야지’ 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시대에 미래불을 위해서 여기 모여서 화엄경 법회라도 이렇게 해야 된다. 악독한 우리지만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다.
글만 쭉 하는 것보다 이렇게 한 번 설명하면 ‘아이구 맞네’한다. 이렇게 들어가는 것이다.
원효스님 이름만 들은 것도 금생에 와서 우리는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강당 학인들에게 제가 얼마나 잘난 척 하겠는가?
여기 와서 그렇게 하면 두드려 맞겠지만, 학인들은 만만하다.
“스님 뭐” 이것저것 묻고 하면 “조용해” 똑똑한 학인들이 많아서 어떤 때는 제가 잘 모르는 것들을 많이 묻는다.
“너는 내한테 묻지 말고 내 이름만 아는 것도 고맙게 생각해. 내하고 같이 밥 먹잖아 여기서. 그리고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야. 혼자 계속 연구해.”
그러면 학인들도 안다.
‘아이고 실력도 없는 강사가 저렇게 윽박지른다’
얼마나 어거지인가? ‘내 이름 아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 세상에 실력도 없는 사람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원안치일체중새어보현보살행보현행법(願安置一切衆生於普賢菩薩行普賢行法)과 : 일체중생을 보현보살의 행에 두기를 원하는 보현행법이다.
원적집일체선근보현행법(願積集一切善根普賢行法)과 : 온갖 일체 선근을 적집한 후, 온갖 착한 일이라는 착한 일은 중선봉행 모으기를 원하는 보현행법이며
원입일체바라밀보현행법(願入一切波羅蜜普賢行法)과 : 일체 바라밀을 원입한다.
입(入)자도 마찬가지다. 입(入)자도 얻을 득(得)자 하고 똑같은 것이다.
젖어든다고 하는 건 푹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완전히 깨달은 사람만이 푹 빠져버린다.
증입(證入)이다.
모든 바라밀다에 푹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물 밖에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물속에 들어가서 물고기하고 대화하는 것이다.
어떤 분은 쪽물을 가지고 염색을 하는데 그분을 보니 쪽물을 가지고 밥도 해잡수고 목욕도 하고 냄새도 맡고 별것을 다 하셨다. 그 쪽을 가지고 약도 만들고, 보통은 인디고라고 해서 쪽물을 파랗게 물들이는데 그분은 쪽물 실력이 하도 뛰어나니까 흰색으로 쪽물을 들였다. 쪽물의 미생물까지도 이용한다.
그 정도가 되면 입(入)이라. 쪽물에 들어간 사람이다.
제가 옆에 있다가 “쪽팔린다”고 하니까 “스님 쪽팔린 거 알아요?” 부부 싸움을 하다가 신랑이 잘못해서 부인 눈이 맞았다면 처음엔 벌겋다가 좀 지나면 시퍼래진다.
“스님 그게 쪽팔리는 겁니다.”
쪽물을 환원시킬 때는 환원시키고 산화시킬 때는 산화시키고 이런 것이 있잖은가? 벌개졌다가 나중에 시퍼래지는 게 쪽팔린다는 건데, 그렇게 눈두덩이가 푸르게 되면 ‘쪽팔려서’ 밖에 못다닌다는 것이다.
처음 들어보시는가?
저는 그 쪽팔리는 분한테 다 들었다.
그분은 참 대단하다 싶었다.
차를 가지고도 그렇다. 찻물에 목욕도 해야 되고 먹어도 봐야 되고 비누도 만들어 봐야 되고, 온갖 것을 다 해봐야 된다.
화엄경에 빠진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화엄경 도표도 만들어 봐야 되고 핸드폰 고리도 만들어 봐야 되고 수건도 만들어 봐야 되고 별걸 다 해봐야 된다.
입으로도 화엄경을 보고, 귀로도 화엄경을 보고, 몸으로도 본다. 하다하다 안 돼서 화엄경 빵도 만들어버린다. 그것이 입(入)이다. 바라밀다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보현행법이고
원만족일체보살행보현행법(願滿足一切菩薩行普賢行法)과 : 모든 보살의 행을 만족하기를, 원만하게 충족되는 걸 원하는 보현행법이고
원장엄일체세계보현행법(願莊嚴一切世界普賢行法)과 :일체의 세계를 장엄하기를 원하는 보현행법이고
원생일체불찰보현행법(願生一切佛刹普賢行法)과 : 일체 불찰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보현행법이다.
