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아침기도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제2저녁기도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끝기도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
1193년 아시시에서 태어났다. 같은 아시시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를 본받아 그의 청빈 생활을 뒤따랐다. 글라라회의 어머니요 창립자였다.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많은 선업을 쌓았다. 1253년에 세상을 떠났다.
성녀 글라라가 프라하의 복녀 아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Edit. I. Omaechevarria, Escritos de Santa Clara, Madrid 1970, pp.339-341)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전심으로 그리스도께 매달려 그 거룩한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천상의 군대들이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사랑에 불을 놓습니다. 그분에 대한 관상은 우리의 휴식이고 그분의 자비는 우리의 만족입니다. 그분의 감미로움은 우리를 가득 채워 넘쳐흐르게 하고 그분에 대한 기억을 감미로운 빛으로 빛나게 하며 그분의 향기는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고 그분을 직접 보는 영광스러운 천상 예루살렘의 모든 시민들에게 행복을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영광의 광채요 영원한 빛의 반사이며 티없는 거울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여, 왕후이신 자매여, 이 거울을 매일 들여다 보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비친 당신의 얼굴을 보고 안팎으로 단장하고 여러 색깔의 꽃들로 치장하여 지극히 높으신 임금님의 딸과 정결한 정배에게 있어야 하는 온갖 덕행의 옷을 입도록 하십시오.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거울 전체를 보면 아시겠지만 그 거울에는 복된 가난과 거룩한 겸손과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먼저 거울의 맨 밑에서부터 본다면 말 구유 위에 강보에 싸여 누워 계신 분의 가난을 볼 것입니다. 놀라운 겸손이여! 비할 수 없는 가난이여! 천사들의 임금이시고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분께서 구유에 누워 계십니다. 다음으로 거울의 중간을 본다면 그분께서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겪으신 무수한 수고와 고통 그리고 그분께서 지니신 겸손과 복된 가난을 볼 것입니다.
이제 끝으로 거울의 맨 위를 본다면 십자가 나무 위에서 고통당하시고 거기에서 가장 수치스런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신 그분의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볼 것입니다. 그리스도 자신이신 이 거울께서 십자가 나무 위에 매달려 계실 때 지나가는 사람들 보고 이런 것들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아, 나를 바라보라. 내가 겪던 고생 같은 고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외치고 울고 있는 그분께 한마음 한 목소리로 대답합시다.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두고두고 기억하면서 내 마음 괴로워하겠나이다." 천상 임금의 왕후이신 아녜스여, 당신이 그렇게 하신다면 당신 안에 이 사랑의 불이 더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임금님의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부요와 끝없는 영예를 바라보시고 열렬한 갈망과 마음의 사랑으로 그것을 그리워하고 그분께 이렇게 외치십시오. "오, 천상의 신랑이시여, 날 이끌어 당신을 뒤따르게 해주소서. 싱그럽기 그지없는 당신의 방향으로 줄달음쳐 가리이다." "당신께서 나를, 술방으로 이 몸을 데리고 가실 때까지, 당신께서 왼손으로 내 머리 받치시고 당신 바른손으로 기쁘게 이 몸 안아 주시며 당신의 그 입술로 나에게 입맞춰 주실 때까지, 나는 지치지 않고 달려가리이다."
사랑하는 아녜스여, 이런 것을 깊이 생각할 때 이 가련한 어머니를 잊지 마십시오. 당신에 대한 기억은 내 마음 안에 굳게 새겨져 있고, 나는 다른 누구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68. 여성편 (2) 성녀 글라라
가난한 동정녀로서 복음적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글라라에게 당시의 교황, 추기경과 왕, 귀족들까지도 그녀의 기도를 부탁하고 자문을 구하러 찾아왔다.
평생 단순 겸손 가난의 삶 살아
모범적인 삶에 기도 부탁 줄이어 엄격한 회칙 만들어 승인 받기도
“성 프란치스코께서 우리가 그리스도께로 회개하기 시작할 때부터 가르쳐 주신 것과 같이 자매들은 거룩한 단순성과 겸손과 가난의 길을 따르며 또한 값지고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항상 노력하십시오.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자매들은 우리 공로로써가 아니라 온전히 자비의 아버지 자체이시고 선물을 베풀어주시는 그분의 자비와 은총으로써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나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나 언제나 좋은 명성의 향기를 풍기게 될 것입니다.”(성녀 글라라의 유언 중에서)
‘거룩한 단순성과 겸손과 가난’, 그것들은 성녀 글라라(Clara, Assisiensis, 1194~1253)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단 한시도 다름없이 실천했던 덕목들이었다. 글라라 수도회의 창설자로 사후 불과 2년만에 교황 알렉산델 4세에 의해 시성된 글라라는 오직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순종, 기도로써 얻을 수 있는 참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성인이었다.
성 프란치스코 성인으로 이미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장녀로 태어난 성녀는 어머니가 기도 중에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고 난 후 태어났기에, ‘빛’이라는 의미를 지닌 ‘글라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글라라는 성 프란치스코의 열정적이고 기쁨에 찬 설교를 직접 듣고 난 후 그 형제들의 생활을 보면서, 그러한 복음적 생활에 대한 강한 끌림을 느끼게 됐다. 이에 그녀는 1212년, 18살 때의 성지주일 밤, 가족들이 곤하게 잠든 사이에 집을 나서 프란치스코를 찾아가 그의 첫 여성 동료가 된다.
