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푸른 날, 태백산맥의 고장, 보성군 벌교읍을 찾았습니다. 오늘은 11월의 마지막 날. 이제 올 한 해도 한 달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벌교 천을 지나서 길 양쪽으로 장이 서는 거리를 천천히 둘러봅니다. 할머니와 아낙네가 파는 참꼬막에 눈길이 갑니다.
▲ 홍교(좌측) 와 부용교 (우측) 부용산 아래 홍교도 만났습니다. 벌교 천을 따라 조금 내려오면 부용교가 있습니다.
항상 이때쯤이면 이곳 아낙들은 물 빠진 바닷가 뻘밭 일로 바쁜 철입니다. 10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찬 바닷바람 속에서 허리를 못 펼 정도입니다. 벌교 여자 만에서 생산되는 벌교 참꼬막을 캐는 일이지요.
이때가 참꼬막 맛이 가장 좋을 때입니다. 남도 지방에서는 이때쯤 제사나 잔치가 있는 집은 반드시 꼬막 반찬이 오르지요.
넓지 않은 벌교읍을 한 바퀴 돌다가 느티나무 가지에 까치집 하나 대롱거리는 부용리 마을회관 앞까지 걸었습니다.
▲ 부용산 앞 월곡마을에서 본 벌교읍내의 일부
부용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월곡초등학교 서쪽 담벼락을 따라서 몇 발자욱 걸으니 별교여자중학교 담벼락에 붙은 돌로 된 이정표가 보입니다. '부용산 용연사'라고 음각된 이정표입니다. 건너편에 핏빛 같은 녹을 뒤집어쓴 골함석 지붕의 '한일 정미소'가 보입니다.
부용산(芙蓉山)을 뒤로하고 산비탈에 자리한 이 마을은 월곡마을입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아담한 산동네입니다.
군데군데 빈집이 눈에 들어옵니다. 돌밭 콩을 심고 있던 아주머니는 옛날엔 이곳 물이 좋아서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예전 같지 못하다고 말끝을 흐립니다 월곡마을 바로 뒤에 부용산 오리길이 있었습니다.
▲ 부용산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부용산 오리길 입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가면 용연사라는 절집이 나오고, 부용산으로 오를 수 있습니다. 우측으로 가면 부용산 시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말로만 듣고 노래 속에서 그리던 부용산입니다. 처음으로 오르는 산입니다.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옵니다. 언제부터 이 노래를 알게 되었는지 기억은 없지만 허전하고 답답할 적엔 가끔 불러보던 노래였습니다.
<부용산>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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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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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 노랫말은 1947년에 쓴 박기동의 시(詩)입니다. 시인의 아버지였던 박준태의 3남3녀 가운데 차녀였던 애영은 18세의 나이로 벌교 세망동으로 시집을 가지만, 몸이 허약했던 누이는 자식도 낳지 못한 채 1947년 폐결핵으로 순천 도립병원에서 세상을 뜹니다. 누이를 벌교 부용산 자락에 묻고 돌아오는 길에 적은 시입니다.
이 시에 작곡을 한 안성현은 목포 항도여중 음악교사였고 '엄마야 누나야'라는 동요의 작곡자입니다. 뒤에 안성현은 월북을 했고, 이 노래는 당시 빨치산이 즐겨 불렸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 부용산 오리길. 이 길로 가면 체육공원과 부용산 시비가 나옵니다. 은행나무 잎이 떨어져 길을 덮었습니다.
은행잎으로 노랗게 포장된 길을 따라 <부용산 詩 비>를 만나러 갑니다. 발에 밟히는 노란 은행잎들이 너무 아까워 몇 장 주워 봅니다. 책 속에 넣어두고 다음 가을을 기다려 보렵니다. 저 모퉁이를 돌아 백여 보를 걸으니 부용산 시비가 보였습니다.
▲ 50여 년이라는 세월 속에 가슴으로만 흐르던 <부용산>이 시비로 부활했습니다.
어둠의 시절에 가슴으로 불렀던 이 노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소리없는 노래, 이제는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하던 대학가 젊은이들이 부르기도 하고, 최근에는 가수 이동원, 안치환, 한영애가 불렀고, 박흥우, 국소남이 부른 노래도 있습니다.