원선관찰일체법보현행법(願善觀察一切法普賢行法)과: 선관찰한다. 미주알 고주알 MRI처럼 관찰해서 뚫어버리는 것이다.
아주 곱게 세밀하게 뚫고, 일체법을 세밀하게 관찰해서 일체법이 본래 없다는 걸 오온개공을 확 뚫어내버린다. 그런 보현행법이며
원어일체불국토(願於一切佛國土)에 :원어일체불국토에서 일체 불국토, 모든 불국토에서
성무상보리보현행법(成無上菩提普賢行法)이 : 성무상보리보현행법이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루기를 원하는 보현행법이
시위십(是爲十)이니 : 열 가지이니라.
결론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끝났다.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약에 모든 보살이
근수차법(勤修此法)하면 : 이 법을 부지런히 수행하면, 닦으면
질득만족보현행원(疾得滿足普賢行願)이니라 : 질득, 즉득 만족 보현행원이니라. 보현의 행원을 만족하게 하느니라.
화엄경 입법계품은 3가지가 있다.
17권짜리가 60권화엄경, 스무권반 짜리가 80권화엄경, 40권짜리 화엄경은 전체가 입법계품이다.
40권화엄경의 40권째 제일 마지막은 보현행원품이다.
찰진심념가수지(刹塵心念可數知)
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飮盡)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까지는 60권화엄경 80권화엄경 40권화엄경에 공통분모로 다 있는데
아차보현수승행(我此普賢殊勝行)
무변승복개회향(無邊勝福皆迴向)
보원침익제중생(普願沈溺諸衆生)
속왕무량광불찰(速往無量光佛剎)은 40권 화엄경에만 있다.
그러니까 찰진심념가수지까지는 현수법장스님께서 해설을 다 해놓으셨다.
60권화엄경, 80권화엄경이 다 번역되고 그다음 백 년 뒤에 제일 마지막으로 중국에 번역된 화엄경이 40권 화엄경이잖은가.
그래서 앞선 현수스님이나 원효스님이 손대지 못한 걸 청량스님만 손댄 부분이 보현행원품이다. 청량스님만 보현행원품 해설이 있다.
청량스님께서 거품을 물고 보현행원품을 장대하게 낱낱이 해설하셨다. 보현행원에 대해서 ‘이것이 화엄경의 마지막 결론이다’ 라고 10가지 조목조목을 다 들었다.
40권화엄경 중에서 제 40권째는 청량국사의 살아있는 화엄사리라고 볼 수가 있다.
여기서는 우리가 80권 화엄경을 보니까 보현행원 보현행원 하고 쭉 넘어가지만 이걸 더 심도 있게 보시려면 40권화엄경을 보셔야 된다.
청량국사는 80권화엄경을 해설하면서 마지막 제40권, 보현행원품을 우리가 꿇어앉아서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설해 놓았다.
나노 크기만큼, 머리카락만큼 강철을 뽑아내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현수스님이 머리카락만하게 강철을 가늘게 뽑아냈다면 그것도 굉장한 해설인데, 청량국사는 거기다 빵구를 뽁 내버린다. 머리카락에다가 빵구를 낼 정도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냐?
빵구낸 데에 실을 가지고 꼽았다, 이렇게 보면 된다. 이 정도로 해놓았다.
그러니까 뒷사람들은 거기다 실을 길게 꿰어서 잘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 오늘 비싼 것을 너무 풀어놔서 좀 아깝기는 한데, 특별히 다음 주에 바쁘신데도 오셔서 할 수 없다.
모든 보살이 이 법을 수행하면 바로 보현행원을 빨리 만족하게 된다 하느니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먼 길 차조심해서 가시기 바란다.
(죽비소리)
하강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부처님 오신 날을 다 마치고, 5월 18일 ‘아침 8시 통근길’ 법문도 끝났는데, 운동을 하느라 외출에서 돌아오자 <유튜브 염화실TV>에 또 새로운 방송이 올라와 있었다.