스승이며 영적 아버지인 성 프란치스코를 따라 글라라는 세속을 완전히 떠나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과 사랑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아직 형제회에 여자 수도회가 없어서 인근의 베네딕토 수녀원에 머물던 글라라는, 부모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삭발한 자신의 머리를 보여주며 이를 뿌리치고, 자신을 따라 복음적 생활을 함께 시작한 동생 아녜스와 함께 성 프란치스코의 도움을 얻어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글라라 수도회)를 시작했다.
수도회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하는 비천한 종, 겸손한 하느님의 여종으로서 글라라는 공동체 생활을 해나갔다. 특히 가난한 동정녀로서 복음적 삶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글라라에게 당시의 교황, 추기경과 왕, 귀족들까지도 그녀의 기도를 부탁하고 자문을 구하러 찾아왔다.
글라라는 성 프란치스코가 마련해준 아시시 인근의 성 다미아노 수도원에서 이처럼 복음적 삶을 살았고, 그리하여 이 수도원은 수도회 가족들 뿐만 아니라 수도회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가까운 이웃이 되어 그 기쁨과 고통을 함께 나누는 자리가 됐다.
그녀는 한편, 프란치스코의 정신과 관계가 없는 회칙들을 지키는 생활이 프란치스코에게서 배운 복음적 가난의 생활과 형제회와의 유대를 보존할 수 없음을 염려해 스스로 회칙을 작성해 교황에게 인준을 요청했다. 하지만 교황과 다른 고위 성직자들이 그 엄격함이 과하다고 생각해 반대,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거절당했다.
그러다가 1240년 글라라는 한 차례의 기적과도 같은 일을 행하게 된다. 아시시에 사라센의 대군이 쳐들어왔고, 아시시의 시민들과 수도회의 가족들은 커다른 위기에 놓이게 된다. 이에 글라라는 깊은 병으로 자신의 몸조차 가눌 수 없었지만 성체께 의탁해 기도하여 수도회의 봉쇄구역까지 쇄도했던 사라센인들을 물리친다. 기도를 마치고 몸을 일으킨 글라라는 성광(聖光)의 빛으로 적군들을 물리친 것이다.
그밖에도 글라라는 오로지 복음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작은 빵 하나로 50여명의 수녀들이 먹기에 충분할 만큼 불어나게 했고, 많은 환자들의 병을 치유했다. 더욱이 1252년에는 병석을 떠나지 않고도 2㎞나 떨어진 성당에서 거행된 성탄 미사에 참례하는 기적을 보여준다. 이를 계기로 교황 비오 12세는 1958년 글라라 성녀를 TV의 주보로 선포했다.
글라라가 쓴 회칙은 1243년 또다시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거절됐으나, 오랜 뒤인 1252년 그녀는 프란치스코의 회칙을 근본적으로 받아들여 관상과 봉쇄 생활에 적용하는 고유한 회칙을 작성한다. 교회 역사 안에서 여성 수도자로서는 최초로 쓴 이 회칙은 결국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인 1253년 8월 9일 마침내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승인을 얻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이틀 뒤인 8월 11일 글라라는 세상을 떠났고, 알렉산델 4세는 2년 뒤인 1255년 그녀를 시성했다. 성녀가 평생을 머물며 기도와 단순한 삶으로 복음적 가르침을 살았던 성 다미아노 수도원 성당과 그 유해가 모셔져 있는 아시시의 성 글라라 대성당에는 오늘도 전세계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고 있다.
단순한 삶, 가난하고 헌신적인 봉헌의 삶을 살았던 글라라 성녀의 삶은 신비였다. 비록 프란치스코와는 달리 오직 수도원의 봉쇄 구역 안에서 평생을 살았던 성녀는 그러나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세상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삶의 신비는 바로 하느님께 대한 흠숭과 사랑에서 비롯되는 기도 안에 있었다.
물질과 쾌락에 집착하는 현대인들은 글라라 성녀의 삶에서 참된 기쁨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된다.
[가톨릭신문, 2005년 10월 9일, 박영호 기자]
텔레비전의 수호성인 클라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충실한 제자이자 글라라 수도회 창립자인 클라라 성녀는, 1193년 아시시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성모 마리아처럼 ‘가난한 동정녀’로 주님의 가난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클라라는 빛이라는 뜻을 지녔는데, 성녀의 어머니가 기도 중에 온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름대로 클라라는 겸손의 덕과 착한 행실 그리고 기도로써 하느님의 부르심에 성실하게 따랐다.
성 글라라 수도원의 모태가 되는 성 다미아노 수도원은 성 다미아노의 가난한 자매들의 회(Order of Poor Ladies of San Damiano)가 창설된 곳으로, 클라라는 1253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한 번도 이곳을 떠나지 않고 복음적 가난과 사랑의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아시시의 클라라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이상을 여성적으로 표현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기도 하는데, 성녀는 종종 자신을 ‘복되신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불렀다.
클라라는 다정한 자매요 어진 어머니로서 자매들의 모든 기쁨과 아픔을 함께하였고, 수도원의 궂은일을 하는 자매들의 비천한 여종이 되어 겸손하게 그들을 섬겼다. 또한 분별력 있고 지혜로운 수도원장으로서 자매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며, 주님의 뜻을 찾으려 애썼다.
1252년 성탄 밤, 중병으로 누워있던 성녀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병실을 떠나지 않고도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자정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 기적은 1958년 교황 비오 12세가 성녀를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다. 축일은 8월 11일.
[경향잡지, 2007년 3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