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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 미국 인류가 처음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를 발사하였다
1969년 7월 20일. 인류 최초로 달에 첫 발걸음을 내디딘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1930~2012)선장이 한 말이다. 이 날 전 세계인이 텔레비전을 지켜보는 가운데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며 역사적인 인류의 첫 발자국을 찍었다. 이로써 수천년간 우리 인류에게 신화와 동경의 대상이었던 달이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됐다.당시 우리나라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에 관심이 대단했다. 달 착륙을 생중계했던 조경철 박사는 아폴로 박사로 불리며 유명해져 과학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고 달 착륙 해에는 많은 학생들이 천문학과로 몰렸다. 우리가 잘 아는 ‘아폴로 눈병’도 이 때 눈병이 유행해 붙여진 이름이다.
인류가 달에 사람을 보내게 된 배경에는 1950년대부터 시작된 미·소의 우주경쟁이 있었다. 당시 경쟁 관계였던 미국과 소련은 우주기술 개발을 통해 자국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이를 통해 체제의 우수성을 입증하려 했다. 첫 승자는 소련이었다. 소련은 1957년 미국보다 한발 먼저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지구궤도에 올려 보냈다. 1961년에는유리 가가린(Yurii Gagarin, 1934~1968)을 태운 보스토크 1호 발사에 성공해 인류 최초의 우주인을 탄생시켰다. 이에 자극 받은 미국은 1961년 케네디(John F.Kennedy, 1917~1963)대통령이 의회 연설에서 10년 안에 인간을 달에 착륙시켰다가 무사히 귀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미항공우주국(NASA)은 제미니 계획 1)을 통해 기본 기술을 확보하고 뒤이어 아폴로 계획 2)을 추진했다.
1969년 미국은 마침내 소련을 제치고 최초로 인간을 달에 보내게 된다. 미국이 아폴로 계획에 투입한 예산은 당시 돈으로 약 250억 달러, 현재 한화로 무려 100조 원에 이르는 돈이다. 인류의 달 착륙은 이런 천문학적인 금액뿐 아니라 발사시험 중 아폴로 1호의 폭발로 3명의 우주인을 잃는 인명피해까지 감수하며 얻은 결과다.
NASA는 우주선을 처음 개발할 당시 우주선이 달에 갔다 오는 방법으로 ‘직접발사(Direct Ascent)’, ‘지구궤도 랑데부(Earth Orbit Rendezvous)’, ‘달 궤도 랑데부(Lunar Orbit Rendezvous)’의 3가지 방식을 고려했다. 이 중 비용과 기술적 생존성 등을 고려해 달착륙선만 달에 갔다가 달 궤도에서 지구 귀환선과 다시 랑데부 3)하는 ‘달 궤도 랑데부’ 방식을 최종 선택했다.
1969년 7월 16일. 사령선, 기계선, 달착륙선으로 이루어진 아폴로 11호는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거대한새턴-V 4) 로켓에 의해 발사됐다. 아폴로 11호는 발사 12분 후 지구궤도에 진입해서 지구를 한 바퀴 반 회전했다. 그 뒤, 새턴-V의 마지막 3단 로켓을 점화해 달로 가는 궤도로 진입했다. 30분 후에는 새턴-V 로켓을 최종 분리해 떨어뜨리고 따로 보관돼 있던 달착륙선과 합체했다. 아폴로 11호는 발사 3일만에 달의 뒤편에 도달한 후, 기계선의 로켓 엔진을 점화해 달 궤도에 진입했다. 궤도에서 달을 13바퀴 돈 후에야 착륙지점인 고요의 바다 20km 상공에 도달할 수 있었다.