“이러면 여기 실시간 몇 분 몇 초 돌아가는 거 다 나와.”
법문을 틀자 큰스님께서 화엄전을 방문하신 스님께 유튜브 방송을 켜는 법부터 하나하나 가르쳐 주시는 장면이 나왔다.
전에는 자주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누군가에게 뭔가를 일러주시는 큰스님의 모습은 항상 새롭고도 기쁨이 가득하셨다.
*
“반갑습니다. 지금 오후 2시인데 오늘 아주 귀한 손님이 오셨어요. 내가 아주 좋아하는 철운스님이 오셔서, 앞으로 당신도 절에 가서 유튜브 방송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시현해 보이는 시간입니다. 이 스님은 내가 그때 우리 몇 년 전이지? 1992년도에 중국 여행을 45일간 같이 했던 스님이라. 그때 우리나라가 중국하고 수교도 안 돼가지고 홍콩으로 가서 심천으로 들어갔어. 그때 인연이 되어서 그 후에 내가 스님 있을 때 법주사에 가서 강의도 한번 한 적이 있고 그래요. 17년간 법주사 강사를 했어. 법주사 강사를 그만두고 나온 지가 벌써 11년 됐고 평택 도원사에서 혼자 수행하고 계시는데 오늘 마침 이렇게 어떤 인연으로 왔어요. 스님이 정식으로 인사를 해.”
“안녕하세요. 평택 도원사에서 수행하고 있는 철운입니다. 염화실 TV에 이렇게 찾아뵙게 돼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오늘 여천 무비큰스님 친견하러 범어사에 왔는데 스님께서 특별히 방송국을 또 안내해 주고 이렇게 설명해 주고 저보고도 돌아가거들랑 절에서 TV 유튜브 방송을 하라고 권하면서 이렇게 손수 TV 화면을 켜고 저한테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저도 힘내고 용기 내서 절에 돌아가면 유튜브 방송을 한번 시작해 볼까 합니다. 스님한테 힘 받아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꼭 하셔야 돼. 반드시 하셔야 돼. 앞으로는 신도들 공간에다 모시고 자시고 그거 번잡해. 그렇게 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신도님들에게 교화하는 것, 공부같이 하고 하는 기술이 있으니까, 그런 시대야 이제. 스님은 금방 이해하고, 강사를 17년이나 했으니까, 그 젊은 나이에 벌써 일찍이 했던 그런 경험이 있고, 또 지식이 많고 불교에 대한 지식이 누구보다도 이 시대에 많은 분이니까, 그거 썩히기가 아깝잖아. 그러니까 열심히 하시기 바랍니다.”
이날 실시간으로 댓글을 쓰신 분들에 대한 소개도 한 분 한 분 특징을 잡아 철운스님께 말씀해 주셨다. 그중에 대원성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석대원성이라고 아주 우리 염화실 카페 방송국 지킴이다 지킴이. 사천왕. 내한테 누가 만약에 뭐라고 비판을 했다든지 불만을 표시했다? 대원성보살님이 그냥 당장에 쫓아와가지고 혼을 내고 막 그러는 보살님인데, 호법신장이라. 대원성보살님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죠? 깜짝 이벤트네요. 그렇습니다. 이벤트입니다. 이런 일이 잘 없어. 정기 법회만 방송국에서 하니까. 그런데 나는 이런 시간을 좋아해. 왜냐면 내 혼자만 계속하니까.”
스님도 방송국을 연다면 5분도 좋고 10분도 좋고 신도분들이 직접 출현해서 자기 신행담이나 부처님과의 인연담 같은 것을 발표하게 하는 시간도 가져보라고 권하셨다.
“스님 말씀하시는 걸 이분들이 다 듣나요?”
“아 그럼 다 듣지 다 듣고 있잖아. 당신들 컴퓨터나 핸드폰에 신호가 간 거야. 늘 알림설정을 해놓거든. 스님 주소하고 아까 말씀이 있었지만 조금 더 부연 설명하고 덕담 한말씀 하시고 끝내도록 할까요? 한말씀 더 하십시오.”