부용산 시비를 뒤로하고 부용산을 올라 봅니다. 산길 옆 양지 바른 곳에는 물봉선과 꽃향유, 들국화가 아직도 남아 있고 그 위로 벌과 나비들이 부산한 움직임이 보입니다.
▲ 부용산으로 가는 길에 녹차 밭을 만났습니다.
몇 군데 조그만 녹차밭이 있습니다. 수줍은 듯 아래를 보고 꽃을 피운 모습이 하얀 저고리에 짙푸른 치마를 입은 키 작은 시골 아가씨 같은 모습입니다.
무엇이 부끄러운지 푸른 하늘을 보질 못하는 모습에서 자기를 낮추는 향기가 풍겨옵니다.
팍팍하고 힘들었던 지난 삶 속에서 알뜰하게 살림을 일구어 온 우리 누님 같은 향기입니다.
▲ 부용산를 뒤에 두고 용연사라는 절집이 있습니다. 관음전의 모습이지요.
용연사의 입구엔 조그마한 쉼터가 있고, 화장기 없는 얼굴이 수줍어 애써 두 손으로 기리는 듯한 용연사라는 절집이 있었습니다.
칠성각과 대웅전 등 최근에 지은 건물도 있지만 다른 호사스런 절집에 비해 퍽 아담해 보이고 애틋한 정이 느껴집니다. 이 용연사(龍淵寺)는 태백산맥(조정래 지음)소설에서도 그려진 곳이라 합니다. 벌교의 전 지역이 소설의 무대가 되었기에 아마 이곳도 빠지지는 않았나 봅니다.
용연사에서 갈증난 목을 축이고, 마른 솔잎들이 수북이 쌓인 소나무 숲길 사이로 부용산을 오릅니다.
그리 가파르지 않고 높지 않은 산입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친숙한 마을 뒷산 같은 산입니다.
▲ 부용산으로 오르는 길의 솔밭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대신에 따스한 햇볕이 스며듭니다. 이마엔 땀이 맺히기 시작합니다.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떠나간 누이를 묻고 내려오는 여린 시인의 가슴은 어떠했을까? 부모가 죽으면 하늘의 별이 보여도 형제가 죽으면 하늘의 별이 안 보인다고 합니다. 눈앞이 시커멓고 오목 가슴에 주먹만 한 돌이 박힌 듯 가슴앓이를 했을 것입니다.
유난히 예뻤지만 폐결핵으로 자식도 낳아보지 못하고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 타고' 날아간 누이동생을 '피어나지 못한 채로 붉은 장미는 시들었구나!' 라고 통곡을 합니다.
이런 애달픈 사연을 담은 <부용산>은 당시 남도의 가난하고 팍팍했던 삶의 애환을 어루만져주는 노래로 많은 사람이 사랑하던 노래였습니다.
▲ 부용산 솔밭사이에서 내려다본 벌교읍내와 평야 그리고 바다.
하지만, <부용산>은 여순사건, 6.25 등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죽이고 죽이는 어둠의 시대 속에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부를 수 없던 노래였습니다.
'피어나지 못한채 ' 가버린 누이동생을 그리는 노래가 50년을 넘는 세월동안 가슴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숨죽여 부르던 <부용산>, 그 시절의 대립과 갈등은 지금도 동서와 남북 갈등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치 너와 내가 다르기에 서로 죽여야만 하는 그 암울한 시절이 반복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삶과 가치는 저 푸른 하늘과도 같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 삶을 외면할 수도 없고, 짓밟을 수도 없습니다.
희망 잃은 삶 속에 작은 꿈을 주는 일에 너와 나를 구분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삶과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집단은 바람에 날리는 겨일 뿐입니다.
▲ 부용산의 억새가 나직하게 흐느낍니다.
연꽃을 상징하는 부용산은 연꽃처럼 아름답지 않았지만 온갖 궂은 일을 가슴으로 삭히며 살아온 어머니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 뻘밭을 낮게 기는 아낙네의 허리 같은 산이었습니다. 참꼬막이 한창 맛이 있을 이때, 부용산의 노래를 아는 벗과 다시 들려 보고 싶습니다.
참꼬막을 한 소쿠리 삶아놓고 마시는 술잔에 부용산을 담고 싶습니다.
"부용산 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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