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당국은 김주열의 시신을 도립병원(현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마산의료원)으로 급히 옮기고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시내로 퍼졌다. 이에 흥분한 3천여명의 시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가 김주열의 사망을 확인했다. 김주열의 시신은 최루탄이 오른쪽 눈을 관통한 상태였다.
시신의 참혹한 몰골을 본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살인선거 물리치자" 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먼저 마산상고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불종거리를 거쳐 시청 쪽으로 향하며 마산고 학생들과 합류했다. 1차 마산의거에서 총상으로 사망한 김용실 군이 마고생(1-C반 급장)이었고 김주열은 상고생이었기 때문.
이때 학생들 중 일부가 마산여고와 성지여고로 올라가서 시위에 참여하라고 악다구니를 쳤다고 한다. 처음에는 여고생들이 시위에 합류할 수가 없었는데 이유는 교사들이 신발을 전부 감춰버렸기 때문. 결국에는 안전을 이유로 교장이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오는 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 장면이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전국판 신문에 실리며 타 지역의 시위열기에 다시 불을 붙였다.
이때 중년 여성들의 시위 참여도 확산되었다. 이들은 "죽은 자식 살려내라!", "차라리 우리도 죽여달라!" 고 절규하며 시위대의 행진에 함께하였다. 또한 특이한 점으로서 해인대학교 학생 5,000~6,000명,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까지도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시위 대열에도 합류했다. 이윽고 성난 2만여 명의 시민들이 마산 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하였으며 많은 관공서 건물과 차량들이 대파된다. 그날 밤 경찰은 또 발포를 했고 두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이에 더 자극받은 마산 시민들은 3일간 거리로 쏟아져나와 시위를 벌였으며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정부에서는 2차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난동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 15일에도 공산당 선전 때문에 마산 "폭동" 이 일어났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소위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 를 구성, "적색분자들의 준동 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 고 하는 한편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 이라고도 하였다.
1960년 4월 11일 밤 분노한 시위대는 마산경찰서를 습격하여 수류탄을 탈취하고 경찰서장실 앞에서 터뜨렸다.
이 즈음 시위에 참여한 고등학교
마산고, 마산상고,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동래고,
4월 학생 혁명 기념탑
■ ‘최루탄 박힌 김주열 열사 사진’ 보도깵 ‘혁명’ 기폭제
1960년 4월 14일자 동아일보 석간 3면에 실린 김주열 열사 시신 사진. 동아일보는 당시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태극기를 덮은 김 열사 사진을 게재하며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최루탄이 관통한 ‘구조도’도 함께 실었다.http://news.donga.com/3/all/20100315/26857691/1
(서울=연합뉴스) 1960년 4월 11일 마산 해안에서 낚시꾼에 의해 눈에 최루탄이 박힌채 발견된 고 김주열군의 참혹한 시체. 1960.4.11 (본사자료) (끝)
<저작권자 ⓒ 2009 연 합 뉴 스.1960-04-11 00:00 송고
▲ 얼굴에 최루탄이 박혀 숨진 채 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사진을 특종 보도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1960년 4월 12일자 부산일보 지면.
부산일보DB
김주열 군의 묘에서 통곡하는 김주열 군의 어머니
마산경찰서 앞에 운집한 고 김주열 군의 고등학교 학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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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경찰서 앞에 운집한 김주열군의 고등학교 학우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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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경찰 처벌하고 연행 학생 석방하라
마산 학생들의 시위 |
마산의 여고생들
서울에서도
첫댓글 그리 조용하진 않은데... http://1318virus.co.kr/sub_read.html?uid=713471§ion=sc2§ion2=%C3%BB%BC%D2%B3%E2%C0%CF%B9%DD 이런 기사를 보시죠