“예 주소는 저도 잘 모르겠고 평택 미군부대 앞에 있는 도원사에 살고 있습니다. 법주사에서 나와가지고 시골에 있는 노보살님들, 또 찾아오시는 분들 정성껏 대접하면서, 주지를 살고 있어서 그동안 공부해 오던 책들은 아직까지 컨테이너에 묶어 놓고 풀지 못하고 있는데, 큰스님의 오늘 이러한 격려와 또 용기를 주신 힘을 입어가지고 이제 돌아가면 책도 풀고, 또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화엄경에 대해서 좀 말씀해 보고 싶은 용기가 생깁니다. 가서 공부 좀 해서 앞으로 화엄경에 대해서 말씀드릴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불현듯 이렇게 스님 찾아왔는데 아주 자세하게 안내해 주시고, 유튜브 방송에 대해서 설명을 많이 해 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스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열심히 한번 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꼭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거 유튜브 방송을 시작하면서 부산 지역에 부산불교 연합 조계종 연합회 스님들이 있거든. 그 스님들이 늘 인사를 오니까 올 때마다 내가 그냥 막 열을 토하고 이 시대는 지금 개인 방송시대다, 전부 유튜브 방송을 해라, 그렇게 해가지고 몇몇 절에서 몇 스님이 또 기도할 때도 이거 켜놓고 기도하고, 독송할 때도 방송하고, 그런 스님들이 좀 생겼어. 몇 곳이 생겼어.”
“절에 직접 스님들 찾아가지 않아도 집에서도 또 법문 듣고 공부할 수도 있는 시대가 되니까.”
“지금 그런 시대로 변해 가고 있어. 그리고 아까 이야기가 미군부대 앞이라고 했는데 미군부대 앞이면 뭐 그렇게 썩 변두리도 아니겠는데?”
“예 읍단위인데 그래도 유동 인구 있고 괜찮습니다. 교통도 편하고요. 대부분 우리 보살님들은 버스 타고 내려서 한 200m 걸어 오면 절이 있습니다. 절은 한 80년 돼서 마을 가운데 있지만 마당도 있고 주차장도 있고 또 소나무도 몇 그루 있어가지고 사람들이 오면 운치가 있고 편안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렇구나. 그럼 뭐 스님 평생 사시는 데는 지장 없네? ”
“네 지장 없습니다. 신도님들이 잘해 줘가지고 제가 잘은 못 하지만 신도들이 열심히 잘해 주고 도와줘서 초파일도 잘 보내고 이렇게 스님 친견하러 왔습니다.”
“스님 인상만 봐도 호감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서로 소통이 되는 거라. 바로 언제든지 이렇게 열면 소통이 돼.”
“스님은 이 방에 앉아서 전국에 있는 신도들, 또 세계적인 신도들을 다 포교하고 교화하는 것 같습니다. 큰일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문득 예고 없이 열었는데도 32명이 동참을 했어. 이렇게 된다고. 근데 예를 들어서 스님이 편리한 시간, 그것도 잘 선택해서 해야 돼. 실시간 저녁도 괜찮고, 그전에 나는 오후 2시에도 하고 그랬어. 딱 정해지면 그 시간에 맞춰서 기다리다가 들어오는 분들이 생겨서 그것도 또 편리해. 여기 조회수는 왔다가 중간에 전화가 오거나 하면 전화 받아야 되어서 나가게 되고 그런 관계들이라. 알만치만 알면 되고, 기술적인 것도 아주 무궁무진해. 근데 그거 뭐 알 필요 없고. 방송국에서도 똑같은 이 프로그램을 써. BBS 방송국에서 와서 봤거든. ‘스님은 우리가 쓰는 프로그램하고 똑같은 것 쓰네요’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가서 이제 그만 쉬고, 오래 쉬었다, 한 10년간 쉬었으니까. 용기 내서 꼭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활용할 줄 아는 분들이 또 인연이 돼가지고 동참하고, 무슨 날 있으면 오라고 광고하면 여기서 바로 광고가 돼버리니까. ‘내일은 관음재일이니까’ 방송 켜놓고 의식을 해도 돼. 그렇게 해서 ‘관음재일에 빠지지 마시고 절로 오십시오. 오시면 편안하게 차 한 잔씩 나누고 이야기나 나누고 가십시오’라고 광고해도 되고, 여러 가지 편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야. 내가 생각해 보니까. 나는 이거 내 개인이 하는 것이고 예를 들어서 범어사라면 KBS 못지 않는 콘텐츠가 많을 수 있겠어. 그런데 마음이 안 따라가니까 내가 그렇게 노래를 불렀는데도 그렇게 잘 안 해. 이쯤 방송에 대한 상식 정도를 이해하셨으면 오늘 이것으로써 방송을 끝내겠습니다. 동참해서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신 모든 분들 대단히 고맙습니다.”
