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광한루원 양한규 감나무
- 이승의 정과 한, 저승의 행복과 평화이길
광한루원은 조선시대 관아원림의 대표 정원이다.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 평양 부벽루 등 조선 4대 누각이며 삼척의 죽서루, 무주의 한풍루와 함께 단숨에 조선 시대로 이끄는 시간 여행의 장소이다. 이 광한루는 황희가 남원 유배 시절 지은 광통루이다. 1434년 정인지가 중건, 광한청허부라 하여 옥황상제의 황궁을 뜻하게 되었다. 1461년 남원 부사 장의국이 연못을 만들고 오작교까지 놓았으나, 정유재란에 한 줌 재가 되었다. 현재의 광한루는 1639년에 새로 지은 건물이며 일제강점기 선열들의 고통이 서려 있다. 1910년부터 18년간 2층 누마루는 재판소, 아래층은 감옥이었다. 1층 돌기둥의 파여진 홈은 그때의 칸막이 자국이니, 1919년 4월 3일, 4일의 남원 독립만세 피 울음의 핏빛 자국이다.
1971년 대대적인 광한루원 확장 공사가 있었다. 이때 정문 쪽 전통시장이 옮겨 가고, 남서쪽 담장 가의 한 말 의병장 양한규(1844~1907)의 집도 사라졌다. 양한규는 임진왜란의 명장 황진, 의병장 양대박, 조경남과 함께 남원의 상징 인물이자 영웅이다. 어릴 때 이름은 월서이고 아버지는 양맹석,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
1882년 임오군란에 양한규는 남원부사 심의두에게 군사 3백 명을 주면 상경하여 난군을 토벌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어 상경하여 1891년 종4품인 선략장군부사과, 이듬해에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초계군사 겸 내금위장, 곧 정3품 당상관 통정대부가 되었다. 1894년 1월 갑오농민전쟁에 농민군을 토벌하려 했으나, 이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의 일제 만행이 있었다. 이때부터 양한규의 생각이 달라졌다. 임오군란, 갑오농민전쟁 때에 군인과 농민이 토벌의 대상이었으나, 그 대상이 일본으로 바뀌었다. 그러던 중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가 강제로 빼앗은 1905년 11월 17일의 을사늑약에 양한규는 피눈물을 흘렸다. 남원의 가산을 정리하여 자금을 마련 활, 화살, 총포, 탄환 등을 사들였다. 또 영남과 호남의 천여 명 우국지사와 연락하며 의병을 모았다. 그 의병 100여 명과 참봉 유병두의 군사 50명, 진사 박재홍, 상인 양문순, 이응천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되었다.
1906년 6월 4일, 최익현이 일흔셋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켜 이튿날 태인현청을 점령하고 이어 정읍, 곡성, 11일에 순창에 이르렀다. 그러나 남원의 관군과 대치하다가 같은 민족과 싸울 수 없다며 해산하였다. 이때 양한규는 순창으로 출동하는 남원의 진위대에게 의병을 공격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1907년 2월 12일은 음력으로 1906년 12월 30일이다. 첫날을 앞두고 일본과 조선 진위대의 대부분 장병이 휴가를 갔다. 양한규는 이 틈을 타 남원읍성 점령 계획을 세웠다. 담양의 고광순, 능주의 양열묵 의병과 합세하여 남원을 의병의 근거지로 삼을 생각이었다.
다음날 새벽이다. 의병이 성안으로 들어서자 광한루에 주둔하던 일군과 조선관군 진위대는 무기 등 군수품을 내팽개치고 도주하였다. 하지만 하늘도 무심했다. 이들을 추격하던 중 양한규는 적의 유탄에 숨을 거두었다. 다음 날 진위대에게 다시 남원성을 내주고 말았다. 그렇게 남원을 의병의 중심지로 삼고자 했던 양한규의 꿈은 무참하게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광한루원의 양한규 집터엔 월매집이 들어섰고, 그의 무덤은 도시 개발의 이름으로 사라졌으니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어졌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이다. 아마도 양한규가 어린 시절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을 것이다. 집터의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감나무를 보며 이승의 정과 한이 저승의 행복과 평화가 되었길 빈다.
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남원 광한루원 양한규 감나무 – 호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