1969년7월20일 20시17분. 고요의 바다 상공에서 우주비행사들은 달착륙선으로 갈아탄 뒤 달에 착륙한다. 당시 아폴로 우주선에는 선장 닐 암스트롱과 함께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 1930~),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Buzz Aldrin, 1930~)이 탑승해 있었다. 이들 중 선장 암스트롱과 조종사 올드린은 달착륙선 ‘이글’로 옮겨탔다. ‘이글’은 콜린스가 조종하고 있는 사령선 콜럼비아에서 분리된 후 역추진 로켓을 분사하며 달 표면에 착륙했다.
하지만 이글은 달 착륙 당시 4분의 비행오차가 생겨 착륙지점을 수 마일 지나쳤다. 창 밖으로 큰 바위들이 널려 있는 것을 발견한 암스트롱 선장이 급히 수동으로 우주선을 조종해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다.
1969년 7월 21일 2시56분. 달 착륙 후 약 6시간 반 만에 암스트롱 선장은 착륙선에서 내려 달에 역사적인 인류의 첫 발자국을 찍었다. 함께 이글에 타고 있던 올드린도 곧 내려가 처음 본 달의 모습을 ‘장엄하고 황량한 풍경’이라고 표현했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이후 약 2시간 반 동안 달의 표면에 성조기를 세우고 사진촬영을 했다. 지진계와 레이저 반사경 등 여러 과학 장비를 설치하고 22kg의 달 암석과 토양 샘플도 채집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인류의 달 착륙을 기념하는 여러 기념품과 우주복의 생명유지 장치, 카메라 등 필요 없어진 기재들을 남겨두고는 착륙선으로 돌아와 수면을 취했다.
1969년 7월 21일 17시54분. 우주비행사들은 이글을 다시 이륙시켜 달 궤도를 돌고 있던 사령선과 무사히 도킹 5)했다. 지구로 돌아올 때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착륙선을 달 궤도에 남겨놓고 사령선과 기계선만 지구궤도로 돌아왔다. 최종적으로는 우주인을 태운 사령선만 대기권을 지나 지구로 돌아왔다. 현재 아폴로 11호 사령선은 워싱턴 항공우주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달 궤도에 남아 있던 달착륙선은 아폴로 12호 비행 때 까지는 궤도에 남아 있었지만 결국은 달에 추락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구로 돌아온 아폴로 11호의 우주인들은 세계적인 영웅으로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 달을 인류 최초로 밟은 암스트롱 선장은 NASA 은퇴 후 신시내티 대학 교수가 됐다. 우주 비행 당시 사령선 조종을 맡았던 육군 출신 콜린스는 홍보담당 국무차관보를 지냈다. 공군대령인 올드린은 현재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우주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아폴로 11호 귀환 후 미국은 아폴로 12호를 다시 달에 보내 67년 발사한 서베이 3호의 카메라 회수에 성공했다. 11호 이후 발사됐고 영화로도 잘 알려진아폴로 13호는 달로 항해하던 중 폭발사고로 임무를 포기하고 간신히 지구로 돌아왔다. 이후 미국은 1972년 발사한 아폴로 17호까지 총 6번의 달 착륙에 성공했다. 이로써 미국은 소련의 우주기술을 추월해 우주강대국이 됐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아폴로 우주선과 소유스 우주선을 도킹시키며 우주경쟁이 아닌 협력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태양계 탐사 및 우주정거장 개발에 나섰다.
아폴로 11호의 성공으로 미국은 20세기 인류의 과학기술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우주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변화시켰다. 과학자들은 아폴로 11호가 달에 설치한 레이저 반사경을 통해 달까지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했고 달에서 가져온 암석을 분석해 지구와 태양계의 기원도 밝혀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아폴로 계획을 통해 개발된 첨단 미래기술이다. 이 기술들은 컴퓨터, 레이저 등 산업분야뿐만 아니라 정수기, 선글라스, 골프채, 형상기억합금 의류 등 일상생활에까지 사용되면서 20세기 과학문명 발달의 기폭제가 됐다. 아폴로 11호의 성공으로 인류는 본격적인 과학기술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지구를 벗어나 먼 우주로 도약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