“스님 염화실TV에 나와서 영광입니다. 감사합니다.”
철운스님이 시청자께도 다시 인사하셨다.
“만나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다음에 또 인연 있으면 만나겠습니다.”
“그래요. 스님 방송국을 열면 저도 가고, 여기 오늘 동참한 분들도 호기심에서, 손가락만 까딱까딱 하면 바로 들어가니까, 한 걸음도 옮기지 않고 가는 도리가 있어. 그런 시대니까 우리가 또 그렇게 만납시다.”
“알겠습니다.감사합니다.”
*
존댓말은 실시간 유튜브 청중에게 하신 말씀이고 친근한 어투는 평택에서 오신 철운스님께 하시는 말씀이었다.
큰스님께서 5월 22일 하안거 결제날 아침에 다음날 법문을 하루 쉬겠다고 하셨다.
수계도반이신 범어사 일원스님의 열반을 추모하기 위해서라고 하셨는데, 이날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불사문중(佛事門中)에 불사일법(不捨一法)
-無比스님, 2024년 5월 22일 유튜브 염화실TV 중에서-
‘자기가 범행에 게으르면 다른 이로 하여금 게으르지 않게 하지 못하느니라’ 일단 자기가 부지런해야죠. 그런데 이런 문제는 딱 그 한 가지로 그렇게 결정해서 말할 것은 아니에요. 한 가지로 딱 잘라서 뭐든지 자기가 다 우수하고 모범이 되고 잘 돼야만 입도 벌릴 수가 있고 법을 설할 수가 있다, 꼭 그런 뜻은 아니에요.
저의 경우만 하더라도 내가 지금 몸 상태가 이렇게 여러 가지로 설명을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불편한데도 ‘네 몸이나 잘 간수하지 무슨 법문이냐’ 이래 버리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에요.
그런 것만도 아닌 이치가 또 거기에 있으니까 그래서 저는 죽을 때까지 화엄경 한 구절이라도 내가 읽고 내가 감동하고 또 이 유튜브 방송을 통해서 화엄경을 한 구절이라도 더 전할 수 있다면 그 전하는 것 그것이 저의 원력이고 저의 꿈이고 저의 살아가는 생명줄이고 그렇습니다.
저희 생명은 거기에 걸려 있어요.
청량스님은 득기사소라. 내가 화엄경에서 죽을 곳을 얻었다, 나는 경에서 그 살 곳을 얻었다, 뜻은 같죠.
죽을 곳을 얻었다는 청량스님 말씀이나 내가 살 곳을 얻었다는 내 이야기나 그 궁극에 가서 귀결점은 같습니다. 저는 그래 생각해요.
그러니까 꼭 내가 사대육신이 다 청정하고 건강하고 또 일체 행이, 신구의 삼업이 아주 모범이고 여기 화엄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불보살의 말에 딱 맞아 떨어져야만 그렇게 화엄경을 이야기할 수 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않느냐, 그래요.
거기에 대한 경전이라든지 조사 스님들의 말씀도 상당히 많아요.
‘약이인악고(若以人惡故)로 불수광명(不受光明)하면 타갱락참거의(墮坑落塹去矣)라’
만약에 불을 들고 가는 사람이 그 사람은 동네에 소문난 나쁜놈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들고 가는 불빛을 받지 아니하면, 그리고 캄캄한 데로 자기가 그냥 간다면 결국은 구렁에 떨어져서 다치고, 상처 나고, 죽을 수도 있다, 초발심자경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그것이 또 만대의 표준이 되고 기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점도 있고요.
모든 것이 완벽하고, 등불을 들고 가는 사람이 착하면 더 좋죠. 아주 훌륭하고 아주 소문난 훌륭한 사람이다 하는 인격자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겠죠.
그렇지만 등불을 들고 가는 사람이 설사 나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등불 빛은 아무 허물이 없지 않습니까? 잘못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두운 길을 잘 비춰주는 역할을 또 한몫 잘하니까요. 그걸 어쩔겁니까?
여기서 제가 한 말씀 드리겠는데요.
내일은 우리 범어사에 일원스님이라고 연세가 지금 92세로 어제 열반하셨고 내일은 영결식입니다. 그래서 내일은 그 스님을 생각하고 그 스님을 추모하는 마음에서 하루 쉽니다.
그 스님은 저하고 같이 사미계를 받았어요.
사미계를 네 사람이 받았는데 두 사람은 중간에 어디 가버리고 없어요.
도대체가 안 보입니다. 안 보인지가 여러 수십 년이 됐어요
그런데 일원스님은 옛날에 해인사 선방에서도 같이 지냈고 또 여기 범어사에서도 아랫방 윗방에 살았어요.
내 뒷방 위의 십여 개 이상 계단을 올라가면 거기에 건물이 있는데 그곳에서 여러 수십 년을 사셨고 80이 넘어서도 선방에서 대중들과 함께 하신 스님입니다.
그런데 크게 활동을 안 했다 보니까 그렇게 알려지지는 않았어요.
아주 조촐하게 모범으로 깨끗하게 평생을 정말 자기 수행만을 위해서 깨끗이 사신 분이죠. 그러다 보니까 크게 반연도 많지 않고 아는 사람도 흔치 않고 범어사에 살았던 스님들은 물론 다 알죠. 그 외에 스님들은 크게 교류가 없는 스님입니다
나하고는 사미계를 같이 받은 인연이 있습니다.
60년이 넘는 세월을 알고 지내고 사미계도 같이 받고 그랬던 스님이예요.
그 스님의 추모의 뜻을 좀 더 돈독히 하기 위해서 내일은 이 유튜브 방송을 쉽니다.
말씀하다 보니 어려서 출가해서 평생 절 생활을 하면서 마지막을 절에서 할 수 있는 사람이 50프로가 안 됩니다.
근데 우리는 네 명이 함께 계를 받았는데 그래도 50프로가 됐네요
두 분은 중간에 어떻게 해서 안 보이는지 도대체가 안 보이고 두 사람만 이렇게 있으니까 50프로 남아 있으니까, 경우 따라서는 또 한 60프로 70프로 남아 있는 분들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스님들이 출가해서 승려생활을 하면 그 사람들이 다 끝까지 회향하기만 하면 참 좋은데 그게 그렇게 안 되더라고요. 숫자를 계산해 보면 그렇습니다.
그 얘기도 우리 화엄경 사이에 이렇게 집어넣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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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3일 오후 <인터넷 다음카페 염화실>에 일원스님의 영결식에 참석하신 큰스님의 사진이 여러 장 올랐다.
용학스님이 휠체어를 밀고, 제자스님들이 큰스님을 둘러쌌다.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으셨던’ 오래된 도반이 마지막으로 마련해 주신 조촐하고 정결한 찻자리에 큰스님이 앉아계셨다. 일일이 인사하시는 스님들을 맞고 웃으시고 깊은 눈길로 도반의 마지막 큰 장엄불사를 지켜보셨다. 큰스님의 눈길로 쫓아간 영결식장에는 큰스님께서 염려하신 덕분에 가사를 입으신 스님들이 가득해서 여름 숲처럼 울울창창했다.
큰스님은 어느 사진 속에는 밀짚모자를 벗어서 무릎에 단정히 놓고 합장을 하고 계시기도 하고, 어느 사진 속에서는 밀짚모자를 머리에 쓰고도 계셨다.
새로 시작되는 여름, 범어사의 뜨거운 햇빛이 짐작되었다.
시작도 없이 끝도 없는
아득한 시간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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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成就慧身 不由他悟...언제나 감동과 환희로움으로 대하는 대방광불 화엄경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나무대방광불화엄경_()()()_
고맙습니다.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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